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49-1화 : 그녀들의 사랑 방식.(1)
6-1. 그녀들의 사랑 방식.(1)
신앙처럼 굳건한 믿음과 사랑으로 원판을 따르던 여자 란. 그녀는 지금 자신이 그토록 경외하며 사랑하던 교주이자 애인의 몸에 총을 난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제가 잘 못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란은 여전히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 놀라지 않는 것 같네요, 진유준님.”
나는 그녀의 의문에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충분히 놀랐소. 표현할 타이밍을 놓쳤을 뿐.”
“정말, 그런 건 가요?”
“그렇소. 뭣하면 비명이라도 질러 드릴까?”
내 반문에 란은 갑자기 깔깔대는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죽인 애인의 시체 옆에서 소리내어 웃는 여자의 모습은 지극히 요사스러워 보였지만… 그보다 이건 아무래도……
“다중인격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내가 조용히 말하자, 그제야 란은 서서히 웃음을 그치기 시작했다.
“그 자는 원판의 ‘복제’였던 건가?”
그래… 본래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내가 상대해야 했던 여러 괴물들을 생각해 봐도, 놈의 DP라는 기업은 지금까지 이 시대 유전공학의 한계점을 비웃을 정도의 이런저런 결과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보여 왔지 않은가.
“당연히 그렇죠. 후후-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감히 이런 짓을 할 수가 있겠어요. 진유준님은 언제 눈치채셨는지 몰라도… 아니, 그… 영혼마저 스캔할 수 있는 로봇, 몽몽이 있으니 언제든 당연한 건가요? 물론 이 가짜 마스터는 스캔을 막는 장치를 몸에 지니고 있었지만… 역시 그 놀라운 기본 기능에 ‘진화’까지 하는 로봇의 스캔을 막을 수는 없었나 보군요.”
란은 새삼 ‘탐이 난다’라는 눈빛으로 내 몸을 살피며 몽몽을 찾으려 했다. 물론 몽몽은 자신의 기능을 막는 기술을 만나면 그 기술을 깰 방법을 모색해 언제고 찾아내는 ‘진화형’인 것이 틀림없지만……
“찾을 필요 없소. 난 이번에 몽몽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
“예?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소.”
“그, 그럼… 자신의 판단… 아니, 느낌만으로 이 가짜 마스터를 알아봤단 말씀인가요?”
“그, 뭐, 확실히 알아본 건 아니고… 아무래도 이상해서 의심은 하고 있었소. 아무리 인격이 바뀌었다고 해도 함께 바뀔 리가 없을 것 같은… 놈만의 어떤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할까…? 뭐,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곤란하지만… 하여간 그랬소.”
란에게서 웬일인지 조금 전까지의 요사스럽고 당당하기까지 하던 태도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 이… 스페어 육체는 말이죠. 마스터의 부재나 여하간의 사정이 있을 때를 대비한 거라 대체 직전과 완벽히 같게 복제되었으며, 심지어 얼마 전 진유준님께 잘린 머리카락 형태까지도 재현했어요. 그래서 오랜 세월 섬겨온 수하들조차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어요. 심지어 처음엔 저 조차… 그런데… 그런데도 진유준은 마스터의 영혼을 이렇게 단번에……”
“쳇! 쓸데없는 오해하지 말라고 했잖소. 내가 누군가의 영혼 존재유무… 혹은 여하간의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웃기는 노릇이지만, 그건 뭐…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유체이탈 같은 걸 자주 해 봤던 몸이다 보니 그런 거고… 원판 놈이 딱히 특별한 대상이라서가 아니란 말요.”
“과연… 그럴까요?”
내 반론에 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진유준님 자신의 생각은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마스터의 생각과 판단은… 아아- 역시 전 지금까지의 제 생각을 수정해야겠어요. 진유준님이 아무리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해도, 아무리 단기간에 지하무림처럼 거대 단체를 수중에 넣을 수 있는 남자라고 해도… 그런 이유들은 중요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왜 당신이 아니면 안 되는지… 왜 마스터께서 그토록 당신을 원하시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으~ 그냥 ‘진유준은 스카웃하고 싶은 인재’라는, 매우 긍정적인 얘기일 뿐이라고 해석해도 될 법한 얘기건만, 왜 원판이나 저 여자가 말하면 이렇게 불쾌하고 소름이 돋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변태 살인마에게 스카웃 대상이라는 거 자체가 충분히 썰렁한 거지만… 어, 어라?
“부디… 지금까지의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란은 뜬금없이 내게 손을 내미는가 싶더니, 이내 그 팔을 자신의 가슴에 대며 상체를 숙였다. 아니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중세 유럽의 기사나 평민이 왕족에게 인사하는 듯이 정중하고 경건한 태도로 내 앞에 몸을 조아리는 것이어서 나도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곧 고개만을 들더니 어이없어하는 내게, 지금까지의 어느 때보다 자연스러운 미소와 함께 몇 마디를 덧붙였다.
“이제… 진유준님이라면 마스터께 하운이니 그 놈이니 하고 불러도 인정해 드릴게요.”
“…그거 퍽이나 고맙수다.”
난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밖에 대꾸해 줄 수가 없었다. 원판이나 이 여자나, 지들 멋대로 나와 특별한 관계를 주장하는 건 짜증나지만 그렇다고 내가 더 뭐라 부인해 봤자 헛수고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늘 상황에서 정말 중요하고 심각한 부분은 따로 있다. 물론 지금 란의 태도로 봐서는 결코 쉽게 말해 줄 것 같지가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내가 망설이는 사이, 란이 먼저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당분간은… 적어도 마스터께서 돌아오실 때까지는 저희도 진유준님께 시비를 걸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그 동안만이라도 평화를 즐길 수 있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쳇…! 여러모로 퍽이나 고맙수다.”
“후후~ 물론 어차피 지금의 진유준님이라면 마스터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누구라도 상대가 되기 어렵겠지만 말이에요.”
“나름대로 칭찬이라고 한 거겠지만 별로 달갑지는 않고… 담에 내 앞에 설 때는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요. 당신 말대로 나와 내 칼은 이제 무정해져서… 원판은 물론이고 여자인 당신이라도 멈추지 못할 테니 말요.”
나는 새삼 살기를 뿜어내며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지만 란은 여전히 웃으며 고개만을 끄덕였다. 나는 이대로 돌아갈 것처럼 몸을 돌렸고, 그 순간에야 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 참! 별 건 아닌데……”
난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원판을 복제한 놈은 대체 누구요?”
“예, 예?”
기습공격(?)… 성공! 이 여자, 지금 자신의 표정과 태도를 관리하는 타이밍을 놓쳤다. 그럼 이 때 질문 공격 몰아치기!
“원판이 스스로 한 거라고? 그런 놈이 내게 ‘도와달라’고 했다 이거요? 게다가 당신과 도홍도 애써 남몰래 내 도움을 받아 가짜를 제거하려고 했고…? 이 모든 일이 단지 놈의 특이한 장난질… ‘나와 놈의 동족성(?)’을 테스트 위한 자작극이었다고?”
“그, 그야 당연한 얘기죠. 벌써 다… 이해하신 거 아니었나요?”
란은 조금 전까지 대화를 주도했던 태도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당황한 표정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란을 지긋이 응시하며 말했다.
“글세, 뭐… 나도 그런 거라면… 물론 기분은 엄청 더럽지만 그래도 차라리 그게 나을 거 같소. 하지만… 난 어째 원판은 자신이 카피본으로 대체되는 걸 막을 수 없었으며 당신들 역시 그게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는 게… ‘연극이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었단 말이오.”
계속되는 내 추궁에 란의 얼굴이 차츰 더 복잡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지금 당신의 반응 때문에 ‘확신’으로 변했지. 그렇다면 원판의 적은 내부의… 아니, 그 정도가 아닐 거야.”
내가 끝까지 묻지 못하고 일단 말을 멈춘 것은 란이 갑자기 성큼 내게 다가서며 내 팔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더, 더 이상 묻지도, 말하지도 말아 주세요.”
내게 부탁하는 목소리와 내 팔을 잡은 그녀의 손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렇게 뭔가 두려워하는 여자를 계속 몰아대는 건 결코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사항까지는 확인해야 한다.
“…이 시대 비화곡의 진짜 주인은 원판이 아니라는 얘기…! 혹은, 내가 만난 원판이 아닐 뿐 그 이전의 원판이 또 있는 거요…? 그 것도 아니라면 원판이 이 시대에서 만난 제3의 인물이나 조직이 너무 거대해서 원판도 아직까지 그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요?”
“전… 대답할 수 없어요. 무엇하나도.”
“…지금의 그 대답이 또 한 가지 의문을 풀게 해주는 군.”
“예…? 그건 또 무슨……”
“…됐소. 더 이상은 물어봐야 제대로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으니 그만 두겠소.”
나는 비로소 그렇게 말하며 슬쩍 뒤로 물러서려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란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과 함께,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놓치려 하지 않았다.
“너무 하시는 군요. 전 당신과의 대화 한 마디 한 마디에 목숨을 걸고 있는데, 그렇게 쉽게 정보를 빼내가셨다는 건 가요?”
란은 내 눈앞으로 더욱 바싹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어 부담스러울 정도의 거리에서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제 표정을 읽고 속마음을 맞춰보세요.”
쯧, 조금 전까지는 냉정을 잃게 한 다음 반응을 본 거고… 내가 무슨 독심술사도 아닌데 어떻게 댁의 마음을 일일이 알 수 있겠수.
“…어서요!”
“음… ‘나 예쁘지?’라고 말하는 것 같소만.”
“그런 장난치지 말고욧!”
“그, 글쎄, 뭐… 이제 별다른 건……”
이, 이런 제기! 이 여자, 갑자기 내게 도둑 키스를… 으~ 이건 우리 대교 껀데! 나는 갑작스럽게 당한 일에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란의 태도에서 이렇게 밖에는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배후인물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듯 안타까운 감정이 너무나 강하게 느껴져서 결국 그녀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이 빠르게 소리 없이 더듬어 쓴(?) 몇 마디는… 이랬다.
제발 구해줘요! 나의 마스터! 그 분의 영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