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35화 : 대마법사 케인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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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35화 : 대마법사 케인의 정체


5 대마법사 케인의 정체

나는 거침없이 짝뽀를 향해 걸었다. 상대 역시 비죽이 징그러운 미소를 띤 채 마주 다가오기 시작했다.

말도 행동도 거침없이… 그러나, 방심은 금물. 리철민은 분명 ‘초고수일수록 절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어. 그렇다는 건 아마도… “어딜 보나?”

분명 정면에서 마주오던 자가 한순간에 내 뒤를 점하고 있었다.

슉!

당연히 가해진 칼질이 나의 목줄기를 꿰뚫는 상황보다, 내가 상체를 옆으로 비켜 피하는 것이 빨랐다.

슈슈슉!

연이어 등 뒤에서 날아드는 칼질도 권투의 위빙 동작처럼 흔들리는 내 몸에 적중되지 못했다. 나는 아직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였고, 그대로 놈의 살기를 향해 도기를 날렸다.

팟!

도기를 피해 우측으로 초고속 이동하여 피하는 것을 감지하기도 전에, 나의 몸이 먼저 그 쪽으로 회전하며 회전력이 더해진 정글도가 가로로 내달 렸다.

핏!

분명 무언가 베어진, 그러나 기껏해야 적의 머리카락정도일 뿐임을 알 수 있었다.

반격은 아래? 위!

쒸익!

내 몸과 공간 자체까지 잘라버릴 기세의 칼날이 머리 위로 직격되고 있었다.

쩍!

놈의 칼, 바이오 블레이드가 일직선으로 내려 꽂혀 건물의 시멘트 바닥에 박혔다. 난 분명 한 박자 먼저 옆으로 피했고, 바이오 블레이드는 나의 왼 쪽 반신으로부터 10여 센티나 떨어진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왼쪽 반신에 찌릿찌릿함이 느껴질 정도로 초강력 일격이었다.

찌-익

놈의 바이오 블레이드가 박힌 시멘트 바닥에 실금이 가고 있었다. 거미줄 같은 균열은 계속 찍, 끽 소리를 내며 나의 발밑까지 퍼져왔다. “돼지답게 파워하난 쓸만한 걸? 앞으론 멧돼지라고 바꿔 불러줄까?”

도발이 먹히지 않을 걸 알면서도 무심결에… 음. 뭐, 하긴, 아무려면 어때.

놈은 예상대로 싸움이 시작되기 전보다도 여유가 넘치는 표정과 태도로 바이오블레이드를 뽑더니 다시 뒷짐을 진 자세로 돌아갔다.

“왜 계속 공격하지 않았지? 방금 회심의 일격이 실패한 직후의 나에게는 빈틈이 많았을 텐데?”

“뭐야.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훗. 그야 당연히 나의 전 친위대였던 멍청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묻는 거라네.”

짝뽀가 뜬금없이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자, 리철민은 맥없이 고개를 저었다.

“난 기껏해야 10여 차례의 공방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총42회와 공방이었어.”

짝뽀의 단언에 리철민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실제 공방 사이사이의 페인트 모션이 그렇게나 많이…………? 그렇다면 조금 전에도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여전히 한심하군, 나의 전 친위대여.”

짝뽀는 한층 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리철민을 비웃고 있었다.

“동양의 무술 용어로 하자면, 전부가 진초……………! 허초나 페인트 모션 따위는 한 번도 없었어. 안 그런가, 이방인?”

난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빌어먹을 뽀글 멧돼지의 사부놀이는 짜증나지만, 어쨌든 맞는 말이긴 해. 고수일수록 수 읽기가 빨라서 시전 직전의 초식도 상대의 반응에 따라 바꿀 수가 있는데, 그건 비록 영점 몇 초 전에 취소되기는 했어도, 분명히 실행될 예정의 진초가 맞거든. 더구나 조금 전 나와 짝뽀처럼 한 수 한 수 가 모두 일격필살이었을 경우에는 서로 실제 공격을 받은 것처럼 반응할 수밖에 없지. 예를 들자면… 천년 전 ‘북천여제(北)자옥령과 나누었 던 논검비무(論劍比武)의 실전판이라고나 할까…..?

난 새삼 짝뽀의 번들대는 얼굴을 노려보았고, 짝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내가 내공을 잃지 않은 상태였더라도 쉽지 않았을 강적…………!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역시, 짜증나. 강적이면 강적답게 나름 멋진 구석도 있어야지. 댁은 왜 이렇게 일일이 꼼꼼하게 재수 없는 거야?”

“흐흐~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는 날 이길 일말의 가능성도 잡지 못할 걸세. 아니, 어차피 무슨 짓을 해도 내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원숭 이로서 죽어갈 수밖에 없겠지만…….”

“됐네, 이 사람아. 쓸데없이 더 지껄여 봤자………….”

아무래도 안 되겠군.

“아니, 그래. 내가 먼저 정리해주지.”

나는 리철민을 슬쩍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저 친구는 댁을 ‘초고수일수록 절망시키는 인물’ 이라고 했어. 리철민이 했던 또 다른 말들, 그리고 내가 직접 겪은 당신을 종합해보면 그건 당 신이 ‘수 읽기’가 빠르다는 의미였어. 수하들의 특징을 모두 모아 놓은 그 괴물 몸보다도, ‘수 읽기’야말로 당신의 진짜 최고비밀 병기인 거야.” “…60점.”

“상대의 다음 행동을 너무나 빠르고 정확하게 읽고 그보다 한 박자… 아니 반 박자라도 먼저 움직이는 거야. 리철민처럼 그걸 당해 본 입장에서는 항상 손쓸 틈도 없이 당했다는 공포 때문에 실제보다 과장되게 당신을 인식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실제 당신의 육체적 능력은 리철민보다 그리 뛰어난 것도 아니야. 안 그래?”

“…70점.”

순순히 인정하는 건 좋은데, 이번엔 웬 채점질이야?

“근데 ・・・ 웃긴 건 말이지, 그렇게 ‘초고수’를 농락하는 ‘초초고수'(?)의 면모를 자랑하는 당신이 내가 보기엔 어째 무공을 깊이 있게 익혀 본적도 없는 것 같단 말야?”

“80점! 하지만… 어떻게 알았지?”

“좀 보면 알아. 공격과 방어가 더럽게 기계적이잖아.”

“…질문을 바꿔보지. 무술 역시 적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인 기술………! 내가 행하는 파괴와 뭐가 다른 걸까?”

“그건・・・ 아니, 아니. 난 지금 무공 강의를 하고 싶은 게 아냐. 댁의 그 잘난 수 읽기 능력……! 아무래도 거기도 뜯어고친 결과 같지만..”

내가 손을 들어 짝뽀의 머리를 가리키자 비로소 그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무래도 좋아.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이렇게 다 눈치깐 상태니까 더 이상 심리전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란 거야! 무엇보다…….”

난 아주 잠깐 망설인 다음, 마저 말했다.

“나란 놈을 당신이 얼마나 빠르게, 어디까지 계산해낼 수 있는지는 어차피 직접 부딪쳐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을 걸?”

“…자신은 ‘쉽게 계산될 수 없는 인물이라 이거군. 짧은 시간에 거의 모든 것을 알아챈 점도 놀랍고… 과연 ‘신성 파괴자’라고 불린다는 남자다 워.”

원판? 그 녀석이 또 엄한 별칭을 붙이고 다닌 모양이네?

“훗.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걸 하나 빠트렸으니, 90점.”

“90점이라고?”

“그래. 지금 못 받은 10점이 최후의 순간에 자네를 지옥에 빠트릴 걸세.”

“알게 뭐야. 난 원래 시험 볼 때 100점 받은 적은 거의 없어도, 채점하는 사람들보다 잘 살 자신 있거든?”

“후후~ 이렇게 시건방진 학생은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은…………”

“거, 진짜!”

결국 짜증을 이기지 못한 내가 먼저 정글도를 휘둘렀다.

시잇-

간만의 깔끔한 심도 일격이 가해진 공간에는 이미 짝뽀가 없었다. 마음을 먹는 순간 이미 목표에 적중하는 심도. 그걸 피할 수 있다는 건…………. 쳇! 이번에도 마음을, 생각을 미리 읽혔어! 하지만!

스윽-

그리 급하지 않게 한 걸음 물러난 것만으로도 바닥의 갈라진 균열사이로 솟구치는 절단 실을 피할 수 있었다. 첫 격돌 때처럼 나 역시 그의 다음 공 격을 읽은 것이다.

실전 쌈질계의 명예를 걸고 상대보다 빠른 다음 수를… 아, 몰라! 명예고 나발이고, 계산하기 싫어! 수학 싫어! 공부하기 싫어!

뜬금없이 솟구치는 반발심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자 정글도도 따라서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싯! 싯! 싯!

그 어렵던 심도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연발로 펼쳐지고 있었다.

젠장!

그럼에도 기분이 더러운 건, 모든 공격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또 읽었다고? 전부? 윽!

“그거 아는가?”

심도의 연속 공격까지 전부 읽혔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또 어이없이 뒤를 잡히고 말았다.

“처음에 자네가 나와 대등한 공방을 펼칠 수 있었던 건…….”

공격이 안와? 우쒸!

정확히 놈의 살기를 향해 일도를 날렸건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소위 ‘수 읽기’를 자네 수준에 맞추었을 뿐이었단 것을 말야.”

뭐야? 그래서 지금 뭐하자는 거야? 썅!

패액!

전신을 격렬하게 회전하며 도기를 뿌렸다. 그러나 놈의 빌어먹을 목소리는 여전히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니. 그걸 깨달았기 때문에 무리해서 흐름 전환을 노린 거라고 봐야겠군.”

나는 정글도 휘두르는 걸 멈추었다.

“어쨌든,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놈은 계속 내 후위를 점한 채 살기를 발산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한 번도 공격을 해오지 않고 있었다.

“인간의 몸이란 알고 보면 참으로 정직해서………….”

놈의 말은 무시 무시하자.

“계산될 수 없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계산하기 좋은 동작을 반복하게 되거든.”

수 읽기는 물론이고, 빡 도는 이 상황 자체를 잠시 잊고………………

“그리고…………….”

그냥 벤다. 그냥, 그저.

스윽-

놈의 살기가 아닌 희미한 존재감을 천천히 베었다.

칼끝의 이 느낌. 아니, 그걸 따질 것도 없이………….

“무술의 고수라는 자들의………….”

또, 실패. 어설픈 마음 비우기가 실패한 건가? 아니면…

“무심의 경지라는 건 더더욱 한심해. 결국엔 이렇게 단순한 동작을 할 거면서 온갖 의미를 다 갖다 붙인단 말이지.”

확실히 내 판단에 문제가 있었군. 감정에 몸을 맡겨도, 감정을 지워도 통하지 않아. 놈의 수 읽기가 기계적이라는 것까지는 알았지만 그 기계 가 설마 몽몽급의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던 거야.

“이제 그 어리석은… 나의 수 읽기를 어지럽히려는 시도를 끝내고, 자네 역시 수 읽기에 집중해 보는 건 어떤가.”

하지만………….

“지능은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무수한 실전에서 쌓은 데이터를 활용한다면 나와 얼마간 놀아줄 수 있을 정도는 될 것 같은데 말야.”

“놀아줘?”

나도 모르게 쿡! 웃음이 흘러 나왔다.

“계속 내 후위를 점하고 그렇게 몇 수위의 고수인 척 폼을 잡고 있으면 모를 줄 알아? 사실은 무서워서 내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거면서 말야.” 난 잠시 애매하게 들고 있던 정글도를 다시 어깨에 걸치며 말을 이었다.

“그 잘난 수 읽기로도 결정적인 계산은 쉽지가 않지? 어떻게 해야 날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는지… 과연 계산대로 죽어 줄 남자인지 확신이 서지 않지? 나 진유준은 신의 사도들이 그토록 죽이길 원했어도 죽일 수 없었던 남자니까 말야.”

그런 의식을 원판이 강조해서 심어 준건지 어쩐 건지까지는 내가 알게 뭐냐만. 어쨌든 아까 짝뽀가 단 한 번 나의 심도에 상처를 입었을때, 난 그 직후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었다.

“여유를 가장하여 뒷짐을 지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런다고 손이 떨리는 걸 감추지는 못했어. 겁쟁이 돼지 양반!”

말을 끝냄과 동시에 몸을 돌리며 정글도를 그었다.

핏!

스쳤⋯ 어쨌든 걸렸어!

퓨퓨

연속으로 짧게 끊어날리는 ” 형태의 찌르기를 짝뽀가 여유 있게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치명적이지 않은 공격을 일일이 피하느라 반격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리철민처럼, 혹은 그 이상의 회복력을 가지고 있을 자가 좋아. 이대로 몰아서 되도록 빨리 결정타까지………………

“어이없군.”

응?

““입력된 인물 데이터 중에서 가장 강하다’라는 전제 조건 때문에…………

뭐, 뭐야? 지껄일 여유가 있어?

“계속 ‘속임수’ 라고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잠시 혼들리는 것 같았던 짝뽀의 기운이 다시 안정화되고 있었다.

“인체는 정직하다고 했지? 이제 확실히 보이는군. 네 몸의 그… ‘체력저하’ 현상.”

・들켰다. X됐다.

“체력, 아니 내공을 잃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된 이상……………”

한순간 뒤로 빠지는 것 같던 짝뽀가 다시 불쑥 다가붙으며 바이오 블레이드의 연속기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역으로 가벼운 연속 공격을…윽! 익!

“흐흐흐~ 이대로 잠시만 괴롭히면 수 읽기조차 필요 없을 상태가 될 것 갈군. 아니. 이미 그런 상태인가?”

익! 잇! 윽! 내공! 왓! 새삼! 익!익! 아쉽⋯ 잇!

막고 피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보인 건 짝뽀의 뒤에서 달려들고 있는 리철민이었다.

아, 안돼!

스팟!

“끅!”

리철민의 가슴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짝뽀의 바이오 블레이드 하나는 여전히 날 몰아붙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하나가 너무나 손쉽게 리철민을 베어 버린 것이다.

저 바보…………! 신체 능력은 결코 짝뽀에 뒤지지 않는데도… 짝뽀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데 급급해서 그렇게 단순무식하게 달려들었으니…………… 웬만한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역전 장면과 달리, 리철민의 회생은 그냥 허무한 회생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그나마 즉사하진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아이 – 빌어먹을! 남 걱정할 때가 아니야!

“흐흣~ 이제 슬슬 끝을 내볼까? 제 아무리 미지의 저력을 감춘 자라고 해도… 심장이나 머리가 완전히 파괴되어도 부활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설마 더 이상 방법이 없는 거야? 나 진유준이 고작 이런 자를 어쩌지 못해서… BB형제를 불러서 도와달라는 그런 추접을 떨어야 하는 거야….? 응? 그런 거냐구, 진유준! 뭐 이런 X같은 상황이………….

스걱~!

“에?”

여유롭기만 하던 짝뽀가 예의 ‘경악과 불신의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 막 짝뽀의 오른팔을 잘라버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랏? 우째 이런 일이?

“무, 무슨… 무슨 짓을………….”

내가 되려 묻고 싶은걸? 댁의 팔이 왜 제멋대로 잘리고 난리야? …아, 그보다.

나는 발밑에 떨어져 있는 짝뽀의 팔, 아니 바이오 블레이드를 툭! 차서 리철민이 쓰러져 있는 쪽으로 치워버렸다. 리철민이 잘렸던 다리를 다시 붙 이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짝뽀는 나의 이런 행동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대체 어떻게……”

“낸들 아우?”

솔직한 대답이었다. 나도 아직 이 뜬금없는 역전의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이, 이!”

파악!

이를 악물며 순간이동을 함과 동시에 찔러오는 칼질을 간신히 피했다. 그리고 다시 한 박자 쉴 수 있었다. 짝뽀가 연속공격을 포기하고 제풀에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작자의 혼란스런 기색을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열라 재밌고 난이도 높은 게임을 하면서 막판왕을 다 깨가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퍼렁 에러 화면 작렬………! 세이브 하는 걸 깜박 했음. 그런데 에러 원인은 불명. …뭐. 대충 그런 기분인 것 같아 보이는군.

난 왠지 내가 컴퓨터 바이러스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짝뽀를 향해 한 걸음 떼었다. 흠칫 놀란 짝뽀가 반사적으로 날리기 시작하는 칼질은 분 명 아직도 강력했다.

하지만… 허둥지둥 하는 공격이라 그런지, 되게 피하기 쉽네. 그럼 어디………….

난 확실하게 겨냥하여 정글도를 그었고, 짝뽀는 피했다. 그는 아직도 내 공격을 문제없이 읽고 있었다.

다시! 다시!

쩌억~!

어랏? 세 번 만에 적중시킨 건 좋은데… 우째서 정글도의 둥에 저 자의 뒤통수가 맞는겨?

“어떻게… 어떻게 이런 공격이 가능한 거냐!”

“공격? 댁이 와서 맞은 건 아니고?”

황당한 노릇이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정작 공격은 잘 피해 놓고는 엄하게도 거두어들이는 도중의 정글도에 그가 스스로 머리를 갖다 댔던 것이 다.

간단히 말해서 계산기 고장 났군.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부담 없이 정글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흐음. 계속 대부분의 공격은 잘도 피하면서 가끔씩………….

짝!

정글도로 뺨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뻑!

또 뒤통수.

철썩!

배를 한 대 맞아 볼록한 배가 혼들렸을 때, 드디어 짝뽀의 굴욕감이 인내심을 넘어 폭발해리는 것 같았다.

“으아아아~!”

괴성과 함께 미친 듯이 왼팔을 휘두르는 순간, 나는 그 빤히 보이 는 동선의 중간에 정글도를 가져다댔다.

서걱-

간단하게 잘린 팔 겸 바이오블레이드가 내 발밑에 떨어졌다. 동작만으로 보자면, 그냥 대충 정글도를 들어 올렸을 뿐인데 이런 결과가 나온 셈이었 다.

가, 갑자기 어떻게 이런… 이런 일이…….”

“아, 글쎄. 나도 궁금하다니까?”

짝뽀의 지금 표정을, 이번엔 온라인 게임에 비유하자면… 게임 중에 자꾸 접속이 끊겨서 게임 진행이 어려워지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 만랩이 저 랩되고 아이템 갑부가 거지된… 그런데도 서버 관리자는 발뺌. 미치고 팔딱 뛰다 돌아가시겠음. 대략 그런 상태랄까?

“…그, 뭐. 초정밀 기계일수록 사소한 에러가 치명적인 고장으로 이어진다고는 하지만…….”

“…사소한 에러?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단 말이다!”

짝뽀가 거품을 물다시피 악을 쓰거나 말거나, 나는 두 번째로 잘린 바이오블레이드도 잊지 않고 차서 리철민 쪽으로 보냈다. 아니. 이제 거기엔 리철민과 백인 북녀 리순희도 있었다. 조금 전에 불현듯 나타나서 리철민의 상세를 돌보고 있던 리순희가 짝뽀의 바이오 볼레이드를 터 억 발로 밟았 다.

“진유준 동무래… 해낼 줄 알았씨요.”

그녀 역시 내심 짝뽀에 대한 감정이 나빴는지, 그를 노려보는 눈매가 지극히 사나웠다.

“고죠, 말끔한 끝맺음 부탁함네다.”

“그야 뭐……”

“다, 닥쳐!”

버럭 고함을 지른 짝뽀가 뿌득, 이를 갈았다.

“조심하시라요! 그 간나래, 우리보다 재생력이 강함네다!”

불컥, 불룩, 기분 나쁜 느낌의 소리와 함께 짝뽀의 잘려진 팔이 다시 생성되고 있었다.

“오~.”

나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팔이 새로 생성되면서, 그 대신 풍성했던 배가 스르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의외의 훌륭한(?) 시스템이었다. 너희 반역자년놈들…………! 이제 곧 갈갈이 찢어 발겨주마!”

짝뽀의 악에 받친 살기에 리순희가 찔끔 기가 죽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에이~ 무슨 그런 가당찮은 말씀을・・・・・・.”

나는 스윽-크게 힘들이지도 않고 정글도를 그었고, 막 새로 생간 팔 겸 바이오 블레이드가 다시 투욱 바닥에 떨구어졌다.

“저런 미녀는 일급 보호종이야. 멸종되어야 할 해충은 당신 쪽이라구.”

“크윽!”

신음성과 함께 물러나는 짝뽀의 나머지 바이오 블레이드 역시 바닥을 굴렀다. 그제야 다급하게 초고속 이동을 펼친 짝뽀가 순식간에 수십 미터 밖 으로 날았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우당탕 추하게 나뒹굴어야했다.

“계산기가 에러 좀 났기로서니, 잘하던 수 읽기는 고사하고 혼자 버벅대다가… 이젠 자기 다리가 잘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는겨? 당신, 계산기 없을 땐 어떻게 산거야?”

나의 물음에 대답할 여력도 없는듯, 짝뽀는 다시 두 팔과 두 다리를 재생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컸던 배둘레햄(?)도 용량이 부족했 는지, 팔다리가 완전히 재생되기도 전에 배는 물론이고 전신까지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쳇. 난 역시 너무 맘이 약해서 탈이야.”

난 결국 쓴 웃음을 지으면서 정글도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봐요. 리순희 양. 미안하지만, 말끔한 끝맺음은 못할 것 같아. 굶어 죽기 일보직전인 것 같은 꼴을 보니까, 더 손대기가 좀………….”

“고거이, 상관없시요. 이젠 그 종간나래, 내래도 아작 낼 수 있으니끼니.”

“그런다고 해도 딱히 말릴 생각은 없지만…………….”

‘이자의 생사는 이 섬의 주민들이 직접 결정하는 것이 좋다.’ 라는 정론(?)을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잠・・・ 깐.”

짝뽀였다. 이제 뽀글씨가 아니라 뽀글 씨 발밑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의 카피본이 된 것 같은 그가 힘겹게 묻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이방인・・・ 진유준. 당신과 리철민의 싸움…뿐 아니라 신의 대리께서 보여주신. 당신의 모든 싸움. 그 모든 데이터는…………….”

짝뽀의 생기다만 팔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EB・・・ 엠퍼러 브레인(Emperor Brain)에 의해… 완벽하게 분석되고… 그에 따른… 나의 육체 연동.. 역시 완벽· ! 헌데 어째 서………….”

“글쎄? 나란 놈은 원래 계산하기 힘들 거라고 했잖아.”

“납득… 할 수가 없어. 나의 EB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분명.”

대화에 끼어든 것은 리철민이었다. 빠르게 회복 중인 것 같기는 해도 아직은 리순희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몸을 일으킨 상태였다.

“저자의 수읽기가 적의 도식적인 움직임만을 읽어내는 정도였다면… 저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전사들을 쉽게 쓰러트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 다.”

내가 오기 전까지 어디서 그렇게 많은 적들을 상대해봤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또한, 특정 무공의 고수들처럼 그 무공을 미리 알지 않고서는 다음 동작을 예상하기 어려운 그런 상대는 더더욱 쓰러트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분명 그 모든 상대의 수를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진유준님처럼 엄청난 초고수조차 그의 수 읽기에 말려 들었잖습니까. 물론 나중에 역전하시기는 했지만…….”

“그건… 음. 뭐, 하여간 그랬지.”

“저자의 수 읽기는 아마도 좀 더 근본적인 것을 읽는 데서 출발하는… 말하자면, 상대의 타고난 반사신경에 의한 반응속도와 패턴의 모든 것을 완 벽하게 파악하여 이용하는 수준일 겁니다. 지금까지는 저도 반신반의했으나, 저자가 진유준님마저 농락하는 것을 보며 확신했습니다.”

“반사신경의 모든 것…………? 쉽게 말해서 눈앞으로 뭔가가 느닷없이 날아왔을 때의 본능적인 움직임에서 눈 감는 속도와 고개 돌리는 각도와 속도 라던가 그런 세세한 것들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자에게는 그 어떤 무공의 어떤 특이한 초식이라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걸 펼치기 위한 인체의 기본 작동 패턴부터 훤 히 꿰뚫고 있는 거니까 말입니다.”

・내참. 뭐, 그런 어이없는 방식이 다 있냐?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한 짓 같지만, 그게 아니야. 대체, 적의 칼질 막는데 왜 적의 모든걸 알아야 해? 이 건 칠판 가득 온갖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 공식을 늘어놓은 다음에 ‘이것이 콜라병을 따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라고 하는 꼴이잖아. “거기에 적의 심리 상태 같은 다양한 요인을 포함한 변수의 계산율 실전에서 한치의 오차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해낸다는건…….”

…으음. 어이없기는 해도, 여하간 엄청나긴 엄청난 능력이군. 아. 근데, 그러고 보니까 …이거… 참.

난 왠지 기쁘다고 해야할지 어떨지, 묘한 기분이 되어야했다. 저 괴물 계산기와의 싸움을 역전시킨 결정적 역할을 한 건, 내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특기 아닌 특기’ 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왜 잘 못 읽을 수밖에 없었는지… 대답해주지 않는건가? 역시 너 자신도 모르고 있는…….”

“아니, 이제 생각나긴 했어. 근데, 실은 그것도 좀 뻘짓이었던 거라……”

난 손가락을 들어서 나의 두 눈 사이를 쿡 눌러 보였다.

“이거 다른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하면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눈을 감는다고 하더라구. 주먹질 전문의 권투선수들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사 람들도 있긴 했지만… 하여간 자꾸 연습하니까 눈을감지 않을 수가 있게 되대? 뭐, 그밖에도 사람의 몸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아서, 심심할 때마다 연습하곤 했어. 제일 유명한… 무릎에 힘을 빼고 툭치면 올라오는 거, 그거 안 올라오게 하는 것이 의외로 가장 힘들더라구.”

“자율신경에 의한… 반사작용을… 연습으로 바꿨다고?”

“자율신경이니 뭐니 어려운 말을 알기도 전의 어렸을 때 심심풀이로 하던 놀이였어.”

일명, ‘너 이거 되니? 난 되는데? 놀이’…………..!

“솔직히 말해서, 내가 작은형보다 잘하는 건 그런 거뿐이라, 더 몰두해서 연습했던 거기도 했지만…………….”

“몰두해서 연습………?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건 본래 안되는 게 당연한 거야!”

쳇.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때마다 대부분 이런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일찌감치 그만두고 계속 잊고 있던 거였지.

“뭐. 나도 커가면서 그게 별로 자랑할 일이 아니란 건 알게 되었지 만 그치만, 어쨌든 똑같은 자극에 항상 똑같은 반응을 하는 건 재미없지 않 아?”

“…오늘 같은 하이 레벨의 싸움을 대비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런 이유로….”

“당근이쥐. 사람이 말야, 아무리 사소한 동작이라도 가끔은 다르게 하는 맛도 있어야지.”

“그건… 자, 잠깐. 혹시… 랜덤?”

“그야 당연하지. 항상 반대로 하면 그것도 또 식상하잖아.”

뭐야. 애써 해명해주고 있는데, 왜 갈수록 오버해서 맛이 간 표정이 되는거야?

“반사작용이 랜덤? 말도 안 돼! 아, 아니! 설사 그런 비인간적인 변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난 읽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넌 단 한 번도 그런 이 상반응을 보이지 않았단 말이다!”

이런 제기. 누가누구에게 ‘비인간적’이라는겨?

“그야, 댁과의 싸움 전까지는 그랬겠지. 나도 그런 건 까맣게 잊고 살아왔었다고 했잖아. 하지만 말야, 오늘 댁처럼 더럽게 재미없게 싸우는 자는 처음이었어. 그래서 내 몸이 나도 모르게 사소한 동작 에 변화를 주며 재미를 추구했는지도 모르지.”

“…애초에… 완벽한 계산이 불가능했던 규격 외의 괴 물・・・・・! 괴물신경…괴물인격………!”

나처럼 모범적인 규격 청년이 어딨다고 이런 모욕적인 언사를………….

“우쒸! 너무 쪼잔하게 싸우는 댁이야말로 문제인 거 아냐? 사람이 살다보면 계산이 조금 틀릴 때도 있는 거지, 뭐 좀 틀렸다고 세상에 이럴 수가 있 네 없네, 별 요란을 다 떨고 지롤을 해싸니까 제풀에 망가지지!”

“닥쳐!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의 몸은 정직한 거야! 전부 내 계산대로 움직인단 말이다! 너만! 너만 거짓말! 거짓말쟁이 생물!”

이 작자가 이젠 별 생떼를…………….

“죽어버렷!”

악을 쓰던 짝뽀의 입이 순간적으로 동그란 형태를 그리고 있었다.

“앗! 엠퍼러 소닉!”

리철민과 리순희가 동시에 놀라며 외쳤지만, 한 박자 늦은 경고였다. 엄청난 위력의 충격파가 짝뽀의 입에서 발사되기 전에 피식~ 맥없이 중단 되었던 것이다.

“…”

수상한 기색을 느낌과 동시에 날린 정글도에 의해 육체와 이별한 짝뽀의 머리는 바닥을 구르면서도 여전히 추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런 칼질… 반사작용은 늘 똑같아도 할 수 없지.”

홋. 말이 그렇지, 사실은 전부 반사작용이 아니라 어느 정도 대비 하고 있었던 거야, 짝뽀. 명칭까지는 몰랐어도 댁이 입 혹은 목구멍에 뭔가 숨기 고 있다는 건 진작에 눈치 깠었어. 댁이 아까 처음 나오면서 지껄일 때, 먼 거리에서 목소리를 까는데도 잘 들렸잖아……? 내공을 쓰는 것이 아닌데 도 그랬으니까, 목에 뭔가 장치가 있나보다 한 거지, 뭐.

엄청난 계산기(?)를 머리에 이식 받아서 모든 사람들의 세세한행동까지 미리 계산해낼 수 있었던 자가, 뽀대 좀 내느라 최후의 비밀 병기를 일찌 감치 노출시켰던 것이다.

“리순희 양. 결국 당신의 요청대로 말끔한 끝맺음이 된 것 같군.”

뽀대도 이렇게 일단 살고 본 다음에 내는 거지, 암.

“오오~ 욕시 위~ 대한 전사 동지십네다! 내래. 요래 가열차게 못진 분은 쵸음입네다!”

크흠. 그렇다고 그렇게 노골적인 반응을 보일 것까지야………….

리철민은 리순희의 전직 기쁨조다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섣불리 뭐라 하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엄청 주눅 든 표정으로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리순희를 투명화 시켜서 데려왔던 건, 당연히 소냐…………! 조금 뒤처져서 따라오던 소냐가 어떻게 리순희를 만나고, 분명 적이었던 리순희를 왜 믿고 데려왔는지… 그 과정은 아직 모르겠으나… 여하간, 아까 리철민이 용기를 내서 짝뽀에게 달려들었던 건, 저 아가씨가 왔기 때문이었으려나…………? 리철민에게는 ‘그래도 한 번 개기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니 힘내라’는 소리를 해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리철민과 소주 한 잔 하는 일과 함께 좀 더 미뤄두어야 할 것 같았다. 이곳의 벽에도 어김없이 설치되어 있는 모니터들 중에서 가장 큰 화면이 켜졌기 때문이었다.

“…요몽.”

내가 요몽을 부른 건, 녀석에게 찾으라고 했었던 인물이 지금 화면에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멋? 데릭 허버트 씨?」

그래. 데릭 허버트…………! 저 남자가 왜 이렇게 등장하는 거야?

최근 나와 얽히는 바람에 망가지기는 했어도, 본 바탕은 특수 부대 출신의 강인함이 느껴지면서 한편으론 어느 정도의 중후함까지 묻어나던… 나 름 B급은 넘지 싶은 레벨의 중년 백인 남자…………! 그는 매우 호화스런 권력자의 집무실로 보이는 곳에서 접대용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자기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공연히 피실피실 웃고 있는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지금 자신의 모습이 나에게 중계방송되고 있는지를 모르 고 있는듯했다.

「허버트씨도 참. 제가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저런 곳에 팔자 좋게 땡땡이 치고 있었네.」

땡땡이? 흠. 그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저긴・・・ 음. 43층 I2호실이네요. 43층 전체가 주석 관저로 등록되어 있어요. 그치만 주인이 방금 아웃 처리 되었으니까.

“이젠 마법사 케인의 관저…라고 해야겠지. 케인이 짝뽀와 대등한 관계의 초대 손님쯤 되는 건지, 아니면 짝뽀를 뒤에서 조종한 원흉이었던 건지 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말야.”

「우응~ 근데 왜 그 케인은 안 나오고 허버트 씨가 나온 거죠? 허버트 씨는 혹시 위장 귀순을 아, 이건 어쩌면………………」

요몽은 뜬금없이 말총머리 가발을 꺼내서 지 머리에 쓰더니 짐짓 목소리까지 남자애처럼 변조하기 시작했다.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

쯧. 이 녀석이 지금 대체 뭔 흉내를 내는 건지 모르겠네.

“범인, 아니 케인은 저 화면 안에 있어!”

요몽은 자신만만하게 화면을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화면 속의 데릭 허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닙니다.”

에?

요몽은 물론이고 나까지 약간 놀랐으나, 이건 아무래도 우연의 일치인 것 같았다.

“전 그분의 수하에게 당한 고문에는 진심으로 굴복했던 것이 아닙니다.”

…으음. 데릭은 지금 화면 바깥의 보이지 않는 누군가(아마도 마법사 케인)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군.

“제가 그분에게 진정으로 감탄하고 존경심을 느끼게 된 건…….”

데릭 허버트가 커피 잔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하려는 기색을 보였을 때였다.

「에잇! 몽몽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당신의 가면을 벗겨주겠어!」

“몽몽.”

깝족대던 요몽을 몽몽 할아버지(?)가 냉큼 체포해 갔고, 비로소 조용해진 가운데 데릭 허버트의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로드 오브 헬, 그분은…….”

요몽 때문에 놓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내 얘기를 하는 도중인 것 같군.

“…나 같은 예술가의 상상력조차 따라가기 힘들 만큼 터무니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아니, 어쩌면 그의 존재가 오히려 그 아름답고 성스러 운 세계가 잉태되고 꿈틀대며 신비의 순수한 날갯짓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일 수도…………! 신의 기적을 투박한 칼 한 자루로 대행하는 성자로서의 과 감한 잔혹성과 야생 짐승의 비린내, 또한 매혹적인 선혈의 바다 위의 수줍은 처녀의 감미로운 신음소리를 갈구하는 절박함으로…..”

아직도 보이지 않고 있는 누군가가 거칠게 말했다.

“그만!”

…동감. 데릭 허버트, 저 인간이 대체 날 뭘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네.

“데릭…………! 넌 역시 진심으로 그 남자, 진유준의 수하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군.”

으음. 그동안 예상하고 있던 것과 거의 일치하는 분위기의 목소리로군. 음침하고 착 가라앉은 그러니까, 깊은 동굴 속에서 어두운 후드를 뒤집어 쓰고 주문을 외는 전형적 악역 마법사 분위기의 목소리야.

“위대한 대마법사 케인…………! 제가 전날 당신께 맹세했던 충성 또한 제 심장의 피처럼 붉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보다도 현실적이 아 니며, 당신보다 아득한 존재가 강림하셨으니, 당신 또한 저와 함께 그분을 숭배하는 자가 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이런 저 아저씨가 오히려 케인을 설득하려고 드네 그려. 비록 사이비 종교에 빠지기 무지 쉬운 타입인 것 같기는 해도, 내 입장에서는 나름 기특(?)하기도 하고…………….

“케인이여~ 전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저의 당신에 대한 충심과 사랑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부탁………….”

휘릭~

보일 듯 말 듯 가는 실이 데릭 허버트의 목을 감고 있었다.

절단실?

나도 모르게 움찔 했지만, 모니터 화면에 정글도를 휘둘러서 데릭 허버트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큭! 꼭! 꼭!”

억눌린 신음성과 함께 데릭 허버트의 몸이 스윽 허공으로 떠올랐다.

곧바로 목을 자르지는 않았어………! 아직 죽일 생각은 없는 건가?

화면에는 목 매달린 사형수처럼 버둥대는 데릭의 다리만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획- 옆으로 날아가더니. 화면 밖의 어딘가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지는… 통증을 호소하는 소리! 역시 죽이지는 않은 거군.

“후후후.”

음. 드디어 화면 안으로 최종 보스 캐릭, 마법사 케인이 들어오네. 짙은 회색의 망토에 후드까지 깊게 뒤집어쓰고 있어서 붉은 입술만 겨우 보이 는… 쯧. 이거 너무 예상대로의 모습이라 오히려 약간 김새는 기분인 걸?

“안심하시오. ‘인질’을 죽일 리가 없으니까.”

“인질…………? 방금 그 남자가?”

“후후. 본래 나를 숭배하던 자라고 해서 인질의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내가 왜 굳이 데릭의 당신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 주었겠소. 난 당신 이란 남자가 아무리 작은 인연을 맺은 자라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글쎄……? 그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문제지. 하지만, 뭐… 일단 말은 해봐. 그 남자를 인질로 뭘 요구하겠다는 거지?”

“…특별히 뭔가 요구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에?”

“난 이제 데릭을 이 43층의 어딘가에 있는 ‘수족관’에 던져 넣을 거요. 이 섬의 미친 주석, 조금 전 당신의 칼에 죽은 자가 기르던 전장8미터에 달 하는 백상어 두 마리의 수족관에 말이오.”

젠장. 이런 초현대식 건물 안에서 뜬금없이 웬 백상어?

“그건, 그러니까………….”

“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프리메이슨에서 한 국가를 살 수 있을 정도의 현상금을 걸어 놓은⋯ 진유준이란 남자의 제거! 난 당신을 심리적으로 쫓기는 상태로 만들어서 그 가능성을 높이고 싶은 거요.”

“친절한 금자. 아니, 친절한 케인 씨. 설명은 고마웠어. 근데・・・ 기왕 친절한 김에, 그 칙칙한 후드를 벗어서 얼굴 좀 보여주면 안 될까?”

…음. 벗는 척도 안하는군.

“뭐랄까, 분명 첨 만나는 작자인 것 같으면서도 왠지 아주 낯설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솔직히, 저렇게 꼭꼭 감추고 있는 자를, 게다가 직접 마주 대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모니터로 보면서 뭔 감을 잡을 수 있겠는가. 괜히 그냥 한번 떠 보는…………….

“훗. 조금 실망이야.”

“뭐?”

“나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힌트를 줘 왔소. 아주 쉽고 결정적인 힌트조차 활용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조금 전 주석을 쓰러트린 것도 운 이 좋아서였을 뿐인 모양이군.”

뭐야? 이건 정말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란 의미? 저 인간, 대체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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