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0-1화 : 귀물(貴物)이 귀물(貴物)인 이유.(1)

랜덤 이미지

극악서생 3부 – 40-1화 : 귀물(貴物)이 귀물(貴物)인 이유.(1)


5-1. 귀물(貴物)이 귀물(貴物)인 이유.(1)

난… 특별히 음공(音功) 같은 걸 따로 익힌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제대로 단련된 군바리의 복창 소리에 내공이 실려졌을 때의 위력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지하무림인들의 상상을 초월한 모양이었다.

나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동작 그만’이란 명령이 끝났을 때는 이미 내 앞의 모든 이들이 그 때까지의 난장판을 멈춘 것은 물론이고 상당수가 양손으로 귀를 막은 자세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사, 사자후(獅子吼)……!”

그나마 멀쩡한 축에 속하는 듯한 구양대주가 겨우 입을 열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불교계 절기는 아니니까, 그냥 고참후(古參吼) 정도로 알아둬.”

“고, 고참후……?”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다들 이제야 조용해 졌군, 그래. 응?”

나는 짐짓 목소리를 깔며 좌중을 스윽 돌아보았다. 구양대주와 자룡대주까지 타격을 입은 모양이라 내심 미안했지만, 결과적으로 정신 사납게 떠들 던 자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얌전해지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썰렁~해져 있는 건 만족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난 군대에서 득음(?)을 해서, 첫 휴가 때 야구장에 갔다가 상대편 팀의 단체 응원을 혼자 악을 쓰는 것으로 제압한 적도 있었다. 흠… 생각난 김에 음공도 한 번 본격적으로 익혀 볼까……?

“가, 갑자기 이 무슨 짓을!”

탄식처럼 불만을 토한 건 소군황 구영웅이었다. 소군황는 내력이 출중한 탓에 멀쩡한 모양이었지만 그에게 내력을 몰아줬던 자들은 그렇지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사실 그의 사부인 초사마군와 일파 여섯 명은 현재 일반인에 가까운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열 받은 와중에도 위력을 조금 줄였었는데, 그래도 심했는지 그들 일곱 명은 거의 실신 상태로 주저앉아 해롱거리고 있었다.

“…다짜고짜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소군황이 지 사부들의 상태를 살피며 따져왔지만, 나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다짜고짜? 난 그 전에 분명히 먼저 조용히 하라고 정중하게 권고했어.”

“그, 그랬는지 몰라도 조금 전의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못들을 수밖에……”

“왜에~ 내 앞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건……”

“훗~! 이건 지하무림인지 지하장터인지 분간이 안가서 나도 소리 한 번 질러봤어. 어디 나도 계속 같이 떠들어 볼까?”

소군황은 반사적으로 뭐라 더 반발하려던 눈치였지만, 곧 눈 깔고 어물쩍 입도 다물고 말았다.

나의 협박(?)과 지긋이 응시하고 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인지, 아니면 스스로 주도했던 조금 전까지의 돗떼기 시장 분위기가 결코 자랑이 아니라는 깨달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들… 이제 본래 하려던 거나 마저 하는 게 어때?”

나는 모두를 향해 말하며 천우신의 귀물 상자들을 턱짓해 보였다. 다른 대주들이나 마군들 역시 내 고참후(?)의 위력에 질린 건지 조금 전까지의 상황이 부끄러운 건지 몰라도 기가 팍 죽은 모습으로 얌전히 내 말에 따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 눈앞에 놓여진 상자 두 개를 내려다보며 짧게 한 숨을 내쉬었다.

이 귀물 상자들을 확인하는 절차에 대한 기본 사항은 전에 이미 구양대주에게 들었었다. 첫 번째 상자의 조건은 ‘나만이 알 수 있는 뭔가로 여는 것’, 그리고 첫 번째 상자를 열면 그 안에 두 번째 상자를 여는 키워드와 내용물에 대한 힌트가 있다고 했다.

게다가 두 번째 상자 같은 경우는 열기 전에 내용물을 먼저 말하고 난 다음 열어서 내용물을 맞추어야 한다고 했다.

[ 왜 그러세요, 주인님? 자신… 없으세요? ]

< 아니, 사실 상자 여는 거나 내용물 맞추는 거야 뭐 어렵겠냐. 그 친구가 어련히 알아서 나만이 열 수 있게 안배를 해 놨을 테고… 원판도 뭐가 들었는지 스포일러질 하려고 했던 거 보니 내용물을 바꾸거나 건드린 건 아닌 것 같고 말야. >

[ 어… 그런데 왜 표정이 그리 좋지 않으세요? ]

< 그냥… 저거 개봉박두(?)라고 했던 게 언젠데, 정작 이렇게 개봉하게 될 때까지 어영부영 무지 오래 끌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그 사이에 친구가 오래전에 남겨준 유물을 확인한다는 감흥마저 다소 퇴색될 정도로 말야. >

[ 그러세요? 전 잘 모르겠는데? ]

< 너야, 그 사이 나처럼 생각이 길고 복잡하지 않았을 테니 그런 거고. >

별 생각 없는 듯한 요몽과 달리, 난 천우신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상자들 앞으로 좀 더 다가서자 구양대주는 내 왼쪽의 상자, 길이는 1미터 50센티 정도에 폭이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크기의 금속 상자를 정중하게 가리켰다.

“첫 번째 상자는 ‘그’의 오른 손, 뇌신(雷神)의 병기를 기다린다.”

음, 이제야 시작이로군. 나의 오른 손과 뇌신의 병기라…! 내 오른 손과 정글도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손과 뇌신의 병기 둘 다 정글도를 상징하는 걸까……?

지하무림에 전해 내려왔다는 ‘키워드’를 듣고 생각해보는 사이, 구양대주는 손에 10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열쇠 같은 걸 꺼내들고 상자의 좌측 모서리에 섰다. 이어 초사마군도 아직 정상이 아닌 것 같은 몸으로도 제자인 소군황의 부축을 받으며 반대 편 우측에 서더니, 역시 비슷한 모양의 열쇠를 꺼내 들었다.

흐음… 두 개의 열쇠를 같이 사용해야 열리게 되어 있고 열쇠는 보천구룡대와 일백마군의 수장 격인 자들이 각각 하나씩 보관해 왔었군 그래. 나름대로 철저를 기한다고 했겠지만 천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저런 구식 열쇠를 복사해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이 먼저 들어서 힐끔 초사마군을 보았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그의 열쇠 꽂고 돌리는 손길이 구양대주에 비해 능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결국 뚜껑이 열리고… 거기에는 한 눈에 보기에 도 내 정글도에 맞춘 듯한 모양과, 내 손 모양에 맞춘 듯한 틀 두 개가 자리잡고 있었다.

키워드는 내 손과 정글도를 따로 말하는 거였군. 그럼 손 쪽은 ‘지문 감식 장치’…? 에이~ 설마! 천우신이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그 시대에 그런 것까지 만들어 냈을 리는 없겠지?

[ 두 번째 뚜껑은 정글도의 무게와 주인님 손 모양의 일치,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이 일치해야만 잠금 장치가 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

두 번째 뚜껑? 아, 저 틀들 또한 내용물의 전부가 아니라는 거군. 어… 그런데 또 하나의 조건이라고…? 지문 감식 장치…는 역시 말도 안 되고, 틀 아래에 적혀 있는 문구에 해법이 있는 건가?

“검은 하늘이 열세 번째 찾아왔을 때, 땅에서는 일곱 번째 불길이 솟았고, 다섯 명의 영웅이 일제히 그의 앞길을 트도다.”

옆에서 먼저 소리 내어 읽은 것은 초사마군이었다. 무심을 가장한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미미한 비웃음 같은 것이 떠올라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 나쁜 노인네…! 갑자기 왜 저렇게 재수 없는 표정이 되는 거지? 이제까지는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이 수수께끼 문장을 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나는 초사마군의 표정이 상당히 불쾌했지만 일일이 따지기는 싫어서 그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문장을 읽어보았다.

검은 하늘이 열세 번째 찾아왔을 때… 땅에서는 일곱 번째 불길이 솟았고… 다섯 명의 영웅이 일제히 그의 앞길을 트도다…? 쳇…! 천우신, 그 친구도 참! 아무도 모르게 암호 문장을 쓰는 건 좋은데 나만은 알기 쉽게 써놨어야지,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으으음~ 검은 하늘이 열세 번째… 그 뒷문장도 그렇고…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가? 아니면 검은 하늘, 땅, 영웅… 그런 요소에 비밀이…

제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첫 번째 상자에서부터 막힐 줄은……

난 사실 처음에는 잠금장치에 암호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천우신에게 가르쳐 준 몇 자의 한글이나, 한자라도 내가 자주 썼던 용어가 사용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저의 연옥도에 ‘내게만’ 남긴 편지와 달리, 지하무림의 귀물들은 지금처럼 현 시대의 지하무림인들과 함께 확인해야 하니까 그런 ‘현 시대의 흔적’이 쓰이면 안 되는 것이다.

해저 연옥도에서 봤던 편지 내용을 생각해 보면 천우신은 분명 나중에 내가 ‘시간여행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눈치가 빠른 친구니 함께 있는 동안 나의 언행에서 뭔가 느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천이단 만의 놀라운 정보력으로 나와 대교가 소림사 방문 이후에 나눈 대화를 알아냈거나, 내가 그 시대를 떠난 후 홀로 남겨진 대교가 그 친구에게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느라 내 비밀까지 전부 얘기해 줬다거나 하는 과정을 거쳐 진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얘기를 자신의 조직인 천이단 사람들에게도 밝히지 않고 ‘나중 진하사의 후손이나 전인을 만나면…’이라는 식으로 유언을 남긴 걸 보면… 그 친구는 내가 시간여행을 숨겼던 의미까지도 이해해 줬던 것이다. 그런 친구이니 내가 남기고 온 흔적들을 이런 물건에 이용했을 리가 없다.

으음… 그러고 보니 내가 자신에게까지 진실을 숨겼던 점은 섭섭해했을 것도 같은… 어… 설마, 그 친구…? 그게 섭해서 일부로 어려운 암호로 날 골탕 먹이려는 건 아니겠지? 에고~! 이건 가능성 있는 추정이다. 천우신 그 친구도 은근히 짓궂은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난 결국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린 거지만, 당연히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깨달음이어서 난 새삼 쩝, 입맛을 다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밤하늘에 떠있는 저 달 속에서 천우신이 소령이와 함께 날 내려다보며 메롱~을 날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천주……”

문득 들려온 작은 음성 때문에 돌아보니, 나의 여제자(?) 자룡대주였다. 표정을 보니 날 부르려고 했다기보다는 걱정이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나온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반대파의 보스 초사마군은 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흣하~! 어찌된 겁니까? 설마 천년 전의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쓰읍- 이 노인네가 자꾸…! …쳇. 그렇다고 지금은 화를 낼 입장도 못 되잖아. 암호문을 풀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

“…뭐. 솔직히 그래. 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내 말에 초사마군과 그 일파들은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피식 마주 웃어주며 덧붙였다.

“하지만… 아주 생각이 나지 않는 건 아니야.”

그래…! 천우신이 비록 장난을 좋아하긴 해도 이런 상황을 생각 못하고 날 곤란하게 했을 리가 없다. 생각하자. 다시 생각해 보자 진유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었던 요소를 빼고도… 천년 전의 시대에 적응했던 진유준만이 가지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거… 그건 역시 나의 정글도와 생사금마도결(生死金魔刀訣)이다.

나는 상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먼저 정글도를 틀에 내려놓았다. 잠금 장치에 작용하는 건 정글도의 무게라는 점도 그렇고, 정글도와 틀과의 사이에 미세하나마 공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우신도 정글도의 전신 형태를 정확히 측정한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른 손을 천천히 그 옆의 틀에 맞추어 대보니……

“아- 딱 맞아요! 마치 방금 본인의 손으로 찍어낸 것처럼!”

자룡대주가 감탄성과 함께 외친 것처럼 손모양의 틀은 정말 내가 직접 찍은 것처럼 정확히 내 손과 일치했다. 문득, 내가 내공을 얻은 후 유일하게 맹렬하게 권각법을 수련했었던 연옥도의 숲이 떠올랐다. 도결 수련에 비하면 극히 짧은 수련 기간에 불과했었지만 그곳의 나무에는 분명하게 내 장법(掌法)이 시전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천우신은 그곳에서 내 손바닥 모양을 채취했겠지? …좋아. 그럼 내 손… 내 손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다시 천우신이 남긴 암호문을 입으로 낮게 중얼거려 보았다.

“검은 하늘… 검은 하늘이라……”

내가 할 수 있는… 내 손으로 열 수 있는 검은 하늘… 현천(玄天)… 현천기공(玄天氣功)…? 그래…! 현천기공은 생사금마도결의 기본이 되는 내공 심법이며 지금은 나만의 독문 심법! 그리고 그 현천기공의 열 세 번째 결(訣)은… 태양현현(太煬現顯)으로 시작되는 양강계열의 운기법으로서, 패도선배가 현역 시절 가끔 선보이면서 독립적인 무공으로 오해를 받았고… 그래서 나중에는 태양마공(太陽魔功)이란 별칭까지 붙었던 심결이지.

처음에 무심코 문장을 풀이해서 읽었던 게 오히려 실수였던 셈이다. 현천이라는 표현을 글자 그대로 현천기공에 단순 대입한 것만으로도 모든 암호가 풀려 버리기 시작한다. …현천기공의 열 세 번째 심결은 강력한 열화를 발현하기 위한 운기법이며 그 중 일곱 번째 식(式)은 그 열화를 손끝으로 방출하는 구체적인 기법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장의 다섯 명의 영웅이 길을 연다는 건, 다섯 손가락 끝으로 동시에 열화를 방출하는 오봉신화(五峯神火)를 쓰라는 뜻!

나는 천우신의 암호문 해석이 끝남과 동시에 그 뜻에 따라 내력을 손가락 끝에 모아 오봉신화를 펼치기 시작했다. 다시 문득… 연옥도 시절이 떠올랐다.

…연옥도 생활도 1년이 거의 다 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나의 현천기공이 생각보다 빨리 목표했던 경지에 도달해 가는 것에 고무되어 천우신 앞에서 오봉신화를 펼치며 자랑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천우신은 감탄과 함께 이렇게 말했었다.

“오오~ 정말 다행이네, 친구! 어제 내가 실수로 아궁이의 불씨를 꺼트렸었거든! 부싯돌도 다 떨어져서 이 일을 어쩌나 고민했었다네!”

“이런- 제기! 현천기공의 열세 번째 비결이 ‘부싯돌 신공’밖에 안 되는 줄 알아?”

나는 천우신의 엉뚱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투덜대긴 했지만, 결국 그 후로는 정말 가끔 인간 부싯돌 구실을 해야만 했었다. 그때는 그렇게 대충(?) 넘어갔었지만… 나중 그 일을 이렇게 인용했다는 건, 사실 그때 그 친구도 누구보다 내 무공 성취를…..

철컥-! 하는 소리에 나는 잠시의 추억에서 깨어나야 했다. 반가운 금속성의 소리는 물론 내 눈앞의 상자 어디선가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 성공하셨습니다, 주인님. ]

[ 와아아~ 역시 성공! 성공! ]

요몽의 환호성 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어보니 구양대주와 자룡대주를 비롯한 인정파 인물들도 감탄과 안도의 표정을 떠올리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반대파 인물들의 대부분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며 술렁대기 시작했다.

음, 그래도 무리의 보스 급이라 그런가? 초사마군과 소군황만은 아직도 별로 기가 죽은 표정이 아닌 게 다소 불쾌한 걸? 뭐… 내가 곧 두 번째 상자까지 열어젖기면 알아서 찌그러지겠지만 말이다.

[ …이 상자의 잠금 장치는 특정 무게가 가해졌을 때 동작하는 단순 장치와 다섯 곳의 소규모 지점에 설치된 형성기억합금에 의한 동작이 일치되어야 해제되는 복합 장치였습니다. 당시에 어떻게 형성기억합금을 만들어 이용할 수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합금의 가공 형태로 보아 제작 자체는 우연한 결과의 산물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의 기록에는 이런 형태의 금속이 화산 부근에서 드물게 발견되어 신묘금(神妙金), 복룡철(復龍鐵)등으로 불리며 중요한 기관진식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

몽몽의 추가 설명은 나름대로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난 당장 눈앞의 일이 더 궁금해서 바로 두 번째 뚜껑부터 열었다. 그러나… 애써 연 것치고는 보람이 적다고 할까? 상자의 바닥에 또 다른 암호문구인 듯한 글자가 잔뜩 새겨 있을 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 전부터 이 첫 번째 상자에는 두 번째 상자를 위한 안배가 있을 뿐이라고 들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크게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안부 편지 한 통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는데… 으음- 혹시 이 암호문 자체가 안부 편지를 겸하는 건 아닐까?

나는 상체와 고개를 좀 더 숙이며 첫눈에도 이상했던 문장, 아니 글자의 집합체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아무리 글자들의 뜻을 연결하려고 해 봐도 앞뒤가 안 맞지를 않았다.

이런, 이런… 아까처럼 최소한의 문장이 이루어지지가 않으니 뭔가 연상할 수도 없잖은가. 그렇다면 이거… 아무래도 퍼즐처럼 조합을 해야만 해석이 되는 방식 아닐까…? 그러고 보니 글이 새겨진 패턴도 바둑판처럼 일정한 것이… 좋아, 그럼 숫자부터 파악해 보자. 가로 한 줄이 총 30글자이고… 어, 세로로도 딱 30글자네? 오호~ 역시나 전형적인 퍼즐식 암호 형태의 냄새를 팍팍 풍기는 구만! 그렇다면 글자의 배열 패턴을 알아내는 것이 관건인데… 천우신이 내게 사용했을 법한 배열 패턴이라면 대체 어떤 것이 있을지… 음… 으음… 응…? 뭐…지? 갑자기 왠지 거북한 기분이……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은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의 정수리쯤에 뜻드미직한 바람기가 느껴지고, 그와 함께 야릇한 향기와 비릿한(?) 냄새가 어우러져 풍겨 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무심히 고개를 들어 본 나는 머리 위의 밤하늘을 가득(?) 메운 각양각색의 사람 얼굴에 흠칫 놀라 외치고 말았다.

“뭐, 뭐야? 뭐?”

나도 놀랐지만 그 사이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더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썰물처럼 뒤로 물러났다. 내가 정신을 암호풀이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다른 지하무림 사람들은 인정파와 반대파를 가릴 것 없이 나와 상자 주위로 모여들어 핏발선(?)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고딩 1학년 초기, 학교에서 열심히 혼자 영어 샘님께서 숙제로 내 준 문장을 해석하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주변의 친구 놈들이 전부 모여들어 내 해석을 베끼고 있었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고 할까…? 그때는 다음 영어 시간에 선생님(별명 타이슨.)께서 나와 내 거 베낀 애들 모두 해석 개판이라고 핵 펀치를 날렸었던… 그래서 한동안 왕따를 당했었던… 음, 흠! 공연히 아리따운 추억까지 떠올렸군, 그래.

“죄송합니다, 천주. 모두들 선대가 남긴 귀물의 수수께끼를 궁금해했던 터라… 음, 방해가 되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구양대주가 대표로 사과를 해와서 나는 손을 저어 보였다.

“아, 아니야, 구양대주. 다들 당연히 궁금했겠지. 어… 그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조금 전처럼 모두 너무 달라붙지는 말아 줘.”

“그렇다면… 허용하시는 거리까지만 접근하겠습니다.”

“그럼. 1미터쯤… 그래, 지금 자룡대주가 서 있는 정도!”

“감사합니다, 천주. 명을 받들겠습니다.”

구양대주가 먼저 복명하고 자룡대주 옆으로 서자, 물러났던 자들도 다시 일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양한 군웅들의 무수한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비화곡주에 마군황으로 이어지는 ‘주목받는’ 생활을 거쳐 온 나로서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무엇보다 조금 전처럼 저 많은 남자들이 바로 가까이에서 일제히 남자의 숨결과 남자 냄새를 뿜어내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어… 그러고 보니 일백마군은 본래 여자의 비율이 매우 낮았는데, 그나마도 오늘 모인 중에는 달랑 두 명뿐이다. 연세가 좀 있으신 저 아주머니 마군들은 처음부터 조금 뒤로 빠져있던 것 같으니 좀 전에 날 에워 쌓던 남자냄새를 조금이나마 중화시켜 주었던 야릇한 향기는 역시 자룡대주에게서 났었던 모양이다. 특별한 향수를 쓴 것 같지도 않은데도 기분 좋은 향기가 있다는 건 자룡대주가 그만큼 괜찮은 여자라는 반증이려나……?

음… 방금의 생각은 누가 알았다면 오해할 만한 패턴의 생각이었을까…? 하지만, 뭐… 난 그냥 순수하게 그녀를 평가했을 뿐, 절대로 이상한 마음을 품은 건 아니었다. 난 확실한 배반은 고사하고 그럴 폼 비슷하게 잡는 것조차 우리 대교에게 미안해서 못한다. 암!

나는 오직 대교! 천우신은 오직 소령! 우리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편단심 민들레파 조직의 친구들! 훗…! 하마터면 실제 입 밖으로 ‘오직 대교’를 외칠 뻔했다. 생각해 보니… 나와 천우신은 연옥도에서 강호로 복귀한 첫날, 첫 자축 파티에서 그 구호를(?) 외치며 건배했었다.

후후~ 그 때는 나나 천우신, 둘 다 각자의 천사들에게 자신의 진면목도 밝히지 못했었던… 말하자면 짝사랑 동지였었군. 나도 당시엔 꽤나 복잡한 입장이었지만 천우신 역시 소령이와 어렵게 재회를 하고도 밤새 삼육구 게임이나 해야 했던 처량한… 처량한… 삼육구…? 어? 가만…? 혹시… 그게 그 친구가 남긴 암호문의 해독 패턴……?

삼육구 게임의 패턴 정도는 특정 시대에 국한시키기 어려운 요소니까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지……?

떠오른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내 눈동자는 다시 암호문 위를 더듬기 시작했다. 연상과정은 다소 얄딱구리 했지만…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삼육구 게임의 패턴대로 글자들을 읽어보자 드디어 제대로 뜻을 이루는 문장이 구성되었던 것이다. 369패턴이란 것이 사실 다소 단순하기는 하지만, 패턴에 따르자면 33이나 36번째 같은 경우는 글자를 두 번 연속으로 문장에 넣어야 하는데도 전체적으로 용케 문장을 만들어 놓았다.

쯧~! 이렇게 되면 오히려 그 친구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노릇인 걸? 현천기공을 의미한 문장도 그렇고 나만은 뻔히 알 수 있는 걸 이용했는데도 이렇게 시간을 끌고 버벅대고 있으니 말이야. 이제라도 분발해서 후딱 후딱 진행해야… 음… 그건 그런데… 어째 해석된 문장도 직접적인 힌트는 아닌 것 같네?

셋이 함께 즐겼던 것을 다시 셋이 즐기네… 하나가 들면 하나가 나가고… 늘 수는 같고… 흥겨움은 여전하나… 너무나 아쉽고 섭섭한 마음도 여전하니… 이로서 다시 셋이 되기를……

나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며 해석된 문장을 다시 몇 번 읽어보았다. 느긋하게 수수께끼 풀이 자체의 재미를 느낄 만한 주변 상황이 아니어서 그런 탓도 있지만… 이번 문장은 더더욱 내가 그 친구의 ‘마음’을 빨리 깨닫지 못하면 안 된다는… 그런 의무감 같은 것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답답하다는 듯 재촉한 것은 금동이였다. 녀석은 어느 틈에 두 번째 상자 근처에 앉아 특유의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손으로 땅바닥을 탁탁 내려치고 있었다.

그래…! 셋이란… 나와 천우신, 그리고 금동이… 내가 빠지고 나서 소령이를 얻어 다시 셋이 되고… 그런 얘기였군.

나는 천우신은 물론이고 금동이에게도 미안한 마음에 사로잡혀 두 번째 상자로 향했다. 두 번째 상자 앞에는 벌써부터 인정파 중의 한 명과(아직 소개받지 못한 자) 반대파 중의 한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각각 하나씩의 열쇠를 꺼내 두 번째 상자의 겉 뚜껑을 열어 주었다.

그 안에도 역시 이중 뚜껑이 있었으며 중앙에 바둑판 모양의 틀이 장치되어 있었다. 첫 번째 상자의 글자보다 많은 숫자의 새로운 글자가 바둑판 무늬 하나 하나에 새겨져 있는… 일종의 키보드(?)에 해당되는 장치인 것 같았다. 나는 새로운 문장도 369의 패턴대로 한 번 읽어 본 다음, 곧 바로 고대의 키보드를 패턴대로 누르기 시작했다.

“잠깐!”

갑자기 옆에서 날카로운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니 소군황이 엷고 기분 나쁜 미소와 함께 천천히 고개를 젖고 있었다.

“순서를 잊으셨습니까? 암호는 푸셨는지 모르지만, 상자 안의 내용물을 먼저 밝히는 것이 먼저 아닙니까?”

“…그랬지. 깜박했어.”

“훗~! 아니면 차츰 연기하기도 지겨워서 그러십니까?”

“…뭐?”

“사실… 저희들도 당신께서 두 번째 마군황의 후손이나 어떤 식으로든 절기를 이어받은 전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닥쳐욧!”

이번에도 내 대신 끼어 든 사람은 자룡대주였다.

“이제와서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죠? 당신들도
천주께서 귀물의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내면 얌전히 인정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후후~ 그건 그 쪽에서 어떻게 나오는 가를 보기 위해서 그랬던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세상에 이런 낡아빠진 상자를 어떻게 믿습니까? 이런 암호나 잠금 장치는 현대의 기술로 얼마든지 감쪽같이 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뭐, 뭐라고요? 당신들 설마……”

기막혀하는 자룡대주에게 소군황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뭘 어쨌다고 지래 짐작하지 마십시오. 난 다만 일반론, 상식적인 얘기를 한 것뿐이니까 말입니다. 사실… 자칭 2대 마군황께서 흘렸던 정글도를 줍는 바람에 조금 조사를 해보긴 했지만… 그 역시 천년 전의 유물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더군요.”

“다, 당신… 당신 정말 끝까지……”

그 말 잘하던 자룡대주가 더 이상 조리있게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며 분노에 떨기 시작했다.

“하아~ 정말 실망입니다. 설마하니 구양대주나 자룡대주 정도 되는 분들이 선대의 귀물까지 이용해서 자신들을 위한 독재자를 만들어 내려 들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하무림을 통합해 봐야 무슨 의미가……”

“닥쳣!”

소군황의 적반하장에 구양대주도 광분하여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네… 네 놈! 초사마군과의 오랜 우정을 생각해 참아왔건만… 끝내……!”

구양대주는 말을 맺기도 전에 성큼 보법을 펼쳐 소군황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어지는 구양대주의 공격에 담긴 살기와 파괴력은 내가 봐도 대단했지만… 소군황은 피식 한 번 냉소를 날리더니 여유있게 피해내며 외쳤다.

“하하핫~! 천하의 구양대주께서도 속내를 들키니 자제심을 잃으시는 군요!”

“닥쳐라 이놈! 언제까지 그런 헛소리를 내 뱉나 보자!”

구양대주는 이를 갈며 더욱 맹렬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소군황도 조금은 더 신중해진 표정으로 방어에 나서고 있었다. 구양대주는 보청구룡대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임에 틀림없겠지만… 지금은 역시 누가 봐도 구양대주의 뜻대로 흘러갈 싸움이 아니었다.
그려… 그려… 댁들은 맘대로들 하고 있어. 난 우선 이걸 열고 봐야겠으니…
나는 둘의 싸움, 아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에서 신경을 끄고 조금 전에 멈췄던 키보드(?) 누르기를 계속했다. 모두가 싸움에 정신이 팔려있는 가운데… 나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50CM정도 되는 높이의 청동 항아리가 들어 있었고, 그 것을 들어올리자 바닥에는 또 몇 자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한 발 물러서서 찾아보면 다른 이들의 마음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이건 세 번째 귀물에 대한 힌트인 모양이고… 아무래도 거기엔 당시의 지하무림인들이 남긴 것이 있나보군. …이 항아리까지가 지하무림의 손을 빌어 천우신이 보내 준 선물이고 말이야.
나는 항아리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정글도를 들었다. 금동이가 항아리에 새겨져있는 금동주(金童酒)라는 글자를 가리키며 반가워하며 낄낄대는 가운데, 나는 정글도로 단칼에 항아리의 윗 부분을 잘라냈다.

[ 주인님! 천년이나 지난 술입니다. 이미 성분이 변질되어 해로운 물질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니…… ]

나는 몽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항아리를 들고 냄새부터 음미해 보았다.

< 상관없어, 몽몽. 내게는… 그 때와 똑같아. >

[ 에? 그럴 리가요? 1차 스캔 결과만으로도 그 술은 이미 변한 거로 나오는 데요? ]

“훗~! 아니야 요몽. 이건 내가 친구들과 마시던 그 때 그 술이야. 향기도, 맛도… 우리의 마음도……”

난 잘려진 항아리의 윗 부분을 거꾸로 들어 잔처럼 거기에 술을 따랐다. 금동이에게는 그걸 건네주고 나는 항아리를 통째로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옛날처럼 크고 작은 서로의 잔을 부딪치며 마시기 시작했다.
금동이 홀짝, 난 벌컥, 천우신은… 음, 그 친구는 내가 대신……
나는 술항아리를 상자 쪽에 내미는 시늉을 한 다음 내 입에 부었다.
크으~ 좋구나-! 후후…! 금동아 화내지 마라. 자아~ 너도 그 친구 잔을 대신 받으면 되잖아! 하핫~ 오늘은 천우신, 자네가 가장 많이 취하겠는 걸? 오호~ 소령이는 왜 빼냐고? 그럼 안되지…! 자아- 소령이! 처제이자 제수씨도 한 잔!
적지 않은 크기의 항아리에 담긴 술이었지만, 셋도 아니고 넷의 입에 부어지다보니 비워지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술은 그렇게 비워졌지만… 항아리에 담긴 우리의 마음, 그리움과 아쉬움은 언제까지나 비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내 잔(항아리)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고 금동이 역시 자신의 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우린 잔을 비운 기념으로(?) 동시 에 잔을 뒤집어 흔들며 웃었다.
하하핫~! 캭캭~!
예전처럼 불콰해진 얼굴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한참을 소리내어 웃었다. 얼마 후… 우리의 웃음이 문득 멈추어졌을 때에야 조심스럽게 자룡대주가 입을 열었다.

“…처, 천주. 대체 그건……”

빠르게 올라오는 술기운(?)으로 흐려지기 시작한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 사이 싸움을 멈춘 구양대주와 소군황은 물론이고, 자룡대주나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조용히 나와 금동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일견 기괴해 보일 뿐인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소군황 만이 득의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저런, 저런~! 우리 모두의 확인도 없이 혼자 멋대로 귀물을 꺼낸 것도 모자라, 그 내용물을 마셔서 없애버리다니! 그러한 행동은… 선대의 귀물로서 신분 밝히기를 포기했다는 뜻으로 봐도 되겠군요.”

“선대의 귀물~?”

나는 키득거리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취하면 늘 그렇듯 웃음을 앞세운 채 말을 이었다.

“넌 너희들의 귀물이 귀물인 이유를 알기는 하는 거냐?”

“무슨……”

“네 말대로, 나의 친구와 너희들의 선대가 남긴 물건들은 애써 수수께끼를 풀 것도 없이… 현 시대의 첨단 장비와 기술로 누구나 간단히 열 수 있는… 그런 낡은 잠금 장치에… 내용물도 별 거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흥! 그러니까 최소한 절차대로 했어야… 헛!”

다시 깐죽대던 소군황의 안색이 급변한 것은 내가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정글도를 휘둘러 놈에게 검기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놈은 간신히 자신의 칼을 들어 내 검기를 막아냈지만 그 충격으로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크윽!”

놈은 아까 처음 받아 보았던 내 공격이 나의 전력이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대응하는 태세를 바꾸는 눈빛이었지 만… 늦었다. 나는 검기를 날린 직후 공공보법을 펼쳐 이미 놈이 물러선 만큼을 순식간에 따라붙고 있었다. 나의 정글도가 차가운 푸른빛과 함께 다시 좌에서 우로 그어졌고, 놈의 칼도 착실하게 그 괘도를 막아섰다. 그러나 부딪치는 소리나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이, 이건……”

놈은 아무런 느낌도 없이 잘려 나간 자신의 칼이 믿기지 않는 듯 들여다보다가 그 시선을 나의 정글도로 옮겼다. 정글도의 날에 맺혀있는 푸르스름한 빛이 지이이이잉~하고 불길한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월광절화결(月光切花訣)의 참화지수(斬花之首)……! 그 절기의 응용편이었다고 할까…? 원거리로 날린 것이 아니고 정글도의 날 부분에 맺히게만 했어도 참화지수는 참화지수… 아니, 이렇게 보면 참화지수가 아니라 개화지수(開花之首)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어, 어? 어……?”

소군황은 자신의 얼굴에 피어난 피의 꽃을 뒤늦게 깨닫고 주춤주춤 물러나며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보며 경악했다.

“이, 이게 뭐야? 어, 어느 틈에! 으아아아~!”

사내자식이 얼굴에 칼집 좀 났다고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나는 놈에게서 등을 돌렸다. 시끄러운 건 소군황 하나 뿐, 어느 사이 모든 이들이 말과 행동을 잃은 듯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그 옛날… 당시의 지하무림인들 앞에서 처음 월광절화결을 썼을 때처럼 말이다.

“모두에게 묻겠다! 이 중에서 저 귀물들이 귀물인, 혹은 그래야 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 있나?”

질문을 던진 다음 잠시 기다려 주었지만… 인정파고 반대파에서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난… 말야. 그 동안 당신들에게, 지하무림인들 모두에게 미안했어.” 천년이나 지하무림을 떠나 있다가 지금 불쑥 나타난 놈이… 아무렇지도 않게… 또 그 때처럼 충성을 강요해도 되는가… 그런 생각도 있었고… 그래서 곧바로 날 믿고 따라 준 사람들에게는 고맙고… 반항하는 자들이 나와도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 내가 지금까지… 마·군·황· 답·지·못·했·던·건 말야.”

문득, 다시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핫~! 나도 꽤나 무책임한 놈이긴 해. 하핫~! 그래…!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하지만! 당신들은 그런 나보다 더 지하무림인으로서의 자격이 없어! 선조들이 남긴 귀물이 우리에게 귀한 보물인 건… 저 낡은 상자들 이 내가 진짜인지 아닌 지의 판별할 수 있는 물건인 걸 떠나… 저 안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야. 떠난 친구를, 떠난 지도자를, 자신들의 뒤를 이을 후손들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며 아끼는 마음이 담긴……”

“허튼 소리!”

등뒤의 소군황 놈이었다.

[ 주인님! ]

몽몽의 경고는 놈이 잘려진 칼의 남은 부분을 암기처럼 던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슬쩍 상체를 옆으로 기울인 것만으로 그 것을 피했고,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그어주었다.

“크아아악!”

얼굴에 십자가 모양의 혈화를 피어 올리며 비명을 지르는 놈에게서, 다시 등을 돌렸다. 이제 잡다한 생각들을 거의 접어 버려서 인지 아니면 천우신의 술에 취한 때문인지 몰라도… 정글도를 휘두르는 팔의 감각과 나 자신의 내력 흐름, 적의 움직임까지… 모든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훗~! 이제 아무래도 좋아. 옛날처럼 심플하게 가자!”

나는 예전처럼 다시 싱글싱글 웃으며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다.

“지금부터 2대 마군황의 복습시간! 이 산, 아니 이 지구상 모든 곳이 마군황령(魔君皇領)! 단, 지금은 스피드 시대니 기간은 일주일이면 충분하겠지? 그 동안 날 죽여봐…! 나 진유준을 죽여서 내 지배를 벗어나 봐!”

“천주, 이제 저들도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천주를 인정할 테니 그러실 필요는……”

“닥쳐, 당신도!”

구양대주는 내가 자신까지 공격할 줄은 예상 못하고 있었는지 정신없이 몸을 땅바닥에 던져 굴리고서야 간신히 내 검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가 서 있었던 자리 뒤편의 바위가 깨지며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는 것보다, 모두를 감싸고 있던 산 속의 공기가 얼어붙는 쪽이 빠른 것 같았다.

“인정파? 반대파? 그 딴 구분은 필요 없어. 소군황과 초사마군 말이 하나는 맞아. 마군황은 독재자야! 나… 지하무림의 마군황 진유준은 본래 독재자! 지하무림은 내 거야! 그게 싫은 자들은… 칼! 총! 수류탄! 미사일! 군대! 핵무기! 뭐든 다 인정! 능력껏 저항해봐!”

끝으로 규칙까지 다시 친절하게 알려 준 나는, 좌우 어느 쪽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적으로 검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나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모든 지하무림인들의 마음이 비로소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