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3부 – 62-2화 : 부활하는 비화곡(秘花谷).(2)
7-4. 부활하는 비화곡(秘花谷).(2)
불빛 너머라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닥터 제이였다.
“미안, 미안. 애매하게 깨어나는 바람에… 아, 어쨌든 서두르게. 시간이 없어.”
나는 즉시 돌아서는 닥터 제이를 따라서 벽 속(?)으로 뛰어 들었다. 좁은 통로를 따라 급하게 달려야 하는 상황을 예상했었지만 닥터 제이는 몇 미터 가기도 전에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내려가네.”
에? 왁
순식간에 발밑의 바닥이 사라졌고, 당연히 나와 닥터 제이는 끝도 모를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급…해…서… 설…명…못…”
낙하 속도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충 양해해 달라는 얘기인 것 같았다. 붕괴 직전의 지하 기지에서 탈출하는 거니 방식이 조금 거친 정도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하기지에서 또 더 깊은 지하로…?
이 그랜드 캐년의 지하 동굴은 대체 얼마나 깊기에 탈출로가 더 지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쩌면…
어느 사이에 낙하 속도가 현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경공을 전혀 쓰지 않고 있음에도 보이지 않는 바람, 혹은 공기의 쿠션 같은 것이 몸을 받혀 주기 시작한 듯한 기분이었다.
[ 공기 압축식 완충 장치입니다. ]
기분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군. 어쨌든 발밑으로 보이는 저 빛은…
비밀스런 탈출로에 어울릴 법한 밝기가 아니었다. 나와 닥터 제이는 너무나 눈부신 빛 속으로 빠지듯 떨어져 내렸다.
갑작스런 밝기의 변화에 적응하느라 다시 눈살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바닥에 내려서는 것 자체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정도의 거리를 경공도 쓰지 않고 떨어져 내린 충격은 고사하고 마치 낮은 계단 하나를 밟고 내려 온 정도의 느낌이랄까?
“좋아. 문 열고, 비상구는 1호는 영구 폐쇄.”
내 옆에 나란히 내려선 닥터 제이가 어딘가를 향해 말했다.
그 직후 내 앞의 투명한 유리문이 옆으로 스륵- 열렸고, 슬쩍 올려다 본 머리 위의… 방금 떨어져 내린 구멍은 몇 겹의 금속 문으로 닫히고 있었다. 너무나 깊은 지하임에도 희미하게 느껴지는 이 진동은 간신히 버티던 중앙 통제실을 포함한 지하 연구소 전체가 괴멸하는 마지막 단말마인 것 같았다.
“자아- 어서 나오게. 비상구의 폐쇄 절차는 완벽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앞서 유리박스(?)에서 내린 닥터 제이가 손짓을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르며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비밀… 탈출로가 아니었군요.”
우리가 내린 투명 박스와 밝은 조명뿐 다른 어떤 장비나 사람도 보이 않았지만, 이렇게 수십 평 규모의 완벽한 공간이 ‘통로’라는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다.
“후후- 맞아. 난 처음부터 외부로 탈출할 생각이 없었어.”
닥터 제이는 낯익은 얼굴로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곳이야말로 나와 하운군이 벌일 ‘자유를 위한 전쟁’의 교두보이자, 최후의 보루니까 말이야.”
과연… SFV(Secret Flower Valley)… 이 시대의 비화곡(秘花谷)이란 바로 이 곳을 의미하는 거였던 건가?
“자유를 위한 전쟁…?”
“그렇다네. 나와 하운군은 벌써 20년이 넘게 너무나 터무니없이 거대한 조직의 일원으로서 살아 왔어. 그 정도 세월을 감시받으며 꼭두각시 노릇을 해 왔고… 이제 자유를 되찾을 때가 온 거라네.”
그건… 이해한다. 무엇보다 나 자신부터가 남의 감시와 지배를 받기 싫어서, 그 지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렇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거니까 말이다. 하지만…
“…먼저 묻겠는데, 위에서 죽은 것이 복제인가요? 아니면 지금의 당신이 복제인가요?”
“보면 모르겠는가, 당연히 지금의 이 육체가 복제된 거지.”
보면 모르겠느냐고 하는 건… 그가 전보다 10년 이상 더 젊어 진 것을 말하는 것인 모양이다. 본래도 40대라고 보기 힘들만큼 동안의 남자였는데, 지금은 거의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일 정도였다.
“자신의 육체를 스페어로 몇 개든 복제해 놨을 텐데, 외견상의 모습이 무슨 의미가 있죠?”
내가 다소 삐딱하게 대꾸하자 닥터 제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실이야. 위에서 죽은 건 분명히 나의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육체지.”
닥터 제이는 문득 뭔가 다시 생각났다는 듯 얼굴이 밝아지면서 말을 이었다.
“아핫! 난 말이야. 자네와 달리 임사체험은 처음이거든? 뭐라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하여간 굉장하더군!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의 고통이 사람 짐과 동시에… 그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 그리고 이어지는 그, 그… 으…”
닥터 제이는 유체 상태에서 느꼈던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버벅대고 있었다.
< …몽몽! >
[ 예, 주인님. 1차 스캔 결과, 닥터 제이 본인의 영체입니다. ]
역시… 그랬군.
“…난 별로 좋은 건 못 느꼈었는데, 당신은 좀 달랐던 모양이네요.”
“흐음. 자네는 달랐다고? …하긴, 신일군은 언젠가 유체 상태에서는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바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된다고 했었지.”
“…역시 마신일, 그 사람인가요? 당신의 영체를 곧바로 지금의 육체로 옮겨 준 것은?”
“그건 아니야. 만약의 경우 그가 도와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기는 했지만, 나는 어찌어찌 내 힘으로 이 육체를 차지했다네. 그 과정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쉽지만… 어쨌든 나도 아직 이 세계에 꽤나 미련이 많았던 모양이야.”
닥터 제이는 피식 웃더니 전과 달리 깨끗한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넣으며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 일단 안으로 들어가세. 자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다네. 하핫~! 이렇게 남에게 감시 받지 않고 다른 사람과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유준군, 자넨 커피? 혹은 녹차…”
멋대로 지껄이며 걸어가던 닥터 제이가 문득 멈춘 것은 내가 따라가지 않아서 자기 혼자 걷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닥터 제이가 돌아보는 가운데, 나는 정글도를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렇…군. 하은이 일 때문에 화가 나 있었어.”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대체 왜 그랬죠?”
“…하운군의 유전자로 하은이를 탄생시켰던 거? 아니면 오늘…”
“둘 다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은이게게 자기 아버지의 피를 묻힌 겁니까!”
나는 억제하기 어려운 살기가 치솟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만약… 만약 하은이가 오늘 일로 뭔가 잘 못되기라도 하면… 그 땐 지금 내 눈앞의 당신, 그리고 당신이 또 숨겨 놓았을 복제까지 모조리 찾아내 없애 버릴 겁니다.”
“…진심이군. 고맙네.”
“뭐요?”
기분 나쁘다는 투로 반문했지만, 닥터 제이의 표정은 바로 조금 전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하은이를 진심으로 동생으로 생각하며 아껴주고 있으니 말이야. 그래… 사실은 나도 자네가 있기 때문에 좀더 용기를 내고 결단을 내릴 수 있었어. 나도 하은이에게 상처를 주는 일만큼은 힘들고… 두려웠거든.”
닥터 제이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 먼 지상 어딘가에 있을 하은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 아이의 출생을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었어. 그 아이 자신도 오래 전부터 자신이 복제된 인간이 아닌가, 항상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있었으니까.”
하은이 자신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고…?
“그 아이가 네 살 때, 처음 그 아이 엄마와 함께 미국으로 데려와서 연구소 시설까지 구경시켜 주고 있을 때였지.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몰라도, 어떤 연구원 한 명이 그 아이를 복제인간 배양실까지 데려갔던 거야. 그 후로 그 아인 계속 자신이 그 배양실의 유리관 속에서 자라는 꿈을 꾸곤 했다고 하더군. 물론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밤새 그 아이를 달래고 또 달래줘야 했지.”
아…! 지난번에 소교를 만났을 때 하은이가 언급했던… ‘어린 시절에 항상 꾸던 악몽’이 그런 거였나?
“카디… 카디를 이용하면 그 아이의 의심을 조금은 줄여 줄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
뭐야… 그런 이유로 카디를 만든 거였다고…? 물론 하은이 입장에서는 자신의 복제가 나타나서 ‘당신이 오리지널’이라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분명 내심 안심이 되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였나…? 하은이가 카디를 만나자마자 그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려고 했던 것은?
“하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그건 미봉책이 수밖에 없었어. 그 아이에게 악몽을 꾸게 했던 멍청한 놈처럼, 또 어떤 돌발 요인으로 비밀이 알려 질지는 알 수가 없는 거니 말이야.”
“…무슨 얘긴 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 알게 하고, 또 이런 식으로 끝내야 했던 거죠?”
다시 묻는 내 음성은 내가 생각해도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닥터 제이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유준군. 자네는… 하은이를 누구라고 생각하지? 지금의 정하은? 아니면 천년 전에 의남매를 맺었던 묘랑 진하연? 어느 쪽이지?”
“…솔직히, 저도 계속 그 아이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지금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둘은 한 사람이니까요.”
“…그래. 바로 그거야. 정하은은 진하연이고 진하연이 곧 정하은이지. 천년 전에는 묘강(苗彊)을 지배했었고, 지금은 DP의 공주로서 하운 군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여걸… 그게 그 아이의 본질이지.”
닥터 제이는 딸아이 자랑이라도 하는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한 편으로, 너무나 여리고… 항상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어리광쟁이이기도 하지. 아무리 성장해도 변하지 않을 거야, 그 아이의 그런 사랑스런 연약함은.”
역시 아버지…라는 건가?
“그 때문에, 그래서 그 아이는 지금까지의 나약한 감정을 끊고 강해져야 하는 거야. 이제부터 나와 하운군, 그리고 자네 유준군이 벌일 거대한 전쟁에는 그 아이도 어쩔 수 없이 휘말려야 하니까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하은이 손으로 당신을 죽이게 할 것까지는…”
“말했지? 그 아이는 이제부터 어설프게 기댈 곳이 있어서는 안돼. 출생의 비밀을 알 게 된 이후, 증오하면서도 사랑하는… 나라는 존재가 있어서는 갈등과 혼란이 계속 될 뿐일 거야. 그 아이 자신의 손으로 매듭을 지어야 할 필요가 있었어.”
“하지만, 당신은 또 말했잖습니까. 그 아이는 사실 너무나 약하다고!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 아이가 어떻게 살아가고, 또 어떻게 이런 전쟁에 휘말리고도 버틸 수 있겠습니까!”
“자네가… 있잖은가.”
“예?”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나처럼 뚜렷한 애증으로 혼란만 주는 존재가 아니야. 막연하고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그러면서도 너무나 밝아서 항상 뚜렷이 보이는 희망이야. 천년 전의 진하연이 쌍둥이 오빠인 진하운을 만나기 위해서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던 것처럼!”
“그… 그야 제가 그런 역할을 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야 다행이지만, 전 하은이와 그리 오래 같이 지냈던 것도 아니고…”
“사람이란 꼭 같이 지낸 기간만큼만 가까워지는 건 아니지. 자네라면 가능해. 그 아이가 한국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 친척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함께 놀아주고 돌봐 주었던…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재회했음에도 그 때와 똑같이 아껴주고… 그리고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까지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데리러 오겠다’고 해 준 진유준, 자네라면 그 아이에게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을 거야.”
나는 잠시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잊고 있던 15년 전의 기억들을 최근 하은이와 지내면서 차츰 떠올릴 수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때의 감정까지 확실하게 되살아 난 건 아니었다. 그러나 하은이는… 그 불쌍한 녀석은…
“뭐… 그래도 오해는 하지 말게.”
“…예?”
닥터 제이는 갑자기 표정이 일변하여,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정색을 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뭐, 싸구려 일식 하렘물의 설정처럼… 그러니까 자네가 하은이의 첫사랑이고, 이제는 하은이가 오직 자네만을 ‘남자로서’ 사랑하게 되었다던가… 그딴 식의 망상은 하지 말라는 거야. 하은이가 생각하는 자네는 무조건 오빠야, 오빠!”
“…”
“난 말이야. 사실 하은이가 하운군, 자네가 원판이라고 부르는 진하운 군에게도 너무 지나친 애정을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에효~ 주변에 잘난 오빠들만 있으니 그 녀석에게 브라더 콤플렉스가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뭐…야, 이 아저씨.
“암튼, 겸사겸사, 이 번 일로 하운군은 확실하게 떼어버린 셈이니까 그 쪽은 안심이지만… 앞으로는 자네도 조심해. 내 딸에게 괜히 엄한 생각했다가는 가만 안 둘 테니까 말이야.”
“에이 쒸~! 갑자기 뭔 소리예요?”
“뭔 소리는? 웃자고 한 소린데, 안 웃겼나?”
“뭐가 웃겨요, 그 딴 소리가!”
“알아, 나도!”
조금 언성을 높이던 나에게 더욱 버럭 고함을 지른 닥터 제이는 곧 쩝-하고 쓴 입맛을 다셨다.
“그게… 나도 그리 말주변이 없는 건 아니라고 자부해. 그런데 이상하게 재밌는 얘기로 분위기 쇄신하는… 그 타이밍이랄지, 그런 건 잘 못 잡겠단 말이야? 역시 이건 재능의 문제인 것 같아.”
“…타이밍도 타이밍이지만, 내용도 좀… 별로 그럴만한 주제가 아니었거든요?”
“음. 생각해 보니 그 것도 그렇군.”
순순히 인정한 닥터 제이는 가운에서 한 손을 빼서 공연히 뒷머리를 극적이며 몸을 돌렸다.
“아, 아무튼, 다른 얘기는 일단 좀 다른 곳으로 가서 커피 한 잔 하면서 계속하세.”
닥터 제이는 말실수를 한 사람이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취하는 전형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비슷한 타입이라서 알 것 같군. 심각하고 어두운 현실은… 당연히 가슴속에 담아두고 잊지는 않아야겠지만 … 계속 그 어두운 기분에 사로잡혀서 평소의 자신을 잃는 건 싫은 거야. 자신은 물론이고 함께 있는 나까지도.
“사실은… 나 지금 금방이라도 쓰러질 지경이라네. 이 신체… 현재의 상태로 육성된 후 처음으로 움직이는 거라 그런지 조종(?)하기가 쉽지 않아.”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나도 원판의 몸으로 극악서생 노릇 하느라고 오랫동안 비워 둔 본래의 몸에 처음 복귀했을 때는 움직이는 거 자체가 힘이 들었었다.
“뭐, 원래도 상당히 부실한 신체이긴 하지만…”
이 사람도 원판처럼 머리만 천재이고 몸은 좀 아니올시다 인건가?
“그래도 이 전쟁에서 내 할 일은 확실히 할 테니 걱정은 말게.”
닥터 제이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나도 그를 따라 나섰고, 우리가 한 쪽 벽의 출구 앞에 서자 출구의 금속 문이 소리도 없이 좌우로 열렸다. 소위 미로 구역처럼 정교하게 위장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육중하고 견고해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3, 40 미터 정도의 복도가 직선으로 나 있었다. 아직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면서 왠지 이 지하 비화곡의 규모가 장난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나와 나란히 복도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유’때문에 반란을 계획할 정도로 철저한 감시를 받아왔다면서 잘도 이런 곳을 비밀리에 만들어 놨다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야 뭐… 음. 근데 그 전에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말입니다. 자유를 위해 오랫동안 이런 엄청난 준비를 해가면서 전쟁을 준비하는 것보다는… 그냥 그대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나요? 혼자…”
‘혼자라면 몰라도 하은이를 생각하면 보다 안정적인 선택을 …’이라는 말은 채 이어서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닥터 제이에게서 느껴지기 시작한 살기가 너무나 섬뜩했기 때문이었다. 무공은 고사하고 보통 이하의 체력을 가진 남자가 나를 얼어붙게 하는 살기와 함께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게… 말이지. 나도 한 때는 그런 생각도 했었거든? 하지만…”
말투는 그리 변하지 않았다. 조용하고 여유가 느껴지는.
“그 때… 그 때 일이 있은 후부터 목적이 바뀌었지 뭐야. 자유에서… ‘복수’로. 포기하기 싫은 목적에서 포기할 수 없는 목적으로.”
“그게… 무슨…”
“자네 이모… 나의 시스는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