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12화 : 만나야 할 이유
2. 만나야 할 이유
어찌 보면… 사건의 규모와 위험성에 비해 비교적 간단히 끝나버린 셈이었다.
“몽몽. 놈들이 올리던 실시간 동영상은 잘 차단한 거지?”
-그렇습니다, 주인님.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처음부터 그들은 이미 폐쇄된 공간 속에서 제가 조작한 가짜 조회 수와 댓글을 보고 있었을 뿐 입니다.
역시 넷상의 먼치킨 몽몽 선생…! 자,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겉으로 보기엔 아직 평온해 보일 뿐인 저 예비 장인어른이로군.
우리 일행은 모두 아직 예향원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고, 그 중에서도 나와 대교, 사영… 이렇게 세 사람은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예향원에서 대접 해 주는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대교로부터 그간 있었던 믿기 어려울 사연들의 대략적인 얘기를 들으면서도 사영의 표정은 그리 큰 변동폭을 보이지 않았다.
“…과연, 일이 그리 되었던 거라면 대교의 현재 모습도 이해가 되는군.”
정말 이해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는 척을 하는 건지 몰라도 일단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자그마치 천년에 걸친… 이런 황당한 얘기가 진실이라면… 말이야.”
음. 역시 단번에 믿으라고 하는 것도 좀 무리기는 하지….
“헌데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얘기라도 믿을 수밖에 없겠군. 대교도, 소교도… 나의 딸들은 내게 거짓말을 할 줄 모르니까. 게다가….”
사영은 문득 작게 웃으며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난 늘 기적을, 이 세상에는 기적이란 것이 있다고 믿고 있었거든.”
“아버지…………….”
“믿지 않을 수 없었지.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는 그 사실이 기적이며 신비로움 자체였었으니 말이야.”
…돌아가신 대교의 어머니, 나의 장모님. 그분 얘기인 모양이다.
“흐음ᅳ 그렇다면 저 아이들도…..”
소령이와 미령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예향린의 어린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중이었다.
“이거 참. 마녀 때문에 소교를 잃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런 우려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밤의 보상인가? 오히려 두 딸아이가 더 생겨 버렸군.” 사영의 입가에 진심으로 흐뭇해하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사영은 한동안 소미령이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려오는 사영의 표정에는 역시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난 왠지 은근히 섬뜩한 느낌을 받아야했다.
“대교가 현재의 모습이 되기 전의 내 딸… 가혜의 육체는?”
에구. 대교의 꼼꼼함은 이 양반 닮은 거였나 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만… 윽!”
쩡!
저런 자세에서 잘도 이런 스피드의 발검을 해버리네. 게다가 강렬한 타격음으로 보아 대교가 재빨리 눈치까고 막아주지 않았으면 x됐을 거다.
“으음. 아깝군.”
“아버지! 대체 무슨 짓이세요!”
“애비 된 입장으로 딸아이를 제대로 지켜내지도 못한 녀석을 어찌 곱게 볼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해도 이리 불시에 살수를 쓰시면…”
“뭐, 안 죽었으면 됐지.”
아아- 싫다, 싫어. 나 빨리 복구할래애~
“어쨌든, 아버지. 주가혜의 육체가 희생되었던 건, 제가 스스로 택한 길이었어요. 더 이상 유준 오라버니를 추궁하지 말아주세요.”
“허이~ 아까는 적을 방심시키기 위한 연극이었다만, 이젠 정말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단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구나.”
쩡!
으 ~ 이 양반 누가 살수 출신 아니랄까 봐, 작은 내색도 없다가 뜬금없이 검을 날려 오네.
“아깝군.”
“아이 참아버지!”
“자, 그럼 한 가지 더 묻겠네, 유준 군.”
“그러…시든지요.”
“자넨 지금 아무래도 지난번보다, 아니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군.”
“예. 솔직히 당분간은 내공을 전혀 쓰지 못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찌할 셈인가?”
“뭐, 어쩌긴요. 어떻게 해서든 회복해야지요. 이미 대교에게는 1년의 기간으로 약속을 했습니다.”
“1년… 1년이라……….”
쩡!
“우이 쒸! 거 쯤!”
“아버지!”
우린 동시에 발끈. 불만을 표했지만 이 위험한 살수 사영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엔 여기까지. 하지만… 대교와 그리 약속을 했다니, 꼭 지키길 바라네.”
1년 후까지도 내공을 되찾고 강해져서 자기 딸을 든든하게 지킬 수 있는 자가 되지 못하면… 쓱싹- 해버리겠다는 노골적 협박이었다.
“…쳇! 전 반드시 대교와의 약속을 지킬 겁니다. 이딴 협박 따위가 없어도!”
“홋! 그런 오기만은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결국… 음. 내가 번거롭게 되었군 그래. 그 전까지 허약한 사위감을 지켜주려면 말야.”
“됐거든요? 대교도 있고, 또 뛰어난 수하들과 하여간 굳이 연로하신 장인어른이 나서지 않아도………….”
찡~!
“아~ 거, 쫌!”
“아버지!”
“아깝・・・ 아니, 미안하다. 무심결에 그만.”
에효. 이노무 예비 장인인지, 이 양반은 천년 전에도 이럴 기미가 보이더니만… 이제 신분상의 문제가 없으니까 아주 그냥 대놓고 사윗감에게 심심 풀이(?) 칼질이네.
“후후- 이무래도 말이야. 대교 넌 계속 이 애비를 너무 우습게 보아온 모양이다.”
“아, 전 다만……”
“지금 네 짝을 지키기 위해 내 칼을 막은 것을 탓함이 아니다. 이 애비를 너희들이 빼 놓으려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예?”
사영은 새삼 아버지의 표정으로 대교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느 정도 오해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난 당시 닥터 제이라는 자를 통해 너, 대교를 얻게 되었을 때부터 우리 가족을 둘러싼 가늠하기 도 두려울 정도로 거대한 힘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을 만들어 낼정도의 무서운 자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며 그들이 언제든지 또 다시 나의 가족, 나 의 마을을 멋대로 실험 대상으로 삼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양반, 이번에는 정말 진지 모드로 바뀌어 버린 것 같다.
“…프리메이슨, 맞지?”
제기, 우린 이 양반이 우리의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랐는데 이미 아주 한참 전에 늦어 버렸던 건가?
“힘들었다. 놈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아내기 위한 과정 자체도 쉽지는 않았지만… 놈들의 눈을 피해 놈들과 대적할 힘을 키우는 건 더더욱 힘들었 지. 물론… 아직도 그들에 비해서 미약하기 그지없는 수준이겠지만… 그래도 그 거대한 공룡을 한 번 아프게 물어뜯어 줄 정도는 될 거라고 자부한다.”
“…참, 옛날이나 지금이나 음흉하시기는.”
사영은 나의 상당히 무례한 말에 오히려 쿡쿡 진심으로 즐거운 웃음소리를 냈다.
“자네와 대교만 아는 천년 전의 나도 그랬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비밀리에 키운 살수들에게도 그때와 같은 이름을 붙여주고 싶군.” “…혈의문(門). 당신께서 주인이었던 살수 조직의 이름입니다.”
과거 소림 성승(聖僧)이라는 희대의 고수가 비밀리에 만들어 냈었고, 밑바닥 살수 출신의 사영이 물려받아 강호의 어둠 속에서 암약하던 혈의문. 그 혈의문이 현 시대에서 사영의 손에 의해 재탄생한 셈이었다.
…그때는 내가 대천마(大天魔)에게 일시적으로 빼앗겼던 비화곡, 사마외도의 하늘에 대항하던 비밀 결사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세계의 지배자 프 리메이슨에 대항하는 비밀 결사!
난 사실 대교와 나의 인연을 제외한 모든 ‘운명의 반복’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뭐, 이런 경우는 상관없으려나? 정작 당사자가 저리 만족하는 것 같으니 말야.
사영은 나에게 들은 자신의 옛 조직명이 비교적 마음에 들었는지 혼자 뭔가 웅얼웅얼 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후후— 아버지는 안 그러시는 것처럼 하면서도 옷차림 같은 것에 꽤 신경을 쓰는 편이에요. 아마지금 ‘신) 혈의문’의 복장을 연구 중이실 걸 요?」
훗. 어쩌면 조만간 살수계에 럭셔리 패셔니스트 조직이 나올 지도 모르겠군. 지금 입고 있는 복장과 오토바이를 보아 ‘올 레드’ 패션이 유력하려 나…………? 으음. 근데 그나저나…….
비록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기는 했지만, 결국 나와 대교는 사영에게도 정식으로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런 기쁨에 쌓인 우리와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소미령이 애들 역시 꽤 짠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저희들은 일찍 입양이 결정된 편이어서 예향원의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아요.”
예향원 출신 미령이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저희들의 어린 시절 기억보다 소중한⋯ 당시의 저희들처럼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어요. 진작에 이 예향원을 다시 찾아와 보았어야 했어요.”
이렇게 상당히 모범적이며 건설적인(?) 미령이에 비해 소령이 외 현재 관심 집중대상은 소위 ‘옛날 아빠’ 사영뿐인 것 같았다. 녀석은 조금 전 우리 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오자마자 대뜸 사영의 옆자리를 선택했었다.
“헤에- 아빠?”
“으응? 음.”
“아빠?”
“어. 음. 네가 그러니까……….”
“소령이요!”
“어… 그래. 소령이. 소령이로구나.”
“옛날 아빠?”
“으음. 그건 좀 표현이 이상하구나.”
“하지만 소령이에게는 현재의 아빠가 따로 있는 걸요?”
“그럼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도 상관없기는 하다만………….”
천하의 사영도 자기 옆에 착 달라붙어 턱을 괴고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소령이, 전생의 딸래미를 어찌 대해야 할지 다소 난감한 모양이었 다.
“헤에~ 점잖은 아빠도 좋지만, 이렇게 예쁜 아빠도 참 좋다.”
과거에는 사영도 원판처럼 자신의 미모(?)가 언급되는 걸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소령이의 ‘예쁜 아빠 소리에는 알게 모르게 옅은 홍조까지 떠올리고 있었다.
“커흠. 흠! 음. 거기 넌 그럼…….”
“전 미령이라고 해요. 아… 예. 미령이요.”
홋! 미령이 녀석은 전에 없이 쑥스러워 하느라 아빠 소리를 쉽게 하지 못하는군.
「・・・유준 오라버니.」
그려, 안다 알아.
나는 대교의 전음을 받자마자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이젠 아직 어색한 전생 부녀들의 시간인지라, 나는 뒤따라 나온 대교 와 함께 소교를 찾아보았다.
소교는 예상대로 여옥과 함께 있었지만, 뜻밖인 건 여옥도 소교를 도와 주방에서 예향원 아이들의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 여옥 이모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적어도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게 보여서 기뻐요.”
“글쎄, 과연…….”
아차, 무심결에 너무 부정적인 반응을 했나? 하지만 저 여옥이란 여자는 내가 아는 우리나라의 어떤 여자 정치인과 이름이니, 용모의 분위기가 너무 흡사해서 그런지, 저런 모습을 봐도 어째 ‘가식적이고 꾸민’ 느낌이 먼저 든단 말야…………?
다른 건 몰라도, ‘거짓과 뻔뻔함으로 권력을 차지해 본 경험자’는 쉽게 그 ‘거짓과 뻔뻔함’을 버리지 못할 거라는… 이건 나름 현명한 안목일까? 아니면 그냥 편견일까?
“미안. 여옥에게 직접 많은 일을 겪었던 너나 소교도 있는데, 내가 괜한 말을 했다.”
나는 슬쩍 주방의 문가로부터 물러나며 대교에게 사과했지만, 대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와 소교가 여옥 이모를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건, 어쩌면 당신이 그렇게 신중하게 뒤에 서 있어주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대교, 넌 역시 항상 입술에 꿀 발라 놓은 거 같아.”
“예?”
“우심뽀까?”
“아이 차암~! 이런 곳에서……
그닥 싫지 않은 기색의 대교의 손을 잡고 으슥한(?) 공간을 찾는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
느닷없이 나타나, 전혀 그럴 이유가 없을 것 같은 상황임에도 괴성을 지르며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한 예향원의 원딩들(?)! 그리고 녀석들의 집단 움직임이 시작된 방향에 조담놈이 서 있었다.
한국을 떠난 이후로 계속 있는 듯 없는 듯, 우리 일에 아무 참견도 않고 조용히 있던 녀석이 웬일로 이곳의 어린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아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좋지만, 하필 요럴 때.
「흐흐흐흐~.」
응? 조담놈의 전음이 어째………….
「또 눈!꼴!!! 짓을 하려던 거겠지?」
윽! 저 자식, 지금 일부러 애들을 동원한 거구나!
「소령, 미령, 그 꼬맹이들이 그러더군. 솔로들이 힘을 합쳐 커플들의 만행을 저지해야 한다고 말야.」
으흐윽~! 내가 강아지, 고양이가 아닌 호랭이 새끼들을 키우고(?) 있었어!
솔로부대의 반격에 다소(?) 당황했던 시간이 지나고, 또 상당히 시끌벅적한 저녁 식사시간까지 지난 후… 나와 대교는 예향원 옥상에 올랐다. “후후 다행히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나 봐요.”
“오래 전, 영혼 상태의 네가 꿈에 불법 출연하여 ‘울 동생들 데려와서 잘 보살피지 않으면 삼대가 재수 없으리니~’라고 협박 했었던 원장님 부부 말하는 거지?”
“치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훗! 아무려면 어때. 중요한 건 그분들이 우리 소미령이들을 애써 거두어 잘 돌봐 주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후로도 지금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많은 아이들을 거두고 보살펴주고 있다는 사실이겠지.”
“예. 정말 고마운 분들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저회들로 인해 큰 곤욕까지 치르셨으니… 뵐 면목이 없어서 혼났어요.”
그런데도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노부부께서 오히려 우리들에게 연신 ‘구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바람에 나도 좀 민망하기는 했었다.
“감사와 사죄의 마음을 금전으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곳의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요.”
대교는 ‘조금이라도’라 표현했지만, 현실적으로 이 예향원은 이제 엄청난 후원자들을 확보한 셈이었다. 우리는 물론이고 사영회주겸 혈의문주 사 영, 그리고 아직 어리지만 GM에서 상당한 연봉을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소미령이들……………
“뭐, 어쨌거나……”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에 걸린 달이 조용히 잔잔한 은빛을 뿌려주고 있었다.
“여러모로 기분이 좋군. 내일은 또 반가운 녀석을 만날지도 모르고 말야.”
연옥도(煉獄島)에서 함께 저 달을 보며 강호 복귀를 얘기하던 나의 친구……………! 지금은 어쩌면 GM의 이단아 ‘더블엠 천’이라는 인물이 되어 있을 그 친구, 천우신…………! 우리는 오늘 밤 예향원에서 하루를 묵은 후, 내일 곧바로 그를 찾아갈 예정이다.
“후후~ 아무래도 당신께서는 벌써 그분의 환생을 확신하고 계신 것 같아요.”
“뭐・・・ 좀 그래.”
말이 그렇지 좀이 아니다. 처음에는 막연했던 생각이 갈수록 확신 쪽으로 기우는 건 아무래도 그 친구와 소령이의 인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우리지만, 그 친구도 꽤나 열렬했었잖아?”
‘으음- 맞아요. 제가 3년의 준비 기간을 거치는 동안, 그때까지도 소령이는 천우신님께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아니, 아예 ‘남녀간의 정’이란 것에 둔감했다고 할까요? 소령이, 저 둔한 녀석에 대한 천우신님의 일편단심은 정말 눈물겨울 정도였죠.”
“하핫!”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런 친구니까 점점 더… 그래도 천우신이니까..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 같아. 난 본래 환생자들이 전생 때문에 현생의 운명까지 영향을 받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천우신이니까. 난 지금의 소령이가 그 친구와의 쉽지 않은 인연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천우신이니까. 그 친구니까. 그 친구는 결국 어떻게든 자신과 소령이까지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남자니까라는 생각이 들게 된단 말이야. 그리 고 무엇보다…….”
나는 공연히 쑥스러워져서 조금 망설인 끝에 고백(?)했다.
“역시 보고 싶어. 그게… 내가 그 친구를 만나야 하는 가장 큰 이유지.”
“어머…? 갑자기 질투가 다 나네요.”
“후후~ 하지만 무리 그런 우정이라도 역시 문제는 있지.”
“이런 걸 못하잖아. … 대교. 아까 못했던 우심뽀까?”
“아이 차암~!”
나는 사랑스런 나의 소녀를 끌어당겨 달빛을 머금은 그녀의 애처로운 입술을………….
쐐애엑~!
윽! 웬 파공성?
“아!”
강력한 기세의 기습이었다. 우린 순간적으로 경공을 펼쳐 간신히 피할 수가 있었다.
“와아- 멋져!”
마당 쪽에서 들려온 이 소리는.. 소령이의 탄성?
“뭐예요! 위험하잖아요!”
이건 미령이 녀석.
“왜 그래? 지금쯤은 또 두 사람 분위기가 좋아졌을 거라고, 뭔가 해보라고 한 건 너잖아!”
조…담…놈………!
“그래도 그렇게 강력한 검기를 다짜고짜 날리면 어떻게 해요! 언니나 오빠가 다쳤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걱정해줘서… 정말 끔찍하게 고맙기도 하셔라.
“…유준 오라버니, 살수의 허락을.”
“OK!”
채엥~
대교의 청명검이 뽑혔고, 대교는 즉각 마당으로 뛰어 내렸다.
“와악~! 언니 미안! 잘못했어요오~!”
“꺄악! 장난이었어!장난!”
“으아아- 난 여자와는 안 싸운다니까아~!”
무심한 달빛 아래 예향원의 마당에서 솔로부대원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청명검이 춤추기 시작했다.
다음날.
지난 밤 대교가 살짝 광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소미령이들은 멀쩡하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조담놈은 ‘장난 좀 쳤기로, 내상까지 입히다니’ 라며 완전 삐쳐서 혼자 아주 먼 좌석에 짱 박혀 버렸다.
내 보디가드를 자처하는 이유는 좀 썰렁해도, 어쨌든 지난번 에레보스를 상대할 때처럼 꽤 도움이 되기도 하는 녀석인데 우리가 좀 너무했 나…………? 음. 하지만 이번에는 어디까지나 녀석의 자업자득이지..? 암.
솔직히 말하면, ‘이젠 저놈이 또 솔로부대 대표 용병으로 나서서 우릴 방해하지는 못하겠지?’라는 생각이 더 컸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거 이렇게 자꾸 편한 전용기만 타고 다니면 버릇 나빠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예전처럼 마군황(魔君黃) 자리에 따르는 ‘부’에 무조건 거부감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늘 아끼고 검소하게 살아가시는 부모님 생각도 나고……………
ᅳ주인님.
“어, 몽몽.”
-이번 미국행에 있어 한 가지 더 알고 계셔야 할 사항이 확인 되었습니다.
음. 지금은 아직 콕 집어서 ‘행복’, ‘여유’ 이런 거에 빠져 있는 건 아니니까, 또 타임 씨의 심술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은 아니겠지?
-코드명 더블엠 천. 그와 관련된 사건 데이터를 분석 중, 다른 환생자로 의심되는 인물이 검색되었습니다. 본명은 아직 확인 되지 않았으며, 비공 인 코드명은 ‘에메랄드 킬러’ 입니다.
응? 에메랄드 킬러? 킬러? 설마…………
-현재까지의 분석 결과, ‘흑주’님의 환생일 가능성이 60% 이상입니다.
“흑…주?”
나도 모르게 몽몽과의 대화 모드를 잊고 입밖으로 흑주의 이름을 되뇌고 말았다. 대교나 천우신을 떠올릴 때와는 또 다른 느낌! 마치 한 줄기 바람 이 가슴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보고 진행을 일시 중단할까요?
“…그래, 몽몽.”
나는 잠시 눈을 감았고, 다시 떴을 때는 민감하게 나의 이상을 느낀 대교가 조심스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몽몽. 대교도 함께 보여줘.”
-지난 1차 보고로, 더블엠 천이 현재 ‘캔들 리’라는 한국계 인물을 지원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해당 인물의 암살 의뢰를 ‘에메랄드 킬러’라 불리는 인물이 진행 중인 것으로 파악되어 그의 데이터를 수집 중 발견된 사진들입니다.
어두운 칠흑처럼 까만 밤의 풍경이었다. 어디부터 하늘인지 모를 어둠 속에 고층 건물의 라인이 간신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 중 하나의 옥상 난간쯤에 누군가 가서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상당히 먼 거리의 앵글이지만… 다음 사진은 비로소 대상을 정확히 포착하여 앵글을 당긴 듯… 완전한 전신사진…………! 이, 이 녀 석은 역시……….
상하의가 연결되고 타이트한 검은 옷. 그 위에 걸친 바바리코트까지 어둠에 반 이상 동화된 색채였다. 한 손에 들린 크고 긴 저격용(아마도) 총은 무광의 검과 같았고, 흩날리는 긴 머리 결까지도 어둠 속에 핀 흑화였기에 상대적으로 선명한 건 달빛처럼 차가운 옆얼굴뿐이었다.
그래도 아직… 정확한 얼굴 식별은 힘들 정도로 먼 구도의 사진일 뿐…………
머릿속의 이성적인 판단은 그랬지만, 내 입은 다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흑주!”
분명 내게 각인되어 있는 그 녀석이라고… 내 안의 무언가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흑주님……? 정말・・・ 그분?”
대교 또한 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몽몽. 이 사람이 흑주님이라는 근거를 조금 더 제시해 줄 수 있겠니?”
곧바로 다른 사진 한 장이 더 떠올랐다.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들어 올려 어딘가를, 아니 바로 이 사진을 찍은 자를 정면으로 겨냥한 모습이었다. -해당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의 생전 마지막 작품이었습니다.
망원렌즈로도 간신히 포착한 모양인 거리에서 자신이 촬영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고…………? 이 녀석, 천 년 전 이상으로 평범한 킬러가 아닌 건가? -해당 사진을 촬영한 사진작가는 몇 년 전 우연히 목격한 여성 킬러를 잊지 못해 개인적으로 행방을 추적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당 분야 상위 1%에 들 정도로 높은 사양의 장비를 이용했기에 결과물의 확대 보정이 용이합니다.
이름 모를 사진작가가 유작으로 남긴 단 세 장의 사진이 몽몽에 의해 확대되고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더 확실해지는 모습은 점점 더 강하게 대상이 누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분명 높은 퀄리티의 영상 데이터이나, 제한된 앵글뿐이기에 용모의 유사성만으로는 가능성 50%를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석 대상 인물의 전 용병기에 ‘활’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비록 아직 비공인 데이터 즉 소문에 불과하나. 항상 머리카락을 이용해 한쪽 얼굴을 가리는 해어스타일을 유 지한다는 점. 역시 비공인 데이터이나 ‘말을 하지 못한다’라는 점 등 다수 외적 요인의 일치성으로 가능성 수치가 더 높아졌습니다.
“젠장……! 왜 흑주 이 녀석까지………….”
대교는 내가 입술을 깨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곧 뭔가 깨닫고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당신께선 흑주님이 보다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항상 바라셨는데… 어째서 현 시대에서도 천 년 전과 유사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 었는지 모르겠네요. 더구나…….”
어쩌면 또 얼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썅~! 타임 씨! 당신 정말… 정말 이럴 거야?
“Time is as almighty as God is!”
“뭐?”
“미래에서 온 여자 과학자가 그렇게 말했었다죠?”
“그래. 그래서 이럴 때면 그노무 타임 씨인지 뭐시긴지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지… 읏.”
대교는 한 손가락을 내 입술에 얹어 막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모든 천지신명의 수장일지도 모를 분에게 무례해서는!”
“그건……”
“당신께서는 그 어떤 존재에게도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알지만… 음. 그래도 굳이 신에게 나쁘게 굴 필요는 없잖아요? 솔직한 말 로, 우리 손해잖아요.”
쯧. 현실적으로(?) 대교의 말이 맞는 거긴 한데……………
“실은… 이미 늦었거든? 천지파멸식(天地破減式) 발동했을 때 나, 그 양반도 죽인다고 광분했었어. 뭐, 아무리 그렇게 엄청난 에너지를 담은 공격 이라고 해도 그게 정말 신에게까지 날아가고 더구나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어머, 어머. 세상에!”
대교는 녀석답지 않게 과장된 손짓까지 해가며 놀라고(?) 있었다.
“알겠어요. 이제부터 우리에게 뭔가 또 나쁜 일이 일어나면 전부 당신 탓인 거예요.”
“에? 그건 좀…….”
“아아~ 대교는 어쩌자고 이렇게 신에게까지 싸움을 거는, 툭하면 대형사고를 치는 분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몰라.”
훗. 어째 대교의 분위기 전환에 어영부영 말려든 것 같군. 결국 이렇게 싱겁게 웃게 되었으니 말야.
“후후ᅳ 한 가지, 저 사람이 정말 흑주님이라면 적어도 한 가지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뭐?”
“몽몽, 마지막사진을 조금 더 확대해 줄 수 있겠니?”
대교의 말에 따라 약간 더 확대된 흑주의 정면 얼굴은… 으음~ 아무리 확대해 봤자, 내가 우려하고 있는 ‘이상이 있을지도 모를 얼굴 부분’은 역시 머리카락과 총에 가려져서 거의 보이지 않는데… 대교는 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거지? 어? 가만? 이거 혹시………………
“눈? 눈색깔이・・・ 달라?”
“그렇죠? 물론 이안(異眼)을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음. 콤플렉스라는 게 될 사람도 있겠죠?”
그래서 가리고 다녔을 뿐일 거라고? 확실히 다른 쪽 눈은 본래 흑주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을 정도로 유난히 까맣고 짙은 눈동자여서 좀 부자연 스런 느낌이 드는 것 같기는 한데. 흐음. 어쨌든 그러고 보니 저 다른 눈동자 색 때문에 예의 ‘에메랄드 킬러’라는 별명이 붙은 건지도 모르겠군. “또한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직 소문에 불과할 뿐이라 잖아요. 그러니까… 미리 화부터 내지 말아주세요.”
쯧. 결국 타임 씨에게 너무 까불지 말란 얘기네. “그리고… 정말. 화만 난 것도 아니시면서…………….”
응? 대교 이 녀석, 문득 표정이 좀 묘해지는 걸?
“흑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당신께서 지은 표정이 어떠했는지… 당신 스스로는 모르시겠죠? 천우신님의 경우와 달리, 정말 조금은 질투가 났어 요.”
으음. 어째 ‘조금 질투’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대체 어떤 표정이었던 걸까……?
“저기, 대교야. 너도 알다시피 흑주에 대한 내 감정은 어디까지나..”
“됐네요. 사실 흑주님이야말로 저보다도 먼저 곡주님의 곁을 지켜왔던 분이니, 전 질투할 자격도 없는 거겠죠.”
“어 아~ 아닌 거 알면서……”
“홍!”
짐짓 삐친 척을 하는 대교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난 결국 흑주의 환생에 대한 상반된 감정 모두를 잠시 접어두고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순수한 감정만이 더 진하게 밀려오기 시작했다. 천우신과 흑주, 둘 다… 정말이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