극악서생 3부 – 32-1화 : 옛날 옛적 금동이와 소교는……(1)
4-3. 옛날 옛적 금동이와 소교는……(1)
각자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시간은 조금씩 흐르고…
적어도 표면적인 분위기는 차츰 더 화기애애하고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얼마 후 요리가 날라져 오기 시작했으며 그 요리들이 하나같이 누구나 인정할 만큼 맛깔스러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훌륭한 요리는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정화해 준다고 하더니 이 집의 요리도 어느 정도 그런 경지에 있지 않나 싶었다.
처음 우리 모두가 자리에 앉았을 때 직접 나와서 인사를 하고는 여옥에게 예약되어 있던 주문을 확인하던 남자…
찐빵맨처럼 두루뭉실하고 사람 좋게 생긴 그 남자가 바로 이 레스토랑의 주방장 겸 사장이었다.
“죄송하지만, 오늘 초면인 분인 것 같습니다만……”
그는 나에 대해 묻는 여옥에게 그렇게 답했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은… 아는 분의 추천을 받아서 이 곳을 지목했을 뿐, 저나 동생도 이 레스토랑은 처음 와보게 된 겁니다.”
나 역시 내가 이 곳을 선택한 이유를 간단히 해명했 고… ‘게다가 홍콩 요리 자체에 익숙하지도 못하니 주문은 전부 그 쪽에서 알아서 해달라’ 말로 마무리했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여옥이 이 장소에 대한 경계를 풀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나 역시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난 확실히 전에 와 본 적이 없으며 오늘도 자룡대주와 하은이 녀석이 엉뚱한 경쟁 구도로 시간을 끄는 바람에 미리 와서 현장 확인을 할 시간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구양대주의 말로는 여기 사장이자 직접 주방을 맡고 있는 그가 바로 일백마군의 한 명인 반포마군(反哺魔君)이다.
내 기억 속의 천년 전 반포마군은 요리계의 인물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당대의 반포마군이 이런 계통에 있는지 모르겠다.
암튼 요리는 정말 맘에 들어서 평범한 식사 초대를 받은 거였다면 초대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감사했을 법했다.
음… 그런데 나와 달리 하은이 녀석은 표정이 그리 밝지가 못한 것 같다. 저 녀석 입에는 맞지 않는 건가?
“…왜? 뭐 싫어하는 거 있어? 너 가리는 음식 별로 없다며?”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끼리만 먹는 게 좀 미안해서 그래.”
“우리끼리만? 그럼 또 누가 있……”
윽! 있었구나! 에구구… 이 정신머리하고는!
나는 그제야 밖에 대기 시켜 두었던 금동이를 생각해 내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우리의 금동 옹.
“이 레스토랑, 애완 동물은 출입금지인가요?”
내가 묻자 여옥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 진대인의 일행(?)이라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빼 내 몸으로 가려져 있던 입구 쪽을 살핀 여옥의 표정이 흠칫 굳어졌다.
“워, 원숭이? 원숭이는 안……”
‘안돼’라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나는 재빨리 손짓해 금동이를 불러 버렸다.
그와 동시에 녀석은 왜 이제야 불렀냐고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눈부신 속도로 우리에게(라기보다는 음식에게?) 달려온다.
“윽, 이 녀석!”
달려 온 탄성을 살려 파앗- 몸을 날려 내 어깨에 뛰어 올라온 금동이는 정신없이 테이블 위를 돌아보며 뭐가 제일 맛있을까…하고 살피기 시작했다.
“야, 야! 진정하고… 얌전히 주는 것만 먹는 거다? 알겠지?”
사실 금동이는 내가 따로 잔소리 안 해도 함부로 행동할 녀석이 아니다.
오히려 금동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녀석이 ‘인간 사회를 아는 원숭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 하는 말이랄까?
“후후~ 영리한 녀석이라 말썽은 피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난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여옥을 건너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의 나름대로 자애로워 보이던 표정이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고, 분노를 억누르느라 뻣뻣해진 안면 근육 중에서 입가만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흐음~ 원숭이는 안 된다고 해서 더 굳이 부르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마녀가 쓰고 있던 ‘선량한 탈’이 벗겨지기 시작하다니… 원숭이에 대한 뭐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나?
“워, 원숭이는 안 된다고 했……”
“전 괜찮아요! 만지지만 않으면 괜찮다고요, 어머니!”
다급하게 끼어 든 소교가 그렇게 외치자 마녀는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아. 그, 그랬지. 하지만……”
마녀 여옥은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소 불안정해 보이기는 했지만 결국 다시 가면을 눌러 쓴 마녀가 내게 말했다.
“실은… 제 딸아이는 아주 심한 원숭이 알레르기가 있어서 기침이나 눈물이 나는 건 물론이고 피부도 심하게 상하게 된답니다. 그래서 원숭이만은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금동이를 보고 이렇게 험한 반응을 보이는 게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만 그게 소교때문일 줄이야!
“아,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에요. 가까이 접하지만 않으면 괜찮은 걸요. 그냥… 데리고 계셔도 돼요.”
“음… 정말 그래도 될까?”
“예.”
소교는 여전히 웃으며 대답해 주었지만 여옥의 표정은 그렇지가 못했다.
당사자인 소교가 뭐라 말하든 자신이 견디기가 어려운 눈치였다.
“너… 정말 괜찮겠니?”
“그렇다니까요, 어머니.”
소교는 계속해서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도 소교의 태도와 표정에서는 확실히 불안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금동이 녀석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멀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쯧…! 어차피 금동이도 나나 소령이를 만날 때와 달리 바로 소교를 알아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원천적으로 거부당할 줄은 몰랐는걸?
원숭이 알레르기라니… 그럼 나중에 금동이가 소교를 확실히 기억해 낸다 해도 소교에게는 계속 ‘가까이 하기엔 너무 재채기 나고 두드러기 나는 당신’으로 취급당하겠지?
그럼 금동이는 이번에도 소교와는 그리 친해지지 못할 운명이라는… 아, 아니지?
원숭이 털 알레르기라면… 금동이 같은 경우는 괜찮지 않을까? 금동이는 보통의 인간들보다도 털이 거의 날리지 않으며 체질 자체가 다른 특수 원숭이 아닌가!
원숭이 족의 완전체(?) 금모신원 금동이라면……
“잠깐!”
나는 조금 목소리를 높여 여옥과 소교의 주의를 내게 돌린 다음 금동이를 내 어깨에서 내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금동이가 우리 집에 와서 부모님들이 기겁을 하셨을 때 했던 ‘한정특판 금모신원 1종 세트 광고’를 재현해 보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소교가 다른 모든 원숭이들에게 알레르기가 있다 해도 이 녀석만큼은 괜찮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만둬, 오빠.”
응?
“그만둬. 여기서 금동이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어.”
뭐야? 하은이 녀석이 왜 갑자기 딴지를 걸어오는 거지?
“…알레르기 같은 게 아니야.”
어…? 왜 갑자기 한국말로 바꾸는 거지? 비밀… 얘기라는 건가?
그럼 나도……
“무슨 소리냐, 대체?”
“금동이가 나타났을 때의 소교, 아니 수혜인지 하는 저 애 표정 못 봤지? 두려움이나 혐오감 같은 건 전혀 없었어. 보통의 소녀들처럼 호의를 가지고 당장에라도 금동이를 만지고 싶어하는 표정이었다구!”
“그랬…냐?”
“수혜의 표정과 태도가 바뀐 건 오히려 자기 엄마… 저 마녀라는 여자의 눈치를 살핀 후였어.”
호오~ 이거, 하은이를 데려온 보람이 있는 걸?
난 마녀에게 집중하느라 소교의 반응은 살피지 못했는데 말이다.
“흐음… 그렇다면 원숭이 알레르기가 있거나 여하간 싫어하는 건 역시 마녀 쪽인 건가?”
“글세? 그럴 경우 굳이 딸의 핑계를 댈 필요가 있을까?”
“하긴, 그건 좀 이상하다. 아무래도… 뭔가 다른 사연이 있는 모양이군.”
하은이의 판단이 타당하다고 느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소교를 돌아보며 중국어로 말했다.
“아… 갑자기 우리끼리 떠들어서 미안해. 지금… 내 동생은 나에게 알레르기가 사람에 따라 아주 위험할 수도 있다고 설명해 준거야. 이 녀석은 나보다 아는 게 많거든.”
“전 정말 괜찮은데……”
음… 하은이의 얘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금동이를 바라보는 소교의 눈빛에는 정말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고 싶어하는 심정이 담겨진 것 같기도 하다.
“뭐… 하는 수 없지. 아니, 내가 큰 실례를 했어. 확실히 묻지도 않고 이 녀석을 불렀으니 말야.”
금동이를 밖에서 계속 혼자 기다리게 했던 것도 미안했지만, 이제는 다시 쫓아내야 하는 건 더 미안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사과의 의미로 내 몫의 왕새우(아깝지만)를 비롯해 몇 가지 해산물을 듬뿍 집어 접시에 담았다.
금동이는 사람처럼 잡식성이지만 연옥도(煉獄島)라는 섬 출신답게 해산물을 특히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어… 근데 이 녀석 왜 이래? 기껏 나 역시 너무나 좋아라하는 음식을 담아 주었건만 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잖아?
이 자리에서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 걸 깨닫고 열 받은 건가?
“어이- 금동아! 금동!”
이런…! 내가 힘주어 몇 번 불렀는데도 못 알아듣는다.
게다가 심통이 난 표정이 아니라… 이 녀석 지금 그저 멍하니 소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건가?
뭐…야. 설마 벌써 소교를 기억해 낸 건가?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녀석이라고 해도 그렇지 당시에 그리 친하지도 않고 만난 기간도 짧았던 소교를 이렇게 빨리… 어, 잠깐…! 그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건 내가 그 시대를 떠나기 전까지의 상황뿐이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떠난 후에는 금동이와 소교가 무지 친해지기라도 했던 건가?
녀석이 나와 재회했을 때 못지않게 빨리 소교를 기억해 낼 만큼 말이다.
“금동아.”
나는 다시 작게 불러 보았고, 이번에는 녀석이 천천히 날 돌아보았다.
“미안하지만, 나간 다음 문밖에서 대기해. 알겠지?”
말과 함께 손짓으로 같은 뜻을 전달했지만 녀석은 곧바로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금동이는 다시 소교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또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의 행동에 소교는 소교대로 당황스러운 듯 한 손을 입가에 가져가 가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더 아무런 말이나 행동도 하지 못하고 녀석을 지켜보고만 있게 된 건 나를 비롯한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알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던 금모신원 금동이는 갑자기 스윽 몸을 일으키더니 훌쩍 테이블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천천히 밖을 향해 걸어나가는 녀석의 뒷모습은 평소와 달리 너무나 조용해서 쓸쓸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던 녀석이 잠깐 멈춘 것은 출입구 바로 앞이었다.
다시 이 쪽을(아마도 소교를) 돌아보았던 금동이는 곧 그 시선도 거두고 문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금동이가 나간 후에도 남은 사람들 사이에는 잠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작은 원숭이 한 마리의 엉뚱한 행동을 본 것뿐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웃어넘기기에는 왠지 뭔가 특별한 광경을 목격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상…해요, 저 원숭이.”
먼저 입을 연 것은 소교였다.
“분명히 처음인데도… 어째서인지 그리 낯설지가 않은… 그런 느낌이……”
뭐…야? 설마 소교도 대교처럼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다는 건가?
“그리고 왠지 갑자기 꿈 생각이 나기도 하고……”
“꿈…이라고?”
“아, 예.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꾸던 이상한 꿈이 있거든요.”
소교는 잠깐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결국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꿈이에요. 항상 저는 어딘가… 매우 어두운 곳의 바위 위… 그래요, 차가운 바위 같은 곳에 앉아 있어요.
아마도 바닷가… 촉촉한 바다 내음이 맴돌고 아련한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그런 곳에서 저는… 정면에 뜬 너무나 크고 신비롭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고 있게 되요.”
바닷가의 바위 위에 앉아 정면에 뜬 달을 본다……?
“정말 이상한 건… 그 하얀 달빛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전 분명히 그게 수평선 위로 떠오른 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달빛이 드리워진 바다의 수면이나 그 외의 밤하늘은 보이지 않아요.
마치… 마치 달이 바로 하늘 자체인 것처럼……”
“달이… 하늘 자체?”
아차! 나도 모르게 끼어들고 말았다.
“이, 이상하죠? 이런 얘기.”
“아냐. 괜찮으니까 계속해 그냥……”
“아뇨. 죄송해요. 제가 그만 실없는 얘기를 꺼내고 말았네요.”
에구, 내가 흐름을 끊고 만 건가?
“흐음~ 이상한 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왜 금동이를 보고 그 꿈이 떠올랐다는 거죠?”
오~ 정하은! 땡쓰다. 네가 내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구나.
그래, 소교야 얼른 그 이유를 말해 보렴.
“아… 그건 제가 그 꿈을 꿀 때면 항상… 음… 전 꿈속에서는 왜 그런지 한없는 쓸쓸함을 느끼게 되곤 해요.
그런데 그럴 때면 항상 제 곁에는 금빛의 작은 형체가 나타나 주죠.
노란 달빛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그 황금빛 형체…
그건 제게 한 마디 말을 하는 법도 없이 단지 곁에 있어주기만 하는데도 전 웬지 위로 받고 격려받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어요.
마치 작고 따듯한 모닥불을 쬐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황금빛 형체라는 건 역시 금동이를 얘기하는 거겠지?
하지만 대체 어떤 상황이었던 건지는 잘… 으음… 혹시나 하고 짐작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설마……
“와우~! 잘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낭만적인 꿈이네요. …부럽다.”
“아… 꼭 그런 건 아니에요, 하은 언니. 실은… 어렸을 때 그 꿈을 꾸게 된 날 아침에는 항상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 있곤 했거든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밤새 눈물을 흘렸던 건지 이렇게……”
말끝에 소교는 갑자기 두 손을 들어 눈앞에 대고 주먹을 쥐어 보였다.
“눈이 만두처럼 퉁퉁 부어 있었어요.”
윽~! 소교 녀석,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짓을……
“아하하~! 정말? 정말 만두처럼?”
“예, 정말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는지, 주먹만두(?)를 유지한 채 입술까지 불쑥 내밀며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 시작한 소교 때문에 하은이는 계속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나 역시 따라서 싱겁게 웃고 말았지만…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건 웃을 만한 얘기가 아닌 것 같았다.
특히, 나 진유준이라는 놈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