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6-2화 : 원판에 대한 진유준의 애증(愛憎)?(2)
5-8. 원판에 대한 진유준의 애증(愛憎)?(2)
그러고 보면, 원판 놈에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면 난 요 며칠 급상승한 컨디션과 기분으로 부담없이 놈을 상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놈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자 오히려 이런 복잡한 기분이 되어 끝내 엉뚱한 생각까지 하게 되다니… 사람 심리라는 게 참……
[ 지금의 얘기를 요몽에게 전달해도 되겠습니까? ]
< 그야 니 맘…이지만, 난 아직 뭐든 결정한 거 아니야. >
[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 ]
뭐…야. 아직 방향을 결정한 게 아니라는 걸 안다는 놈이 왜 저렇게 기뻐하는 기색으로 요몽에게 전화를 하는 거야? 응…? 전…화? 허어- 고 녀석들 참. 몽몽은 소년 모드 그대로 휴대폰을 꺼내 들고 요몽에게 전화를 거는 시츄에시션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갈수록 둘이 가상공간에서는 아주 제대로 인간처럼 지내는 모양이었다.
[ 정말이죠? 정말 원판씨를 구해 주시기로 한 거 맞죠? 네? ]
요몽은 자기가 언제 삐쳐서 방구석(?)에 은둔했었냐는 듯 재빨리 돌아와 호들갑스럽게 물었고,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구해주긴 뭘 구해 줘. 난 그냥 지금의 놈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뭐, 어떻게 방법이나 기회가 있다면 한 번 시도해 볼까 망설이는 정도…… >
[ 와아~ 만세! 땡쓰- 주인님! 정말 고마워요, 주인님! ]
쳇…! 아직 확실히 결정된 게 아니라는데도 기뻐 날뛰는(?) 군.
< 넌 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왜 그렇게 녀석을 좋아하게 된 거냐? >
[ 예? 에이~ 좋아하긴요! 전 일편단심 주인님 인 걸요! ]
< 야, 야! 입에 발린 소리하지 말고! >
[ 헤헤~ 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좋아한다 싫어한다 같은 걸 떠나서… 그냥, 원판씨는 어쩐지 처음부터 남 같지가 않았어요. 저처럼 외딴 세계에 홀로 떨어진 자의 외로움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거든요. ]
이 비슷한 얘길 전에도 한 번 들은 적이 있긴 하지 만… 요몽이 ‘느껴졌다’라는 표현을 쓰니까 새삼 묘하게 와 닿는 군. 요몽 녀석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하게 느꼈던 인간적 감정은 ‘외로움’이었단 말이지?
[ 그런 처지도 안됐는데… 만약 또 다른 자신에게 밀려 사려져 버리게 된다면, 그건 너무 가엾잖아요. ]
< …글세. 난 놈이 그렇게 외로움 같은 걸 탈 놈도, 또 이렇게 사라질 정도로 약한 놈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어쨌든 나도 기회가 된다면 놈의 현재 인격을 제거할 용의는 있어. >
[ 그쵸? 그쵸? ]
< 야, 임마. 네가 몽몽에게 어떻게 얘길 들었는지 몰라도, 난 전의 놈보다 지금의 놈이 더 위험하여 대교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을 뿐이야. 게다가 놈은 인격이 변하면서 웬지 나사라도 하나 빠진 것처럼 ‘날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인 것 같아. 이건 어떻게 보면 내가 놈을 없앨 절호의 기회라는 얘기지. >
[ 에? 그건…… ]
< 내말 잘 들어, 요몽.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독립적인 하나의 인격만 제거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거야. 게다가 난 놈을 위해 위험한 일까지 감수할 의리도 결코, 없어. 분명히 밝혀 두는데… 만약 내게 놈을 그냥 죽이는 것과 놈의 지금 인격만을 죽이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난 주저 없이 그중 쉬운 길을 택할 거야. 알겠니? >
[ 그, 그건… 너무해요. ]
요몽은 내가 몽몽에게 들은 것보다 강경하게 나오자 다시 울상이 되었고, 공연히 죄 없는 몽몽을 흘겨보기 시작했다.
[ 저어- 주인님. ]
< 됐다, 몽몽. 아무래도 이 얘긴 이제 그만 해야겠다. 난 아직 원판 놈은 고사하고 론과도 승부를 못 냈어. 원판 놈을 어쩔 것인지 고민하는 건 아직 이르다구. >
몽몽은 내 말에 얌전히 수긍했지만 요몽은 역시 불만인 듯 다시 심통이 난 표정으로 사라져 버렸다.
< …또 은둔 모드냐? >
[ 그렇습니다. ]
< 몽몽, 너도 솔직히 불만이긴 하지? >
[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주인님의 결정이 보다 합리적입니다. ]
< 훗~! 칭찬은 고맙다만… 솔직히 말해서 요몽에게 한 말은 나 스스로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한 말이고, 내게는 아직 갈등이 남아있어. >
[ 그렇…습니까? ]
< 그래. 그러니… 지금 더 생각하는 건 무의미할 거야. 뭐… 나중 원판을 직접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순간의 내 마음이 결정하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지. >
그래… 그리고 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끝내 놈을 내 손으로 죽여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웬지 원판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놈 말대로 나와 놈은 닮은 구석이 분명히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요 며칠 동안 중에서 가장 길고 복잡한 고민을 하는 사이, 헬기는 처음 출발했었던 동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지하무림의 성지로 삼고 싶을 만큼 소중한 석실이 있는 곳을 싸움터로 만들기는 싫었는데도 결국 이 곳에 온 것은… 적이 다른 놈도 아니고 이미 이 장소를 알고 있는 원판이 보낸 병력이라 새삼 숨길 의미가 없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대교를 빨리 그 석실에 데려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룡대주.”
“예, 천주.”
“지금부터 모든 보천구룡대는 이 동굴 입구를 중심으로 주변에 방어진을 치고 있도록 하고… 자룡대주와 은사마군을 비롯한 어사조 일행은 동굴 안까지 날 따라와.”
“예, 천주. 그런데……”
얌전히 명령을 받던 자룡대주는 슬며시 고개를 돌리더니, 조금 떨어진 헬기 옆에서 금동이를 안고 선 대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 분, 주가혜 양도 석실까지 함께 가십니까?”
“…그녀에 대해 전달 못 들었어?”
“아, 들었습니다. 그러니 전장에서 떨어진 장소에 모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여……”
“음… 사실 그게 정석이겠지만, 이번 적에게 안전한 장소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거야. 내 곁… 말고는 말이야.”
후후- 나, 정말 많이 변했다. 이런 표현도 쑥쑥 해버리고 말이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약간의 씁쓸한 표정…? 하지만 우려했던 것보다는 그리 대단한 반응이 아닌 것 같군. 어사조에서 제외되고 곧이어 대교에 대해 알게 되면서 약간이라도 가졌던 나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않았나 싶은데… 그래…! 무지 미안하기는 하지만, 제2의 소교를 양산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 일찌감치 정리되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암!
나는 너무나 순순히 납치범을 따라주는 고마운 대교를 대동하고 역시 순순히 날 포기해 줘서 고마운 자룡대주를 비롯한 수하들과 함께 동굴 입구에 들어섰다.
< 모두들 잘 들어. 난 지금부터 석실까지 가면서 몇 개의…… >
[ 총 42개를 준비했습니다, 주인님. ]
< 음, 대략 20개 정도의 방어진을 설치할 거야. 너희들에게는 진식의 생문을 알려 줄 테니 잘 기억해 놓도록 해. >
< …복명. >
< 좋아. 모두 그 쪽에 잠깐 서 있어봐. 우선 이 첫 번째 갈림길에는… 기문서혈진(奇門敍穴陳)! 이렇게…… >
나는 입구 쪽의 일행들과 나 사이의 동굴 바닥에 내력을 담은 정글도로 간단한 진형을 그린 후, 필요한 위치에 적당한 크기의 돌을 주워 다가 내려놓았다. 마지막 돌이 정확한 지점에 위치하는 순간, 안 그래도 그리 밝지 않았던 동굴 속의 공간에 더욱 짙은 어둠이 사르륵- 내려앉았다.
“아~!”
갑자기 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진식 너머의 모두가 짧게 탄성을 울렸다. 아무래도 모두들 조금 전 대답은 했었지만 실제로 이런 진식이 펼쳐 질 거라는 걸 실감하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곧 내가 진식을 거꾸로 밟아 올라가 다가서자 모두들 입을 따악 벌리고 있었다.
< 이건… 이 동굴 안에 이미 상당히 강력한 기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야. 진형이 그려진 라인과 진식에 필요한 돌에 나의 내력을 주입해서 전체적인 기의 흐름을 64괘(卦)를 응용한 이형효(異型爻)라는 형태를 구성하도록 흐르게 함으로서…… >
음, 시간도 별로 없는데 일일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으려나? 사실 나 역시 진식은 아직 잘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것도 쑥쓰럽고……
< …매우 복잡한 과정이므로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들 날 따라 오면서 생문을 기억해 두면 지나다니는데 문제가 없을 거야. 알겠나? >
< 보, 복명! >
< 좋아. 가자. >
나는 다시 앞장을 서기 시작했고 다들 조심스럽게 날 따르기 시작했다. 기존의 웬만한 진법은 원판이 전부 꿰뚫고 있을 거라 몽몽이 새로 만들어야 했던 진법들을 설치하면서 석실까지 가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과 내력을 써야만 했다. 그래서 몽몽이 42개를 준비했다고 했는데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20개 정도라고만 말해 둔 거지만… 결과적으로 난 모두 24개의 방어진을 설치했고, 우선 이 정도만으로도 어지간한 적들은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으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군. 놈들이 벌써 근처까지 도착했겠는걸? >
< 그럴지도 모르지만 동굴까지 오려면 더욱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천주. >
응…? 자룡대주가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한다는 건……
내가 조금 의아한 기색으로 돌아보자 그녀는 전황마군이 등에 메고 왔던 무선기의 송수화기를 들고 바깥과 통신을 하기 시작했다. 석실은… 오는 과정이 복잡해서 그렇지 사실은 바깥과 그렇게 먼 지점이 아니다. 그래도 물론 몽몽처럼 초강력 로봇이 아닌 우리 시대의 장비로는 무선이 어려워서 ‘중계기 설치’를 지시했었는데, 대교를 데려오는 사이 벌써 작업이 완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 …조금 전, 약 4분 정도 전에 산밑에서 적들과 교전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방어에 나선 우리측 병력은 초사마군이 동원한 정규군으로서 적의 네 배가 넘는 병력과 화력을 가진 특수부대라고 합니다. >
< 초사마군이? >
< 예, 천주. 천주께서 아직 저희들의 부족한 상태를 우려하시는 건 알지만, 그래도 한 번 맡겨 주시는 건 어떨는지요. 지금 교전을 시작한 병력도 비록 정식 지하무림의 식구들이 아니지만…… >
< 자룡대주! 내가, 놈들이 생체강화 전사라는 것까지는 얘기해 줬지? 그래도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다른 놈들도 자룡대주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강할 거고… 특히 지휘관인 론, 그 자의 전투력은 나와 맞상대까지 가능할 정도야. >
< …예? 설마…… >
<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설명해 주겠어. 그러니 지금은 일단 다들 후퇴하라고 해. 내가 이 곳에 도착했으니 다들 임무를 잘 끝내 준 거야. >
<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
쯧…! 갈수록 더욱 공손해지는 구양대주와 달리 이 여자는 계속 은근히 내 말에 토를 잘 다네? 수하이면서 내 제자까지 겸직해서 그런가?
< 앞으로도 저희가 대적해야 할, 천주의 적이라면… 이번 기회에 적의 역량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
< …하는 수 없군. 정히 그렇다면 허락은 하는데… 대신 절대로 무리는 하지마! 알겠어? 내 허락 없이 당하기라도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
< 예. 감사합니다, 천주! >
뭐 그리 좋은 일을 허락받은 것도 아니면서… 자룡대주는 물론이고 다른 어사조 멤버들의 표정도 환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