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23화 : KKK 단의 대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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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23화 : KKK 단의 대마법사


3 KKK 단의 대마법사

“접니다, 유준 형님.”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고 뻔뻔스러운 원판의 음성이었다. 물론 ‘중요한 용건’이라고 했으니 몽몽이 연결해준 거겠지만……………

“야! 이번엔 네가 먼저 호텔 방에 짱박혀 연락도 안 받아서 그냥 온 거잖아! 근데 왜 전화질이야?”

“…이 비논리적인 오버는… 애인과의 얼레리꼴레리를 방해받은 자의 전형적인 행동 패턴이로군.”

하여간 빌어먹을 놈.

“그래, 네 말대로다. 넌 솔로도 아닌 놈이 왜 방해질이야?”

“…프리제타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뭐?

좋은 시간을 방해받아 나 못지않게 불쾌해 하던 대교가 표정을 풀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너, 에레보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더니………….”

“프리제타가 에레보스의 멤버가 된 것까지는 몰랐지요. 그 아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프리제타도 ‘레인’ 녀석과 비슷한 경우인 거냐? 그러니까………….”

“레인과 동갑입니다. 레인과 같은 라인에서 탄생하고 2년 정도는 녀석과 친남매처럼 함께 지내며 내게 교육 받았었지만 다른 연구기관으로 끌 려 간 후로는 나도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지요.”

“…그 아이는 아직 잊지 않고 있는 것 같더라. 자신의 형제들… 그리고 너에 대해서도.”

아까 프리제타는 유령 남매를 따라가기 직전에 내게 원판에 대해서 물었었다.

““그 분은 아직도 악몽을 꾸시나요’라고 하더라.”

그래. 분명 그랬었다. 하지만…………….

“……뭐라고 답해주었습니까?”

“난 너하고 안 친하다고 그랬다.”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결국 쿡,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다운 대답이었군.”

“야. 니가 뭔 꿈을 꾸면서 자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 니 애인 란이라면 알지 몰라도…..”

어, 가만?

그러고 보니… 언젠가 새벽에 원판의 아파트로 쳐들어갔을 때, 녀석의 아파트는 그 전날까지 있었던 가구며 작은 장식물 하나까지도 싸그리 치워 진… 마치 정신병원의 독방처럼 적막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지?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 흠. 지금도 사실 뭐, 별로 궁금하지는 않지만…………. “네가 아파트를 엄청 허전하게 만들어 놓고 자던 건 그 때문이었던 거냐?”

…으음. 예의상(?) 물어봐 준 거지만 막상 대답이 금방 안 나오니까 은근히 궁금해지기 시작하는군.

“그, 뭐… 원판 너도 12인의 사도들에게 괴롭힘께나 받은 건 알지만………….”

…에고. 계속 반응이 없으니까 왠지 내가 다른 사람 괴로운 기억을 끄집어내서 약 올리는 놈이 된 것 같은 기분이네. 애초에 말을 꺼낸 건 프리제타 였는데 말야.

“다음에 만나게 되면 말입니다.”

응?

“그 아이에게 이렇게 전해주십시오.”

어……………? 원판 녀석 음성에 어쩐지 웃음기가 섞인 것 같은………….

“난 여전히 밤마다 그 추악한 괴물들의 이빨에 찢겨 피와 살점을 뿌리며

뼈째 삼켜진다고..

“야! 넌 걔 부모 격인데 얘길 꼭 그 따위로 해야겠냐? 듣는 애 기분도 좀……………”

“후후~역시 당신은 보기보다 다정한 남자로군.”

“끊는다?”

“아아- 미안, 미안. 표현의 수위는 당신 마음대로 조절해도 좋아, 중요한 건 이제 그 악몽도 끝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니까.” “뭐?”

이거 지금 원판이 12인의 사도로부터 도망칠 방법을 찾았다는 얘기는, 아무래도 이 녀석 이미지와 안 맞지? 그렇다면 어떻게든 12인의 사도 를 모두 없앨 수 있는 길을 찾았다는………….

“잘 부탁해요.”

에?

“당신・・・ 유준 형님이라면, 나보다 귀여운 조카 프리제타를 위해서라도 용감하게 12인의 사도와 싸워 물리쳐 주시겠지요?”

이 자식…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인 거야?

“음… 프리제타 얘기는 이 정도로 하죠. 사실 그보다 다른 아이들에 관한 부탁이 있어서 전화한 거였는데……….”

“CR들?”

“그 아이들을 이번 일에 투입해주는 건 어떨까 합니다만.”

CR들을 KKK단 토벌에…………?

그러고 보니 CR들을 지하무림에 편입시켜 놓기는 했어도 아직 개개인의 능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니까 시험 삼아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도 같기는 한데… 원판 녀석이 먼저 얘기하니까 왠지 그러기 싫은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을 어? 잠깐? 제안하는 게 아니라… 부탁?

“그 아이들이 팔려가 학대받았던 곳에는 KKK단도………….”

“…접수.”

이런. 나도 모르게 그만…………!

“역시 당신은 다정한 남자………….”

“몽몽. 끊어.”

딸칵.

전화는 끊겼지만 어쩐지 원판 녀석의 재수 없는 썩소가 훤히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요몽이 감금되기 전에 자주 듣기는 했지만 저도 가만 보니 두 분은 은근히 잘 통하는 사이인 것 같아요.”

“뭐시여! 지금 설마 나와 원판 놈 얘기를 한 겨?”

“물론 전 요몽의 발칙한 생각과 달리 ………….”

윽! 요몽 녀석이 대체 뭐라고 했기에………….

“전 두 분이 진짜 형제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야! 대교 너까지 왜 그래?”

“후후~ 사실 이런 애증관계는 때로 당사자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보는 경우가 있답니다.”

“에이-진짜!”

나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교가 이수일과 심순애의 심순애처럼 내 다리를 잡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정말… 화나셨쎄요?”

심순애가 아니라 심거성이로구나. 집에서 어머니와 TV께나 본다 싶더니……………

「주인님.」

에고. 계속 화를 내기도 애매했는데 마침 잘됐다.

“왜 그냐, 몽몽.”

「별장 안에서 포로 심문이 끝난 것 같습니다. 또한, 다수의 루트부터 작전 코드명 ‘낚시’의 소스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응? 다수의 루트? 호텔에서 대기 중인 애들 말고 다른 곳에서도?”

「그렇습니다. 미령님께서 홍콩의 소교님께도 연락을 취했습니다.」

난 굳이 소교까지 참가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으음. 이거 자룡대주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최고 인기 사냥감 상(?)은 자룡대주가 차지하는 건 힘들 지도 모르겠군.

나와 대교가 별장으로 돌아갔을 때, 실내에는 전황마군과 아처 왕만이 데릭 허버트와 함께 있었다.

“아……!”

별장 밖에 있다가 우리보다 한 발 늦게 들어오던 자룡대주가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비명소리로 봐서는 프랑켄쉬타인 몰골이 되어 있을 것 같았던 데릭 허버트가 거의 말짱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겉보기에는 그렇지만 눈빛이 썩은 동태 꼴이 되어 축 처져 있는 걸로 봐서 꽤 고생을 했을 것 같기는 한데………….

“데릭?”

아쳐 왕이었다. 그가 작게 이름을 부르자 데릭 허버트가 화들짝 놀라 차렷 자세를 취한다.

“천주께서 납시면 어찌 하라고 했었지?”

“모, 모든 것을 숨김없이!”

오- 예전 군대의 군기발랄한 이등병 모드로군.

“저희 KKK단의 수뇌부는 현재………….”

그냥 자백하는 정도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데릭 허버트는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아득바득(?)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었다. 너무 시시콜콜히 늘어놔서 요점정리가 필요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쓰리 스켈레톤 부대를 이끌고 호텔을 습격했던 일을 아직 수뇌부에 알리지 않았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에레보스의 초능력자들이 부추겨서 단독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건데… 전에도 에레보스 녀석들과 친했었나?”

“그렇지 않습니다! 대마법사 ‘케인’님이 오기 전까지는 프리메이슨과의 연계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대마법사……………?”

“저희 KKK단의 새로운 지도자! 초대 ‘제국의 마법사(Imperial Wizard)’님의 현신입니다!”

원래 KKK단은 중세 분위기 내기를 좋아해서 초기의 보스를 제국의 마법사라 불렀다고 하더니… 최근에 또 어떤 놈이 마법사인 척하고 보스자리 를 차지한 정도가 아닐 수도 있으려나?

“그 자를 직접 만나 본 적이 있나? 마법 쓰는 건 봤고?”

“그렇습니다! 그 분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진정 위대한 마법사였습니다!”

쯧. 내 이럴 줄 알았어. 뱀파이어에 이어서 이제는 좀비들을 부리는 마법사와 싸워야 한다 이거지?

“그 분은 칼을 맞고 총알이 박혀도 결코 죽지 않습니다!”

불사신 마법사를 뭐라고 하더라………..? 판타지 계열 책을 본지가 오래라 생각이 잘 안 나네. 어쨌든…..

“그것뿐이야?”

“예?”

“현재 내 부하들 중에도 그 정도로는 안 죽는 애들 많거든?”

CR들 얘기다. 부활할 때 나이를 한꺼번에 먹는 단점이 있어서 문제지만, 여하간 불사신이 맞긴 하지.

“저희 대마법사님의 한마디에 모든 KKK단… 미군내 수만의 군대까지 순식간에 집결할

“그 중에서 쓰리 스켈레톤 부대는 빼.”

“예?”

“어젯밤에 핵미사일 맞고 통째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놀라는 걸 보니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던 모양이군. 하긴, ‘당했다’고 외부로 보고할 병력조차 남아 있지 못했을 테니………….

“그… 대마법사님을 배신한 자는 달밤에 라이칸스로프(Lycan-thrope)에게 물려 죽는다는 소문이……….”

나는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새깽이 늑대 라프가 거꾸로 달라붙어 졸고 있었다.

「몽몽. 라프의 봉인 한정 해제.」

얼마 전부터 마력 제어가 가능해진 몽몽이 봉인을 일시 풀어주자, 라프는 잠결에도 그걸 알았는지 별안간 부욱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봉인.」

라프는 뜬금없이 풀렸다가 다시 봉인되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깡총 내 어깨로 내려왔다.

“얘는 분신이고. 본체는 마계의 늑대 마신이야. 본체가 라이칸스로프들의 선조이고 신이라니까, 얜 신의 아들쯤 되려나?”

“그런 괴물을 애완동물처럼………….”

데릭 허버트는 어느 사이 요란한 이등병 모드를 잊어버린 것 같았지만 굳이 지적해주지는 않았다. 이 현명한(?) 남자의 얼굴에는 이미 ‘완전 절망 및’이라는 표정이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근데・・・ 당신이 주최하는 사냥대회는 KKK단의 회원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사님을 즐기는 부자라면 누구나…”

더 잘 됐군. 꼭 KKK단이 아니라도 그런 놈들은 같이 청소해야 하나 말이다.

“자룡대주! 준비는?”

“예, 천주. 미끼는 조금 전 페트라 부대주로부터 모두 전송 받았습니다.”

자룡대주가 전마부대원들의 지원을 받아서 1층의 TV를 옮겨 오고 노트북과 연결하는 사이 아쳐 왕은 직접 커피를 타서 데릭 허버트에게 대접해주 고 있었다.

데릭 허버트는 고문 악마(?) 아쳐 왕의 친절에 더욱 겁을 먹는 것 같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의 행동에 호기심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

데릭 허버트는 상영이 시작된 TV화면 속의 자룡대주와 TV옆에서 미소 짓고 있는 자룡대주를 번갈아 보다가 곧 ‘미끼’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는 것 같았다.

“이건 확실히 남부 쪽 회원들에게 인기를 끌 만한… 설마 유색인종 중에 이렇게 멋진 라인의 다리를 가진 여자가 있을 줄은…”

무심코 중얼거리던 데릭 허버트가 흠칫 입을 다문 것은 자룡대주의 차가운 시선 때문이었다.

“각선미・・・뿐인가요?”

“아, 아니요. 당신은 그뿐 아니라… 그… 현대의 차가운 정장에 감힌 내면의 원시적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여 언제고 폭발할 것만 같은 메마른 회색 빌딩 속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매혹의 향기를 발산하는…………….”

오. 명색이 영화 제작자라고 이 와중에도 표현이 제법·

“야성의 여비서.”

에? 나름 괜찮다가 갑자기 웬 3류 에로 비디오 제목?

자룡대주는 더욱 싸늘한 기색을 띠기 시작했지만 데릭 허버트는 슬쩍 그녀를 외면하고는 다음 동영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음……? 인형이 아니었군. 오~ 기본 용모도 그렇지만 저 무미건조한 표정이 특히 압권인 걸?”

어째 소령이의 평가도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이번에는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소령이는 아직 천우신이 부상당한 충격에서 벗어나 지 못했는지 미령이가 카메라를 들이대며 연신 뭐라 부추겨도 귀찮은 표정으로 누워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 귀찮아하는 표정을 이 나름 유능하다는 영화 제작자께서는………………

“분명 살아 있는 소녀임에도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움으로 거울처럼 추악함을 비추는… 으음. 캔자스의 그 형제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겠군.” 저 인형 소녀가 바로 댁의 후배 부대원들을 지구상에서 지워버린 몰살소녀…라는 건 굳이 알려줄 필요 없겠지?

“이번에는 오드아이……? 오!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파워풀하고 싱그러운 육체로다! 게다가 영국 여왕처럼 고고하면서도 황야의 처녀처럼 쓸쓸 한 분위기는 서부의 파렴치한 젊은이들이 침을 흘릴 법한………….”

영상 속의 흑주는 지금 옥상 난간에 앉아서 졸고 있을 뿐인데 대체 뭘 보고 저런 표현이 나오는 건지 원.

“…친주.”

자룡대주였다. 그녀가 왠지 미심쩍어 하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다들 그냥 일상적인 모습을 찍어서 보냈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요?”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

“당연히 상관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평소의 더럽혀지지 않은 모습을 찍어서 보여줘야 상품평가가 좋은 경향이 있습니다.”

눈치 없는 데릭 허버트의 말에 자룡대주의 입가가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쓸데없는 액션과 에로(쓰러질 때 치마가 좀 올라가긴 했음.) 연 기를 요구해서 고생시킨 지하무림 프로덕션의 대표인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해야 했다.

“와아~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빙고. 대충 말하고 본 건데 마침 정말 소교가 나온다.

“… …”

…에? 이럴 때는 왜 바로 평가가 나오지 않는 거야? 우리 프로덕션이 자랑하는 초특급 보호본능자극촉발소녀가 나왔는데 우째서……….

“로드 오브 헬(Lord of hell).”

으잉? 소교에게 웬 뚱딴지 같은 평가를………………

“저 소녀는 대체 누구입니까?”

…아. 지옥의 군주란 말은 날 부르는 소리였구나. 근데, 그보다 이 남자… 표정이 왜 이래…………..?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이 왠지 아까 조 금 심하게 심문 받게 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정상적인(?) 인간의 표정이랄까……?

사실 영상 속의 소교는 그리 특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늘 보던 소교가 셀프 촬영을 하면서 약간 어색해하고 공연히 쑥스 러워하고 있는 모습일 뿐이었다. 하지만 데릭 허버트는 그런 소교에게서 멍하니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진심으로… 백인 이외의 여성에게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아니, 전세계의 어떤 소녀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미 지의 매력이….”

정말 진심이 에누리없이 느껴지는 음성이었고, 나야 우리 소교가 칭찬 받는 건 좋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한 반응인 것 같은데……………?

슬쩍 다른 관객(?)들의 반응도 살펴보았다. 데릭 허버트처럼 완전히 뻑 간 모드는 아닌 것도 같지만… 자룡대주의 샐쭉한 기색이 사라져 있었고 심 심한 듯 대검을 돌리고 있던 전황마군의 손동작도 멈춰 있었으며 고문 전문가 아쳐 왕까지 뽀뽀뽀를 보는 어린아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것 봐라…………?

전에 흑해마군(黑海魔君)의 배에서는 나도 ‘애잔 모드 슈퍼 울트라 니트로 장착’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대교의 부활 이후로 소교도 다 시 어느 정도 밝아져서 예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느끼자 못했는데…………….

“몽몽.”

「저의 디지털 단위 분석으로는 현재 관람자들의 반응 수위를 예측 할 수 있는 데이터가 구성된 영상으로 판단할 근거가 불충분합니다. 그러나 현 재의 상황을 포함하여, 최근 확인된 소교님의 주변 영향력은 뚜렷하게 계측 가능한 현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재현이 어려운 예외적 패턴의 데이터 집합체. 즉. ‘예술’이라 칭하는 분야의 창조물이 인간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과 유사한 사례로 분류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직접 대하지 않고 화면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을 정도의 예술…………?

내 눈에 소교는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피기 전의 애초로운 들꽃 같을 뿐인데… 어느 틈에 나만 보지 못하는 꽃이 만개했다는 얘기인 가……………? 예구. 이거 어째 나만 예술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 된 기분이……………

“하아~.”

자룡대주가 먼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득 쓴웃음을 떠올렸다.

“어째서 저 아가씨를 보면 나까지 이렇게 가슴이 아려 오는지…”

전황마군은 자룡대주처럼 소리내어 중얼거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낯선 감정을 느낀 자신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 다.

냉혹한 고문 전문가 아쳐 왕 역시 소교가 나오는 동영상이 끝나자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는 표정이 되고 있으니… 소교의 ‘계측 기능한 영향력’은 최상위 미혼공(迷魂功) ・・・ 말하자면 아예 무공 수준이라고 봐도 될 것 같지?

흐음. 뇌룡대주(雷龍隊主)를 호위로 붙여줬어도 약간은 불안했었는데… 이 정도면 자체 방어력을 갖추게 된 것 같으니까 더 안심해도 되겠어. 내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사이, 데릭 허버트가 다음 동영상들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호텔에서 본 아가씨인 것 같은데… 역시 매력적인 아가씨군요.”

이런

“…예. 이 아가씨도 충분히 사냥꾼들에게 어필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이런…………….

“으음. 분명 매혹적인 소녀이기는 한데………….”

계속 담담한 평가라니……………!

‘소교의 셀카’라는 애잔 블록버스터(?) 다음으로 개봉되는 바람에 흥행에 실패한 페트라, 은사마군, 미령이까지. 지못미!

“오. 이건……!”

데릭 허버트가 다시 살짝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건 엉뚱하게도 블랙 스마이커 비행 소대의 티미였다. 데릭 허버트 자신이 남자 취향은 아닌지 화려 한 미사여구를 동원한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소위 ‘상품 가치를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 다음 영상 속의 인물은 중국에 남겨두고 왔던……………

“호오~ 상당히 인상적인 미소년이로군! 지난날의 ‘더 월’ 못지않아!”

「…더 월(The Wall)은 헐리웃 배우 ‘키아누 리브스’의 별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어린 키아누 리브스 수준의 미소년………?

천음마군(天飮魔君)이?

이 무슨 망발… 아, 아닌가? 행실에 따른 이미지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나도 처음 만났을 때는 꽤 핸섬한 미소년 스타일이라고 느꼈었군. 사실 상당한 동안이기도 하고 말이야. “어??”

데릭 허버트가 의아한 소리를 낸 건 천음마군의 영상을 마지막으로 동영상 상영이 종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아가씨는 왜………….”

데릭 허버트의 시선이 향한 건 대교였다. 그러나 대교는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제 모습을 담을 수 있는 권리는 오직 한 분께만 있습니다.”

대교가 ‘그래서 불만 있나요?’라는 표정으로 스윽 주위를 돌아보자 전황마군과 아쳐 왕은 재빨리 딴청을 피웠고, 자룡대주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 였다.

“이 분은 우리 지하무림의 여신….! 당신 따위가 평가하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어요.”

응……?

분명 강하게 수긍하는 태도인데… 표정 어딘가에 씁쓸해하는 기색이. 어? 대교…? 대교 잰 또 왜 저렇게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와 함께 자룡대주 를 보고 있는 거지……? 설마… 대교는 일부러 자룡대주를 자극한 건가…………?

언뜻 그런 식의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난 결국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보니 그렇게까지 의미심장한 표정은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 대교에게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으니…………….

“…잘 알겠습니다. 제 생각에도 미끼는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데릭 허버트의 눈은 아쉬움을 담아 조금 더 대교의 자태에 머무는 것 같았지만 결국 시선을 내게 돌렸다.

“그런데 실은 FBI의 감시 때문에 당분간 사냥 일정을 잡기가 어려운데……….”

나는 당연히 자룡대주를 보았고, 그녀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버트 씨. 그 문제는 신경 쓰지 마세요. 대략 다섯 시간 전, FBI는 당신에 관한 모든 사항을 우리에게 넘겼습니다.”

응……?

FBI의 감시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완전히 넘겨받았단 말야?

데릭 허버트는 물론이고, 나도 약간 놀라서 바라보니 자룡대주는 조금 민망해하는 기색으로 전음을 보내왔다.

-실은… 저보다 페트라가 FBI에 인맥이 많아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과연・・・ 양지의 화려한 수완가 자룡대주와 음지의 뒷거래 전문 페트라는 멋진 콤비로군.

“그렇다면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데릭 허버트는 불과 몇 십분 정도 전까지 지옥 같은 고문을 받았던 사람답지 않게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본 동영상 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이 현실을 잊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난 본래 데릭 허버트에게는 동영상 평가를 하는 것까지만 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에게 영상 편집 및 회원 모집 등의 거의 모든 과정 을 맡긴 채 별장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 난 아무래도 자기 분야에 열심인 사람에게는 약해서 말이야. 음・・・ 근데 자룡대주는 왜 그래? 뭐 잘못된 거라도 있어?”

약간 불안한 얼굴로 별장 쪽을 돌아보던 자룡대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천주. 다만… 저자가 사냥꾼들과의 접촉에서 만의 하나라도 허튼 짓을 시도할까 우려되어……….”

자룡대주, 이 아가씨야. 이런 게 바로 대교와 자네의 차이일세. 우리 대교는 이 몸이 결정하고 진행하는 일은 무조건 믿어주고 의심조차 않거든?

뭐, 물론 그게 때로는 약간 부담이 되기도 하고, 나란 놈은 본래 내가 생각해도 썩 믿음직하지는 못하네…………? 에고. 아무래도 수하들까지 전부 대교 같으면 오히려 곤란하겠구나.

“그건 어쨌든 몽몽이 철저하게 체크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솔직히 나야 그쪽 분야를 잘 모르지만 몽몽이 얼마나 엄청난 녀석 인지는 알거든.”

“아………! 제가 잠시 그 몽몽 씨의 존재를 잊고 있었군요.”

…쿱! 몽몽 녀석이 이렇게 불리는 건 나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실은 저 역시 첨단 기기를 자주 활용하기는 해도 기술적인 것 까지는 잘 모릅니다. 페트라 부대주는 컴퓨팅과 네트워크 전문가여서 몽몽 씨의 능 력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말입니다.”

그렇겠군. 몽몽은 페트라 부대주의 실력도 소령이 수준에 꽤 근접할 정도로 대단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으니……………

“페트라 부대주는 사실 몽몽 씨의………….”

자룡대주는 무심코 말을 꺼내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지만 이미 늦었다.

“페트라? 페트라가 뭐?”

“아니, 그…….”

호오. 이것 봐라? 이 아가씨가 감히 내 앞에서 대답을 망설이네? 그렇다는 건 그 듣기도 좋고 영양가도(?) 많다는 사생활 얘기? “저어, 실은…….”

자룡대주는 나와 대교가 동시에 그녀에게 바싹 다가서며 보낸 연합 눈빛 공격, ‘말해주지 않으면 삐친다. 정말 삐칠 거야!’에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실은… 페트라 부대주의 몽몽 씨에 대한 감정이 보통이 아닌…….”

「주, 주인님! 긴급 보고입니다!」

으음~ 몽몽 씨에 대한… 다음부터 잘 못 들었다. 몽몽 녀석, 지금 설마…………

“잠깐!”

일단 자룡대주의 말을 막았다.

「데릭 허버트의 사이트에 접속한 자들 중에 중요 체크인물, ‘J&D령 1급 수배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J&D령 1급 수배자…………? J&D령이라는 용어는 사실 반쯤 장난으로 만든 용어, 즉 진유준&대교의 공통 명령이란 말이지만. 어쨌든 중요한 사안 이 맞긴 한 모양인데………………

“미안, 자룡대주. 지금 바로 당사자에게 연락이 왔네.”

내가 양해를 구하며 몽드폰을 꺼내 들자 자룡대주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며 주위를 돌아본다.

“어머. 설마 지금의 대화까지 해킹을………….”

“어, 아냐. 몽몽은 적어도 나와 관련된 일은 해킹이나 도청을 안 해.”

대신 그냥 대놓고 옆에(?) 같이 있어서 문제지만 말이다.

“그냥 다른 용무일 거야.”

쯧. 이렇게 말한다 해도 눈치 빠른 자룡대주에게 다시 이 얘기 듣기는 어려울지도………….

“아, 그렇다면 제가 얘기했다고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페트라도 자신의 애틋한 감정이 알려지는 건 아직 원치 않고 있으며, 몽몽 씨에 게는 언젠가 직접 아니, 페트라의 성격상 조만간 대쉬에 들어갈지도…….”

…음. 괜한 걱정이군. 자룡대주 역시 여자였어. 결국 폭로성 수다의 본능에 충실한 걸 보면 말야. 그나저나……………

나는 자룡대주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는 신호를 보내며, 항상 켜져 있는 몽드폰을 새삼 켜는 척을 했다.

“몽몽.”

“몽모옹~?”

「…아, 예, 예?」

오호통재라~!(?) 천하의 몽몽 선생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날이 있을 줄이야!

“얼굴 좀 보자. 명령이야.”

어쩔 수 없이 은발 소년 모드를 드러낸 몽몽은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지만, 연기가 모락모락 오를 것처럼 붉어진 안색을 숨길 수는 없었 다.

“어머, 귀엽……!”

자신도 모르게 탄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던 대교가 재빨리 자신의 입을 막았다.

“아… 미안. 놀릴 생각은 없단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

다독거려 주는 대교와 달리 나는 솔직히 쬐금(?) 놀려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 놀림마왕 진유준도 차마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몽몽의 안색과 식은 땀은(?) 장난이 아니었다.

사실상 몰래 연애질하다 걸린 것도 아니고 그냥 ‘옆 반 여학생의 소문을 들은’ 정도 수준의 얘기였을 뿐인데 이 정도라니…

“저기, 몽몽. 보고는 천천히 해도 돼. 너도 쉬면서 다른 생각도 좀 하고 그래야지.”

대교는 마치 처음 사춘기를 맞은 아이를 대하는 엄마처럼 다정하게 말했고, 나도 결국 ‘놀리고 싶어 죽겠다!’는 본능을(?) 참고 명령했다.

“그래. 내무반(?) 가서 쉬어. 팍팍 쉬어!”

「…감사합니다, 주인님.

으음. 정말 가버렸다.

-이거 이거 내가 우리 몽몽을 너무 순진하게 키웠나?

난 대교의 손을 잡으며 약간의 불만이 섞인 전음을 보냈지만, 태교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 몽몽이 저렇게 순진해서 전 더 귀엽기만 한 걸요.

-아니,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말야. 자기가 먼저 과감하게 작업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이건 뭐, 지가 더 계집애 같으니………….

-너무 그러지 마세요. 처음이라 그러니 앞으로 차차 달라지했죠.

-그야 당연히 그래야지. 사내 녀석은 좀 터프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구, 암.

-후후. 당신처럼요?

-아니, 뭐. 꼭 내가 그렇다기보다……………

으음. 내가 터프한 남자를 자처할 수 있는지를 떠나서… 우리 대화 분위기가 어째 좀..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네요. 우리 몽몽은 인간이 아니었어요.

대교는 너무나 당연한 걸 이제야 깨달은 듯 약간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어쩌죠? 몽몽도 페트라 부대주에게 관심을 가지기 전에 막아야 할까요? 아, 하지만 조금 전의 반응을 보면 몽몽 역시 이미 어느 정도는……………

어째 역사 깊은 나보다도 대교가 더 몽몽에 대한 의인화가 더 심한 것 같은… 으음. 그러고 보니 대교는 봉인되었던 세월 동안 몽몽 생각도 꽤나 했 었겠구나.

-정말 어쩌지요? 자칫 몽몽이 이번 일로 상처를 받기라도 하면……….

-저기, 대교. 아직 몽몽은 별다른 소리 안 했거든? 이성에게 관심을 받은 것이 처음이라 당황했는지는 몰라도 벌써 심각한 상황이라고 규정하기 는 좀…….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요. 사랑이란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는 법이어서⋯ 음. 저도 그랬거든요.

-그거, 내가 도둑놈이란 얘기?

-아이 차암. 그런 뜻이 아니구요.

유치한 농담으로 살짝 주의를 돌려봤지만 대교는 쉽게 걱정을 접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페트라 부대주에게는 미안하지만, 역시 사는 세계가 다르니 제가 나서서라도 막아야 할지도………….

어쩐지 아침 드라마의 시어머니 대사를 듣는 기분이네.

-대교, 아직 확실해진 것도 없는데, 너무 앞서가지 말자구.

-그야… 아, 죄송해요. 제가 잠시 너무 흥분했었나 봐요.

-훗, 게다가 벌써 엄마에 시어머니 모드까지 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어머, 어머? 제, 제가 그랬나요?

대교는 화들짝 얼굴을 붉혔고, 사실 처음에는 비슷한 모드였던 나만 교묘하게 먼저 빠져 나오는데 성공한 셈이었다. 「주인님.」

오, 때마침 아들, 아니 몽몽이 돌아와 줬다.

「…비정기 오류 점검으로 보고가 늦어 죄송합니다.」

“어, 아냐, 아냐. 그건 오류가 아닌 하여간 괜찮으니까, 죄송할 필요 없어.”

“벌써 ・・・ 정말 괜찮겠니?”

몽몽은 우리의 과보호(?) 분위기가 오히려 부담스러운 눈치였지만, 짐짓 모른 체 보고를 시작했다.

「그동안 J&D・・・ 즉, 주인님과 대교님께서 공동으로 내린 명령에 의해 규정된 1급 수배자들 중, 이번에 탐지된 자는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諸 島)에서의 ……………」

이런…………! 바로 그자들이었나?

「…코드명 ‘신들의 유희’ 멤버입니다.」

그래… 대교와 내가 12인의 사도들 못지않게 반드시 찾아내고 싶었던 건 바로 그놈들이었다. 주가혜로서의 대교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그 섬………! 그 때문에 내가 미쳐 날뛰게 되었던 그 섬에서의 우리를 도박의 칩과 구경거리로 삼아 즐겼던 자들…………!

「신들의 유희는 주최자인 ‘엘(L)’의 죽음 이후 폐지된 것으로 추정되며, 멤버였던 자들도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데릭 허 버트의 사이트로 접속했던 자가 확인됨으로서 곧 다른 멤버들의 정보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흣. 그동안 천하의 몽몽도 못 찾았을 정도로 꼭꼭 짱 박혀 있던 놈들이 이런 일로 걸려들다니 역시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 “야.”

“예. 그렇・・・군요.”

대교에게는 이미 조금 전까지의 다정한 분위기가 사라져 있었다. 나도 놈들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지만 대교의 입장은 더 특별할 수밖에 없었 다.

주가혜였을 때의 기억에는 대부분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니… 당시 그자들 모두에게 ‘똑같은 신세가 되게 해주겠다고 맹세했던 때의 기억 과 감정은 좀 다른 모양이군. 하긴, 그때의 대교는 내가 오히려 나서서 진정시켜야 할 정도로 빡 돌았었으니……………

“그 자들, 신들의 유희에게만은 제가 나서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역시 드물게 요구의 말투가 나오는군.

“…그래. 물론 그래야지.”

일단 대답은 했지만, 난 지금 대교의 뜻과 약간 다른 방식이 생각나 버렸다.

-자룡대주.

대기 중이던 자룡대주를 부른 후에 슬며시 손을 놓아버린 의미를 대교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즉흥적인 결정…..?

아니야. 계속 생각해왔으나 실행할 타이밍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지. 뭐, 그렇다고 지금도 좋은 기회라고 할 만한 상황인 건 아니지만… 계속 더 따 지고 재봤자 뾰족한 수가 나올 리가 없어. 그래. 이럴 때는 저지르고 보는 것이 내 스따일이쥐. 암.

“…자룡대주. CR들은 어떻게 되었지?”

“편재 된 병력 전원. 천음마군의 인솔하에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며, 도착 예정 시간은 8시간 정도 후입니다. 단, 해당 부대의 본래 수장인 남자 는 아직 행방조차……….”

““레인’ 말이지? 그 녀석은 아직 선행 임무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보다……….”

레인 녀석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짱 박혀 있는 형제들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사실상 언제 복귀할지 기약이 없다.

“페트라에게 연락해서 은사마군을 이쪽으로 보내라고 해.”

레인이 없는 CR의 아이들을 이끌 수 있는 건, 녀석들이 가장 따르는 은사마군일 것이다. 캔들 리 진영에는 막강 뱀파이어 ‘에스’가 정식으로 합류 했으니까 은사마군이 빠져도 별 문제가 없을 테고 말이다.

“모든 작전은 데릭 허버트의 사냥 대회를 기준으로 진행되며 세부 조정에 들어가겠지만, 당장 큰 변동 사항은……………”

나는 대교와 자룡대주의 중간쯤으로 몸을 돌리며 선언했다.

“두 사람은 먼저 이 작전에서 빠져줘야겠어.”

“예?”

자룡대주는 흠칫 놀라며 즉시 반문했지만, 대교의 표정은 아직 애매모호했다.

“그건, 대교가 나와는 별도로 진행할 작전이 있기 때문이야.”

훗. 대교도 이제야 표정이 확 바뀌는군.

“따라서 앞으로는 자룡대주와 전황마군을 포함한・・・ 그러니까, 은사마군과 CR을 제외한 모든 지하무림의 지휘권을 대교가 맡는다.”

드디어 두 아가씨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는군. 사실 차근차근 얘기해줘도 되는데 난 굳이 깜짝쇼를 하는 습관이 있어서 탈이란 말야?

“자룡대주가 대교를 보좌해서 처리해줘야 할 적은… 뭐, 성향은 KKK단 놈들과 비슷해. 하지만 ‘신’을 자처할 정도이니 KKK단 따위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의 거물이겠지. 잘 부탁해, 자룡대주.”

“보, 복명!”

잠시 후.

얼떨떨해 하면서도 결국 명령을 받들고 물러간 자룡대주와 달리 대교의 안색은 더욱 복잡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맡기는 김에 아주 팍팍 밀어주는 건데, 아직도 부족해?”

“아, 아뇨. 그게 아니라………….”

“훗! 그럼 잘 해봐. 대교, 홧팅!”

짐짓 장난스럽게 파이팅 포즈까지 취해줬건만, 대교는 오히려 금방 눈물을 흘리기라도 할 듯한 표정이 되고 있었다.

“제가 제가 뭔가 잘못이라도….”

“에이. 그런 거 아니야. 사실은…”

“죄송해요! 역시 여인네가 감히 함부로 나서서 그래서 화가 나신 거죠?”

“별소리 다하네. 내가 그런 놈 아닌 거 알면서. 그러니까 실은…….” 

“하지만!”

에구. 뭔 말을 못하게 하네.

“그렇다면 어째서 저를… 님의 곁에서 떼어놓으시려는… 아, 역시 제가 내력 보좌에 있어 실수를…”

“훗. 그 반대야.”

“예?”

“원앙해비(鴛鴦偕飛)… 그 심법도. 심법을 쓰는 대교 너의 보좌도… 너무 훌륭해. 너무 훌륭해서 난 너의 손을 잡음으로서 내가 내공을 잃은 몸 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싸울 수 있었어. 하지만.. 그게 오히려 문제라구! 내공을 되찾기 위해서는 역시 혼자 빡시게 굴러 볼 필요가…”

대교도 비로소 내 뜻을 깨닫는 것 같았지만, 이미 한 방울 눈물이 또옥 떨어지고 있었다.

“그, 그런・・・ 제가 생각이 모자라 못난 모습을 흑! 죄송해요!”

“아, 거. 니가 왜 죄송해? 내가 괜히 말을 돌려서 오해를… 그, 그치만 너도 그렇지! 다른 일에는 엄청 눈치 빠른 똑순이면서 이럴 때는 왜 이렇게 바보처럼… 어허~ 뚝!”

“흡……! 예. 뚝.”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또 괜한 객기 부리다가 객사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적지 않았었다. 하지만 천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어린 소녀로 돌아간 듯한 대교가 그딴 잡생각을 말끔하게 지워주고 있었다. 대교는… 역시 나의 천사이자 요물………….?! 나 진유준이 나약해질 틈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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