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8화 : 그냥 이대로……

랜덤 이미지

극악서생 4부 – 8화 : 그냥 이대로……


8 그냥 이대로……

라혈꼬.

라후의 혈족으로부터 받은 사과의 의미와 함께 재대결 약속에 대한 증표. 또한 내가 라후의 혈족과 동등하다는 신분증으로서 통할 거라던 그런 거였는데 우째 ‘저것’이 ‘저놈’이 되어 버렸을까?

나는 거실 바닥에 얌전히 엎드려 아버지의 쓰다듬을 받고 있는 라혈꼬를 보며 여러모로 생각을 해봤지만,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소파에 길게 누 워 TV를 보는 척을 하고 있는 나에게 몽몽이 일종의 브리핑을 시작했다.

「…주인님의 천지파멸식 발동으로 인한 과도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밀려서 확인 불가의 시공간으로 날아간 후, 역시 확인 불가의 과정을 거쳐 ‘자아’ 형성과 실체화가 진행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접했던 주인님을 혈족 혹은 주인으로 인식하여 찾아오던 중 잠시 이번 포획 장소에 머물던 것으 로 추정됩니다.」

“결국 전부 추정?”

「죄송합니다, 주인님.」

“죄송맨, 아니 죄송보이. 네가 죄송할 건 없는데. 뭐, 또 다른 추정도 있다며?”

「…코드명 라혈꼬가 라혈꼬의 본체가 있는 마계로 돌아갔었다는 추정입니다. 마계 증명 및 해명이 되지 않은 공간이나 다차원 어딘가에 존재하는 곳으로 가정하여 해당 장소에서 라후의 혈족이 직접 자신의 일부에 자아와 실체화 조건을 부여하여 주인님께 돌려보냈다는 추정으로서, 선행 추정 에 비해 타당성이 높은 추정입니다.」

“흐음. 내가 듣기에도 두 번째 얘기가 조금 더 그럴 듯하다. 저런 변신을 우연히 한다는 건 아무래도 말이 안 되는 거 같으니 말야.”

「코드명 라혈꼬는 해명 불가의 생명체로부터 분리된 존재이며 1차 형태시에도 주인님께 가해진 공격에 반응한 사례가 있으므로 첫 번째 추정 또 한 불가능한 추정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어, 그건 또 그러네? 하지만 뭐 진상이야 어쨌든 나중에 라후의 혈족 삼형제를 만나면 알게 되겠지. 그보다 당장 문제는… 저 녀석의 장난 아닌 마력을 과연 재단에서 만들어준 저 봉인만으로 완전히 막을 수 있느냐 하는 거야.”

라혈꼬는 현재 흔한 개목거리 같은 걸 하고 있는데, 저게 바로 재단에서 특별 제작해 준 마력봉인 아이템이다.

「현재까지, 소량의 에너지 누출이 감지되기도 하나. 주변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으으음. 그럼 일단은 믿기로 하자.

하지만 아무리 힘을 봉인했다고 해도 과연 마계의 늑대 녀석을 저렇게 진짜 애완동물처럼 집에서 키워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마계는 고사하고 인 간계의 야생도 아닌 놈처럼 엄청순하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것 같으니 당장은 문제 될 건덕지가 보이지 않기는 한데 말야.

「주인님.」

돌아보니 소파 옆의 부엌 입구쯤에 어머니께서 팔짱을 낀 자세로 서 계셨다. 라혈꼬와 녀석을 예뻐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 어 머니.

“…저건 이름이 뭐냐?”

“라, 어… 라… 라프요.”

“뭐?”

“라프! 라프라고요!”

「와아- 주인님 또 즉흥적으로 이상한 이름 붙였다! 라혈꼬가 불쌍해에~!」

요몽 이 녀석, 좀 있다 보자.

“집안에 강아지 늑대 새낀지를 들이고… 하여간 이제 아들, 네가 누구든, 뭐든 집안에 데리고 와도 놀라지 않을 거 같다.”

“죄송해요.”

“알면 됐다만… 담에는 미리 얘기 좀 해다오. 마음의 대비 좀 하게.”

“예. 꼭 그럴게요. 죄송해요.”

에고. 아무래도 결국 살짝 삐치신 거 같다. 얼마간은 대교와 애교 연합전선이라도 좀 펴야겠는걸………? 그리고 이제 진짜 더 이상은 예고 없이 쳐들 어올 만한 놈 없겠지?

그러고 보면 삐치실 만도 하다. 우선 처음의 금동이는 맛배기였었던 셈이다. 지난번에는 본의 아니게 하은이의 쌍둥이 형제 원판을 말도 없이 데려 왔었고(?), 그 직후 뜬금없이 신부감 등장…………! 대교를 받아들이기로 하시자마자 우르르~ 대교의 동생들이 들어와서 인사를 드렸었다.

뭐… 전부터 집안에 있던 아이들이 며느리감의 동생들이라니 당근 놀라실 수밖에 없었지.

그 중 처음 보는 소교가 금동이를 안고 오질 않나…………! 전부 대충 이런저런 변명으로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하여간 나도 참………! 다른 일은 나름 꼼꼼하게 챙겼으면서 부모님께는 소홀했단 말야………? 반성해야지. 암. 반성하자, 불량아들 진유준!

「그런데 주인님.」

“왜, 요몽.”

「라혈꼬, 아니 라프에게 지어 준 이름은 혹시… 라후의 혈족의 늑대 울프, 여기서 처음과 끝을 빼서 붙인 거예요?」

“알면서 왜 물어.”

「우에ᅳ 내 이럴 줄 알았어! 주인님은 다 좋은데 작명에 너무 성의가 없다구요. 그나마 다른 이름보단 좀 나은 편이지만……………」

한소리 하려던 나는 ‘나은 편’이라는 말에 혹하고 말았다.

“좀・・・ 낫다고?”

「예. 뭐・・・ 몽몽이나 요몽보단 천만 배쯤 낫죠.」

“짜식~ 결국 니들 이름이 불만이란 얘기였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님. 저는 현재의 코드명이 좋습니다.」

「에에ᅳ 그건 몽몽 오빠나 그렇지, 난 아니라구.」

“그럼 넌 개명이 하고 싶단 얘기냐? 원하는 이름이라도 있어?”

「있기는 있었는데 지금은 포기했어요. 예쁜 이름이 저처럼 하찮은 요정에게 어디 가당키나 하겠어요?」

이 녀석, 이름에 대해서는 확실히 삐쳐 있었군.

“…알았다. 곧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마.”

「어? 진짜요?」

“그래, 난 어차피 믿을 수 없을 테니 대교에게 얘기해서 지어 줄께.”

「와아~ 만세! 우리 완소 주인님 킹왕짱!」

으음. 이 녀석이 종종 섞어 쓰는 용어들은 아무래도 인터넷 은어나 유행어 같은데. 나도 유행에 뒤지지 않으려면 신경 좀 써야 하려나?

곧 복학해서 애들 하고도 어울려야 하고… 하다못해 요몽이나 패티 였던가? 그 녀석은 하도 안 나와서 이름도 헷갈리네. 하여간 두 녀석들이 쓰 는 용어도 잘 모를 정도면 곤란.. 음? 뭐지? 어째 내가 뭔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는 듯한 데……………? 어… 뭐였더라………? …아, 그때 그거…………! 그런 일도 있었지?

“야, 요몽.”

「예이- 요몽 대령이옵니다.」

“짜식이 까불기는. 암튼 너… 전에 누군가에게 ‘복수한다고 했었지? 난 허락했었고 말야.”

「맞아요. 잊지 않으셨네요?」

“뭐, 그때는 소교를 구출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정신없어서 대충 넘어갔었는데 뭐랬더라? 너하고 패티가 만든 사이트에 악플러가 많았다고 했던가?”

「예, 맞아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본래는 녀석들의 사이트에 악플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대교의 팬 사이트로 시작되었으나 날이 갈수록 운영자인 요몽과 패티 본인공지능들의 인 기가 높아져서 결국 점점 지들 팬들의 공간이 되어 갔다나?

그러다가 패티가 한 가지 실수 아닌 실수를 했는데… 누군가가 올린 ‘어떤 노래를 좋아하세요. 그룹 ○○의 XX, XX 같은 노래 어때요?’라는 글 에 ‘들어 본 적이 없는 노래 라서 잘 모르겠고, 제가 현재 좋아하는 노래는………….’ 정도의 답글을 달았었다는 것이다.

「…근데 그게 바로 그 00라는 5인조 그룹 멤버 중의 한 명이 직접 올렸던 글이었지 뭐예요? 그리고 지가 올렸던 글과 패티의 답변을 함께 지 ‘싸 다 월드’의 미니 홈피에 올려버렸어요. 저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개떼처럼 몰려든 그 녀석 팬클럽 멤버 오크들이 악플로 도배를 하 는 바람에 패티는 상처를 받아서 울기만 하고…

으음. 확실히 요즘 인터넷 분위기는 장난이 아닌 모양이군.

“그래서 어떻게 복수를 했냐?”

「그야 당근, 쳐들어 온 오크들이 온라인상에 가지고 있는 모든 관련 장소, 홈페이지며 메일 계정이며 싸그리 박살을 냈지요. 그 못된 것들의 집에 있는 PC에도 제가 만든 바이러스들을 집어넣었어요. 로우 포맷을 한다 해도 1시간 안에 부활하여 다시 깽판을 부리는 녀석들이죠.」

“접속했던 애들 전원의 전부를?”

「그럼요. 저에게 그런 건 일도 아니지요.」

“하긴. 음. 그럼 복수는 그 정도에서……….”

「그럴 리가요! 오크들 본부 격인 팬 사이트도 가만 놔둘 수 없었지요. 거기 멤버들 전부가 악플러는 아니지만, 연대 책임이란 것도 있고 근본적으 로 성향이 비슷하므로 거기도 계정 자체를 없애 버렸어요.」

“뭐. 기우리는 건 알지만, 걸려서 추적당할 일은 없겠지?”

「호홍~ 절대로, 눈곱만큼, 코딱지만큼도 없지요.」

“…잘했다.”

「와이- 정말요? 정말 칭찬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 전에 내가 너에게 많은 제한을 두었던 건 네가 너무 철없는 짓을 할까 봐였어. 하지만 너도 이제 많이 컸으니 앞으로는 좀 믿어 보기로 했 “다.”

「역시 주인님이 최고! 대인배!」

“근데 그게 끝이냐?”

「예?」

“내가 보기에는 처음에 글을 올렸던 녀석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 그놈도 지 팬클럽의 성향을 잘 알 텐데 그런 글을 공개했다는건 ‘한번 엿먹어 봐 라’는 거 아냐?”

「와우~ 역시 우리 주인님! 이건 진짜 혼날까 봐 어떻게 말해야 하나 했는데…

호오- 이번엔 좀 쎈건가 보지? 솔직히 앞에서 들은 얘기들은 내가 보기에 별로 복수 같지도 않았는데 말야.

「전부 보내 버릴 거예요, 군대에」

“응? 뭐?”

「지들끼리 대화한 기록을 보면 그룹 멤버 전부 다 똑같은 것들이에요. 어떤 녀석은 한국 사람이면서 ‘일본은 내 나라’, 그딴 소리나 하고! 그래서 전부 보내 버리기로 했어요. 군대, 그것

도 전부 주인님 같은 특공대!」

“…가능은 하나?”

「그럼요. 소속사에 비리가 얼마나 많다고요. 국방부에 미리 손 쓴 데이터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었고요.」

신나게 떠들어대던 요동은 문득 수다를 멈추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역시 내가 과연 어떻게 나을지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건 안되겠다.”

「히잉~ 주인니임 그것들 정말 나쁘단 말예요. 저희들이 인간에게 해꼬지 하는 거 싫어하신다는 건 알지만………….」

“그게 아니고, 그런 애들이 내 후배가 되는 게 싫다. 해병대 보내. 해병대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말야. 그리고 연예사병? 부대장 딱가리? 여하간의 편한 보직? 그딴 거 없다. 할 수 있지?”

요몽은 더 이상 호들갑스럽게 주인님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면서도 씩씩한 자세로 내게 경례를 붙였을 뿐이었다. 요몽은 즉각 내 명령 을 반영하려는 듯 사라졌다.

앞으로 몇 년 후에 철없는 연예인 몇 명이 사람이 되어 나오거나, 도중에 탈영했다는 뉴스를 보게 되거나… 뭐, 둘 중 하나겠군. 나는 방금 요몽에 게 한 시시한 명령 같은 건 잊어버리기로 하고, 좀더 편안하게 자세를 잡았다.

“몽몽. 영화표는 예약해 놨겠지?”

「예, 주인님. 커플석으로 확보했습니다.

“유람선은?”

「영화 종영 후, 한강의 해당 포인트까지의 이동시간을 감안하여 예약을 맞추었습니다.」

“땡쓰- 몽몽.”

「별말씀을.」

몇 가지 사소한(?)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불과 십여 일 전까지 연이어 벌어졌었던 사투들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편안하고 느긋한 요즘이다. 천년 측백나무 앞에서 대교에게 했던 약속을 잊은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잠시만 더 이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그건 지금 점심 준비를 위해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며 어머니와 즐거운 수다를 떨고 있는, 그리고 식사 후에 가질 나와 둘만의 데이트 시간을 기대하고 있는 대교도 마찬기지일 것이다.

이건 우리가 목숨을 걸고 얻어낸 작은 성과이니 말이다.

영화 감상 후 한강에서 유람선 타기… 그야말로 전형적이고 평범한 데이트 코스였다. 하지만 대교는 집을 나서기 전부터 살짝 들떠 있는 것 같더니 만 영화관까지 가는 내내, 영화 보는 동안 내내, 다시 한강으로 향하는 차안에서도 내내⋯ 줄곧 행복해 했다. 물론…………

「아아~ 낸시(우리가 본 멜로 영화의 조연이름)가 너무 불쌍해요. 낸시 지못미~」

이렇게 아무 때고 눈치 없이 끼어드는 녀석도 있기는 했다. 요몽의 ‘지못미’라는 말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인터넷식(?) 줄임 말이라나? 그리 고……

「주인님. 지속적인 탐문 결과, 극장의 팝콘 코너에서 새치기를 한 남자가 대교님의 0.1 성 공력의 섬광분소지에 격증된 일의 목격자는 없는 것으 로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약 8분 20초 전 주인님의 차 앞으로 신호도 없이 위험하고 무례하게 끼어들기를 했던 차랑은 현재 천음마군이 확보, 운전 자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분위기 깨는 보고를 하는 녀석도 있었다. 천음마군은 아마도 아까 잠깐 검색해 본 인터넷에서 발견한 스타(?) ‘싱하’의 ‘형 왔다, ‘조낸 맞는 거다’ 놀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야, 야. 다들 적당히 하라고 해. 그리고 너희들도 좀… 그러니까, 니들은 우리가 뭐 하러 나온 건지 알기는 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주인님, 주인님과 대교님 안전에 영향을 미칠 사항 체크 및 보고를 제외한, 모든 접촉 루트를 임사 차단하겠습니다.

「히잉 잘못했어요. 함부로 안 끼어들 테니까 따돌리지 말아 주세요오.」

“훗. 이제야 좀 우리 둘 만의 기분을 좀 더 느낄 수 있으려나?”

“전 별로 상관없는데………….”

“정말?”

“…아뇨. 솔직히 말하면 저도 ‘우리 둘만의 시간’이 더 좋기는 해요.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걸요.” 아아- 듣기 좋은 꽃노래도 자꾸 들으면 싫증이 나는 법인데, 어째서 대교의 달콤한 말에는 이렇게 항상 처음 듣는 것처럼 설레는걸까…? 역 시. 이것이 콩깍지의 위력?

“후후 게다가 우린 아직 절대 둘만일 수가 없잖아요.”

대교는 자기 무릎 위의 새끼 늑대 라프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 라프 녀석도 은근히 웃기는 것이, 누구의 손길도 거부하지 않고 잘 따르면서도 절 대 내 주위에서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자신이 나의 신분증(?)이란 걸 아는 것 같았다.

“아, 저것이 한강?”

차창 밖으로 유유히 흐르며 자태를 드러낸 한강은… 사실 나로서는 허구헌날 보던 녀석에 불과했지만 대교는 연신 감탄하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느낌이 뭔가 달라요. 대하(大河)의 광활하면서도 쓸쓸한 풍경과 달리 왠지 포근하게 사람의 마음을 감싸주는 듯해요.”

으음. 대교가 그렇다니까 내 눈에도 어째 그리 보이는 것 같기도하네.

대교가 왠지 포근해 보인다고 했던 한강은, 사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훵- 휭- 몰아치는 차고 매서운 강바람은 말이다. 하지만 대교는 유 람선에 올라서도 선실에 들어갈 생각도 않고 이 모진 강바람마저 무시하고 강변의 야경을 즐기고 있다.

“…안 춥니?”

슬쩍 묻자 고개를 젓고는 나와 팔짱을 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머리를 기대왔을 뿐이었다.

“영혼인 상태로 이곳을 지나갈 때는 다른 연인들이 부러웠을 뿐이지만 지금은 이렇게 당신과 함께 서울의 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얘기할 수 9104…….”

정말 아름다운 것은 한강의 아스라한 물결이 유람선에 부딪쳐 일으키는 물보라의 다채로운 무늬도, 인공의 불빛이 점점이 흩뿌려진 보석으로 변신 해 버린 서울의 야경도 아닌 추위로 인해 파리해진 너의 얼굴이 그리는 고운 선이라는 것을. 넌 내가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 7?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대교의 입술을 찾았고 대교 또한 기쁘게 화답했다. 우리의 키스는 그 전처럼 격렬하지도 않았고 절절한 안타까움에 떨리 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잔잔하며 따뜻한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소중한 의식이었다.

한강 위를 유유히 가로질러 거닐었던 유람선은 우리의 마음처럼 처음의 장소로 다시 되돌아왔고, 우린 손을 맞잡고 내려 강변을 우리의 발로 걷기 시작했다.

새깽이 늑대 라프는 대교가 땅에 내려놓자 지가 알아서 우리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아직은 추운 계절의 밤이라 오가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 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지런하고 성실한 주인이 운영하는 듯 불이 켜져 있는 간이매점에서 컵라면을 살 수가 있었다.

변장을 위해서 쓴 커다란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후후- 입김을 불어 가며 뜨거운 컵라면 국물에 열광하는(?) 대교의 모습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지난 1일 한강에 투신했던 김모 씨의 시신이 아직도………….”

쯧. 매점 안의 TV 소리가 조금 분위기를 깨는군. 하긴, 세상 모든 것이 다 우리 분위기에 협조적일 수는 없겠지………..?

“TV 꺼라. 밥 먹자.”

매점 안쪽에서 매점 주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슬쩍 안쪽을 보니 눈매가 좀 날카롭고 험악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수하고 사람 좋은 인상도 풍기는 중년 남자와 그의 아들 인 듯한 꼬마가 작은 밥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열심히 맛나게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음. 방 한 쪽에 엽총이 놓여져 있는 게 좀 그렇지만… 본래 어두운 한강변은 우범지대니까 현명한 대비를 하고 있는 것 같군.

“왜 웃으세요?”

대교는 내 웃음이 자신의 입가에 묻은 라면 국물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휴지를 꺼내들고 있었다.

“아냐, 문득 예전에… 지금보다 더 어리고 철없던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이 한강 둔치에 몰려와서 놀던 생각이 나서 그래.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술 마시고 신나게 떠들어댔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상당히 민폐였던 것 같아. 위협을 느끼고 피해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말야.”

“후후 누구나 그런 때가 있었겠지요. 저도… 음……”

“에? 대교 너도 그런 적이 있다고?”

“상황은 좀 틀리지만… 술에 취해 약간의 실수를 한 적이 있었어요.”

이런, 이런… 우리 대교에게 그런 충격적이고 경악할 만한(?) 과거가 있었단 말인가?

“당신께서 혼자 떠나신 후… 애써 격동을 누르며 당신을 찾아 갈 준비를 시작했을 무렵이었어요. 하루는 견디지 못하고 술에 의존해 잠시의 평안 을 찾으려 한…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한 적이 있었죠.”

…과연, 소령이처럼 비화곡 시절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군.

“사실은 술동이를 두 개째 비운 이후로는 잘 생각이 나질 않아요. 아침에 눈을 떠보니 술을 마시던 객잔이 아니라 처음 보는 산 속이어서 무척 당황 했었어요.”

이거, 이거… 우리 대교도 만만치 않은걸?

“더구나 완전히 폐허가 된 산간 마을 한 가운데 같아서 더 놀랐는데…”

응?

“천우신님 말씀으로는 객잔에서 저를 희롱하려던 남자가 있었다고 해요. 그는 인근 산을 지배하던 산적 패의 두목이었다고 하더군요.”

산적 두목이 술 취한 대교에게 집적댔다가 그놈 자신은 물론 웬만한 마을 규모로 큰 산채까지 어떤 재앙을 당했는지… 안 봐도 비디오군.

“그래서 그 후로는 술을 끊었지요. 아, 주가혜로 있을 때는 조금 마신 적이 있었네요.”

“음・・・ 그럼 우리, 오늘은 같이 한 잔 할까? 아직 재회 축하 파티조차 못 했는데 말야.”

그랬다. 지금까지 대교는 오직 우리 부모님의 눈에 들기 위해 한 점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거의 항상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었다. 오죽했으면 오늘 아침에는 어머니가 먼저 아들, 이 무심한 놈아. 오늘은 무조건 대교를 데리고 놀러 나가라’고 종용하셨을까.

“후후- 좋아요. 조금만, 저 다리 아래까지만 더 산책한 다음에 당신께서 자주 가시던 곳에 데려가줘요.”

이거 내가 자주 가던 곳은 대부분 허름찬란한 술집이나 포장마차밖에 없는데 대교를 그런 곳에 데려가야 하나……..?

역시 몽몽에게 분위기 클래식하고 멜라꼬리한 A급 장소를 물색해서 예약을 하도록 하는 편이. 으음. 근데 대교가 과연 그런 곳을 마음에 들어 할 까…………? 굳이 ‘진유준이 란 남자가 자주 가던 곳을 지목한 걸 보면 그런 쪽에 의미를 둔 것 같은데 말야.

내가 갈등하는 사이, 어느 결에 우린 대교가 말한 다리 아래에 도착해 있었다. 어두운 밤이지만 당연히 다리 밑은 더 깜깜하여 검은 커튼이 드리워 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음・・・ 대교. 우심뽀까?”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라는 말 줄임의 고전 명작(?).

“아이 참! 그 말은 알아요. 비화곡에서 쓰신 적 있잖아요.”

새삼 내숭을 떨며 내 가슴을 살짝 때리는 대교의 팔을 잡았다. 꽤 먼 어디선가로부터 약간의 이상한 감각이 전해져왔지만 무시하고 대교를 끌어당 겼다. 다시 꿈처럼 달콤한 시간이 시작되었……….

「주인님!」

“아!”

이런 빌어먹을! 어떤 쌍썅바같은 씨빠빠가 방해를 윽! 저거 뭐야?

내가 조금 전에 느꼈던 이상한 감각이란 ‘위기감’이었던 모양이다. 건너편으로 길게 이어진 한강 다리 밑의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휘릭~ 척! 휙- 척! 휘리릭- 척!

대략 거대한 트럭 크기의 ‘무언가’는 잘도 곡예를 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다리 밑의 구조물을 이용해서 이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암전하게 앉아 있던 라프가 일어나 작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르~ 소리를 냈다.

휘이 푸아아아~!

어느 정도 근접하자 물 속에 뛰어든다…………? 공격 및 사냥 준비?

나는 등 뒤의 새로운 가죽 칼집 뚜껑의 단추를 열었다. 전에는 정글도에 천을 대충 말아서 가지고 다니거나 금동이에게 운송을 맡겼었지만, 이젠 그러지 못하게 되었기에 며칠 전 대교와 ‘커플 칼집'(?)을 맞추었었다.

대교도 이미 칼집을 열고 그 안의 청명검을 잡고 있었군. 쯧.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주인님!」

몽몽의 경고 직후, 바로 코앞의 한강 물이 푸악- 솟구치며 거대한 무언가가 날아올랐다. 사방으로 벌려지는 흉측하고 커다란 입에 뱀처럼 긴 혀…………

번득!

청명검의 서늘한 광채가 어둠과 괴 생명체를 함께 베어 버렸다. 내가 놈의 형상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전이었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우리 앞에 떨어진 정체불명의 방해꾼은 조금 움찔움찔 하다가 이내 추욱 늘어진다. 웬 놈인지 몰라도 몸이 거의 반쪽이 나고 도 살 수 있는 놈은 못되는 모양이었다.

사실 우리 대교 마마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비화곡의 3대 금역(禁域) 중의 하나인 한룡소(桿龍沼)에 살면서 성지로 통하는 비밀루트를 지키던 ‘이무기’를 사투 끝에 제압하여 그 내단(丹)을 꿀꺽한 바가 있다.

지금은 그때보다 몇 배 더 강해진 상태이니 이렇게 이무기의 절반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 녀석은 한 주먹, 아니 한 칼 거리도 못되는 것이다.

“…서울의 한강에는 특이한 짐승이 사네요.”

“저기, 대교야. 한강에는 원래 저 딴 거 없었어.”

“어멋! 그래요? 그럼 제가 실수를… 희귀보호종 같은 걸 죽여 버린 건가요?”

“아냐, 대교. 저런 건 그냥 ‘괴물’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렇다면…….”

대교는 자기가 죽여 놓고도 징그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청명검을 들고 괴물의 시체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왜? 그거 확실히 죽은 거 같은데?”

“아뇨. 혹시 당신께 도움이 될 만한・・・ 내단이 있을까 해서요.”

「해당 괴생물체는 몇 가지 성분의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선택적 세포의 불특정 특이 확장 반응에 의해 거대화한 경우로 추정되며, 본래의 개체를 밝히려면 샘플 채취 후 역순의 분석에 7분 39초가 소요될 가능이 78%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스캔으로도 대교님이 찾는 고도 에너지 농축체, 내 단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돌연변이 괴물이래. 이무기처럼 오래 묵은 녀석이 아니니까 내단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대교는 매우 실망하는 표정이 되어 물러섰고, 나는 그런 대교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가자, 대교. 갑자기 회나 골뱅이가 땡긴다.”

정체불명 괴물의(그래도 일단은 물고기가 기반인 것으로 추정 되는) 사체를 보고도 회나 골뱅이가 땡긴다고 한 건 반쯤 진심이었다.

하지만 대교가 원하는 건 ‘내 단골집’ 이었고, 당시의 나와 친구들이 횟집을 들락거릴 수 있을 정도의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또 있는 것 이… 내가 여기 한강 둔치에서 술을 마실 때는 거의 물가에서 난장 까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정말 그때처럼 매점에서 소주 몇 병 사다가 잔디밭에 앉아… 대교에게 소주 병나발 불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해서 고민이었는 데… 으음. 이게 소주 병나발에 새우깡 안주 보다는 나은 거긴 하지만 그래도 대교에게는 상당히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네, 그려.

나는 길거리 포장마차, 그것도 좌판(?) 앞에 긴 나무 의자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인 작고 보잘것없는 포장마차에 대교를 데려 온 현실에 대해서 착잡 한 죄책감마저 느껴야 했다.

“대교야. 역시 우리 다른 멋진 곳에 가서…………….”

“예?”

눈앞에 진열된 여러 가지 안주거리를 보고 있던 대교는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본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 우리 대교는 침 삼키는 소리까지 왜 이렇게 이쁜지 몰라…가 아니라! 이거, 생각보다 그리 싫어하는 눈치가 아닌데……………? 오히려 이 구수한 왕새우나 기타 여러 가지 안주 굽는 냄새에 상당히 집착하는 듯한 듯한 왕새우? 오오- 내가 왜 잊고 있었지? 당시에는 너 무 비싸서 엄두도 못 냈었던 레어 안주 아이템 왕새우!

꼴깍!

나 역시 본능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저씨! 여기 왕새우 소금구이 2인분. 아니 4인 분! 아… 아 참. 대교 넌?”

“저도 새우요리률 너무 너무 좋아해요!”

역시 우리는 이심전심 염장신공의 커플!

잠시 후 우리는 서민들의 친구 소주, 아니 왠지 쐬주라고 해야 더 감이 오는 녀석을 서로의 잔에 채웠다.

“우리의 재회와 미래를 위하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챙- 잔을 부딪치고 원샷~!

크허~ 좋다.

이 알싸한 소주 맛도 오랜만이고, 이토록 기분 좋은 건배도 오랜만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천년만의 자리인 것이다.

“우후~ 독하네요.”

“에이-너 술 쌘거 다 아는데 뭘 그래.”

“긴 세월을 격해서 처음 마시는 거라 그런지 좀…….”

그러면서도 내가 술병을 내미니 냉큼 잔을 드는군.

“아… 비취각 뒤의 샘처럼 맑고 투명해서 이 예쁜 잔과 너무 잘 어울려요.”

대교 앤 뭐든 긍정적이고 감성적이라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같은 경우는단 한번도 소주잔 디자인을 신경 써 본적이 없을뿐더러, ‘술자리에서 쌈나면 대부분 술병 깰 생각부터 하는데 요걸 바로 던지면 꽤 효율적인 기습이 될 수 있을지도……’ 같은 생각만 몇 번 한 적이 있을 뿐이니 말이다. “고마워요.”

“에? 뭐가?”

“이렇게… 당신이 좋아하는 장소를 함께 누릴 수 있게 해주어서요.”

“…야 인마! 넌 무슨 애가 이렇게 욕심이 없냐? 넌 좀더 멋진 곳에서 우아하게 엇!”

대교가 갑자기 내 입까지 바싹 새우 한 마리를 들이대는 바람에 말을 멈추고 일단 받아먹어야 했다.

음음. 쩝짭.

“맛있죠?”

“음. 죽여.”

“좋죠?”

“당근.”

“그러니까… 저도 여기가 좋아요.”

…쳇. 앤 왜 맨날 뭔 말을 못하게 하냐?

나는 속절없이 더 이상의 딴 말을 하지 못하고, 연이어 대교와 건배를 거듭했다. 나나 대교나 지금은 아무리 먹고 마셔도 모자랄 것만 같았다.

・맛있다. 정말 더럽게 행복하게 맛있다. 평생 이렇게 맛있는 술과 안주는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었어!

“씨Bal! 눈꼴시어서 못 보겠네! 우린 추워 죽겠는데 옆에서 아주 선풍기를 강풍으로 트는구나, 틀어.”

…뭐시여. 이 눈물나게 좋은 분위기를 깨는 사운드는?

돌아보니, 롱 의자의 반대편 끝에 앉아서 역시 소주를 까고 있던 두 명의 청년 중 한 명이 내뱉은 소리였다. 이미 불쾌해진 얼굴로 씩씩대기까지 하 는 모습에서 상당히 취한 기색이 역력했다.

으음. 괘씸하기는 하지만, 솔로부대 앞에서의 염장질은 다소 미안하기도 한데… 어? 대교?

대교의 얼굴은 이미 발갛게 달아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싸- 한 냉기를 뿜고 있었다.

“우릴 방해하실 건가요?”

헛. 칼집을 열고 있다.

“대교야. 참아.”

난 다급하게 대교의 손과 칼집을 함께 잡고 막아야 했다. 뭔가 입장이 바뀐 것 같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죄송해요. 저.. 약간 취한 것 같기도………….”

“엠병! 아주 골고루 하는구나! 이거 애인 없는 사람들은 서러워서 살겠나!”

너무나 전형적인 시비조 대사를 치는 솔로부대원들.

“씨8! 누군 저런…….”

쩡!

용감, 아니 무모했던 솔로부대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대교가 날린 나무젓가락이 그들이 마시던 소주병을 꿰뚫고 꽂혀 버린 것 이다.

“저, 뭐, 이, 이게 뭔…………….”

간신히 입을 떼기 시작한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포장마차 주인이 쓰는 식칼이 대교의 손에 들려 있는 모습이었다. 대교의 서늘한 눈빛과 칼날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창백한 기운을 저들도 보았을까………?

“튀! 튀어!”

말과 동시에 와장창- 소리를 내며 일어나 후다닥 튀어 버리는… 불쌍하고 가여운 우리 솔로부대원들의 뒷모습이 내 가슴마저 아프게 했다.

“어? 계산은? 야! 거기 안 서?”

잠깐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는 모양이던 주인 아저씨가 녀석들의 뒤를 쫓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교.”

“죄송…해요. 제가 약간 그만・・・ 흥분을………….”

한 손이 내게 잡히자 다른 손으로 젓가락을 날리고 능공섭물(緩空攝物)을 펼쳐 포장마차 안쪽의 식칼을 끌어오기까지 했던 대교는, 다시 식칼을 제 자리로 돌려보냈다.

“아니, 뭐. 니가 안 그랬으면 내가 나서서 녀석들을 쫓아냈겠지. 근데 그렇다고는 해도……….”

“우음・・・ 이런 시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뭔가 사고를 치고 야단맞는 것을 대비해 미리 애교를 떠는 고양이 모드로 들어간 대교가 내 팔에 자기 이마를 부비부비 하고 있었다.

고양이 모드는 미령이 건데… 훗.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대교의 본래 주량이 아무리 높다 해도, 보통 오랜만에 마시는 술에는 더 쉽게 취하 는 법인데… 내가 암 생각 없이 너무 빨리 술을 마시게 한 모양이네. 게다가 난 가끔 잊어버린단 말야…………? 우리 대교의 정체(?) 를!

나에게는 천사 대교지만, 대교가 가진 두 개의 별호에 전부 ‘마(魔)’자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의 의미는 크다.

천하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종주이자 성지 비화곡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천하 마인들로부터 마중제일녀라 추앙 받던… 조폭 마누라를 넘어 ‘조폭 여제’ 급의 무서운 소녀가 바로 대교인 것이다.

내 영향을 받아서 꽤 신경 쓰고 조심하게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삘 받으면 손속에 사정을 둘 리가 없지. 아까 그 친구들, 내가 지들 생명의 은인이 라는 걸 알기는 할려나?

조금 더 깊어진 밤.

우린 포장마차를 떠나, 다시 천천히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나오기 전에 몇 잔 더 마시기는 했지만 내력으로 취기를 조절하기 시작했는지 대교의 발걸음은 비교적 바르고 가벼웠다.

“…안 춥니?”

공연히 다시 물었지만 역시 곱게 고개를 젓는다. 우린 목적지도 없이 걸으며 간간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시선을 맞추고 싱겁게 웃음을 교환했 을 뿐, 계속 별다른 말도 없이 그냥 걷기만 했다.

아직은 차가운 겨울의 끝자락이 불어대는 바람도 이제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도 멀어져 갔으며, 무수한 아파트 단 지의 불빛들도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마치 우리 둘만이… 무한히 펼쳐진 공간 속에 우리 둘만이 존재하는 듯한… 이런 느낌… 이런 기분이 그냥 이대로 언제까지나 계속 될 수 있다 면 얼마나 좋을…..

「…주인님!」

“그래. 내 이럴 줄 알았다.”

「예? 아직 보고를 드리지 않았는데…

“에효. 내 팔자에 뭔 영원한 평화와 행복이겠어. 또 뭔 큰일 난 거지?”

“곡, 아니 유준 오라버니의 팔자가 나쁘면 곤란해요. 유준 오라버니 팔자가 대교 팔자인 걸요?”

“어, 그런가? 미안. 내가 너무 부정적인 표현을 했다.”

「주인님하고 대교니임

~

염장신공의 극의를 이루는 것도 좋지만요. 이제 그만 귀가 하여야지요. 벌써 자정이 다되어 간다구요.」

“뭐? 니들 설마 그 말하려고 방해한 거냐?”

「그건 아니고요. 몽몽 오라버니이~」

요몽 이 녀석. 괜히 벌써 통제를 풀어줬나?

「죄송합니다, 주인님. 요몽이 언행에 좀더 주의하도록 교육을……………」

“지금은 됐고. 대체 뭔 일이냐?”

「우려하셨던 ‘블랙 제수이트’, 검은 예수회의 핵심멤버들이 약 2시간 10분 전 인천공항에 도착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철저하게 위장된 신분을 이용했기에 확인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짜증나는 광신도들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나?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다고는 해도 독립적인 조직이니 그럴 만도 한데……

「…또한, 닥터 제이로부터 12인의 사도 직속 암살조직 에레보스(Erebos, 어둠. 암흑.)도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어쩌면 이미 한국에 잠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연락이 와 있습니다.」

얼씨구~ 아주 경사났네. 경사났어~.

“가야겠지?”

“…예.”

응? 어째 또 조폭 여제 모드로 들어간 것 같은데? 아까처럼 데이트를 방해받아서 그런가?

“제가 저 자신을 죽이고… 그럼으로써 당신께 상처를 주고… 그렇게 간신히 얻은 지금의 시간을 이렇게 빨리… 감히 희롱하러 오는 자들이 있다 는 사실이 … 화가 나요.”

설사 내가 내공을 잃은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이번 놈들과의 싸움은 대교 위주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거야 어쨌든…………… “됐어, 대교, 화내지 말고 웃어. 함께 웃자.”

“아…….”

“우리가 열 받고 인상을 긁어 봐야, 우리 손해지. 누구 좋으라고! 안그래?”

“후후 그러네요.”

우린 다시 마주 웃으며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함께하는 공공보법의 발동과 동시에 우리의 신형은 밤하늘을 가르고 날기 시작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