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20화 : 폭주(暴酒) & 폭주(暴走)
10. 폭주(暴酒) & 폭주(暴走)
“몽몽.”
나는 예정되어 있던 건물의 옥상 부근에서 몽몽에게 물었다.
“…정작 우리가 도착하니까 사라져 버렸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주인님. 반경 400미터에 걸쳐 산발적으로 나타났었던 이상 생물체가 조금 전 일제히 사라졌습니다.
상당히 노골적인 유인책………! 하지만…………….
-그 현상의 중심, 정체불명의 인물은 여전히 현 건물의 옥상에서 이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쯧. 이렇다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몽몽. 자룡대주에게 어사조 운용 포맷을 좀더 캔들 리 쪽으로 집중하라고 전해줘.”
-예, 주인님.
흑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양쪽의 상황을 주시하다가 유동적으로 행동하라고 해 두었기 때문에 당장 정체불명의 적을 상대할 선발대는 나와 대교 뿐이었다.
쾅!
나는 옥상 문을 다소 거칠게 열어 제끼며 옥상으로 나갔다. 어차피 적도 우리의 움직임을 뻔히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 문이었다.
자아~ 어떤 놈인지 얼굴 한 번 보자. 몽몽이 ‘이상한 생물체’ 라고 표현한 것들을 마음대로 동원했다가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놈은 대체………………
나는 대교와 손을 잡아 적의 공격을 대비하며 옥상 한 가운데로 걸어나갔고, 입구와 반대편 난간 부근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놈도 천천히 이쪽으 로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 어딨는 거냐, 응? 지옥문을 열어 버리는 놈일지도 모르는! 엄청나게 위험한 놈은! 도대체 어딨는 거지…………..? 나와라, 이놈!
“저어 유준 오라버니.”
“응? 왜?”
“이런 상황에서의 현실도피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요.”
“어, 뭐. 그거야 그렇지만…………….”
나는 공연히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짓을 멈추고 다시 눈앞의 녀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난 녀석을 적으로 인식하기가 어려 웠다.
이거 뭐야, 진짜. 잘해야 10대 초반 정도……………? 입고 있는 건 교복……? 또 게다가 저렇게 겁먹은 표정의… 금빛 단발머리 소녀…라니…………!
「야, 몽몽. 쟤가 정말 맞는 거냐?」
…그렇습니다, 주인님. 위성에 포착된 이후 계속 성인 남성의 모습이었으나, 32초 전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윽! 이건 또 뭔 소리야? 성인 남자가 순식간에 금발의 소녀로 바뀌었다고?
“너, 변신 괴물…이냐?”
내가 어이없어하며 묻자, 일단은 단발머리 여학생⋯ 그것도 엄청나게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는 소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것이 저의 진짜 모습입니다. 전 사념(思念)으로 겉모습을 위장할 수 있어요.”
“사념으로 겉모습을 위장……?”
“예. 그리고… 전 여자가 아닙니다.”
으잉? 그,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이런 제기! 뭐 저렇게 생긴 사내자식이 다 있어? 이건 완전 우리 소교의 소년 버전이잖아? 으~.
“아, 아무튼! 간단히 말해서, 넌 니 생각을 시각화시킬 수 있는… 그런 초능력자인거냐?”
소녀, 아니 소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가 싶다가 문득 다시 가로저었다.
“시각화뿐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게… 그러니까 완전히 실체화가 가능합니다.”
“…니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예.”
“…네가 혹시 헬게이트?”
“예.”
“에레보스의 넘버 세본, 헬 게이트?”
“예.”
“너, 나랑 싸우러 온 거 맞냐?”
“예.”
“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묻고 말았다. 그리고 헬 게이트 녀석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왠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싸우기 싫어?”
“예. 아, 아뇨. 전 분명히 당신들을 제거하라는 그런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나 이거 참~ 돌아버리겠네.”
진심이었다.
“난 본래 계집애처럼 생긴 놈을싫어하지만, 애들은 또 예외란 말야. 전에 왔던 초롱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너희들, 적의 의욕상실이 특기인 거 “지?”
헬 게이트 소년은 내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볼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주인님! 코드명 헬 게이트의 사념파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윽. 진짜 초롱이 이상의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솔직히 말해서, 전 싸움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저의 이 저주받은 능력은 언제나 제가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해준답니다.”
에고. 그냥 잘 달래서 어찌 넘어갈 걸 괜히 자극했나…………?
헬 게이트 소년의 주위로 정말 지옥문이 열려서 탈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흉측한 형태의 회색 괴물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에너지 반응 1차 분석 결과, 사념체의 평균적인 전투력은……………
전에 마신일이 부적으로 만들었던 식귀(飾鬼)들의 두 배정도…..? 하! 이거 긴장 좀 타야겠는걸? 물론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할 방법이 있.. 제기 랄.
늦었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회색의 구름덩어리 같은 것이 뭉개 뭉개 피어올라 헬 게이트 소년의 전신을 감싸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아직 늦지 않았어. 이제라도 전력을 다해 창조자를 먼저 치면 굳이 다른 것들을 상대할 필요가 윽! 뭐, 뭐야? 탈진(脫盡)…..? 초롱이의?
나는 급격히 몸의 힘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어야 했고, 그건 대교도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초롱이 때보다 강해! 저 녀석에게 이런 능력까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에레보스가 어딘가에서…………
뭐가 어찌되었든, 방심의 대가는 컸다. 칼을 휘두르기는커녕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 버린 우리의 주위를 온갖 끔찍한 형태의 괴물 들이 포위한 채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대체 어떻게 해야……………
“끄어어어~.”
일제히 벌려지는 괴물들의 입은 마치 바다 속에서 솟아오르는 백상어의 아가리 같았다. 그 순간, 내 왼쪽 손의 바닥에서 어떤 느낌이… 그 손에 쥐 어져 있는 대교의 손이 힘없이 파들거리는 느낌이 고압전류처럼 내 머리끝까지 달려 올라왔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떡해! 쌍!
나는 이를 악물고 정글도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괴물들이 굶주린 짐승처럼 우리를 덮쳐오기 시작했을 때, 정글도가 기어이 내 어깨 위로 올려졌 다.
쉬앗ᅳ
작지만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었다. 쉬잇- 쉭! 쉿! 쉿!
마치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작은 파공성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운데, 괴물들은 순간적으로 굳어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괴물・・・ 아니 괴물이었던 것들이 조각조각 잘라지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
헬 게이트 소년이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녀석의 시선은 내 어깨 위의 정글도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표정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내 정글도는 전혀 움직이지 못했어. 하지만………….
“정글도에 집중된 에너지가 주인님의 뇌파와 동조하여 방사 되었습니다. 전례 없는 동조현상의 원리규명에는 추가 분석이 필요할 것이나, 심검 (心劍)이라 불리는 경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굳이 말하자면 심도(刀)라고 해야겠지만 아무려면 어떻겠어. 그래, 내 손안의 소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심검이든 뭐든 써야지. 무조건 쓸 수 있어야지! 안 그래, 진유준?
시잇-!
다시 섬세하고도 예리한 바람이 일자, 헬 게이트를 감싸 보호하고 있던 회색 구름도 간단하게 잘려져 나갔다.
“이익!”
헬 게이트는 황급하게 뒤로 몸을 날려 거리를 벌렸고, 녀석으로부터 다시 무수한 회색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와아악!”
시잇! 싯! 싯! 싯! 짓!
포효하는 괴물들과 달리, 나의 심도는 점점 더 시전하는 나조차 보고 듣기 힘들 정도로 희미한 형태로 펼쳐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절대적이었다. 흐트러진 퍼즐 판처럼 회색의 작은 조각들이 허공에 가득해져 버리자, 헬 게이트도 더 이상 괴물을 만들어내는 걸 포기하는 것 같았다.
“그건. 대체 무슨… 능력이죠?”
“그냥 칼질이지, 뭐겠어.”
“뭐… 뭡니까, 당신은?”
“이분은……”
이번엔 대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항상 저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저만의 곡주님이랍니다.”
흐음. 이건 대교 식의 ‘나의 슈퍼맨’ 같은 표현인가? 어쨌든 간만의(?) 염장신공이로군.
“치이~ 초롱이 말대로 기분 나쁜 남자였어.”
헬 게이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순간, 녀석의 이마 정중앙에 퍼억- 구멍이 뚫려 버렸다.
대교의 섬광분소지(閑光分小付)…………! 대교도 꽤 적응이 빠른 편인걸? 여하튼, 헬 게이트 저 녀석. 아니, ‘저것’도 사념으로 만들어진 거였군.
소녀처럼 아름다운 소년의 형상이 아이스크림처럼 스르륵 녹아내리는 모습은 조금 섬뜩할 정도였다.
쯧. 그러고 보니 헬 게이트는 아까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만 했지 ‘진짜 나’라고는 하지 않았었군 그래.
헬 게이트의 본체 흉내를 내고 있던 사념체가 녹다 못해(?) 아예 소멸된 자리에 낯익은 디자인의 물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몽몽의 스캔기능을 약올리는(?) 스텔스 장치∙∙∙∙∙∙! 마침 잘 됐… 웃!
문제의 스텔스 장비는 내가 채 손을 내밀기도 전에 파츳 소리와 함께 불타기 시작했다.
젠장!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자폭기능까지 있나 보다. 놈들도 중요 장비는 꽤나 철저하게 관리해주시는 걸…………? 으음. 그나저나………….
가짜 헬 게이트가 대교에게 일격을 당한 직후에 우리의 몸을 속박하고 있던 기운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역시 탈진도 헬 게이트의 능력….? 아니, 아니야. 걸어 왔을 때처럼 타이밍 좋게 풀어지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어딘가 느낌이 달라! 그렇다면 헬 게이트의 본체와 또 다른 놈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패티의 위성에 잡혔었던 영상을 근거로 해서 헬 게이트의 능력이 미치는 거리를 가늠해 보면 최소한 800미터? 이건 너무 막연한데.
-주인님!
몽몽이 알려주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밤하늘에 또 뭔가 비현실적인 것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엥? 웬 거대한 박쥐………..? 아니, 아니 헬 게이트 녀석인가? 녀석이… 사념으로 거대한 날개를 만든 거구나.
참 여러모로 편리한 능력이겠다 싶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도주 수단이 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어딘가 부상을 당했는지 헬 게이트의 날개 짓은 극히 불안정했고, 비행괘도 역시 중구난방이었던 것이다.
방금 헬 게이트가 뛰쳐나온 건 바로 옆 건물 옥상의 광고판 뒤였던 것 같았는데 지금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흑주……………! 잠복하고 있던 우리 흑 주에게 걸렸던 거군. …아. 흑주 녀석,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 활을 들어 겨누기 시작한다.
「그만 둬! 흑주!」
에고. 나도 모르게 막고 말았네. 하지만 아무리 날 해치려 들었던 암살자라도 아직 어린 녀석이 죽는 걸 보는 건 좀……………..
내가 목숨을 부지시켜 줬음에도. 헬 게이트는 그리 멀지도 않은 다른 건물의 옥상까지 아주 겨우 겨우 불안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어… 어, 어? 착지가 나쁘다 못해 그냥 꼬나 박을 것 같은… 아!
헬 게이트 소년이 간신히 날아간 건물의 옥상 위에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고, 녀석은 그 인물의 바로 앞에 형편 없는 착지를 했다. 뭐…야! 내 걱정보다는 양호한 편인 것 같기는 해도 분명 엄청 아프게 그냥 떨어지다시피 했는데… 저 빌어먹을 인물은 받아줄 생각도 없었던 것 같잖아…………? 동료가 아니었던 거야?
‘대단하군요.’
응? 이건 전음은 아니고… 텔레파시 ……? 그리고 여자?
머리 속에 직접 대고 속삭이는 듯한 낯선 여자의 음성이 계속 들려오기 시작했다.
‘헬 게이트의 사념체를 칼로 그것도 그렇게 종잇장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버리다니… 정말이지 멋진 광경이었어요.’
…뭐야, 이 여자?
들척지근한(?) 텔레파시도 기분 나빴지만, 몽몽이 확대해서 보여주는 영상 속의 모습도 꽤 거슬리는 모습이었다.
일단 외모가 상당한 미녀…라는 건 인정하겠어. 분명 백인임에도 짙은 흑발과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얼굴에 글래머… 하지만…………! 그래도 역시 왠 지 거슬려. 저 거만해 보이는 얼굴 표정도 그렇고, 자기 발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헬 게이트 녀석을 설사 친한 동료가 아니라 할지라도 분명 어린아 이인 녀석의 부상을 거들떠도 안 보는 태도가 무지하게 거슬린다구!
「너도 에레보스 맞지?」
‘넘버식스, ‘환영(幻影)의 천사’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진 유준씨.’
「닥치고, 이거나 받으시지.
나는 대뜸 정글도를 휘둘러 삼시전결을 날려버렸다. 상당히 먼 거리이기는 했지만, 나의 삼시전결은 정확하게 천사를 자처하는 여자를 향해 쏘아 졌다. 그러나… 나의 삼시전결은 그녀 등 뒤의 송신탑 같은 구조물에 퍼억하고 꽂혔을 뿐이었다.
・제기랄. 어쩐지 저럴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막상 진짜 안 맞으니까 기분 더럽네. 그리고 한 번 더 제기랄! 왜… 적중되지 않은 거지? 저 여 자는 지금 몸을 움직여서 피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호호호- 제가 왜 환영의 천사라고 불리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으셨군요. 아니, 하긴 ・・・ 누구라도 저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없… 앗!’
잘난 척 떠들던 자칭 천사는 화들짝 놀라며 다급하게 상체를 숙여야 했다. 그녀가 간신히 피할 수 있었던 ‘화살’이 그녀의 뒤쪽 바닥에 꽂힌 채 파 르르 깃을 떨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방금 화살을 날린 흑주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지금까지 중 가장 신묘한 빛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흣. 당신의 특기가 뭔지, 이제 좀 알 것도 같은데?」
솔직히 아직 확실하게 감 잡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우선 슬쩍 낚시를 던져보니까 자칭 천사라는 여자가 또득 이를 악무는 기색이 느껴졌다. ‘당신들 모두 특히, 오드 아이의 당신은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닐 걸? 캔들 리는 어쩌면 이미 KKK단 킬러들에게… 앗!’
자칭 천사는 또 말을 맺지 못하고 황급히 흑주의 화살을 피해야 했다.
흐음. 솔직히 흑주가 저런 말을 들으면 당장 캔들 리쪽으로 달려가 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그리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지를 않 네…………? 전투 모드의 흑주는 역시 흑주라는 건가?
‘흥. 저 기분 나쁜 오드 아이는 그렇다 쳐도, 당신이야말로 자신이 우리의 작전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했나요?’
「좀 전엔 흑주에게 ‘특히 당신’ 이라고 하더니 곧바로 나에게도 ‘당신이야말로’ 라고 하다니… 거참. 누구처럼 말 바꾸기 선수군 그래.」
내가 언급한 ‘누구처럼’이 누굴 말하는 건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자칭 천사는 다시 또득 이를 갈았다.
・・・시시한 말장난을 좋아하는 분이었군요. 하지만… 정말 이럴 때가 아닐 걸요?’
이것 봐라? 분한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짓고 있는 저 득의만면 한 미소도 결코 꾸민 것만은 아닌 것 같은 데…………? 뭐지? 내가 정 말 뭔가 놓치고 있는 사항이 있다는 건가?
「확실히 우리들이 너희를 상대하느라 캔들 리와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캔들 리를 경호중인 병력들은 결코 KKK단 따위에게…………」
가만? 혹시 사영 같은 고수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에레보스 암살자들이 그쪽으로…………? 아, 아니야. 만약 에레보스 멤버들이 모두 나섰다면 차 라리 나에게 집중하면 했지, 그쪽으로 몰려갔을 가능성은 적어!
‘호호홋~ KKK단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유색인종의 집권 저지! 즉, 꼭 캔들 리 본인을 제거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뭐?
‘당신은 캔들 리 같은 타입의 인물이 과연 더블엠 천처럼 유능한 킹메이커의 도움 없이도 권좌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나요?’
맙소사……….! 현재 나의 전투 병력은 전부 캔들 리에게 배치되어 있다!
천우신이 있는 리버티 호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나에게 자칭 천사의 악마같은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늦었어요.’
늦었다고?
‘시작할 시간이 되었거든요. 바로 지금.’
정확하게 시간을 카운트하고 있었던 걸까? 자칭 천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몽몽의 보고가 이어졌다.
-.3초 전, 리버티 호텔을 포함한 인근의 모든 전력과 통신망이 동시에 차단되어 더 이상의 직접적인 내부 상황 파악이 어렵습니다.
먼저 목표 건물이나 지역을 암흑화. 밀실화하는 전형적인 수법…………!
이어지는 건 대규모 총격? 폭탄? 암살자들의 소리 없는 기습일수도… 빌 · 어·먹·을!
-주인님! 코드명 조담놈, 에스의 감시 및 추격에 실패한 후 복귀하지 않고 있는 그에게 긴급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현재 위치로는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최소한 20여 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추정……
그런 시간이면 내가 지금 달려가는 것과 매한가지.
「페트라를 비롯한 잔류병력이 있지만. 그들은 전투 전문이 아니니 지금이라도 우리가 서둘러서………
「대교! 몽몽!」
누구보다 당장 전력으로 달려가고 싶은 건 당연히 나였다. 하지만………….
「저 여자 말대로, 지금 달려간다 해도 이미 늦었어. 그리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이내 다시 떴다.
「나는, 가지 않을 거야.」
그래 가지 못할 뿐 아니라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더욱 정글도롤 굳게 쥐며 자칭 천사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먼저 늦었다고 한 건 저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포기할 줄은.. 흐음. 이건 좀 예상밖이로군요. 제가 그동안 당신이란 남자를 잘못 읽은 건가 요?’
저 여자는 분명 강력한 텔레파시 능력자…! 언제부터인가 대 몽몽 스텔스 장비를 차고, 아무런 살기도 없이 우리 주위를 맴돌며 우리의 마음속 을 훔쳐 봐왔다는 얘기다.
‘솔직히, 당신들처럼 평소에도 자신의 정신에 강력한 필드를 치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었지만, 그래도 당신이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확실히 읽 을 수 있었는…?
「까불지 마!」
나는 정글도를 어깨에 올리며 말을 이었다.
「포기…………? 내가 천우신을? 그 잘난 초능력으로… 다시 제대로 읽어 봐. 지금의 나를.」
자칭 천사가 흠칫 안색을 굳히고 있었다.
‘…믿음? 친구의 현재 전력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이상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 불합리한⋯ 아! 자, 잠깐! 다, 당신 뭐야!’ 자칭 천사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정신 차려! 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번엔 내게 보내려 한 텔레파시가 아니었다. 자칭 천사의 텔레파시로 정신을 차린 듯한 헬 게이트가 회색 사념체의 구름을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바보! 못 막아! 달아나야………….”
「달아나?」
나는 나도 모르게 씨이익- 웃었다.
「이렇게 멋대로 뒤집어 놓고, 멀쩡히 가시겠다고………?」
자칭 천사에게서 지금까지의 시건방지고 도도한 모습이 씻은 듯 사라지며 그저 공포에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가 되고 있었다.
‘이, 이런, 이렇게 터무니없는 정신・・・ 내가 왜, 못 읽었던…………..’
헬 게이트 소년이 필사적으로 만드는 것 같은 사념체가 공포에 질린 그녀의 모습을 감추는가 싶더니,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크고 두껍게 한없이 커지려 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나의 살기, 나의 의지가 날았다.
‘아!’
헬 게이트 소년의 사념체가 나의 심검에 산산이 분쇄되어 사라지며 겨우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던 헬 게이트 소년도 다시 의식을 잃고 스르르 옆으 로 쓰러져 버렸다.
자칭 천사 역시 이미 뒤로 주저앉아 있었지만, 제풀에 그러지 않았다면 헬 게이트 소년의 사념체와 함께 그녀의 몸도 조각이 났을 것이다.
‘도・・・ 와줘!’
절박한 구조의 외침을 담은 텔레파시가 사방으로 퍼져가는 것 같았다.
「훗. 누가 와도 널 도울 수는 없…………」
‘잠깐만요!’
읏! 이 텔레파시 음성은?
‘유준 아저씨! 잠깐만요!’
이런・・・ 제기. 너무 강력한(?) 도우미가 나타나버렸네.
나는 어쩔 수 없이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내 옆으로 사삭 등장해버린 아이, 초롱이 앞에서는 더 이상 살기를 발산하기가 어려울 것 같 았다. 그리고 초롱이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 날수 있는 건 당연히………….
“진유준님.”
텔레포테이션(Teleportation. 공간이동, 순간이동) 초능력자. 공간의 마녀. 산드라가 초롱이의 손을 잡고 나란히 서 있었다.
“저희들의 동료, 환영의 천사를… 이번 한번만 용서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쳇. 지난번엔 ‘다음에 만날 땐 조심하라’고 하더니. 막상 나타나서는 동료애 넘치는 애잔 처녀 모드로 부탁을 해오는 건 뭐야?
“…산드라. 당신은 그렇다 치고, 초롱이는 나와 관련한 임무에서 제외시킨다며?”
내가 결국 맥이 빠진 음성으로 묻자, 초롱이가 먼저 급방긋으로 나의 무장해제(?)를 가속화 해버린다.
“제 생각은 그랬으나, 저의 마스터가 반대를 하였습니다. 아, 물론 초롱이가 다시 진유준님을 공격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맞아요. 전 유준 아저씨가 좋아요. 왠지 닥터 제이와 닮은 것도 같고요.”
쯧. 좋다 말았군. 내가 대체 그 음흉한 양반의 어디를 닮았다는 거야?
“…실은. 캡틴은 아직 진유준님에 대한 공격을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개인적인 공명심으로 일을 벌인 저 두 사람은 강한 징계를 받게 될 테니, 부 디 마음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뭐. 까짓 거 그럴 수는 있는데.. 우리, 이렇게 분위기 좋아도 되는 거야? 암살단과 그 목표물이 말이지.”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산드라도 숨김없는 미소를 떠올렸고, 초롱이는 아예 방실방실 도톰한 볼을 더 부풀리며 웃었다.
「역시… 너무 강력한 귀여움이라 당할 수가 없네. 대교. 네가 어렸을 때 딱 이랬을 거 같은데 말야.」
「후후. 저보다 미령이를 닮은 것 같아요.」
흐음.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네. 미령이의 갸름한 얼굴에 ‘애기표 만두 볼 살’ (?)을 더하면………
“진유준님?”
“왜, 산드라.”
“아・・・ 아뇨. 그냥, 바로 조금 전과는 너무나 다른 표정이시라……”
“…뭐,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어. 일단… 저 둘은 데리고 돌아가. 하지만…………..”
나는 그 사이 어느 정도 진정된 얼굴로 일어난 자칭 천사에게 말했다.
“당신이 오히려 더 내 친구가 무사하길 빌어야 할 걸? 만약의 경우에는 내 쪽에서 찾아가게 될 테니까.”
‘그, 그건…’
자칭 천사는 뭔가 대꾸를 하고 싶은 듯했지만, 결국 입술을 깨물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산드라와 함께 사라지기 직전에 초롱이는 손을 흔들며 빠이 빠이 소리를 냈다.
나는 산드라가 동료들을 데리고 순간 이동하는 걸 굳이 확인 할 생각 없이 몸을 돌려 먼저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나와 대교는 리버티 호텔의 입구에 도착했다. 호텔은 이미 전력이 회복되어 우리가 떠날 때와 변함이 없었지만, 어지럽게 오가며 상황 수습을 위해 애쓰는 호텔 직원들의 분위기가 달랐다. 「페트라.」
로비에서 호텔 매니저와 뭔가 얘기를 하고 있던 페트라가 우리를 돌아보더니, 지체없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눌렀 다.
“천주!”
달려온 페트라는 우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타자마자 약간 상기 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약 30분 전, 호텔 전체의 전력 차단을 시작으로 적의 대규모 기습이 있었습니다. 적의 공격은 5층 전체를 차단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목표는, 천우신님 일행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와 잔류 보천구룡대(保天九龍隊) 병력들은 긴급히 대응하여 적의 차단을 뚫고 구출 작전을 시작했으 4…….”
“페트라. 미안하지만, 결론부터 말해주겠어요?”
“예, 천모(母). 소령님과 미령님은 무사하십니다. 하지만 천우신님이…….”
“페트라. 우리측 병력들의 피해부터 보고해.”
“아. 예. 천주. 준 전투요원 두 명 사망, 네 명이 중상입니다. 그 외 경상자가 다수… 아, 그리고 천우신님은…….”
“자네도 다쳤군.”
“아, 예. 파편에 스쳤을 뿐입니다, 천주.”
페트라가 자신의 이마에 붙어 있는 커다란 반창고에 손을 가져가며 살짝 고개를 숙였을 때, 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페트라.”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적의 모든 것, 아니… 어디에 있는지, 그것만 먼저 일아내.”
페트라는 나의 뜻을 깨닫고는 엘리베이터에서 따라내리지 않았다. “예, 천주. 저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빠른 시간에 찾아내겠습니다.” 페트라는 힘주어 장담했고, 난 문이 닫히기 전에 덧붙여 말했다.
“이번엔 자룡대주와 자네도 뒤처리가 쉽지 않을 거야.”
스르르-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의 여기저기에 선명한 총탄 자국이 보였다. 몸을 돌려보니 복도의 곳곳도 마찬가지로 총탄에 의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자욱한 화약 냄새를 맡으며 걷다가 천우신이 지내던 객실에 도착하기 전에 걸음을 멈추었다.
-본래의 숙소가 완파되어 이쪽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몽몽이 알려준 객실 문을 열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흰 가운을 걸친 의사와 간호사의 등이었다. 그 앞의 침대에 길게 누워 있는 천우신은 의사와 간호사에게 가려져 다리만이 겨우 보였다.
“대교 언니……?”
천우신의 발치에 서 있던 미령이가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미령이의 품에 안겨 있는 소령이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언니, 유준 오빠…………..! 천 오빠, 천 오빠가…….”
미령이는 말을 잇지 못하고 끝내 두 줄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대교는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갔지만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여어~ 친구! 많이 다쳤나? 응?”
친구의 대답은 없었고. 의사와 간호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춤 좌우로 물러서고 있었다.
“뭐야. 왜 눈도 뜨지 못하고… 남자가 쪽팔리게….”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보면 모르겠나!”
이렇게 천우신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상체의 대부분이 붕대에 감겨져 있고 이마에 감긴 붕대에도 피가 배어나 있는 중상자의 모 습이었지만, 여하간 말과 함께 눈도 떴으며 눈빛 또한 팔팔했다.
“거, 너무하는구먼! 죽다 살아난 사람에게 무슨 말이 그런가?”
천우신은 잔뜩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으~ 방심했어. 놈들이 설마 이렇게 뻔뻔할 정도로 대담한 공격을 해올 줄은… 윽! 젠장! 더럽게 아프네!”
…이 친구. 아무래도 일부러 이러는 것 같군.
-직접적인 총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몇 군데의 화상(火傷)과 창상(創傷)은 모두 폭발물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며…
“흑! 천 오빠는 소령 언니를 보호하려다가 그만….”
미령이가 눈물을 삼키며 소령이를 좀더 보듬어 안자 소령이는 서럽게 끅, 끅,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어이 이봐 작은 동생들! 난 괜찮아!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 하하핫~!”
천우신은 자신이 건재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평소 같지 않게 호들갑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지만, 미령이와 소령이가 좀처럼 진 정하지 못하자 점점 난감한 표정이 되고 있었다.
“하핫! 핫! 하. 하… 이, 이거 원. 맘 놓고 다치지도 못하겠군.”
“훗, 동감이야.”
“어, 유준 자네도 어디 다쳤는가?”
“아니. 지금 말고, 얼마 전에 조금 다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아주 난리도 아니었던 아가씨가 있었지.”
내가 슬며시 대교가 폭주했던 시그마 일행과의 전투 때를 언급하자, 대교의 뾰족한 음성이 이어졌다.
“흥! 남자들은 정말 모두 무책임하군요. 자신들이 싸우다가 멋대로 다치는 것이 여자를 얼마나 더 아프게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아니, 내가…….”
“아니, 내가……….”
나와 천우신의 항변은 거의 동시에 일치해 버려서. 우린 잠깐 시선을 교환한 다음에 내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우리도 다치고 싶어서 다치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면 좀 억울하지.”
남자 대표의 말에 여자 측 대표 대교는 짐짓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한 손을 저었다.
“됐어요! 이제 두 분 다 책임감을 가지고 더 이상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아시겠죠?”
“예, 예에~ 그렇지요, 마님들!”
으음. 맞장구쳐준 대교는 물론이고 미령이도 빠르게 진정하면서… 오. 피식 웃기까지 하는군. 소령이도… 웃. 소령이는 아직 아니구나.
우리의 분위기 살리기 노력이 무색하게도 소령이는 계속 고개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급기야 미령이의 품에서 화악 몸을 빼고 객실 밖으 로 뛰쳐나가 버린다.
“언니!”
“소령아!”
미령이와 대교가 함께 소령이 뒤를 쫓아나갔고, 천우신도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짧게 신음성을 울렸다.
“끄으음. 이거 진짜 조금은 아프군.”
결코 ‘조금 아픈 부상이 아님에도 천우신은 평소의 차분한 분위기로 돌아와 있었다.
의사가 응급치료는 했으나, 곧 병원으로 찾아와 입원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자 천우신은 비로소 깊게 몸을 눕혔다.
“어떤 놈들인지 알겠나?”
내가 묻자 천우신은 잠시 더 생각을 해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군대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자들이었어. 전반적인 움직임, 사격 패턴, 지휘관의 병력 운용 방식 등으로 보아… 미 정규군. 그 것도 대 테러 교육을 전문적으로 받는 부대원. 이것이 내 판단일세. 그리고………….”
천우신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인 머리맡의 메모지와 펜을 집어들더니 슥슥- 뭔가를 그렸다.
“겨우 버티던 나를 이 꼴로 만든 수류탄을 정확히 투척했던 지휘관으로 여겨지는 자의 팔목에 이런 문신이 있었어.”
과연 전직(?) 천이단의 암천주(暗天主)…………! 어둠 속에서 특수부대의 기습을 받으며 이런 부상을 입는 와중에도 별 정보를 다 챙겼어.
나는 천우신이 건네준 메모지를 챙기며 돌아서다가 문득 한마디를 남겼다.
“고맙네. 친구.”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를 말을 천우신은 어떻게 해석했는지, 객실을 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아아~ 뭘. 나야말로 고맙네. 친구.”
대략 세 시간 정도 후.
나는 몇 시간 전까지 천우신의 거처였지만, 지금은 전쟁터의 폐허와도 같은 객실의 한 가운데에 앉아 수하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보고 받기 전부터 정글도를 꺼내 천으로 정성 들여 닦고 있는 나의 모습 때문인지, 자룡대주의 음성도 평소보다 긴장돼 있었다.
“…이와 같이 보안 작업은 효과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물론 연이은 사건의 규모와 피해인의 신분 때문에 완벽한 은폐는 어려울 것으로 여겨지나, 천우신님의 의견에 따라 적당한 시기에 맞춰 사건의 전파를 캔들 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좋아. 자룡대주는 당분간 그 일에 집중 해줘.”
“복명.”
자룡대주가 뒤로 물러나자, 이어서 페트라가 앞으로 나섰다.
“잠깐, 페트라.”
페트라를 잠시 대기시킨 건, 어떤 놈이 뒤늦게 몽몽을 통해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오리지널! 무슨 일인 거냐? 메시지를 지금 봤다!”
“…조담놈. 너, 지금어디냐?”
“어, 여긴 어떤 강의 다리 밑인데… 근데 무슨 일이지? 오리지널, 또 부상을 당하거나 한 건 아니겠지? 더 이상 회복기간이 늘면 내가 기다리기 가…….”
“닥쳐.”
“…쳇! 내가 에스란 자를 놓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그런 분야의 고수가 처음이라… 치이- 돌아가면 달라진 나를 보여줄………….”
“자룡대주.”
나는 자룡대주에게 몽드폰을 건네주었다.
“……그러니까 에스란 자도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누구? 조담놈 씨?”
“어? 자, 자룡대주? 왜 당신이 전화를 받… 그, 그게……….”
조담놈은 자신이 왜 돌아가지 않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자룡대주는 길게 들어주지 않았다.
“흥! 특별 수련? 당신이 더 강해지던지 말든지,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죠? 쓸모없는 남자 같으니!”
자룡대주는 매몰찬 음성과 함께 전화를 끊은 다음 내게 돌려주었고, 조담놈은 더 이상 전화를 걸어오지 못했다.
“페트라.”
“예, 천주. 금일, 천주와 주력병력이 현 임시 본진을 잠시 비운 틈을 타 난입했던 자들은 애리조나 주 방위군 산하 부대의 특수 공작팀으로 확인되 었습니다. KKK단이 미 정규군을 소유한다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미 정부의 모든 관련 부처는 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인 결과, 최소한 15년 전부터 끈질기게 시도된 KKK단의 회원 확보 노력과 군부 내의 공작으로 부대원 전원이 KKK단의 회원・・・ 즉, 극렬 백인우 월주의자들로 구성된 부대가 탄생한 것은 사실로 보여집니다.”
부대전원이 KKK단의 회원?
나는 보고가 시작되기 전부터 천으로 정성 드려 닦고 있던 정글도의 날 위에 세정제를 조금 더 뿌리며 생각했다.
거, 아주 청소하기 좋게 됐군 그래.
“…다시 말해, 이들은 평소에는 미 정부와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부대가 틀림없겠지만, 언제든지 KKK단의 필요에 의해 동원될 수 있는 KKK단의 사부대인 셈입니다. 현재의 주둔기지와 규모는……”
사막・・ ..?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에 짱박혀 있는 부대라면 더더욱
잘 된 건데… 규모가 조금(?) 문제일까……? 수백 명의 특수부대원이 포진한 강습부대라면… 홋. 뭐, 알게 뭐냐. 너희들 덕분에… 지금은 나 역 시 인종차별주의자…………! 내쪽에서 너희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차별해서 쓰레기 취급해 주겠어.
“… 이상, 금일 습격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대에 관한 1차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다음은 천우신님께서 제공한 ‘문신’ 정보에 의해 파악된 인 물에 관한 보고입니다.”
응? 지금 보고한 부대를 이끌고 왔던 놈을 왜 따로 보고하려는 거지?
“이 문신, ‘쓰리 스켈레톤’ (Three Skeleton)은..”
페트라가 내 앞에 내려놓은 종이 위에는 해골 세 개가 머리를 맞댄 형태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그림이 있었다. 천우신의 기억을 토대로 좀 더 보 강해서 구체화한 모양이었다.
“본래 금일 습격 부대의 마크이기는 하나. 형태가 구형인 것으로 보아 금일 습격팀을 이끈 팀장은 이미 제대한 예비역으로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단서로 추적한 결과. 한 명의 용의자를 확보하여 현재 확인 중입니다.”
아직은 ‘용의자’ 라는 어떤 인물에 대한 보고서 역시 내 앞에 놓여졌다.
‘데릭 허버트’ 올해 46세의 백인이며 헐리웃의 유능한 영화 제작자………! 최근 ‘불법 사냥 행사’의 주최자로 FBI(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미 연방 수사국)의 수사를 받은 바 있는데… 일단은 무혐의 처리된 상태?
“불법 사냥 행사?”
“그렇습니다. 천주. FBI에서 나섰던 것은 그 사냥이 ‘인간 사냥’이었기 때문입니다. 극비리에 이루어지는 행사여서 아직 명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 지만, 유색 인종들만을 납치, 혹은 고용하여 사냥감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특수 부대 출신이랍시고 인간 사냥이 꽤 각별한 취미라 이거군. 그리고… 그딴 행사에 돈까지 내며 참여하는 놈들 역시 KKK단이나 비슷한 부류겠 지?
“… 역시 잘 됐군.”
“예?”
나는 근래 드물게 잘 닦은 정글도 위에 그 정글도를 닦았던 천을 살짝 내려놓았고, 천은 한순간의 지체없이 두 개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게 사실이면・・・ 그 사냥감 아르바이트, 내가 하지 뭐.”
“아.”
“근데, 좀더 많은 놈들을 낚으려면 좋은 미끼가 필요하겠지. 뭐 지원자를 받기로 할게. 자신이 남들에게 ‘사냥하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한다고 생각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룡대주와 페트라, 둘 다 냉큼 손을 드는군. 저 아가씨들은 뭔가 약간 다른 개념 때문에 반사적으로 지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하여간 미끼로서 최상급이긴 하겠어. 좋아. 물론 먼저, 사막의 쓰리 해골바가지 새끼들을 처리해야……………
-주인님! 미령님의 연락입니다.
응? 대교와 미령이는 아까 소령이 따라 나가서 아직 안 돌아왔다고 했지? 설마 소령이에게 무슨 일이?
“유준오빠! 빨리 소령 언니 좀 말려줘요!”
“뭐? 무슨 일이야?”
“소령 언니가 술을 너무 많이………….”
“야! 미성년자가 무슨 술을… 아, 아니 하여간 내가 갈게!”
“여긴 호텔에서 세 블록 정도 떨어진 술집인데, 술집 이름은… let’s go all the way!”
에구. 우리 주당 소령이가 드디어 옛날 버릇 나왔구나.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다가 문득 물었다.
“어, 근데 대교는?”
“대교 언니는 우리에게 추근댄 남자들을 쫓아서 밖에… 아, 실은 소령 언니 달래다가 대교 언니도 술을 좀…………
일났군. 유일하게 소령 이의 폭주(暴酒)를 막을 수 있는 대교까지… 아니, 그보다 대교 녀석도 취하면 조금(?) 위험할지 몰라!
나는 천년 전 술김에 산적들의 마을 전체를 박살냈다는 대교의 일화가 생각나서 더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 게 몽몽의 전에 없이 다급한음성이 들려왔다.
-주인님!죄송합니다! 저의 체크가 늦었습니다!
“됐어, 인마. 소령이 술 마시는 것까지 니가 책임질 필요는 없..”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약 13초 전부터 소령님의 전용 회선들이 가동되었으며, 목적은 미국 내 다수의 전술 핵기지 해킹 입니다!
뭐시라고라고라?
-제가 계속 차단하고 있지만, 소령님이 전세계 네트워크상에 확보해 놓은 거점과 회선은 저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
소령이 녀석………! 몽몽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난 후에 나름대로 뭔가 준비해 놓았던 건가…………? 설마 그걸 이렇게 쓸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결국 폭 주 끝에 폭주(暴走)단추를 눌러 버린 거야.
내 머리 속으로………. 소령이가 양주를 병나발 불며 중얼거리고 있을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씨이~ 이 쏘령이의 왕좌님 천 오빠. 해친 자드을! 전부! 다아! 주거! 주거 빼려!끄윽~!’
ᅳ참고로, 모든 해킹 코드에 등록된 핵미사일의 타격 지점은………….
나는 어느덧 걸음을 멈춘 상태였고, 내 뒤를 따라온 자룡대주와 페트라를 천천히 돌아보며 말해주어야 했다.
“저기, 어쩌면 우리는 사막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죄송합니다, 주인님. 결국 한 기지의 해킹을 막지 못했습니다.
“…게, 아니라. 못 가.”
나는 의아해하는 자룡대주와 페트라에게 뭐라 자세히 설명하기가 뭐해서 그냥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이제 그리 서둘지 않는 걸음으로 호텔을 나와 소령이가 있다는 술집을 향해 가고 있자니 허공에 몽몽이 중계하는 패티의 위성 영상이 펼쳐지기 시 작했다.
황량한 모래 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사막 위의 군사기지가 번쩍! 강렬한 섬광으로 뒤덮였다. 나는 우아하게(?)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을 감상하며 선 언해야 했다.
“…KKK단 산하 쓰리 스켈레톤 특수강습부대 토벌 작전… 조기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