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28화 : 원판의 선물
8 원판의 선물
“사실. 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평범하고 성실한 대한민국 모범청년이었단다, 소냐.”
“예?”
“난 그저 평범하고… 단점이라면 지나치게 착하고 순진하다는 점뿐인 청년… 음. 그랬었어, 옛날에.”
“아, 예에.”
소냐는 겉으로 하는 대답과 달리,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갸웃했다.
…쯧. 이제 와 새삼 과거의 행복한 평범함을 얘기해봤자 소용없는 일이겠지. 새로운 ‘비현실’을 만날 때마다 애써 부정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 노 력해왔지만… 어느 사이 이런 상황까지도 웬만큼 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되어버렸으니……………
나는 뒤에 앉아 있는 돌연변이 투명소녀 소냐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어깨에 매달려 있는 마계 늑대 라프에게 손을 뻗어 공연히 한 번 쓰다듬어 주었 다.
쿵~! 쿵~! 쿵~!
우리를 둥에 태우고 있는 공룡 티라노사우루스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에 맞춰, 눈앞의 전망 좋은 풍경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앞에서 잰걸음, 아니 잰 점프(?)로 앞서가고 있는 BB형제의 듬직한 뒷모습도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발 아래 의 숲 속을 돌아보면……….
사사사사삭~.
실제로 들리지는 않지만, 대충 그런 소리가 연상되는 조용하고도 쏜살같은 움직임의 돌연변이 X-MAN… 아니, CR부대 애들이 보인다.
원시시대 괴수 고양이 세이버 세 마리가 꼽사리 껴서 달리고 있기도 하다.
사실, 전방에서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해안가에 정박 중인 배 안의 천음마군과 은사마군도 심하게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지. 하지만 어느덧 그들 정 도는 가장 무난하고(?) 평범한 수하들로 느껴지니……
「…주인님. 지하 시스템의 세팅을 원하시는 구성으로 맞추어 놓았습니다.
“어, 수고했어.”
으음. 가장 먼저 익숙해지는 바람에 오히려 빠트릴 뻔했군. 사실 몽몽이야말로 지금까지 내가 만난, 모든 비현실의 원조이자 압도적 존재…………! 지금까지의 다른 녀석들 전부 어쩌니 저쩌니 해봤자 몽몽처럼 시대와 종을 초월한 전천후 만능형은 못되지. 물론 앞으로도 몽몽을 능가하는 초호 화하이퍼특급익스프레스… 하여간 그런 특별한 존재는 만날 수 없을 것 같고 말야.
“그래, 맞아, 몽몽이 킹왕짱이지.”
「예? …죄송합니다. 지금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는 무슨. 그냥 칭찬이었어.”
「우에~ 무슨 일인지 몰라도. 몽몽 오빠만 칭찬해주시기예요?」
“어, 요몽. 이제 풀려났냐? 까부는 것도 정도껏 해야… 음. 암튼, 그래. 너도 킹왕짱 요정이야. 패티도 원츄고 암. 그렇고말고.”
「저희들 칭찬에는 조금 성의가 부족한 느낌이 흐응~ 그래도 기뻐요!」
호르릉- 날아 오른 요몽이 티라노의 머리 주위를 돌며 ‘우아- 딥따 큰 왕 도마뱀이다!’라며 감탄하고 있었다. 문득, 그리고 뜬금없이… 우리 부모 님, 특히 어머니께서는 대체 어떤 태몽을 꾸셨기에 나처럼 버라이어티한 운명의 녀석을 나으셨을지 궁금해졌다.
에볼루션 필드 9호 섬에서의 작전 종료 후, 4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우리 일행이 탄 배는 사방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소위 망망대해를 유유히 항해하고 있었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진 상황이었고, 은근한 달빛이 내려앉은 바다의 수면이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좋군.”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앉아 있던 뱃전에서 일어났다.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한 건 1시간 남짓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자잘한 피로 가 많이 풀린 느낌이었다.
자잘한 피로라… 훗. 그러고 보니 명색이 괴수 섬 투어(?)였는데도 화끈하게 뺑이친 시간은 없었던 것 같군. 미친 랩터나 원시시대 벌레 떼거지 같 은 것들로 인해 심각한 상황이 되려 했을 때마다 더 강력한 나의 군식구(?)들로 인해 정리가 되어버렸으니……………
“……몽몽.”
「예, 주인님. 대교님은 그동안 소집된 지하무림 병력들의 구체적 성향 파악 및 부대 편성을 마치고 목적지로 향하고 계십니다.」
흠. 역시 우리 몽몽. 내가 가장 궁금해 할 일을 먼저 알아서 보고해주는군.
“신들의 유희 멤버 중 신원이 추가로 확인된 건 한 명이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번 작전 과정에서 확인된 멤버와 관계된 인물들 중에서 의심되는 자는 한 명뿐이며, 더 이상의 연결고리는 찾아내지 못 했습니다.
“할 수 없지. 본래 엘이 신들의 유희를 운영하면서 내세운 금기가 ‘멤버 간의 사적인 유대’ 였다니까… 음. 뭐, 대교가 어찌 알아서 잘하겠지.”
「후후. 주인님이야 당연히 대교님을 무지 신뢰하고 계시지만… 그래도 그와 별개로, 역시 보고 싶지 않으세요?」
나는 끼어드는 요몽 녀석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그야 약간 그렇기도 하지만…….”
약간・・・・・・? 사실은 떨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보고 싶어 디지겠다아~!
“…참아야지, 뭐. 당분간은 연락도 삼가할 생각이라고 했잖아.”
「헤헤~ 대교님이 지하무림 사람들에게 ‘실세’로 각인될 때까지 말이죠?」
“인마! 난 그냥 아직 잘 모르는 수하들에게까지 대교를 선보이는 의미에서 대교 혼자 그들을 이끌어 보도록… 흠. 여하간 실세는 엄연히 나지, 암!” 「우히? 과연 그럴까요?」
“…몽몽. 이 녀석, 아무래도 너무 많이 아는 것 같다. 천기를 누설하기 전에 제거해라.”
「예, 주인님.」
「에? 자, 잠깐, 몽몽 오빠아!」
으음. 몽몽 녀석, 정말 요몽을 끌고 가버리다니. 설마 진짜 뭘 어쩌는 건 아니겠지?
「실은. 마침 정기 교육시간이었습니다, 주인님.」
오호. 장난은 고사하고 가벼운 농담조차 모르던 몽몽이 조금 발전(?)했는걸?
「그리고… 대교님으로부터는 약 30분 전, 주인님의 운기조식 도중에 메시지가 왔었습니다.」
“어? 그랬었어?”
또링~♬ 또링~♬
메시지 도착음이 이제야 두 번 울리며 대교가 보낸 문자가 떠올랐다.
수하들 몰래연락
해봐요. 기억은나
는데왠지 어색하
고힘드네요
대교는열심히 할게
요걱정말아주세요
♡♡♡
훗.
신세대 주가혜였을 때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의 무림버전 대교로서는 휴대폰으로 문자 찍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인데… 그래도 특수문자 키는 용케 찾아 찍었네.
으음. 근데 사실은 나야말로 문자에 익숙하지 않은 구세대 아니, 그냥 쓸 일이 별로 없었을 뿐인! 청년인지라….
“몽몽. 이모티콘 좀 지원해줘.”
✩ ✩
₩(^_^)/♡♡
몽몽을 통해 문자를 보내고 나서 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답신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교 파이팅!
^^고마워요
저도빨리 익숙해
질거예요
으음. 몽몽이 대신 입력해 준 반칙(?) 문자였는데 좀 찔리는 군.
공룡사진 봤어요
세상에
놀랐어요^^
응? 벌써?
「주인님께서 섬의 괴수들과 찍은 기념사진’을 요몽이 대교님께 보냈습니다. 보안상의 문제는 없을 것 같아 허용했습니다.」 흐음. 요몽이 지가 먼저 대교에게 연락을 했다 이거지? 고 앙큼한 녀석, 벌써부터 ‘실세’인 대교에게 줄을 대기 시작한 건가?
하지만 공룡은
걱정이에요.
먹이.
……?
대교는 한술 더 뜨네? 난데없는 괴수들 소식을 전해 받고도 그딴 걸 먼저 신경 쓰다니………! 누가 예비 신부 아니랄까봐 벌써부터 그런 흐흐~ 역시 울 대교는 알뜰한 신부가 될 겨.
내가 뼈빠지게 칼부림해서 벌어온 돈을 낭비하지는 않을………….
담에 다시
자룡대주가와요
음? 자룡대주에게 뭔가 보고를 받아야 할 시간인 모양이지? 쯧. 혼자 팔불출처럼 흐뭇해 하다가 답신도 제대로 못 보내줬네. 괴수들은 일단 섬에 남겨 두었고, 식량은 지하 연구실인지 기지인지에서 자체 생산이 가능하다니까 비싼 사료(?) 사 먹이느라 등골 휠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그런 얘 기를 해주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겠군.
“…천주.”
지나치게 풀려버린 표정을 수습하며 뒤를 돌아보니, 천음마군이 서 있었다.
“음. 왜?”
“다음 목적지인 ‘KKK단의 본거지’이며 또 ‘섬’인 곳을… 그 DP의 마스터가 알려주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이다. 원판은 나와 섬에서 헤어져 비행기로 먼저 어딘가로 떠났지만, 그 전에 그런 정보를 흘리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왜?”
천음마군은 단단히 삐친 아이 같은 표정으로 왠지 머뭇거린다.
“그… 천주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그 자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입니다. 과연 그자의 말을 믿고 가야하는 건지…………….” “그야, 나도 아직 그 녀석을 완전히 믿고 있는 건 아니야.”
“아, 역시 그러셨군요.”
천음마군은 어쩌면 지금 원판의 진심을 의심한다기보다, 놈이 ‘전생의 까칠한 주군’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경계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 다. 물론, 천 년 전의 나름 친했던 두 사람 사이를 생각해봤을 때, 이번에도 뭔가를 계기로 생각보다 쉽게 친해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뭐, 기본 정보는 사실일 거야. 하지만・・・ 놈이 말한 ‘선물’의 의미가 과연 어떤 것인지는….”
선물…………! 그래. 원판 놈은 또 짜증나게 애매한 말도 남기고 갔지.
‘그곳에는 제가 형님께 드리는 선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라고 말야. KKK단을 치기 쉽게 해줄 무언가를 준비해줬다는 건지, 아니면 반대로 KKK단에게 뭔가 지원해줘서 날 ‘아주 제대로 뺑이 치게 만 들겠다는 건지.쯧. 아무래도 자꾸 후자일 것 같은 기분이 들지…?
“하지만, 뭐. 아무려면 어떻겠어. 어떤 놈들이 엉겨오든 철저하게 박살내 주면 그만이지. 안 그래?”
“…흐. 하긴, 그렇지요.”
“이번엔 마음껏 향주련(香酒聯) 광호(狂虎)의 기질을 발휘해도 좋아. 아니, 기대하지.”
그동안 알게 모르게 걸어 놓았던 금제를 풀어 준다는 말에, 천음마군의 표정이 비로소 완전히 풀리며 심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흐흐. 그럼 전 이만 물러가서 준비를 하겠습니다.”
준비・・・・・…?
독문병기인 일명 정육점 칼, 견신(神)의 날을 바짝 갈아 놓겠다는 거군.
포권을 하고 돌아서면서도 싱글벙글인 천음마군이 선실 쪽으로 향하자, 선실 안에서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던 남자, 데릭 허버트가 모습을 드러냈 다.
“부르셨습니까, 로드 오브 헬.”
내가 운기조식을 마치면 이 남자를 보내라고, 은사마군에게 명령해 둔 건 당연히 나였다.
“음. 거기 앉으슈.”
“감사합니다, 로드.”
의자에 마주 앉고 나서도 데릭 허버트의, 적의가 없을뿐더러 지극히 공손하기까지 한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뭐냐… 날 부르는 호칭 말인데, 댁은 내 부하가 아니니까 그럴 필요 없소. 그냥 이름을…….”
“당치않습니다. 로드!”
데릭 허버트는 고개와 두 손을 동시에 저으며 거부하더니, 매우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께 너무나 잘 어울리는 호칭이라고 생각하지만, 호칭뿐이 아닙니다. 저는 갈수록 진심으로 당신에 대한 숭배의 마음이 커지고 있습니다.”
-쯧. 왠지 비화곡 시절 수하들의 대사를 듣는 것 같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설마 저에게 이런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는 분이 있을 줄은… 로드 오브 헬∙∙∙∙∙∙! 당신께선 저에게 이 추악한 거짓과 위선으 로 뒤덮여 있은 세계의 진실된 면모를 보여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뭔 소리래? 오늘의 괴수 섬도 그렇고, CR애들도 그렇고… 그냥 ‘신기한 구경 많이 시켜 주는 사람이라 좋다’고 하면 될 걸 말야.
“하지만 그 무엇보다…………….”
데릭 허버트는 불쑥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엄숙한 태도로 무릎을 꿇었다.
“로드 오브 헬! 당신 자신이야말로 저에게는 경이의 대상입니다! 부디 저를… 그러니까, 앞으로도 제가 따를 수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영혼을 걸고 절대 충성을…….”
“됐슈.”
“예?”
“쓸데없는 짓 말고, 그냥 다시 앉으란 말요.”
내가 매우 시큰둥하며 불쾌해하는 반응을 보이자, 데릭 허버트는 다소 뻘쭘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다.
“시, 실례했습니다.”
KKK단의 중견 간부이며 돌격대장(?)까지 해 먹던 인물이 적에게 그것도 그동안 지가 인간 취급도 안 하던 동양인에게 잘도 엄청난 충성을 맹세 하는구먼. 정말이지 이런 타입은 싫은데…………….
“충성을 하든 뭘 하든 그건 댁 마음대로 할 일이지만, 여하튼 당분간 함께 다니긴 해야 할 거요.”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이 로드!”
지나치게 오버하는 게 엄청 거슬리는데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진심이 느껴지기도 하고… 으으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뭐, 지금까지 나에 대해 목격한 바가 있으니 적어도 섣불리 배신 때릴 엄두는 못 내겠지?
“일단 화이트 판타지아(Whte Fantasia)란 곳은 알고 있겠지?”
“화이트 판타지아……………! 그 ‘백인들만의 천국’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도 한 번은 가본 일이 있습니다.”
데릭 허버트는 왠지 약간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흥미롭기도 했었지만… 뭔가 매우 이상한 곳이죠. 으음. 그럼 지금 그곳으로 가시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말해 주길, 그곳이 KKK단의 현재 보스인 ‘제국의 마법사’가 있는 본거지라고 하더군. 그래서 난 당신의 도움을 받아서 그곳에 침투…………! 결 국엔 KKK단을 없애버릴 생각인데 어때? 당연히 적극 협조해 주겠지?”
“아, 예. 무, 물론입니다.”
흐음. 조금 전에는 가열 찬 ‘수령어버이(?)시여~’ 분위기더니, 막상 제국의 마법사 얘기가 나오니까 찔끔 표정이 변해서 대답에 힘이 없군. 역시 그 제국의 마법사 ‘케인’인지 뭔지가 꽤 하는 놈이긴 한 모양이야. 게다가……………
“당신, 조금 전에 그 화이트 판타지아를 ‘뭔가 이상한 곳’이라고 표현했지?”
“예. 시대에 뒤쳐져도 어느 정도지, 아직도 ‘노예 제도’가 존재하는 도시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할 정도로 소외된 섬 이 아니고. 겉으로는 오히려 미국의 그 어떤 도시 못지않게 발달한 곳인데도 그런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진짜 대 마법사의 마력이 그곳을………….”
“택도 없는 소리.”
“예?”
“마법 따위가 아냐. 하지만… 마법보다 더 무서운 힘으로 고립 된 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래. 원판의 말이나, 객관적인 정황상으로도 그곳은 분명 정상적인 섬이 아니야. 원시 시대 괴수들이 아닌, 수많은 인간을 사육하는 실험 장………! 프리메이슨의 에볼루션 필드 중의 하나인 거야.
문제의 섬에 관해 원판이 알려준 정보를… 특히 ‘위치’를 중점적으로 몽몽이 확인해보고, 다시 내 식대로 표현하면 대충 이렇다.
지명- 화이트 판타지(whte Fantasia).
인구- 현재 도심 지역에는 15만 명쯤, 그 외 지역에 1만 명쯤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
문화- 겉으로는 미국의 웬만한 도시 스타일 및 수준이나, 철저하게 폐쇄된 독립 국가형 도시.
위치 – 미국 플로리다 주 해안에서 출발하여 멕시코만을 지나 태평양으로 한참을 어영부영 가다보면 얼추 나올지도 모르는 해역의 대략 구석탱이. 내 표현은 뭐, 그렇다 치고… 이렇게 상당한 인구와 첨단 문명을 갖춘 섬이 몽몽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세계 어느 나라의 지도에도 나오지 않으며, 존재한다는 기록 한 줄조차 없었지.
패티의 인공위성 중 하나의 궤도까지 변경하고서야 원판이 알려준 좌표에서 겨우 섬을 발견할 수가 있었으니…………….
“누가, 언제, 왜… 그리고 어떤 식으로 그런 곳을 만들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가?”
“예, 로드. 전 체류 기간이 며칠 되지 않았고, 오고가는 과정도 마취상태로 이동됐던 거라서 가는 길조차 모릅니다. 그곳을 알고 있는 다른 회원들 역시 막연하게 제국의 마법사가 그의 위대한 능력으로 우월 인종들의 천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했으며 그의 신임을 얻으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 고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전형적인 사이비 교단의 패턴이로군.
“저 같은 경우는 원한다면 언제든 그곳에 머물게 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제 이상향은 아닌 것 같아서 거부했습니다. 그 섬은 제가 염증을 느낀 이 식상한 세계를 더 악화시켜 놓은 곳 같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KKK단의 이상향이 자신과 맞지 않는 것 같았다고. •? 갈수록 KKK단의 쓰레기들 중에서는 그나마 재활용이 가능한 타입이라고 생각해주고 싶 어지긴 하는군.
“그런데, 로드, 지금 말씀드렸듯이 저는 그 섬에 갈 기본 조건은 될지 몰라도, 다시 초대받은 적은 없습니다. 제가 과연 도움이 될지…………”
“그건 걱정 마슈. 당신을 부르는 초대장은 이미 발급되었다니까.”
“아! 그렇다면…..”
“그 섬의 누가 우리 협력자인지라던가, 그런 건 몰라도 돼, 당신은!”
‘당신은’이라고 강조하며 슬쩍 인상을 긁자, 데릭 허버트는 바로 찌그러져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제기! 사실은 나도 아직 몰라. 원판 놈이 그 부분은 생까고 그냥 가버렸거든.
“당신은 그냥 상당히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섬을 다시 돌아보며 정착할 것인지를 결정하러 온 VP행세만 하면 되는 거야. 유색 인종인 우리를 노예로 데리고 다니며 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로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실 아무리 위장이라도 상당히 껄쩍지근한 설정이다. 게다가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자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CR 중에 변신이 특기인 녀석 에게 데릭 허버트 역할을 맡길까도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변신이라도 ‘본인보다 들킬 확률이 적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혹시라도 이 남자가 배신을 땡기든가 하면 ・・・ 뭐, 그런 상황도 나쁘지만은 않지. 난 아직 이 남자가 천우신에게 총질에 폭탄질을 했던 걸 잊지 않고 있으니 말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심결에 씨익- 웃었더니, 데릭 허버트는 왠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내 시선을 피한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천국이라는 섬, 화이트 판타지아. 그곳을 향한 항해가 얼마나 더 계속되었을까…………? 나는 계속 뱃전에서 결가부좌를 틀고 앉 은 상태로 수련과 수면을 반복하며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인님!」
음.
「주인니임. 기상하시와요! 도착했다구요!」
요몽의 호들갑스런 목소리 때문에 눈을 떠보니………….
암 것도 안 보이는군. 이렇게 깜깜하다는 건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는. 아니, 그게 아닌 것 같지?
「주인님께서 운기조식에 들어가신 후, 25시간 13분 54초가지 났습니다.」
흐음. 역시 하루가 꼬박 지나서 다시 밤이었군. 근데・・・ 운기조식 경력이 쌓이다보니 나도 이제 도사가 다 된 것 같네, 그려. 배가 이렇게 험하게 요 동을 치고 있는데도 앉아서 자고 있었으니… 잠도사? 음. 암튼.
태평한 자신에게 약간 대견한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배가 떠 있는 바다의 상황은 나빴다. 이번 목적지는 패티의 인공위성으로 확인해 놓았던 대 로, 우리의 연옥도(煉獄島)나 킹콩 영화 속의 해골섬처럼 무수한 칼날 암초와 살벌한 해류로 1차 방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아직 위험구역의 외곽일 뿐입니다. 약 30분 전, 화이트 판타지아의 항구와 교신하여 데릭 허버트의 신원을 확인 받았으며, 곧 항구로부터 안내선 이 도착할 예정 입니다.
그래. 이번의 우린 적지로부터 환영받고 있지. 섬의 주민들에게는 상당히 미안하게도 경제 성장에 보탬이 되는 외국 자본가가 아니라, 평화로운 섬 을 파탄 내러 온 무장 공비(?)들이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주인님. 코드 명 닥터 제이로부터의 연락입니다」
흠. 이 양반과는 꽤 오랜만인 것 같군.
“여보세요~ 헬로우~ 유준 군.”
“지금 거신 번호는, 결번이오니, 확인하시고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하핫~! 여전하군. 잘 지냈는가?”
“예, 뭐. 그쪽은요?”
“나도 비교적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네. 뭐어- 약간의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되겠지.”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지금은 요런 타이밍에 연락하신 이유를 먼저 묻고 싶네요.”
“그야 당연히 몇 가지 도움말을 주기 위해서지. 지금쯤은 하운 군이 알려준 섬에 거의 도착했을 텐데… 음. 하운 군은 보나마나 전부를 알려주지는 않았을 거야. 안 그래?”
“예. 그놈 하는 짓이 늘 그딴 식이죠. 뭐.”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라는 말도 추가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후후. 너무 그러지 말게. 하운 군은 그저 자네를 너무 좋아해서 더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것뿐.
“지금 거신 번호는 결번이오니…”
“하핫! 알겠네, 알겠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실은 말이야, 자네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건…….”
…에? 이건 또 뭔 소리야?
“저기, 방금 뭐라고요? 뭘 먹지 말라고요?”
“…쇠고기. 그 섬에서는 단 한 점의 쇠고기도 입에 대지 말라고 했네.”
“프리메이슨 놈들이 섬에서 유통되는 쇠고기에 뭔가 장난을 쳤다는 얘긴가요?”
“당연히 그런 얘기지. 그곳은 ‘에볼루션 필드 28호……….! 에볼루션 필드 중에서도 꽤 성공적으로 조성된 대규모 실험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네. 그만큼 다양한 형태의 실험이 피실험체인 섬의 주민들 모르게 행해졌던 곳이라는 뜻이라네. 각종 약물이나 바이러스의 임상 실험, 대규모 대중 세 뇌라던가..”
쳇.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데도 새삼 짜증나는 얘기로군.
“근데도 쇠고기만 조심하면 되는 건가요?”
“일단은 그래. 사실은 조심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일일이 말해주기는 어렵기도 하다네.”
원판, 그 노무 시키. 설마 이게 선물이라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대부분 당장 치명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무시해도 될 거야. 뭐, 보통의 세계에도 먹거리나 사용되는 물건에 ‘알면서도 유해물질을 쓰는 파렴치한들이 널렸잖은가.”
…끄음. 그러고 보니 그렇기는 하네.
“문제의… ‘변종 프리온(Prion)’만 빼고 말이야.”
“프리온? 변종?”
“단백질성 감염성 입자(Proteinaceous Infectious Particle)…..! 자네에게는 아무래도 ‘광우병’이라고 하는 편이 이해가 빠를 것 같군.” “광우・・・ 병요? 아, 예. 그건 저도 알아요.”
정확히 몇 년도였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소가 걸리면 미쳐버려서 광우병이라는 건데, 이게 또 사람에게까지 전염이 된다고 해서 한동안 모두 난리도 아니었던 건 분명 기억이 났다.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린다고 하는… 증상의 형태부터 납량특집인데다, 치료제가 없어서 걸리면 무조건 인생 종치는 거라고 했었어. 한국에서 걸렸 다는 사람 얘기가 안 나오니까 차츰 어영부영 흐지부지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야.
그게 원래는 영국인지 어딘지 하여간 외국에서 소에게 소를 갈아 사료로 먹이는 엽기 사육을 하다가 신종 질병이 발생해버린 거였다고 했던 가・・・・・・?
“혹시 그걸 프리메이슨 놈들이 만들었던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야. 오히려 프리메이슨에서는 ‘치료제’, 혹은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지. 물론 불치병을 정복하고 그 기술을 독점한다 는 건 ‘막대한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이지만 말야.”
“그래서 섬의 주민들에게 일부로 광우병 걸린 소를 제공하고 있다는 거군요. ‘샘플용 환자를 얻기 위해서.”
“뭐, 그런 거지. 본래보다 잠복기간이 짧은 변종 프리온도 그런 용도로 개발된 거라네.”
・제기. 자연산(?)을 일부로 더 개량해버렸다 이거지? 난 당연히 섬에 짱 박혀 있다는 KKK단 놈들만 먼저 제거할 생각이었고, 섬 전체의 문제는 나중에 천천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이거 아무래도 작전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
“그럴 필요는 없을 거야.”
“예?”
“훗. 하운 군 흉내를 한 번 내봤네. 자네 지금, 화이트 판타지아의 주민들을 구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KKK단 제거보다도 그쪽에 더 중점을 둔 작전으로 변경하려는 생각 말야.”
“둘이 같이 돗자리 깔면 수입도 따블이겠네요.”
“후후. 역시 그랬군. 어쨌든 굳이 처음의 작전을 변경할 필요는 없을 거란 말을 하고 싶네.”
“무슨 뜻이죠? 프리메이슨에서 그 미친 짓을 중단할 거라는 건가요?”
“이미 얼마 전에 ‘프리온 인체 전이 샘플 확보 계획’은 중단 되었다네. 헌데… 으음. 역시 더 이상의 상황은 직접 가서 보는 편이 이해가 빠르겠군.” “……것두 원판 녀석 흉내인가요?”
“그렇게 말해도 할 수 없네만, 나로서는 재미보다 효율성을 택하는 거라네. 방금 말했듯, 상황을 직접 보고 난 후에 설명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서 말야. 아, 그러니까 몽몽 군? 계속 위성의 통신 채널 보안에 신경을 써주게. 그리고 귀염둥이 인공지능 요몽도 잘 있겠지? 하이~ 요몽! 그쪽의 대우가 시원찮으면 언제라도 내게 와도 좋아!”
「주인님. 회선을 끊어도 되겠습니까?」
“응.”
일단 매정하게(?) 끊기는 했지만, 사실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대화 내용은 많이 썰렁했지만… 닥터 제이, 이 양반. 하은이와 그렇게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헤어질 때보다 많이 밝아진 것 같아. 최근 바쁜 일이 있 었다는 건 혹시 하은이와 관련된 일이 아니었을까…………? 하은이가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다는 걸 확인한 거라던가… 으음. 나도 이번 일이 끝나면 바 로 하은이부터 좀 찾 봐야겠구나.
「주인님. 섬에서 보낸 배가 접근 중입니다.」
뭐, 당장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겠지만 말이지.
“은사마군.”
내가 눈을 떴을 때부터 이미 뒤에서 대기 중이던 수하들 중에서 은사마군이 앞으로 나섰다.
“예, 천주. 하명하신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실은 작전 준비라고 해봐야 딱히 특별한 건 없다. 우선, 배가 섬의 항구에 들어가기 전에 CR들은 먼저 모두 몰래 배에서 내린 다음, 바다를 통한 침투 및 짱박힘으로 전면전에 대비하게 된다.
그런 상태 나와 천음마군, 은사마군, 소냐, 이렇게 네 명만 데릭 허버트와 함께 정식 루트로 들어가서 KKK단의 본거지를 찾는 건데… 음. 근데 우 째 천음마군이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있군.
“천음마군. 작전에 뭐 불만 있어?”
“아, 아닙니다, 천주 전 다만, 칼을 갈아 놓으라고 하셔서 큰 기대를 했었을 뿐입니다.”
난 노골적으로 칼 갈라고 한 기억은 없지만………….
“기대했던 대로 하면 되잖아.”
“예? 은사마군은 우리가 그저 노예 신분이 되어 저 남자를 따라 다녀야 한다고만…..”
“그렇기는 한데, 어디에나 말썽꾼은 있기 마련이잖아. 천음마군은 그냥 맘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야.”
“오오~ 그런 신묘한 작전이었습니까?”
신묘는 개뿔이, 난 그냥 섬에서 난폭한 노예를 어떻게 다루는 지를 보고 싶을 뿐인 거라네.
문제의 섬 주민들은 그 뭐냐, 영화 ‘매트릭스’나 ‘트루먼 쇼’의 트루먼처럼 가짜 세계에 세뇌된 채 살아가고 있는, 어디까지나 프리메이슨에 의한 피해자들이지.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섬의 원주민들과 이민(?) 와서 정착한 KKK단을 구별해서 처리할 생각이지만, 원주민들 중에서도 본성이 개판인 놈들이 있 으면 그런 놈들까지 봐 줄 필요는 없을 테니 말야.
나, 사악한 보스 진유준과 그의 아이들(?)이 향하는 이상한 나라 화이트 판타지아의 항구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일견, 항구는 그냥 평범한 항구처럼 보였다.
대략 30분정도 후.
나는 천음마군을 미끼로 화이트 판타지아 주민들의 성향을 떠보려던 생각을 전격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막상 항구에 들어와 보니, 여차하면 나 자 신도 난폭한 노예가 되어야 할 판이었던 것이다.
설마, 설마… 이렇게까지 강적(?)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으 나는 전에 없이 당혹한 가운데 얌전히 입을 쩌억 벌려야 했다.
여기 대체 뭐니?
“흐음~ 충치는 없는데… 조금 지저분하네? 요 녀석, 너 담배 피는구나?”
이런 말과 함께 나는 가벼운 꿀밤을 맞아야 했다. 천하의 마군황 진유준이 새파란 애송이 검역관 아가씨에게…………!
“요즘 주인들은 ‘애완 노예’에게 너무 많을 걸 허용해서 큰일이야. 일단 흡연 금지는 권고 사항으로 체크해 두고… 훗. 그래도 꽤 귀엽네? 주인이 운동 많이 시켰는지 근육도 탄탄하고, 영양과 위생 상태도 비교적 좋은 것 같고… 흐응~ 나도 이런 녀석으로 한 마리 키웠으면 좋겠어.”
터무니없이 큰일 날 소리를 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 이 아가씨의 용모는 만화속의 전형적인(?) 안경 간호사풍이며 AI급 미모…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냐! 내가 지금 팬티 바람으로 이게 뭔 꼴이냐고!
“크아아아아~.”
포효소리…………? 천음마군의?
옆방에서 검역을 받고 있던 천음마군이 드디어 폭발한 모양이었다. 그쪽은 남자 검역관이었지 아마?
꽝!
격한 소리에 이어 누군가 우당탕~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날 똥개 취급해?”
쩌렁쩌렁하게 짖. 아니, 고함을 지르는 천음마군의 기분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퍽퍽 – 이곳까지 울리는 구타 소리로 보아 운 나쁜 검역관을 심히 잡는 모양이었다.
으음. 차츰 사방에서 경비원들이 몰려오는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하는군.
“뭐야! 무슨 일이야!”
“자, 잡아!”
“큰일이야! 미친 소 먹은 노예인가 봐!”
여러 사람의 소리가 얽히더니 곧 와장창! 쾅! 퍽! 악! 끼륵!(?) ・・・ 하여간 다양한 파괴음과 비명이 계속되었다.
“어머! 어머! 말까지 하는 노예네? 근데 왜 저렇게 사나워진 거지?”
내 앞의 검역관 아가씨가 엄한 부분에서 반색을 하고 일어나더니 문가로 달려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말을 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이곳의 유색인종들은 그야말로 짐승으로 겨우 살아가고 있다는 거군. 이거, 이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몽몽.”
「코드명 라프의 아공간(亞)을 열어 독문병기를 찾으시겠습니까?」
몽몽은 지금 라프의 마력을 제어하여 라프와 라프의 몸통에 묶어 놓은 정글도를 함께 아공간에 감춰 놓고 있다. 아직도 마력 제어가 쉽지는 않아서 아주 작은 출구밖에 열지 못한다지만, 그 정도로도 무지하게 유용한 라프 활용법인 셈이었다.
“…아니. 그건 잠깐 대기. 그보다, 은사마군은?”
그래. 하도 어이없는 일을 당하다보니 깜박했지만, 은사마군 쪽이야말로 걱정이다.
「코드명 은사마군. 그녀는 조금 전 반대편에서 검역이 시작되었으나, 현재의 소란한 상황 때문에 완전 탈의 전에 중단된 상태입니다.」
에효. 그나마 다행이군.
「스캔상으로 나타난 신체 반응의 낮은 수치로 보아. 일체의 감정 변화가 없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으음. 최고의 살수다운 태도는 칭찬을 해줘야겠군.
“그쪽 검역관은…….”
「남성입니다.」
명령 수행을 위해서는 무슨 짓을 당해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특급 살수의 기본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자만 정작 주군인 내 가 은사마군에게 그딴 일을 시키긴 싫어. 당근 나 자신도 저 검역관 아가씨에게 얼레리꼴레리한 부위까지 검사 받기는 싫고! 나의 순결은 어디까지 나 대교에게… 큼, 암튼!
-은사마군. 탈출해.
비루한 내공 때문에 짧게 단문 전음을 보낸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음마군이 때마침 날뛰기 시작해서 계속 행패를 부려주고 있는 덕에 모 든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래서 내 쪽으로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여자 검역관에게 소리없이 다가갔지만, 그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만 아니라면 반쯤 죽여 놓고 갔겠지만… 으음. 잘 될까 모르겠군.
비루한 내공 때문에 약간 불안하기는 했으나, 일단 손을 뻗어 여자의 한쪽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동작에 맞춰 오 행미종보(五行迷踪步)를 펼치기 시작하자 그 녀의 눈동자가 더욱 커진다.
“앗! 이 녀석은 또 어딜 간 거야?”
당황하여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도 옆에 바짝 붙어서 오행미종보를 펼치는 나를 알아채지 못했고, 내가 결국 슬쩍 복도 밖으로 나갈 때쯤에는 내 가 앉아 있던 책상 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은사마군 역시 간단하게 탈출을… 윽!
건너편 검역실의 은사마군도 인법(忍法)의 대가인 흑주의 후계자답게 태연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얼른 시선을 돌린 건 그녀가 아슬아슬한 속 옷 하나만 달랑 입은 반라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늘씬하면서도 탄력 있고 봉긋하거나 말거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하느님, 부처님, 대교님…………! 저에게 굳건하고 건전한 모범 청년의 마음 을… 나무대교타불 대교님보살~.
나름 주문을 외워 마음을 진정시키며 잽싸게 가까운 코너를 돌았다. 부근의 사람들은 모두 천음마군을 잡거나 구경하기 위해 몰려갔는지 복도는 아주 한산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발걸음을 빨리해서 몇 개의 코너를 더 돌았고, 은사마군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몇몇 사람들이 나와 은사마군 앞에 나타났지 만, 누구도 이 반라의 남녀를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갈 뿐이었다.
-천주.
은사마군의 전음은 꽤 오랜만에 듣는 것 같군.
“어? 어… 옷은 좀 입지 그랬어?”
– 예. 곧 뭐든 찾아 걸치겠습니다.
“하긴, 나도 옷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지만………………
에? 계속 무표정이던 은사마군이 왜 지금 살짝 웃은 거지? 뭐시여…………! 똑같이 팬티 바람이면 지가 더 남사스러운 거 아냐? 남자야 본래 밖에서도 웃통 정도는 벗어도 별로 흉이 아닌… 에구! 그게 아니구나! 난 지금 군대에서 가지고 나온… 엄청 낡은 팬티를 입고 있었어. 자주 입던 건 아니라지 만, 비화곡 시절까지 따지면 자그마치 천 몇 년 된 팬티를…………!
“내가… 원래 한 검소해.”
-예. 그러신 것 같습니다.
“아직 쓸 만하거든?”
-아, 예.
“내용이 중요한 거지, 포장이야 뭐………….
에구구. 내가 왜 자꾸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정신 차리자. 진유준.
“크흠! 암튼! 일단, 여기서 헤어지자.”
-그렇다면 앞으로의 활동은………….
“그냥 예정대로 KKK단 탐색을 시작하는 거지, 뭐. 분위기를 보니까 아무래도 우린 특별히 신분을 위장하지 않고 다녀도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아.”
-예, 천주. 저도 이곳 사람들이 노예를 동물과 동급으로 여기면서도, 그 동물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친절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 난 검역관 아가씨의 그런 모순적인 태도 때문에 대뜸 깽판을 치지 못하고 얼결에 굴욕까지 당했던 거였어. 물론 아무리 그래도 엘레리꼴레리 부위까지 검역 당할 수는 없는 거였지만 말야.
“그럼, 나중에 보자구. 수고해.”
-복명!
은사마군의 걸음이 문득 멈춰지는가 싶더니, 어 하는 사이에 기척이 사라져 버렸다.
어째 전보다 은신술에 더 깊이가 느껴지는 걸…………? 혹시, 내가 안 보는 데서 흑주나 사영 어르신에게 한 수 배우기라도 한 건가?
은사마군이 한층 업그레이드 된 은신술을 선보이며 사라지고 난 후, 나는 나대로 이동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앞에서 마주 오고 있는 젊은 여자 앞 을 슬쩍 막아서 보았다.
“어머? 귀여운 동양계 노예네? 주인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거니?”
다정한 멘트와 함께 주머니를 뒤적이던 여자는 막대 사탕 하나를 꺼내더니 내 손에 쥐어 주고는 빠이빠이 손을 흔들며 가던 길을 간다.
역시 생각대로군.
나는 여자가 주고 간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건물 밖의 이상한 나라로 본격적인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