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25화 : 에블루션 필드
5 에블루션 필드
“우와아아아-.”
CR들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뜨거웠다. 우렁찬 함성을 터트리며 기뻐하는 녀석들의 모습은 마치 선생님의 ‘내일 소풍이다’라는 소리를 들은 아이들 같았다. 곧바로 이어진 것은 녀석들이 우르르 앞 다투어 배 밖으로 뛰쳐나가 바다에 뛰어드는 광경이었다.
풍덩! 푸악! 포옥!(?)
빠지는 소리며 이어서 정신없이 헤엄쳐 가는 모습은 다양했지만 대부분 수영선수처럼 빨랐다.
…난리도 아니군. 해안까지는 아직 40-50미터 정도 남았는데 벌써부터………………
어쨌든, 초반 레이스의 압도적인 선두그룹은 당연히 수중형 돌연변이체 형제와 자매들이었다. 평소에는 숨기고 있던 물갈퀴며 지느러미(?)를 드러 낸 채 돌고래처럼 쓴살같이 물살을 가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 봐야 일단 육상에 오르고 나면 다른 녀석들이 더 유리할 것 같・・・ 응?
현저하게 앞서가던 인어(?) 아쿠아린 형제와 세이렌 자매들이 갑자기 방향을 틀고 있었다.
두 패로 갈라져 좌우로 간다…………? 저 녀석들은 바로 상륙할 생각이 없는 건가…………? 섬 뒤쪽이나 여하간의 위치에서 퇴로 차단을 위한 움직 ?
원판을 돌아보았더니 녀석은 여전히 한가한 관광객 모드로 누워서 보일 듯 말 듯 쪼개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 내가 보는 곳에서는 구체적인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으니… 쳇. 원판 이 녀석은 내가 자신에게 지휘권을 넘기는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던 거군.
원판이 선실 안에서 CR들에게 또 어떤 지시를 내려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어들을 제외한 CR들은 하나 둘 섬에 상륙하자마자 제각각 섬 안쪽 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여전히 소풍가서 보물찾기를 시작한 아이들 분위기이긴 한데……….
나는 다시 원판 쪽을 돌아보았지만, 이번에는 녀석이 아니라 그 옆의 백인 소교(?) 소냐와 야생 소녀 실키 때문이었다. 아직 저 녀석들과 화물칸 안 의 BB형제는 움직일 기색이 없었던 것이다.
“…니들은 안가냐?”
“아, 저희들은 조금 나중에..”
소냐가 대답하며 원판을 바라보자 원판은 손을 내밀어 실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열었다.
“숙녀들은 몸을 아껴야 하는 법. 차가운 바닷물에 뛰어들게 할 수는 없지.”
원판의 말에 실키는 환하게 사심 없는 웃음을 보이고 있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그게 이유라고?”
“…조금은 그렇지요.”
“훗. 웬일로 솔직하게 나오시는군.”
“할 수 없지요. 난 분명히 당신께만은 ‘거짓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랬던 것 같기는 하네.
“그 농담, 진담이었어?”
“잊었.. 아니, 애초에 날 믿은 적이 없었던 거군요.”
“당연하지, 인마. 세상에 믿을 놈이 따로 있지. 내가 널 왜 믿냐?”
에? 뭐냐, 저 해괴한(?) ・・・ 진심으로 서글퍼하는 듯한 표정은 어랏? 어이없게도 원판은 삐쳐버린 계집애 같은 얼굴로 날 외면하고 있었다.
이런 제기. 왜 내가 잘못한 것 같은 분위기가 되는 건데?
…사실, 그…뭐,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더듬어 보면… 원판이 말을 교묘하게 돌리거나 회피한 건 다반사였지만 확실하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긴 없는 것 같기도 한・…가……………?
쯧. 잘 모르겠다. 난 한 번도 이 녀석 말을 그대로 믿어 본적이 없어놔서……………
“거, 뭐, 네가 그동안 정말 그랬다면………….”
“이제 됐습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군요.”
“뭐야. 그래서 지금 삐친 겨?”
“나아참! 진짜 삐친 모양이네? 사내자식이 뭐 그런 거 가지고·
“정말 너무하시네요!”
뾰족한 목소리로 끼어든 것은 녀석의 비서이자 대변인 ‘란’이었다.
“마스터께서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란이 말끝을 흐린 것은 원판이 스윽 그녀를 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란은 원판의 차가운 질책의 시선에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지만, 그래서 더 열 받는다는 기색으로 날 흘겨보기 시작했다.
쳇. 어쨌거나 저쨌거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애초에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여자의 흘겨봄을 당해야 하는 거야? 나도 문득 억울해져서 원판에게 인상을 긁었다. 원판은 그런 나를 외면하며 란을 갈구고 란은 또 나를………………
“천주!”
이상한 삼각관계(?)의 분위기를 깨준 것은 천음마군이었다. 그는 원판에게 제공한 의자와 비슷한 비치의자를 내 뒤에 놓아주며 조타실 쪽을 가리 켰다.
“작전 대상들을 태운 비행기가 레이더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어, 그래?”
놈들이 이제야 라고는 하지만………! 쯧. 직접적인 원한관계가 없는 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응징에 나설 만큼 악질적인 놈들이기는 한데… 그런 것치고는 진행에 긴장감이 떨어지는군.
하긴 뭐, 내가 그동안 싸워 온 적들에 비해서 너무 무게감이 떨어지는 놈들인데다 진행 전권까지 넘긴 참이니…
“천음마군. 그런 보고도 이제………….”
내가 다시 원판을 돌아보자 천음마군은 따라서 원판을 보며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댁도 들었겠죠? 임시 사령관 나으리!”
심하게 삐딱한 천음마군의 보고 아닌 보고에 원판은 피식 웃었다.
“어쩐지. 과거의 어떤 혈기왕성한 노인네를 보는 것 같은 친구로군.”
난 아직 원판에게 천음마군의 전생을 얘기해 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감을 잡은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임시 사령관으로서의 명령을………….”
원판은 나름 진지한 분위기가 되고 있었지만 천음마군은 원판이 어떤 명령을 내리든 이제 결코 쉽게 따르지 않겠다는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이다. 원판은 과연……….
“음, 소냐에게 받게.”
“에?”
나나 은사마군은 물론이고 그 누구보다 어이없어하는 천음마군 앞에서 원판은 아함- 짧게 하품을 한 번 하더니 스윽 돌아누웠다.
“젠장! 지금 대체 무슨 수작을…………”
대뜸 험악해지는 천음마군에게 백인 버전 소교 소냐가 다가서며 입읍 열었다.
“저어, 천음 오빠.”
“응?”
“저희들은 곧 지정 장소로 상륙해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배를 채가 말하는 쪽으로 이동시켜 주세요.”
“뭐, 뭐야! 정말 이번엔 네가…….”
“후후- 안심하세요, 천음 오빠. 몇 가지 사전 명령을 전달하는 것뿐, 제가 오빠의 상관이 되는 건 아니에요.”
“아, 그래?”
단순대왕 천음마군은 그나마 안심이라는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
분명히 내가 원판에게 지휘권을 준 후로는 원판과 소냐 사이에 어떤 의사소통이 오갈 틈이 없었어. 그렇다는 건 당연히 내가 자신에게 지휘권 을 넘길 거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예상하고 미리 명령을 내려 두었다는 뜻이지.
물론 이건 조금 전부터 감 잡았던 일이다. 하지만 천음마군이 삐딱하게 나올 타이밍까지도 계산해 놓은 것처럼 때맞춰 소냐를 내세우는 걸 보고 있 자니까, 놈의 ‘사전 준비’가 과연 어느 정도 인지 더욱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까 선실 안에서 CR들과 재회했을 때…………? 아니면 그보다도 이전일까…………? ……제기.
나는 새삼 원판을 노려보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정작 녀석은 더욱 편안한 자세를 잡기 위해 뒤척이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저 빌어먹을 천재형 악당에게 내 행동을 미리 읽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역시 쬐까 짜증나는군.
어쩐다? 이제부터라도 저놈이 예상하지 못할, 혹은 바라지 않을 행동만 골라서 할까………? 본래의 계획이고 나발이고, 내가 결국 손해를 보건 말 건・・・ 무조건・・・・・・?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정을 내리고 정글도를 등 뒤의 도집에 넣었다. 발밑에서 알짱대던 마계 늑대 라프가 눈치 빠르게 쪼르르 내 몸을 타고 올 라왔다.
‘와일드 아일랜드’ 라는 이름의 섬까지 타고 온 배가 소냐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대략 1시간 정도가 지났을 즈음.
・・・쯧. 역시 힘이 들긴 드는구먼.
난 약간의 쓴웃음과 함께 이동을 멈추고 이마의 땀을 닦아야 했다. 나의 현재 위치는 이 섬의 남쪽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며 그 중에서도 전망이 좋 은 편인 나무의 중턱이었다.
얼마 전까지 경공으로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었던 곳을 직접 기어오르느라 뺑이치긴 했지만. 뭐, 나름대로는 더 보람이 느껴지기도 하는군. 사실 우려했던 것에 비해서는 그렇게까지 힘든 것도 아니었고 말야.
가빠질까 말까 하던 호흡을 조절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으로 상당한 규모의 숲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예상보다 거대한 넓이인데다 반대 편 역시 고지대로 막혀 바다가 보이지 않아 서인지 섬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기도 했다.
이거 내가 소위 ‘사냥꾼’들을 너무 얕봤는지도 모르겠군. 놈들은 지금까지의 사냥 대회에서 사냥감을 놓친 적이 없었다 했고… 이 정도 규모의 지역에서 목숨 걸고 도망치는 인간들을 놓치지 않고 사냥할 수 있을 정도면 보통 실력들이 아니란 얘기니 말야. …뭐, 물론 오늘은 ‘그래봤자’ 겠지 만………….
「주인님. 작전 대상들이 숲으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현재 위치는……………」
…으음. 5분에서 10분 정도는 더 있어야 내 육안에까지 보일 거리에 오겠군.
“우리 CR애들은?”
「상륙 이후, 계속 전체적으로 불규칙적인 분포와 이동 패턴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분 20초 정도 전부터는 일시에 이동을 멈추고 매복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는 몽몽이 보여주는 CR들의 매복 분포도를 보며 사냥꾼들과의 첫 번째 조우가 이루어질 지점을 가늠해 보았다.
“…소냐와 실키, 그리고 BB형제는?”
「주인님께서 배를 떠난 직후 그들 역시 섬에 상륙한 것까지는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위치는 코드명 BB형제만이 확인될 뿐, 코드명 소냐 와 실키는 확보된 위성의 장비에도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과연 은밀한 활동 전문인 녀석들 답다고 해야겠군. 하지만 오늘 소냐는 현장 지휘관 역할까지 맡았을 텐데………….
“원판과 녀석들 간의 연락 수단은?”
「죄송합니다. 현재로서는 확인 불가입니다.」
확인 불가………?
몽몽은 죄송하다고 하지만, 몽몽이 확인불가라고 하면 사실상 ‘본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원판 녀석은 CR들과 아예 연락할 생각이 없다는 얘기……? 오늘 작전 전부를 사전 예측과 미리 내린 명령만으로 진행해서 끝내겠다 고…………? …그 자식!어쩐지 내가 배를 떠나는 것도 모를 만큼 퍼질러 자고 있다 했더니……………
지휘권을 가진 놈보다 전부 넘기고 은퇴(?)한 놈이 더 바쁜 상황인 셈이었다. 물론 ‘적극적인 구경’을 원하는 건 나니까 억울해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문제는………….
원판 녀석, 이런 내 행동까지도 예상했으려나…………? 그럴 경우 날 이용한 작전까지도 수립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말야. 아까도 그래서 불쾌했던 거 지만… 까짓, 지금은… 아니, 당분간 참아주겠어.
네놈이 나란 남자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지를, 나 또한 알고 싶으니까 말이야.
난 다시 한 번, ‘지금은 그냥 신경 쓰지 말자’를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웃.”
때마침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 흠칫 긴장해 버리고 말았다. 이건 지금의 내가 경공을 쓰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지금 사람이 가장 후달 린다는 4층 정도 높이의 나무 위에 서 있다 것이 실감난다. 지나치게!
으… 지금은 원판보다 이게 더 문제야. 쌈 구경 나왔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어찌 되기라도 하면 그 무슨 개쪽・・・ 제기~ 이런 나약한 생각 자체가 잘 못된 거라구!
「주인님?」
몽몽의 걱정 섞인 음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려버렸다. 몇 미터나 떨어진 나무를 향해!
“이익!”
자, 잡았다! 당연하지!
철봉하듯 매달려 크게 한 번 몸을 흔든 후 다시 훌쩍 다음 나무를 향해 몸을 던졌다. 이번에는 발로 디딜 수 있는 위치의 나뭇가지가 목표였다. 조금 핀트가… 쌍! 이 정도쯤이야!
약간 오버했기에 그대로 목표 지점을 발끝으로 밀며 다른 가지로 뛰었다. 순간적으로 몇 군데의 대체 목적지가 눈에 들어온다.
어디? 어디? 여기? 여기!
머리보다 빨리 몸이 반응하여 안착과 동시에 다시 내 몸과 발은 앞을 향해 도약한다.
어디? 여기? 여기! 좋아! 다음은… 저기!
차츰 탄력을 받은 나는 연이어 잡고 밟고 뛰며 날며 원숭이처럼 나무 위를 누볐고, 결국 안착하여 멈춘 건 백 미터 이상 이동한 후였다.
「와아~ 멋져욧!」
“땡쓰 요몽. 후우우~.”
「공공보법(空空步法)을 쓰실 때와 똑같… 어… 솔직히 그건 아니고, 계속 불안불안하게 오신데다 호흡도 거칠고 땀께나 홀리시는… 음. 그래도 굿 이었어요.」
“…닥쳐 요몽.”
「어, 전 진심으로 칭찬한 거예요. 내공을 잃으셨는데도 이린 움직임이 가능할 줄은… 헤에- 역시 우리 주인님!」
…쯧. 어째 그리 온전한 칭찬을 들은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래. 나진유준은 그동안내공에만 의지하지 않고 육체 단련도 계속 병행해왔어. 나름 바지런을 떨며 살아온 나 자신의 육체를 좀 더 믿어 보자구. 암.
「음. 근데 본래 가시려던 방향에서 약간 벗어난 것 같은……………」
“요몽, 너. 자꾸 분위기 초칠래?”
「헤헤. 죄송. 하지만 서둘러야 하실 것 같아서요. 지금 사냥꾼들 중 한 팀이 우리 쪽 매복지 부근에 접근하고 있거든요.」
“에? 그냐?”
「캔자스 출신의 로리 취향 형제라고 체크되어 있네요.」
소령이를 보고 특히 혹했다는 그놈들이군.
나는 짧게 흐읍 숨을 들이켠 후, 다시 몸을 날렸다.
대략 10분 정도 후.
「주인님!」
나는 몽몽의 신호에 따라 타잔 놀이(?)를 멈추고 적당한 나뭇가지 위에 멈춰 섰다.
「북동 32도 방향에 캔자스 변태 형제!」
…쯧. 요몽이 알려주는 방향으로 놈들이 얼핏 얼핏 보이긴 하는데… 이노무 아열대성 식물들의 잎사귀는 왜 이렇게 큰 거야? 사방에 우산이 펼쳐 져 있는 것처럼 시야를 엄청 가리네. 아무래도 가까이 내려가야 할 것 같은… 어?
내가 생각을 바꾼 것은 놈들 쪽에서 들려온 짐승의 소리… 정확히 말하자면 개들이 짖는 소리 때문이었다.
저 녀석들은 사냥개까지 데려 온 건가? 난 또 실력이 제일 좋아서 가장 앞서 온 줄 알았더니………………
실망과 함께 다소 맥이 빠진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아버렸다.
“몽몽. 영상 보조 부탁해.”
「예, 주인님.」
즉각적으로 몽몽의 투시 및 줌 기능 기본의 초호화 AV기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으음…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실물은 더 멀쩡해 보이는 자들이로군. 실체를 모르고 만났으면 평범한 사냥을 나온 평범한 백인 청년들로만 보였을 법한 녀석들이 우째………….
“하핫! 진정하라구! 진정해! 맥스! 래트!”
놈들은 사냥개 두 마리의 목줄을 잡아당기며 달래고 있었다, 개들의 반응을 보고 근처에 사냥감이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봐! 숨어 있지 말고 나와! 여기 있는 걸 다 안다구!”
“빨리 나와! 이 사나운 녀석들을 풀어놓기 전에 말야!”
저 녀석들… 침만 질질 흘리지 않고 있을 뿐이지, 사냥개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분위기의 표정이로군. 말 그대로 짐승 모드… 라고 할까?
“정말 빨리 나오는 게 좋을 걸, 도로시!”
응? 도로시? 웬 도로시?
“하핫! 도로시! 그래. 이 녀석은 벌써 너에게 도로시라는 이름을 붙였어! 알아? 내 동생은 아무 소녀에게나 도로시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형 말이 맞아! 우린 널 해치지 않아, 도로시! 예쁜 옷도 주고 항상 사랑해줄게, 도로시! 그러니까 이제 숨어 있지 말고 나오란 말야, 나의 도로시!” …어째 귀에 익은 이름이다 했더니, 세계명작잔흑판타지 소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소녀의 이름이었어. 저 변태 형제 놈들, 소령이를 붙잡으 면 지들 환상 속의 소녀로 꾸며 놓고 장난감 삼을 생각인 거군. 하지…………….
「주인니임.」
요몽이 얄궂은 표정으로 가리키는 방향의 수풀 속에는 숨어서 떨고 있는 소녀가 당연히 없었다. 그 대신 매복 중인 녀석들은….. “앗! 안 돼!”
동생 변태가 당황하여 외친 건 쥐고 있던 개의 목줄을 놓쳤기 때문이었다.
컹! 컹! 크왕!
사냥개는 미친 듯이 사납게 짖어대며 수풀 속으로 뛰어 들어 갔다. 그리고………….
끼잉-.
애처로운 소리가 한 번 울린 후, 적막이 흐르기 시작했다.
“맥…스? 맥스!”
동생 변태가 개 이름을 부르며 따라가려는 것을 형 변태가 막았다. 그리고는 자기가 쥐고 있던 개의 목줄을 놓아 수풀 속으로 뛰어들게 했다. 크와왕!!
용감한 두 번째 사냥개 역시 그런 애달픈 소리를 끝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변태 형제는 그제야 들고 있던 소총을 수풀에 거누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앞에서 수풀을 베치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훗. 쟤도 인형은 인형이지. 작은 체구에 항상 입고 있는 저 멜빵바지와 나름 귀여운(?) 생김새 때문에 꽤 유명한 인 영화(?) 주인공 이름으로 불린 다는 녀석・・・ ‘처키.’
“뭐… 뭐야, 저건!”
처키의 등장에 놀란 동생 변태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쾅!
요란한 총성과 함께 처키의 몸이 훌쩍 뒤로 날았다가 땅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무거운 납탄이 처키의 가슴에 명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형이나 마네킹을 가장하여 암살임무를 수행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이보그형 돌연변이체 처키의 방어력과 회복력은 CR들 중에 서도 최상급이라고 했다.
“히히히~.”
일단 뒤로 쓰러졌던 처키가 괴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사삭-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뭐야, 형! 왜 저런 게 나와! 도로시는?”
“내가 어떻게 알아! 저건, 저건……”
“히히히히~.”
다시 숲 속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불쑥 처키가 상체를 내밀었다. 한 손에는 무지막지하게 크고 날카로운 식칼이 들려 있었다. 쾅! 쾅! 쾅!
변태 형제의 사냥용 소총이 연달아 불을 뿜자 처키는 다시 수풀 속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자, 잡았나?”
“아, 아냐!”
“저게 대체 뭐야!”
“모른다니까!”
변태 형제의 엇갈린 고함 소리를 멈추게 한 것은 착촤촥! 수풀이 좌우로 갈라지는 소리와 광경이었다. 바다의 수면을 가르는 죠스 지느러미… 아 니, 수풀을 가르며 엄습하는 식칼……!
“으아아아~.”
“으아아아~.”
변태 형제는 더 이상 총을 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음. 공포영화 같기도 하고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구경꾼인 나는 감상 포인트에 약간의 혼돈을 느껴야 했지만, 꿈같은 미모의 인형 소녀를 기대하고 왔던 변태 형제 입장에선 그저 ‘아닌 대낮에 날 벼락’이며 끔찍한 공포일 것이다.
인형놀이를 좋아하는 놈들에게는 ‘사탄의 인형’이라 이거지? 원판 녀석의 의도적인 배치인 모양인데… 다른 사냥꾼들에게도 이런 식이라면… 흐 음. 이거 갑자기 우리의 미소년 천음마군을 노리고 온 놈들의 경우가 궁금해지는군, 그래.
다시 얼추 10분 정도 후. 나는 이번에도 나무들 사이를 공중으로 뛰는 방식으로만 이동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 이번엔 더 빠르고 안정적이었어요, 주인님.」
“후흐… 그치?”
「하여간 주인님의 적응력은 좀 짱인 듯.」
적응력…………? 나야 물론 예전부터 뭐든 적응(만?)은 좀 빨리 하는 편이었지. 그러나 이번 경우는 많이 달라. 내가 그동안 남몰래 얼마나 뺑이 쳐왔 는데!
대교나 지하무림 수하들도 내 상태를 알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들 앞에서 헥헥거리며 육체 단련하는 걸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 래서 남들은 내가 항상 앉아서 운기조식(運氣造息)만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근데…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상태에서도 내 머리 속은 산과 계곡을 가리지 않고 뛰고 또 뛰었어.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내 전신의 근육에는 실제 와 똑같은 자극이 가해졌지. 게다가 전에는 몽몽의 가상현실과 신체조작 기능에 신세를 졌었지만, 지금은 나 스스로 그런 수련이 가능하단 말 ……!
나는 그동안의 비밀 특훈에 보람을 느끼며 조금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긴 아까보다 거대 잎사귀들이 적어서 전망이 좋은 편이군. 어디 보자. 저놈들인가? 뭐야. 네 명이나?
어이없게도 ‘소령 VS 천음마군’의 인기 대결은 천음마군의 승리인 셈이었다.
그나저나, 가죽옷에 커다란 썬그라스……………? 저게 저쪽 계열의 유니폼이기라도 한 건가? 네 명이 하나같이… 어, 그러고 보니 네 명 다 헬스께나 한 것처럼 근육질이라는 점도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겠군.
등빨 좋은 거시기 계열 사냥꾼들은 내가 있는 나무 근처에 도착하자 왠지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음… 저기가 맞지?”
“그런 거 같군. 저 앞의 바위 뒤가 분명해.”
“지금 시간은……”
“이미 깨어났을 것 같은데? 데릭 씨는 한 시간 정도 지속되는 약을 먹였다고 했잖아.”
“조금 늦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관없잖아?”
“흐흐~ 맞아. 규칙은 지난번과 같아.”
“그래. 먼저 사냥에 성공한 사람이 그 귀염둥이와 300만 달러의 주인인 거야.”
…잘들 지껄이고 있군. 그러고 보니 이번 놈들에게는 귀염둥이(?) 천음마군 본인이 와도 재밌을 것 같기도 하네. 아, 원판 녀석! 설마 정말 천음 마군을………….
“몽몽!”
어… 아니구나.
몽몽이 스캔하여 띄워준 화면 속의 매복자는 천음마군이 아니었다. 하지만 늘씬하고 아리따운 미모의 꽃소년을 기대하며 껄떡대고 있는 자들에게 저 CR의 매복자는 미친 호랑이보다도 끔찍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아 전처럼 이 동전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신호로……….”
한 놈이 손가락에 얹은 동전을 하늘로 튕겼고, 동전은 반짝이며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놈들 중 누구도 사냥을 시작하기 는커녕 제자리에서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전이 떨어진 쪽 바위 뒤… 이제 막 마취에서 깨어난 미소년이 나타났어야 할 바위 뒤에서 전혀 다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얼굴은 웨서방(웨슬리 스나입스), 몸은 아놀드 주지사를 능가하는………….
“여, 여자?”
저놈들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여자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거 같았다.
쾅!쾅! 쾅! 쾅!
어쨌거나 예상대로 이어지는 총성…………! 그러나 저 2미터가 넘는 초특급 근육질의 여자, 아니 소녀는 방패 같은 두 팔을 교차해 얼굴 부위만을 막았 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코드명, 비비안 BB 형제와 함께 최강의 육체를 가진 Bg3 남매로 불리기도 한다네요.」
내공을 실은 나의 정글도까지 막아냈던 BB형제와 동급이라면 일반 병기로 감당할 수 있는 육체가 아니지.
콰콰콰콰콰~.
비비안이 그야말로 지축을 울리며(?) 전차처럼 달려오기 시작 하자, 네 명의 변태 사냥꾼들은 미친 듯이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에… 코드명 비비안의 스피드로 보아, 네 명이 다 10분 안에 포획될 가능성 98% 되겠습니당.」
내가 보기에도 비비안과 일반인들의 기동력은 격차가 크군. 하지만 놈들이 흩어져버리는 바람에 내가 일일이 쫓아다니면서 구경하기가 좀 어려워 졌는데… 그냥 이제 딴 데 갈까?
…응? 잠시 망설이고 있자니까, 산지사방에서 총성이며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장소에서도 역사냥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시 전부 구경하는 건 무리겠군. 몽몽, 요몽. 니네가 추천 한번 해봐라.”
「후후 저라면………………」
「잠깐, 요몽! 죄송합니다, 주인님! 긴급보고 사항이 있습니다.」
긴급보고? 현재 상황에서 그럴 만한 일이………………
「조금 전 거대 에너지의 발생이 감지되었습니다. 1차 추정 위치는 이 섬의 지하입니다.」
뭐 ・・・・・・?
「에너지의 실측량 2mb, 유지 시간 0.3초입니다. 그러나 인위적 특정 용도로 개발된 에너지 파장이었을 가능성이 90%이상입니다.」
「그러니깐 두루 쥐꼬리만한 에너지가 방출되다 말고 후딱 사라졌었네요. 하지만 그래도 이 섬의 지하에는 수상한 비밀 기지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씀!」
「발생 거점의 원거리 가능성 38.9%, 인위적 시스템의 구조 오류 가능성 52.3%, 기타 가능성 8.8%입니다. 추정 수치는 4분 이내에 수정될 예정입 니다.」
「어- 이게 디따 깊은 곳에서 발생한 에너지라서 그런지, 비밀 기지 만들 때 누가 삥땅치고 불량 자재를 썼다거나 하여간 조금 샌 건지 아직 몰 라요. 하지만 몽몽 오빠가 4분 안에 추가 분석해서 까발려주……………」
「요!」
「고, 죄송! 죄송! 제가 약간 오버를… 헤헤~ 용서해주세요. 여튼,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되요, 주인님.」
…이 녀석들, 이제 심각한 일에도 공동 보고를 하기로 한 건가? …뭐, ‘요몽식 보고도 괜찮다’고 한 건 나였으니 할 말은 없지만 어째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뒤바뀐 것 같은.. 으으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몽몽이 장담한 4분 정도의 시간이 내게는 몇 배나 길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비밀 기지? 역시 프리메이슨………..? 그럴 경우… 이런 섬에서 뭘, 왜? 아니, 아니 그 무엇보다… 왜 하필 내가 온 곳에? 놈들을 쫓아온 것도 아닌데 왜…………? 우연……? 난 역시 뻑하면 우연히 적의 비밀 기지를 발견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 정말……? 정말 그런 거야?
「띠, 띠, 띠.」
장난기와 진지함이 섞인 요몽의 효과음(?)이 들려왔다.
「띵~! 네, 4분 후 정각! 4분 후 뉴스 엄… 아니 요몽입니다! 네, 시작부터 주가 상승 소식・・・ 아니, 수상한 비밀기지 존재 가능성 상승 소식 전해드 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에너지 발생 주요 포인트에 나가 있는 소냐 특파원! 소냐 특파원 나와 주세.. 에? 왜 그래, 몽몽 오빠! 난 나름 진지했… 으왕 미워!」
방송 시간 1분도 채우지 못하고 포박되어 끌려가는 엄요몽 앵커(?).
「죄송합니다, 주인님. 중요한 보고의 요몽 참여는 일시 보류하겠습니다.
확실히 긴장감이 떨어지고 산만했던 건 사실이지만………….
“거, 뭐.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노릇이고… 그보다, 방금 소냐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주인님. 코드명 소냐는 줄곧 행적을 알 수 없었으나 12분 37초 전, 약 3초간 위성 카메라에 잡혔었습니다. 당시엔 중요 정보로 분류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위치는 현재 분석된 정체불명 에너지의 발생 포인트 중 한 곳과 일치합니다.」
“…다른 녀석들, 실키와 BB형제는?”
「코드명 실키도 같은 시간대와 위치에서 동시 포착되었었습니다. BB형제는 총 5차례에 걸쳐 각각 다른 장소에서 확인되었으나 소냐와 실키의 짧 은 포착 이후로는 그 또한 현재까지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
“정황상・・・ 그 녀석들은 다른 CR들과 달리 사냥꾼들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뭔가를… 그러니까 비밀기지인지 뭔지를 찾고 있었던 거고. 결국 발 견………! 그 다음에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그런 스토리 같은데?”
「현재로서, 50% 이상의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는 추론입니다.」
이것 봐라? 그러고 보니 멤버 구성도 ‘비밀 수색 및 침투’에 딱이었잖아? 그리고 그런 활동에 어울리지 않는 BB형제까지 동원된 건… 그 어딘가 로 들어갈 때 ‘힘’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판단 때문…………..?
“몽몽. 원판, 아니 천음마군 연결해.”
천음마군의 핸드폰 컬러링인 영웅본색 주제가가 잠시 들려 온 후.
“예, 천주!”
“그 녀석, 아직도 퍼질러 자고 있지?”
“예? …아, 예. 그 남자, 임시 지휘관은 천주께서 배를 떠나신 후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지휘권 이양 취소. 당장 깨워, 그 녀석!”
“저, 정말입니까?”
기뻐서 목소리까지 떨릴 지경인 모양이었다.
“저기, 그래도 너무 심하게는………….”
“크하하! 학! 이봐, 지휘관이었던 양반!”
이런, 이미 내 말을 듣고 있지 않고 있네.
배는 내가 떠나고 나서 섬 외곽의 사각지대로 짱 박혔다고 했었다. 그 배 위의 상황이 천음마군의 핸드폰을 통해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기상!”
“꺄악!”
란의 비명소리.
탕!
란의 권총 소리에………
쾅! 와장창! 꽝!
…난리가 아니군.
잠시 후.
“…유준 형님?”
“어, 나다. 살아 있네?”
“덕분에…….”
“또! 또 이런 짓을! 진유준님! 결코 잊지 않겠어요!”
에고, 원판보다 란의 음성에 살기가 펄펄 끓어 넘쳐흐르고 있다.
“…다쳤냐?”
“아뇨. 단지 제 머리카락이 약간…….”
으음. 그러고 보니 내가 전에 녀석의 소위 엘라X틴 안 해도 한 것 같은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일이 있었군. 란은 원판의 머리카락에 상당히 집착하 는 편인데 이번에도 천음마군의 정육점 칼이 하필……………
“저기. 난 잠을 깨우라고 했지, 어떻게 깨우라고는…….”
“란은 제가 잘 이해시켜 보겠습니다.”
“어, 고맙・・・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보다!”
쳇. 잠깐 삼천포로 빠질 뻔했다.
“너, 지금 이 섬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지?”
“훗.”
웃・・・어?
“오랜만의 단잠을 조금 더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빨리 알아채셨군요.”
보이지 않는데도 왠지 녀석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표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시점이라면 대부분의 상황을 감 잡으셨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대부분의 상황? 사냥꾼 놈들 상대하는 일은 연막이었고, 나 몰래 소냐 애들을 보내… 아, 하여간! 네놈이 내 호의를 이용해 먹고 있다는 것밖에 모 르겠다.”
“…너무 화내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측면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준 형님이 싫어하실 만한 짓을 하기 위한 일은 아니니까 요. 적어도 그건……”
“믿어달라고?”
“예. …부디.”
쳇. 명색이 극악마인이라는 놈이 잘도 간절하게 부탁하고 지롤이네.
“…사실, 이 섬은 10여 년 전까지 ‘에볼루션 필드 넘버 9’로 불렸었던 섬입니다.”
에볼루션 필드? 직역하면 ‘진화 구역’…………? 맞나?
“프리메이슨을 지배하는… 열두 늙은이들의 고약한 취미생활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유준 형님이 지금까지 목격했던 생 체 실험 이상으로 기괴하고 거대한 규모의 실험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규모가 큰 실험일수록 이렇게 외진 섬 같은 장소가 적격이었겠죠.”
역시 그 빌어먹을 12인의 사도들인 거군. 게다가 뭐? 9번? 대체 얼마나 많은 곳에서 깽판을 쳤다는 거야?
“난 전부터 그 늙은이들의 데이터를 일부 빼내서 몇 몇 폐쇄 필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와 본 건 이곳이 처음입니다.” 어떻게 알았고 어떻게 온 건가도 중요하겠지만……….
“그래서, 결국 뭘 어쩌겠다는 거지? 오래 전에 폐쇄된 프리메이슨의 비밀 실험 기지에 소냐 애들을 보내서 뭘 찾고 있는 거야?”
“…그 아이들의 임무는 에볼루션 필드 넘버 9의 닫힌 출입구를 열고 어두운 곳의 전등 스위치를 켜는 것뿐입니다. 그 이상은 딱히… 「주인님!」
응?
몽몽이 끼어 든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 강하지 않다고는 해도, 섬 전체가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을 하기 시작하다니.
“소냐가 기대 이상을 해주는군요. 잠들어 있던 중앙 통제 시스템을 완전히 깨운 것 같으니… 음. 이 역시 즐거운 오차로군요.”
소냐…………! 그 얌전 소녀는 프리메이슨의 시대를 무시한 기계 시스템에도 정통한 만능 천재형 스파이였던 건가?
“…어쨌건, 걔들이 불 켜고 보일러(?)까지 돌린 모양인데… 이제 어쩔 거냐구!”
“후후. 글쎄요. 주인 없는 집에서 뭘 하고 놀아야 가장 재미있을까요?”
“…그 빈집에 남아 있는 게 뭔가가 문제겠지.”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건 안 갈켜준다는 말 하려고 그러지?”
“역시 빨라서 좋군요.”
“오늘 내가 이 섬에 오게 된… 모든 교묘하게 준비 된 과정.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지하 기지로 달려가게 될 것까지… 전부 네놈의 ‘계획대로’라 는 게 열받지만 그래도 가긴 갈 거야.”
“기쁩니다. 이제야 절 믿어주시는………….”
“닥쳐, 새꺄.”
나는 몽몽이 알려주는 이 섬, 아니 에볼루션 필드라는 거대 실험장의 중앙 시스템이 있다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덧붙여 말 했다.
“원판 너… 재미있는 일이 없으면, 죽을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