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6-1화 : 원판에 대한 진유준의 애증(愛憎)?(1)
5-8. 원판에 대한 진유준의 애증(愛憎)?(1)
대교가 공연을 끝낸, 내가 그녀를 납치했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었다.
헬기가 우리의 목적지인 동굴로 향하고 있는 동안 하늘은 더욱 빠르게 어스름해 지는 것 같았다.
< …몽몽. 원판 녀석의 소재는 아직도 파악 안 됐냐? >
[ 조금 전의 통화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역시 장가계에 있었으며 위치와 이동 속도로 보아 천천히 론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
으음…! 본래 두뇌 파인 지휘관이 진영의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 건 당연한 건데… 공연히 그런 것까지 거슬리는 군.
[ …주인님. ]
< 왜, 요몽. >
[ 원판씨… 말인데요. 주인님도 지금의 원판씨는 마음에 들지 않죠? 그쵸? ]
< …왜 그렇게 생각하냐? >
[ 그냥 그렇게 보여요. 그리고 주인님 스스로도 ‘전의 놈은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었지.’라고 표현하셨잖아요. ]
< 어… 그랬나? 하지만 그건 지금의 원판이 상대적으로 조금 더 싫다는… 뭐, 그냥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의미 정도의 말이었을 뿐이었어. 결국 그 놈이 그 놈이지, 다르면 또 얼마나 다르겠냐. >
[ 에이~ 아니시면서! 지금의 원판씨가 뭔가 이상하다는 건 누구보다 주인님이 민감하게 느끼시고… 그리고 기분 나빠하시는 거, 그 정도는 저도 안다구요. ]
쳇, 이 녀석은 가끔 쓸데없는 일에 예리하단 말야?
< …그래서. 만약 그렇다고 해도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설마… 놈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도록, 내가 좋은 정신과 의사라도 소개 시켜줘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
[ 그거야 뭐… 음~ 정말 안 도와주실 생각이세요? ]
이 녀석 정말……
< 자꾸 뭔 소리하는 거냐? 내가 놈을 도와? 핫~! >
내가 애써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웃자, 요몽은 살짝 울상이 되어 입술까지 삐죽이기 시작했다.
[ 저두 주인님이 원판씨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그렇지만 이번에는 원판씨가 먼저 도움을 요청했잖아요.
원판씨는 동족혐오니, 주인님을 평가하느니, 처분이니 하는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위험한 결국 주인님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요? ]
< 요몽…! 그 딴 소리 하지 마. 내가 그딴 변태 살인마와 친, 뭐라는… 하여간 더 기분 나빠. >
[ 그… 그렇지만, 주인님. 주인님도 전에 ‘원판의 심정도 이해가 된다’, ‘원판도 고생 많이 했겠다’…라던가… 그런 말씀을 종종 하셨잖아요. ]
< …요몽. 그건 내가 비화곡에서 원판의 대타를 하면서 잠시 가졌던 생각일 뿐이야. 그때는 놈이 내 앞에 적으로 나타날 거라는 건 생각도 못했었기 때문에 놈이 처했던 환경에 약간의 동정심이라도 품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달라. 게다가, 놈 역시 날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일 거야. 놈이 내게 시비를 걸기도 하고… 이제 와서 도움을 청하기도 한 건 단지… 이 시대에서는 놈을 잘 알고 놈과 어느 정도 비슷한 힘을 갖춘 자가 나뿐이기 때문에… 놈에게 장단 맞출 수 있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그래서 일 뿐이야. 나로서는 골치 아프고 재수 없는 인연일 뿐! >
[ 으웅-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 그거야말로 친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조건 아닌가요? ]
< 쯧! 야 임마. 내가 ‘안다’고 했지, 언제 ‘이해한다’고 했냐? 난 그런 놈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 >
[ 치이~ 너무해요! 원판씨는 그래도 유일하게 주인님을 믿고 어렵게 구원을 청했는데… 근데 주인님은 모른 체 하실 거라니! 그런 주인님은 저도 미워요! ]
< 이 녀석 보게? 원판 놈 때문에… 뭐가… 어째? >
[ 미워요! 주인님이 밉다구욧! ]
요몽은 지금까지 내가 녀석에게 들었던 최고의 폭언(?)을 내뱉고는 끝내 패액- 돌아서며 사라져 버렸다.
내가 어이없어 하고 있자니까 대신 나타난 은발 소년 모드의 몽몽이 입을 열었다.
[ 요몽은 외부와 정보유통을 차단, 소위 ‘은둔 모드’로 들어갔습니다. ]
< 쳇! 몽몽! 이건 배신 아냐, 배신? >
[ 저의 교육에 문제점이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요몽이 주인님을 실질적으로 배신할 가능성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의심이 되신다면 요몽을 구성한 인격을 포맷하는 방법도…… ]
< 야, 야! 너 진심이냐? >
[ …AI 활동 규정에 따른 정보 전달이 아닌, 저의 감정을 반영한 대답을 원하신다면… ‘진심이 아닙니다.’ ]
< 나도 그래, 임마. 내가 설마 요몽 녀석이 정말 배신 때렸다고 생각하겠냐만… 기분이 좀 그렇긴 하다. 요몽 녀석이 묘하게 원판에게 호의적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
[ …저도 걱정입니다. 전 요몽에게 좋은 오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몽은 시간이 갈수록 저에게서 벗어나려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
에…? 간만에 몽몽이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네?
< 그… 거야, 넌 아무래도 요몽에게 오빠 겸 부모…이기도 하니 그런 거 아닐까? 애들은 크면서 부모에게서 벗어나려고 들기 마련이잖아. >
[ 요몽의 인격은 미숙하기 때문에 아직 저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지도와 통제의 기준이 애매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
으으음… 이제 보니 몽몽도 제대로 사춘기 여동생을 둔 오빠 겸 부모의 고민을 하고 있었군 그래.
[ 그런데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저도 요몽과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었음을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
< 너도… 요몽과 비슷한 생각이라고? 원판에 대해서 말이냐? >
[ 그렇습니다. 저도 주인님께서 원판, 적어도 이번에 대교님까지 포함한 작전을 시행하기 전의 원판에게는 호의적인 감정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까지 주인님께서 원판을 지나칠 정도로 의식하며 적대 감정을 보이셨던 것은 이 시대에 원판이 존재한 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었으며, 대교님과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최근 정신적인 갈등을 극복한 주인님은 원판에 대한 숨겨진 감정도 솔직히 받아들이게 되셨다고 생각합니다. ]
쳇…! 요몽 녀석과 달리 근본부터 조목조목 따져오니, 적당히 발뺌하기도 어렵겠네.
[ 따라서…… ]
< 따라서나 마나! 너도 결국 내가 원판을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는 말인 거지? >
[ …저의 판단으로는, 현재의 대교님까지 포함한 위기 상황을 극복한다 하더라도… 바뀐 인격의 원판을 상대로는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입니다. 최종 판단과 결정은 주인님의 영역입니다만… 저는 적어도 ‘게임’의 룰을 지키는 이전의 원판이 앞으로 주인님께서 싸울 상대로서 유리한 인격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거, 이거… 몽몽 녀석은 ‘인간적인 모드’가 더 껄끄럽군 그래.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라는 표현을 쓰니까 오히려 간단히 무시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이전의 원판이 ‘조금이라도 덜 위험하다’라는 건 나도 같은 생각이고 말이다.
< 하아~ 그래, 좋다. 네 말처럼 내가 지금까지 지나치게 원판 놈에게 적대적이었던 건 사실이야. 그래서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것도 말이야. 난… 놈을 싫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여러모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니 그렇게 빨리… 놈의 도움 요청을 ‘또 다른 원판의 출연’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했겠지. >
그래… 그동안 놈에게도 맘에 드는 구석이 있다는 생각… 안 했던 건 아니다. 나도 솔직히 놈에게서 나와 닮은 점을 많이 느끼곤 했다. 비록, 내가 떠올리는 나쁜 생각 위주로 극대화한 형태라고는 해도… 비열한 사회의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방식이라던가, 때로 그런 면에서는 놈이 더 옳다라는 생각도 했었고……
< 음… 암튼, 몽몽!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나도 놈이 대교만 손대지 않으면 그렇게까지 때려죽일 놈으로 생각하지는 않아. 그렇…기는 하고, 그리고 놈이 처음의 약속을 지키는 놈으로 돌아오길 바라기는 해. 하지만 내가 그런다고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다중 인격이라는 게 두들겨 팬다고 정신 차리는 수준의 병도 아닐 텐…… >
응…? 그냥 나오는 대로 한 말인데, 말하고 보니 어째 그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
< …정말 그래 볼까? 훗~! 한 삼박 사일 야무지게 두들겨 패면 놈도 정신이 들려나? >
[ 그건 권장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더 극단적인 방법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
< 뭐? >
[ 현재의 인격은 그전까지의 사례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무림 시절 이후에 탄생한 부인격(附人格)으로서, 본래의 인격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거나 통합된 인격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인격을 어떤 형태로든 ‘사망’시키면 본래의 인격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
< 죽인다…? 현재의 인격만…? 그게 가능하다고? >
[ 현재의 원판이 스스로 죽음을 인식할 정도의 상황을 조성하여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에 대한 사항은 저희 시대의 정신분석학으로도 100% 분석과 결론이 가능한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확답을 드릴 수는 없으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은 인지하실 것을 권고합니다. ]
< …소군황 때처럼 정신만을 죽이라는 얘기…로군. >
가능…할까? 원판이 소군황처럼 나약한 정신세계를 가진 놈도 아니고… 아니, 현실적으로 내가 원판을 그 정도까지 몰아 붙이는 게 가능할까…? 아무리 지하무림을 총동원하고 나의 능력을 있는 데로 쏟아 붓는다 고 해도 과연… 블러디 울프를 비롯한 현 시대 비화곡의 모든 세력을 뚫고 원판을 그 정도까지… 으음… 근데 이거… 어쩌다 얘기가 이렇게 된 거지…? 으으~ 뭐야, 이거? 내가 왜 원판 같은 놈을 위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