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26화 : 원판, 반격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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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26화 : 원판, 반격의 서막


6 원판, 반격의 서막

소냐 애들이 열어 놓은 비밀 출입구까지의 거리는 대략 2KM 정도였다. 나무 위에서 내려와 천천히 뛰어가고 있자니까 왼쪽의 숲속에서 누군가 비 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기고 있었다.

“으아악! 괴물! 왜 여비서 대신 늙은 괴물이?”

…자룡대주 미끼를 문 사냥꾼인 모양이군. 자룡대주 대신 어떤 CR에게 쫓기게 된 건지 궁금해지기는 했으나, 바쁜 관계로 패스.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현실이 아니야!”

오른쪽에서 들려온 절규의 주인공들은 또 대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하여간 패스.

“데릭 허버트! 이 사기꾼!”

“넌 또 뭐야!”

이번엔 정면에서 두 명이 고함을 지르며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설마 이놈도 저 마녀들과 한 패… 앗!”

비록 비루한 내공을 긁어 쓰는 단발성 비루경공(?)이지만 일반인 두 명의 사이에 순간적으로 뛰어드는 정도야 우습지.

“끅!”

“극!”

양팔로 두 놈의 목을 동시에 걸고 지나갔더니 두 놈 다 휘릭 한 바퀴를 돌아 바닥에 고꾸라졌다. 두 놈을 쫓아오던 CR 두 명도 멈춰 서고 있었다. “어머?”

전신 어디서든 날카로운 가시를 솟구치게 할 수 있는 가시 소녀와……………

“꺄!”

최소 147종의 유해 물질을 자체 생산할 수 있다는 독극물 소녀 자매였다. 소녀들은 재빨리 가시를 거두고 독기운을 줄이며 한 쪽으로 물러서 준다. “어- 수고.”

손을 들어 보이며 지나가자니까 소녀들은 지들끼리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에는 지극히 존재감 없었던 위험 소녀들의 대화 소리가 뒤통수를 간지럽혔다.

“왕대장이 우리 도와줬어.”

“왕대장을 이렇게 가까이 본 건 처음이야.”

저 초단순 호칭은 보나마나 천음마군이 가르쳤을 것이다. 하여간 그 인간… 웃!

느닷없이 뭔가가 나에게 쏜살같이 날아들고 있었다.

큰 공? 아니, 원승, 아니, 실키!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피했지만 마주 오다가 놀라서 방향을 바꿔 된 건 실키도 마찬가지였다. 조그만 몸집을 털가죽 옷으로 감싸고 있는 외형에, 날렵하게 통통 튀는 움직임도 영락없이 원숭이 같은 야생 소녀 실키가 근처 나무 위의 가지에 올라앉는다.

“너…….”

사실 조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녀석은 지금 대략 7, 8인치 정도 크기의 화면이 있는 네비게이션 비슷한 디자인의 기계 장치를 안고 있었다.

“그거, 원판에게 가져가려는 거니?”

“앙?”

아참. 저 녀석은 말을 못하지? 금동이라면 혹시 대화가 가능 할지도 모르지만..

“됐다, 가 봐라.”

실키는 나름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극적이더니 결국 히죽 웃으며 통~ 다른 나뭇가지로 튀었다. 녀석이 빠르게 가고 있는 건 분명 원판이 짱 박혀 있는 배 방향이다.

이거 참・・・・・・

‘지금은 일단 원판 놈의 뜻대로 움직여 줘야 할 때’라는 판단을 하긴 한 거지만, 그래도 역시 찜찜한 불쾌감을 전부 묻어두기는 어려웠다.

원판 놈은 오래 전부터 이 섬에 와서 지하 실험실을 찾고 싶었던 거야. 그동안은 프리메이슨의 감시 때문에 오지 못하다가.. ‘때마침’ ‘운수 대 통’으로 내가 여길 찾아온다니까 얼른 따라온 거…일 리가 없지………!

항상 자신을 감시하는 프리메이슨과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있는 나도 의심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상황의 연속을… 스스로 만들어 낸 거야. 여기까지는 나도 굳이 놈을 타박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 대체 어디서부터 놈의 의도가 개입되기 시작한 걸까…………? 일단 이 섬을 인간 사냥 장소로 이용해온 데릭 허버트가 천우신을 습격함으로서 나와 만나게 된 일부터 의심해야 할까…………?

아니면 그 전에 데릭 허버트가 이 섬을 알게 된 것부터. 아니, 어쩌면 그가 KKK단원이 된 것도 원판의 유도였거나 KKK단 중에서 그를 골라 이 섬을 알게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KKK단 같은 놈들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향인 걸 알고 언젠가는 충돌이 생길 거라는 판단으로 일찌감치 준비를. 아니, 아니, 그 부분은 역시 KKK단이 캔들 리와 천우신을 노리게 만든 것도 원판 놈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 하긴 한데, 제기!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면 한도 끝도 없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춰야 했다.

지난 일이 불쾌한 건 불쾌한 거고, 지금은 녀석이 왜 그렇게 오랜 기간 암중공작을 펴서라도 이곳에 오려고 했는지. 그게 더 중요해. 아무래도… 프리메이슨의 옛 실험 기지인 이곳에 프리메이슨을 역으로 칠 수 있는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일단 그런 추측이 가능하기는 한데… 과연……………

「주인님!」

응? 에… 엥?

‘어떤 놈’이 눈앞의 수풀을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헤치며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와 그 어떤 놈의 뱀처럼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가 따악 마주쳤다. 놈의 입술 없는 거대한 입이 살짝 벌어지며 무지막지하게 늘어선 칼날 이빨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두 발로 선 악어? 아니, 아니………….

「…벨로시랩터(velociraptor)의 변종으로 판단됩니다. 자세한 분석은……………」

분석이나 마나, 에볼루션 필드라는 건 쥬라기 공원・・・ 아니 쥘라직 팍이었던 거야. 옘병!

쿠우~.

공룡 벨로시랩터의 커다란 콧구멍이 숨을 토해내며 쩌억 입을 벌리는 순간, 나도 정글도를 잡았다.

지금? 아니, 아직, 아직………….

랩터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대뜸 움직이지는 않고 파충류 특유의 섬뜩한 눈동자를 번득이고 있었다.

최적 타이밍을 노리는… 영리한.. 지금? 지금!

크!

랩터의 이빨이 엄습하는 순간, 나도 몸을 틀며 일도를 날렸다. 놈의 거친 숨결은 내 어깨와 얼굴을 스쳐 지났지만 대각선으로 뻗은 정글도는 정확 히 놈의 목을 그었다.

크로스 카운터 성공・・・・・・?

씨잉- 서늘한 바람과 함께 랩터의 날카로운 칼날이 내 복부를 찍어 왔다. 재빨리 오행미종보(五行迷綜步)를 밟으며 피했지만 자칫 치명상을 입을 뻔했다. 말 그대로 칼날 같은 발톱이었다.

실수, 실수……! 저놈은 발톱 공격이 무섭다는 걸 깜박했어!

어린 시절 한때라도 공룡 백과사전에 열광 안 해본 사내아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때 내가 신기한 공룡들의 생태에 대해서 읽고 또 읽었던 건 결코 나중에 맞짱 뜨려는 게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난 조금 전의 발톱 공격을 피하면서도 본능적으로 한 칼 날렸어. 두 번이나 크로스 카운터를 먹여서 그런지 놈도 섣부르게 연속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

하지만… 문제는 나의 두 번에 걸친 공격도 결국 놈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는 건데………

‘내공이 널널할 때는 이 정도 경량급 공룡쯤이야 기냥 한 방 감이거늘!’ 하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지만, 쓴웃음과 함께 흘려보냈다. 현재의 나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일 뿐이었다.

자아 이제 어찐다? 비루한 내공은 계속 비루경공에 쓰고 공격은 야금야금이라도……………? 아님 과감하게 한방을… 음. 근데 놈의 약점… 거죽이 가장 약한 곳은 어디일까? 몽몽에게 아니, 아니… 지금은 보다 자립적인 실전을 쌓을 때야.

나도 그렇게 선뜻 먼저 공격에 나설 처지가 아니었으나, 그건 맞은편에서 씩씩 거친 숨을 토해내며 나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 벨로시랩터(날렵한 사냥꾼이라는 뜻이었던가?) 역시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아~ 쓰바.

간만에 간식 좀 잡아먹어 볼까 했더니 웬 간식이 이렇게 무서워? 발톱은 하나인 것 같은데 졸라 나보다 길고, 얍삽이 콤보 공격도 잘하는 것 같아. 잘못 건드린 것 같은데 그렇다고 엘리트 공룡 체면에 허접 포유류가 무서워 도망쳤다간 공룡 학교 백악기수 동기들에게 왕따 당할 것 같고… 으 X됐다.

대략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갈등하고 있는 거 아닐까 싶… 응? 잠깐?

난는 놓치고 있던 뭔가를 엄한 상상 속에서 찾았다.

동기…들? 윽! 랩터의 특징은 ‘무리 사냥이었어!’

「주인님!」

몽몽의 경고와 함께 어딘가에서 후웅-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하여 뒤로 물러선 것은, 눈앞의 랩터와 비슷한 크기의 다른 놈들이 공중에서 새처럼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마리, 아니 세 마리나 더? 으~ 나야말로 X됐어?

콱!!!

내 주위로 세 마리의 랩터가 착지가 아닌, 그냥 떨어졌다. 지들 스스로 점프를 해서 온 것이 아니라 ‘던져진’ 형국이었다.

게다가 다들 목이 정상적인 형태가 아닐세.. .? 현재 이 섬에서 랩터를 닭모가지 비틀 듯 할 수 있는 괴물이라면…………. 고개를 들어보니 낯익은 거대 그림자 두 개가 날아오고 있었다.

쿠우우웅~!

경량급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공룡인 랩터를 가볍게 능가하는 육중함………!

“BB형제………! 니들이었냐?”

둘 중에서 형인 ‘빅 존’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고, 동생 ‘베이비 존’은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나와 발톱(?)을 주고받았던 랩터 쪽으로 몸을 돌렸 다.

근데 벌써 튀어버렸군.

공룡 체면이고 나발이고 쏜살같이 달아나고 있는 랩터의 뒷모습이 왠지 좀 안쓰러웠다. 까마득한 과거라고는 해도 분명 잘 나가는 시절이 있던 녀 석인데 말이다.

“죄송해요! 제가 그만 실수를 해서 몇 마리를 되살리고 말았어요.”

사과의 목소리는 소냐의 것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건 정면에 가까운 옆쪽의 나무사이였지만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스륵-.

마치 투명인간이 보통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소녀의 형상이 나타나며 짙어졌다.

“설마 아직까지 작동되는 배양실과 살아 있는 실험체가 있을 줄은……”

완전히 제 색채를 찾은 소냐는 한 손으로 자기 입술을 가린 채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 인마. 그럴 수도 있지, 뭐.”

일단 너그럽게 웃어주고 보는… 으음. 나 진유준은 역시 여자와 어린아이에게 너무 약해.

“근데・・・ 이 랩터 놈들이 다냐?”

“아, 아뇨. 그게… 세이버 몇 마리도………….”

「saber-tooth tiger. 마카이로두스아과(亞科) 스밀로돈속(屬)의 화석 동물… 일명 스밀로돈, 검치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몽몽의 해설이 없었어도 공룡 백과사전 마니아였던 나는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빨 두 개가 무지 긴 사자와 호랑이 짬뽕 괴물을…………!! “실은, 데이노니쿠스(Deinonychus)도 몇 마리 나갔으니까 조심하세요.”

그건 랩터 비슷한 놈들이었던가?

“흣! 저 듬직한 BB형제도 있고. 나도 왔는데 무슨 걱정이냐. 티라노사우루스(Tyrannosaurus) 같은 것만 아니라면야………….”

응? 소냐 얘, 표정이 왜 이래?

“것두 있어?”

소냐는 조심스럽게 한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스, 스피… 뭐였더라?”

“스피노사우루스(Spinosaurus)요? 그거하고 알로사우루스(Allosaurus)도 한 마리씩 있어요.”

미치겠네.

“아, 티라노보다 큰 육식 공룡 기가노토사우루스(Giganoto-saurus)만 특이하게 한 쌍이 있어요.”

오 마이 갓~!

갈수록 태산이다.

킹왕짱 깡패 공룡 티라노사우루스는 몸무게가 최소 3톤 이상에 아가리 씹는 힘 1.3톤… 대충 그랬었지, 아마? 거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지만 보통 티라노와 라이벌 격이라고 평가되며 영화에서는 티라노를 꺾어 버렸던 스피노사우루스와… 그들 보다 약간 작다고는 해도 결코 만만치 않은 알로사우루스에 적어도 등빨은 티라노를 확실하게 누른다는 키가노…뭐시기까지…………?

이 상황도 물론, 내가 내공을 부정축재(?)해서 무지하게 풍족했을 때는 ‘까짓 거, 미친 소 대신 공룡이나 잡아먹지 뭐…………….”라며 여유를 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젠장. 마음을 비우려고 해도 자꾸 생각나네.

“저어- 그래도 다행히, 빨리 출입구를 폐쇄할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대부분. 특히 대형 종들은 모두 지하에서 나오지 못했어요.”

다행? 난 어차피 거길 들어가야 하는… 아, 아니지, 아냐! 정신 챙겨 진유준!

“그래. 다행이구나. 하지만 랩터 급들은 이렇게 탈출한 녀석들도 있는 모양인데 다른 애들… 그러니까, 너나 실키처럼 전투 능력이 없는 애들이 괜 찮겠니?”

“저도 아주 약하지는… 아, 예. 괜찮을 거예요. 다들.”

옹? 뭐야. CR녀석들, 설마 아직 우리에게도 밝히지 않은 비밀 능력이 있는 건가? 누구나 그런 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 는 지혜라고는 해도 조금 섭섭할 이유가 딱히 없군, 음. 그래. 오히려 기특한 걸?

“그런데… 그년 대형 종들은 본래 많이 배양하지 못했었나 봐요. 기록을 보니까, 당시의 연구진들도 없애기 아까워서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그냥 잠재워 놓기만 하고 떠났던 것 같아요, 후후.”

말 수 적고 조용하기만 하던 소냐가 어느덧 신기한 구경을 하고 와서 자랑을 늘어놓는 어린 소녀 본연의 모습을 보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애들 은 역시 애들다울 때가 가장 좋은 법이었다.

으음… 새삼스럽지만, 빨리 프리메이슨 패거리와 결판을 지어서 소냐를 비롯한 CR애들에게 어린아이답게 살 자유를 주려면… 역시 아무리 원판 이 맘에 안 드는 놈이라도 적극적으로 협조를 할 수밖에 없겠…

“아, 죄송해요. 유준 아저씨가 오시면 빨리 안내해 드리라고 했는데 제가 그만 수다를 떨었어요.”

“괜찮…뭐?”

“마스터께서 유준 아저씨를 지하로 잘 모시라고 했다고요.”

“누가 아저씨야!”

나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소냐.

“그… 그렇게 불리는 것을 가장 좋아하신다고… 아닌가요?”

원판…………..! 협조고 나발이고 가만 안 두겠쓰~!

얼마 후.

프리메이슨의 지하 실험실 출입구 앞에 도착했다. 나. 비록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이며 예비 아빠이기까지 한 님자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 직은 팔팔하고 싱그러운 20대 청춘 진유준 오!빠!께서 말이다.

“아. 저…….”

“야, 야!”

“예, 예?”

에? 에구. 내가 너무 오버했구나.

“무심결에 그만・・・ 놀래켜서 미안.”

“아, 저, 전 다만 출입구를 열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한 건데…….”

소냐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한 쪽의 나무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다른 숲 속의 작은 공터처럼 특징 없는 곳이었지만, 소냐가 특정 나 무에 숨겨진 개폐 장치를 구동하면 공터 바닥이 통째로 출입구가 되어 열리는 구조인 것 같았다. 소냐의 어디까지나 오빠 세대인 진유준. 하여간, 나는 정글도를 빼들었다.

「…구형 스캔 방해 시스템이 있었으나 해체했습니다. 코드명 소냐의 말대로 문 주위에 검치호 세 마리가 매복 중입니다.」

BB형제가 한 마리씩 맡고 내가 한 마리라. 꼭 누군가 노골적으로 짝을 맞춰 놓은 듯한 상황이군.

「또한, 아까의 랩터들을 추가 스캔한 결과, 뇌의 일정부분을 인위적으로 확장해 지능이 향상된 변종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역시나 식상한 설정의 추가로군. 이 ‘평화로운 세상의 진유준 난장기’를 집필 중이신 우리 타임 씨… 좀 분발하셔야 겠어.

기이이이-.

10미터 정도 크기의 땅바닥이 좌우로 열리는 소리치고는 작았다. 소냐들이 불을 켜 놓았다더니, 지금은 그저 어둠에 쌓여 음침한 지하동굴의 입구 일 뿐이었다.

짐승이… 사냥 전에 주변의 조명을 파괴할 정도로… 지능이 업그레이드된 녀석들이라 이거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살짝 긴장하며 지하 공간 속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그르르르르.

자칫하면 놓쳤을지도 모를 만큼 작은 울림소리였다. 이 기분 나쁜 어둠 속에는 랩터보다 크고 강력하며 영악한 고양이과 동물의 제왕이 숨어 있는 것이다.

자아~ 어쩐다?

전투시에는 전과 같이 몽몽의 지원을 금지시켜 두었으니. 이 상태로 어둠 속의 싸움을 진행하려면… 비루한 내공의 효율적인 사용이 가장 중요 해. 감지 능력 상승, 방어력, 공격력・・・ 이 중에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건………….

단순하게 생각하면, 어둠 속의 싸움이니까 적의 공격을 감지하는 걸 1순위로 두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적이 순발력 짱 고양이과 괴수라는 점이다.

그래. 어차피 치고 들어오는 걸 알아도 피하기 힘들 테니까 차라리 방어에 치중하는 편이 현명・・・ 할 리가 없지.

언제가 동네에서 목격했었던, 떠돌이 길냥이가 눈부신 스피드로 옆집 개의 뺨을 연타하여 TKO승을 거두던 광경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한 번 공격을 허용하면 수습이 어려울 거야. 역시 랩터 때처럼 크로스카운터를 노리는 건 물론이고 그 일격에 모든 힘을 집중하는 것이 필승의 전략이 잘도 되겠다!

랩터도 한 방에 못 죽였는데 더 큰 놈이 치명상을 입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최선의 방법은………….

에이쒸바! 몰라! 몰라!

나는 결국 그냥 마구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뎀벼! 야용아!”

버럭 고함을 지르는 순간, 목뒤로 쭈볏 솜털이 솟았다.

고양이과 동물들의 대표적인 사냥 패턴은 ‘뒤통수치기!’

가장 중요한 걸 깜박했다!

캬악!

어둠을 찢는 괴성이 순식간에 덮쳐왔고,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임과 동시에 앞으로 굴렀다.

꺄옹!

…응?

재빨리 반쯤 일어나며 다음 공격 대비 및 반격을 노렸건만, 날 습격했던 괴수 고양이 세이버는 비명을 지르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아직 어둠 에 완전히 눈이 익은 건 아니었지만 세이버가 앞발로 지 콧등을 감싸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꺄! 꺄율!

…뭐야, 쟤. 저 덩치가 콧잔등 좀 베였다고 뭔 엄살이 저렇게 심해?

나름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며 걱정했던 전투치고는 너무나 어이없는 결말이었다.

“멈춰! 빅! 베이비!”

소냐의 고함 소리였다. 그 사이 BB형제에게 잡힌 두 마리의 세이버는 BB형제의 품에 안겨(?) 질식 직전의 상태였다.

“그만 놓아줘.”

소냐가 다시 한 번 말하자 BB형제는 얌전히 팔을 풀고 괴수 세이버 두 마리를 놓아주었다. 소냐가 잠깐 벽을 더듬는 것 같더니 갑자기 환하게 조명 이 들어왔다.

보조 조명이 아니로군. 세이버 녀석들, 조명을 깬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스위치를 내렸었던 건가? 어쨌거나………….

환하게 밝혀진 지하 복도와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난 녀석들에게서는 이미 원시시대의 거대한 고양이과 괴수의 위용이 없었다.

내 눈에는 그저 콧잔등에 피를 흘리며 꺄앙- 꺄앙- 울고 있는 한 마리와 켁켁-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구석으로 짱 박히고 있는 두 마리의… 약 간(?) 크고 이빨 기형의 불우한 고양이들로 보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이 아이들은 괜찮은 것 같아요.”

“뭐?”

“이곳의 데이터에는 대부분의 실험체들이 부작용으로 인해서.”

“아, 안 돼요! 제발 해치지 마세요!”

소냐는 황급히 두 팔을 벌려 내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나의 정글도는 이미 놈들을 향해 날았다.

“꺅!”

소냐가 가냘픈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을 때, 나의 정글도・・・ 아니, 정글도의 도집은 투욱- 세이버들 앞에 떨어졌다.

흐음. 어디, 어디……………

나는 도집에 연결된 줄을 낚시하듯 살살 톡톡 채며 당기다가 갑자기 획 – 위로 당겼다. 도집이 위로 솟구치는 순간, 캭!

세이버 한 마리가 본능적으로 앞발을 뻗어 도집을 잡으려다

실패.

컁! 킹!냥!

한 마리가 반응하자마자 다른 녀석들까지 순식간에 대세(?)에 휘말리고 있었다. 녀석들은 내가 줄을 툭툭 당겨 도집을 움직이게 할 때마다 그걸 잡 으려고 혈안이 되어 발짓을 하며 정신을 못 차리기 시작했다.

어찌 잡았다가도 내가 줄을 당기지 않아서 도집이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발을 떼고… 움직이면 또 달려들고… 훗. 역시………….

나는 정글도를 허리춤에 넣고 천천히 녀석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쥐잡기 놀이(?)’에 흠뻑 빠져 있던 녀석 중 하나가 그제야 나의 접근을 알아채는 순간, 나는 재빨리 두 번째 괭이용 신공을 펼쳤다.

키잇? 갸륵, 캬르… 가르르・・・ 고르르르르………….

으음. 덩치가 크니까 목 울림소리가 무슨 웬만한 차 엔진 소리 같네.

나는 콧잔등에 상처가 있는 녀석의 턱밑을 계속 어루만져주며 소냐에게 말했다.

“얘네들 제정신인 거 맞다. 아주~ 정상적인 고양이들이야.”

살짝 5분쯤 지난 후.

나는 졸지에 초대형 애완 고양이 세 마리를 거느리게 되었다.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비상약 중에는 상처에 효과 좋은 영약(?)들도 있다. 그걸 코 에 상처가 난 녀석에게 발라주었더니 녀석은 내 몸에 뺨을 부비며 갸릉갸릉 애교까지 부린다.

상처를 낸 게 바로 나인데 괜히 더 미안해지네.

사실 아무리 내가 예전부터 고양이들을 다뤄본 적이 있다고 해도, 아니 그 누구라도 고양이과 녀석들과 친해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 래도 이 녀석들은 이미 ‘사람 손을 많이 탄’, 소냐 말처럼 이곳의 과학자들에게 제대로 귀여움을 받았던 녀석들인 모양이다.

하긴. 과학자들 중에서도 위에서 시키니까 억지로 갖가지 실험을 하기는 했지만, 본성은 정말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

나는 다시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며 앞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조명이 전부 켜져서 환하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뻔히 알 수 있었다. 밀폐되어 있 었던 곳이라 10여 년 분량의 먼지치고는 적은 편이었으나, 소냐들이 지나갔었던 발자국 정도는 잘 보이는 것이다.

“근데… 소냐, 넌 아무래도 고양이를 키워 본 적은 없는 모양이지?”

“에에 햇. 설마 그런 식으로 다루는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훗. 말 중간에 살짝 혀를 내밀며 웃는 폼이 심하게 귀엽군. 조금씩 백인판 소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모습을… 응?

“그런데요.”

소냐는 문득 시무룩해지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실은 제가 마스터의 명령을 어긴 거예요. 마스터께선 밝히지 말라고 하셨었거든요.”

“뭘?”

“이곳 실험동물들의 상태요. 이 아이들처럼 미치지 않은 애들이 있다는 걸 알면 전력으로 싸우시는데 지장을 줄 거라고요.”

…쯧. 그 자식, 잘도 꼼꼼하게 명령을 내려두었군.

“유준 아저씬 겉보기보다 너무 다정한 성품이어서 걱정이라고…….”

“야!”

“에? …아, 죄송해요, 유준 아저씨가 그렇게 나빠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

“그거 말고!”

“예?”

“물론 그것도 문제는 문제지만! 하여간 내가 왜 벌써 아저씬데?”

“그야 유준 아저씬.. 아, 죄송해요.”

뭐냐! 어째서 오늘에야 처음으로 날 부르는 녀석에게 왜 그런 호칭이 입에 배어 있는 거냐구!

“저어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다른 아이들처럼 왕대장님?”

“아니, 그것도 좀…….”

치이- 그러고 보니까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구나. 아무리 시한부라고는 해도 얘를 포함한 CR부대 모두는 현재 지하무림에 속해 있어. 아무 때나 사적인 호칭을 쓰는 건 너무 개념 없는 거라구.

“…천주. 그냥 다른 지하무림 사람들과 같이 불러.”

“예에. 그럴게요.”

알게 모르게 섭섭해 하는 느낌이…………….

“하지만…………! 그건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야. 우리가 함께 프리메이슨 녀석들을 박살내서 원판과 너희들도 자유로워지면 그때는 네가 부르고 싶 은 대로 불러도 돼. 알겠니?”

“…예. 후후. 그럴게요.”

난 약간의 감동 비스무래한 표정이 되는 소냐에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 자유롭게 오빠라고 말야. 알겠지? 니 마음대로 자유롭게 오! 빠!”

지금 한 번 연습해 보라고 할… 으음. 근데 갑자기 소냐의 표정이 좀 거시기해 졌군.

“하여간, 사소한 일에 집요한 분이라니까.”

원판…..? 너 이 자식!

“야! 너, 얘한테 쓸데없는 호칭을 세뇌시켰지?”

“글쎄요. ‘진유준 아저씨’란 말을 하루에 1000번씩 외우라고… 어디까지나 ‘권장하긴 했었지만….

“이쉑! 이따 나가면 진짜 가만 안 둘… 응? 헉!”

내가 불현듯 놀라자, 한 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원판의 얼굴’이 피식 웃었다.

…치이. 열 받아서 놀랄 타이밍을 놓쳤다. 이거 무슨 복도에 이렇게 큰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으며, 화질은 또 왜 이렇게 좋은 거야? 게다가 뭔 사 내자식 얼굴이 이렇게 엄청 확대를 해도 티 하나 없는 아기 피부 같으니까 더 기분 나쁘잖아, 이거!

“니놈이 이곳의 시스템에 접촉할 거라는 건 예상했었어.”

그래. 아까 실키 녀석이 가지고 가던 물건이 이곳과 연결할 수 있는 무선 장비일 거라는 건 몽몽이 알려주지 않았어도 뻔한 일이었지.

“다만… 이렇게 화면 가득 재수 없는 귀신 탈바가지 얼굴이 클로즈업 될 줄은 몰랐지만 말야.”

“으음. 너무 하시는군요. 그래도 조금은 자신이 있었는데………….”

“닥쳐! 징그러우니까, 언능 사이즈 줄여!”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쪽에선 잘 보이는 모양이지만, 이쪽의 화면은 액정의 손상이 심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요.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에……………?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럼 이 녀석 지금. 순전히 감으로 기계를 조작하고 있다는 거야?

“정말 죄송해요, 마스터!”

“괜찮다, 소냐. 아무리 1급으로 정리된 필드가 아니라고 해도, 2급 지정 폐쇄 구역에서 대부분의 시스템을 재가동시키고, 이 정도의 단말기까지 찾 아낸 건 대단한 활약이었어. 너희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고 있어서 나는 무척 기쁘구나.”

나름 인자한 척을 하고 있는 원판의 미소와 칭찬 앞에서 소냐는 물론이고 무뚝뚝 BB형제까지 티나게 행복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깨는 건 좀 그렇지만……………

“…그래서, 이제 더 뭘 어쩌면 되지?”

나를 계속 졸졸 따라오는 중인 애완 세이버 3형제(?)를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애들 몇 마리 스카우트 하려고 거창하게 일을 벌인 것 같지는 않은데 말야. 이 지하에는 또 어떤 비밀이 있는 거냐?

“…제가 언제 그곳에 뭔가 중요한 비밀이 있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요?”

“죽을래?”

“있죠, 있기는.”

“털어 놔. 프리메이슨을 깰 때까지는 어쨌거나 동업자 아냐.”

“그게………….”

치직~. 응? 왜 갑자기 잡음이………….

“아, 손이 미끄러져 스위치를 잘못 눌렀……….”

“야, 야!”

치지직~ 하는 노이즈 소리가 심해지면서 화면도 흐려지고 있었다.

“모든 비밀… 칙! 중앙통제… 치익! 도착하면… 췻! 취익~!”

이 자식 설마………….

“…병약한 아우는 여기서 힘 짱 쎈 형님을 응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건투를.”

…지금 소린 잡음 없이 깔끔……?

“이런 빌어먹을 쌍쌍바 시키가..”

쓰바! 어린 소냐 앞이라 욕을 절제하려니까 더 열받네.

“저, 유준 아저…..”

“야!”

“천주.”

“왜!”

나는 소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복도의 끝에 랩터인지 데이노니쿠스인지 헷갈리는 놈들 몇 마 리가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으~.

“크으? 뭐? 뭔 크? 썅! 니들 일루 와 봐!”

대뜸 먼저 성큼성큼 다가가자 놈들도 카악- 달려들기 시작했다.

“좋아! 좋다구!”

맨 먼저 달려들던 녀석의 벌어진 아가리 사이를 번득- 하얀 실선이 지나갔다.

“해주마!”

두 번째와 세 번째 경량급 괴수들의 아가리까지 연속으로 반쯤 잘려져 나가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해준다고!”

어느 사이 마지막 랩터의 칼날 이빨이 코앞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랩터의 아가리는 허공을 물었을 뿐이고 나는 놈의 뒤에 서 있었다. 순간적으 로 짧은 공공보법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캬악

애매한 소리와 함께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랩터에게 세이버 3형제가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 네놈이 나보다 대글빡 좋은 건 인정한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어떤 수작질에도 장단을 맞춰주겠어. 하지만………….”

복도 끝의 조그만 모니터에 시선을 돌리니 그 속의 원판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내 성격 알지?”

“아, 예, 뭐, 지금도 잘 봤습니다. 역시 빡 돌면 무서운 분답군요. 한 줌의 내공으로도 절대 위력을 발휘하는 심검, 아니 심도의 성취를 경하 드 리……….”

“닥치고. 넌 계속 그 잘하는 음모나 꾸미고 있어 하는 김에 아주 잘 말이야! 시원찮으면… 알지?”

“하핫~! 이거, 이거 이렇게 강압적인 분위기는 섬세한 두뇌파에게 좋지 못한데 말입니다.”

“지랄!”

“어쨌든, 혼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 더 열심히 누워서 두뇌 노동을 해보겠습니다.”

이 자식, 화면 조절 못한다더니 은근슬쩍 앵글을 뒤로 빼서 은사마군이 차를 가져다주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육체파 형님께서도 게으름 피우지 말고 계속 힘을 써 주시기 바람.. 음. 이번 차의 향은 비교적 훌륭하군요, 명부화 양.”

“너어!”

뻑~! 통신이 끊겼다.

저걸 그냥, 당장 달려가서 확⋯ 응?

“신기해요.”

소냐였다. 어느 사이 녀석이 내 옆에 서서 원판이 나왔던 모니터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마스터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에요.”

“뭔 모습? 저 뺀질거리는 거?”

“훗!”

소냐는 풀썩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께서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너무나 외롭고 무서운 분이었어요. 그런데 유준 아.. 아니 천주와 얘기할 때는 달라요. 저렇게 진심 으로 즐겁게 웃으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갈아요.”

“…난 그 마음의 문, 도로 닫혔으면 좋겠다.”

사실 나도 살아오면서 처음이다. 이렇게 알면 알수록,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정이 안 가고 가급적 멀어지고 싶은 녀석은 말이다.

“어쨌거나… 이왕 왔으니까, 계속 가보자.”

나는 다시 걸음을 떼었고, 조금 전 랩터 한 마리를 몰매로 사망시킨 세이버들도 기세등등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음・・・・・・? 뭐지?

발걸음이 시작되자마자 멈칫한 것은 불현듯 느껴진 기묘한 울림 때문이었다.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지하 어디선가에서 시작되었음에도 아 직 출입구 부근인 이곳까지 전해질 정도의………….

포효소리? 하긴, 진짜 막강한 초특급 괴수들은 아직 구경도 못했지.

나는 새삼 정글도를 움켜쥐며 조금 아까 펼쳤었던 심도의 느낌을 더듬어 보았다. 심도가 비루한 내공이라도 맛깔나게 쓸 수 있는 최상의 비법이라 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으로 칼을 쓰는 비기를 마음을 잃었을 때밖에 쓰지 못하는 모순적인 현재의 나에게 심도는 아직 너무 먼 하늘 위의 구름인 것 같았 다.

…그래. 빡 도는 게 원할 때 돌아주는 것도 아니고, 이번처럼| 매번 빡 돌았을 때만 적이 나타나 주길 바랄 수도 없는 거지. 게다가 사실 아무리 최상위 경지라고 할 수 있는 심도라고 해도 지금의 내공으로는 ‘절대적 위력’을 발휘한다고 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야.

대교의 내력을 이용해 심도를 썼을 때의 위력은 에레보스의 암살자가 만들어낸 거대 괴물들을 종잇장처럼 잘라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의 심도 는 경량급 랩터의 머리조차 완전하게는 자르지 못했던 것이다.

“저어…….”

“응? 왜, 소냐.”

으음. 요 녀석은 아무래도 뒷말을 아끼고 손가락으로 직접 가리키는 습관이 있는 것 같군. 어디, 이번에는 또 뭐가 나타났다고 그렇게 손가락 끝까 지 바들바들 떨면서 ・・・ 응? 떨어?

이제 보니 소냐는 얼굴까지 창백하게 질린 채 떨고 있었다.

얘도 명색이 CR이다. 원판의 비밀 특수 부대인 녀석을 이렇게까지 겁먹게 하는 놈이 대체 뭐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잖아?

「주인님! 주의하십시오!」

몽몽까지 심상치 않은 음성으로 나섰다. 돌아보니 세이버들도 잔뜩 긴장하여 털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눈에는 전방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복도만이 보일 뿐이었고, 움직이는 건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적막하기까지 한 분위기였다.

한가지, 내 눈에도 왠지 거슬리기 시작하는 건… 복도의 끝에 자리하고 있는 금속 출입문인데 저 문이 열리면 뭔가 무서운 것이 튀어나온다는 건 7?

어째 나도 점차 기분이 나빠지고 있긴 하지만… 구체적인 살기 같은 건 분명 아니야. 뭐…지? 왜 이렇게 불쾌해지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 전에 도 비슷하게 불길한 기분을 느꼈었던 것 같은..”,

투욱-.

뭔가가 저 앞의 복도에 떨어졌다. 우리 집 현관에 뒹굴고 있는 운동화 정도 크기의 ‘무언가’ 였다.

“꺄아아악!”

소냐가 기어이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화들짝 사라졌다. 곧 BB형제의 뒤로 달아난 소냐의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아아아~.”

공포에 질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소냐의 전신은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투명화 은신 능력도 불 안정해지는 모양이었다.

이해가 된다. 빌어먹을…………! 저런 저렇게 큰 ‘벌레’라니…!

음습한 구석의 쥐며느리나 바닷가의 갯가재를 합쳐 놓은 듯한 생김새의 대형 고대 벌레였다.

쉬잇-.

작고 날카로운 바람이 일며 벌레의 몸체가 양단되어 버렸다. 이번에 나도 모르게 발동한 심도의 원천은 분노가 아닌 혐오감이었던 것 같았다. “아아~ 어쩜 좋아! 저 딴 건 없었는데! 난 저 딴 건 깨우지 않았는데!”

연신 고개를 저으며 눈물까지 찔끔 보이는 소냐.

엄청 징그럽기는 해도 냉정하게 보면 별거 아닌 벌레 한 마리에 이린 소녀만 공연히 겁을 먹은 그런 상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내가 전에도 ‘비슷하게 불길한 기분을 느껴 보았었던 건 분명 ‘그랜드캐넌 전투’에서였다. ‘수백만 마리 거미들의 습격’ 말이다.

서걱-

갉는・・・소리?

서걱, 사각, 서걱, 사각, 서걱, 사각, 서걱…………….

갉는… 그러면서 기어오는 듯한… 아니, 틀림없이 그런 소리였다.

점차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지만… 가장 심해지고 있는 건.. 정면의 금속 문……! 저건 더 깊은 지하로 연결된 엘리베이터의 문인 것 같은 데…………? 그럼 설마 지하 가득 저런… 벌레들이…………?

우웩~ 괜히 상상했다. 전의 거미들은 그나마 로봇이었다지만 이번에는 진짜 살아 있는 벌레들이니………….

“소, 소・・・냐?”

어찌되었든 그래도 나보다는 이곳을 잘 알고 있을 녀석을 불러보았지만, 이미 소냐는 거의 작동불능(?) 상태였다. 솔직히, ‘니가 더 무서워, 이것 아!’라는 소리가 나올 뻔했다. 백인답게 원초적으로 새하얀 소녀의 얼굴이 허공에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왜 무섭게 머리만 저런 투명화가… 아, 암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소냐! 정신 챙겨!”

나는 다시 한 번 녀석을 소리쳐 불렀다.

“몽몽. 대책은? 무슨 방법 없어?”

이건 칼질이 문제가 아닌 상황이라 몽몽도 불렀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대응 방법 모색 및 실행에 최소 23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제기.

서걱, 사각, 서걱, 사각, 서걱! 사각! 서걱!

원시시대 벌레 대군의 진격 소리는 점차 확실하게 커지며 끔찍한 상상을 현실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마군황인나 진유준에, 막강 헐크 급 괴력의 BB형제, 고대 괴수 세이버 삼총사, 마계 늑대 라프………! 우리 쪽 스펙은 다들 짱짱하지만 그래도 싫 어. 무서워. 나도 수백만 벌레 대군하고 싸우는 건 정말이지 싫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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