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43화 : 완벽한 패배.
3. 완벽한 패배.
다사다난한 화이트 판타지아 섬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나는 주석궁의 옥상에서 황혼의 바다를 감상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심각한 상황이 현재 진행형이고. 그래서 나도 계속 여기저기의 상황을 체크하며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이쯤에서 나 하나 슬쩍 빠져나가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그런 의미에서…………
“몽몽.”
[예, 주인님.]
“지금… 대교는 모해?”
[헤헤- 역시나!]
요몽?
“넌 또 왜?”
[항상 ‘누구누구의 현재 상황은?’이라고 하시잖아요. 근데 대교님에 대해서 물을 때는 역시나 말투부터 다르시네요오!]
“…촤식. 새삼스럽기는… 하여간 대교 뭐하냐고, 인마.”
[어… 그게 실은…….]
응? 이게 왜 뜸을 들이고 그래?
[좀 전, 40분쯤 전에요, 대교님이 ‘청혼’을 받았지 뭐예요.]
뭐시라고오~?
[두 번째로 찾아낸 ‘신들의 유희’ 멤버가요, 중동의 왕족이었거든요? 대교님이 도착해서 공격을 시작하려고 했더니, 저항은 고사하고 오히려 엄청 난 환영 파티를 준비해놨더라구요. 그 왜, 지난번에 주인님과 대교님께서 싸우는 모습이 신들의 유희 멤버들에게 중계방송 되었었잖아요? 그때 대 교님을 보며 홀딱 반했다면서… 자기의 13번째 부인이 되어달라고… 아니, 대교님만 원한다면 다른 12명의 부인들은 모두 버리겠다고…………”
대체 어떤 씨빠빠가 그런…………
“그래서, 대교의 반응은?”
[12명의 부인들이… 미망인이 되어버렸죠, 뭐.]
으으음. 좋아. 내가 어쩔 것도 없이 대교가 알아서 쓱싹- 버린 모양이군.
[어… 대교님께서 혼자 중얼거린 말씀까지 보고해야 할지 어떨지……….]
“…일단, 그냥 해. 인마.”
“…쓸데없는 짓을 하지만 않았어도 바로 처단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리석은 자⋯!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감히 하나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모독하다니………….”
・…음? 약간 난감한 것 같으면서도 대뜸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소리를 했군, 우리 대교는.
[암튼, 그렇게 두 번째 상황은 종료되었구요. 곧 세 번째 신들의 유희 멤버가 있는 곳으로 출발하실 거예요.]
“…너무 무리해서 다니지는 말라고 해.”
[어, 이번에는 문자를 직접 작성하지 않으시게요?]
“그야 뭐………….”
당연히 직접하고 싶지. 하지만 지난 번 ‘우리 애기’ 메시지 사건(?)을 생각하면 아직도 영 쑥쓰러워서리..
“이번엔 그냥 니가 적당히 내용 만들어서 보내줘. 하여간 ‘무리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말야. 솔직히 말해서 지난번처럼… ‘울 애기 힘들어서 어째, 좀 쉬엄쉬엄 다녀. 애기가 힘들면 내가 더 마음 아파’… 식으로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띠리륑~♬
“야, 야! 너, 또!”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번엔 요몽이 독단적으로………….]
“하여간, 취소! 최소!”
[・・・대교님께서 이미 확인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또 그런 엽기적 문자를…!
삐링~♪
미치겠다! 싸나이 진유준이 또! 우째 이런 일이이~~
[주인님. 자룡대주로부터의 메시지입니다.]
대교의 답신보기도 두려운… 응? 가만? 지금 대교라고 한 게 아니라… 자룡대주? 자룡대주의 메시지라고?
흥! 핏! 쳇!
닭살 커플 즐!
뭐, 뭐냐, 이건!
“야 인마, 요몽! 너 자꾸 니멋대로… 아, 아니 잠깐만, 지금은 그보다! 이거 뭐야! 왜 자룡대주가 이래? 글루 잘못 보낸 거야?”
[아, 아뇨. 제가 실수한 게 아니라 대교님이……….]
“뭐?”
[대교님이 하셨다구요. 대교님이 주인님께 받은 문자를 자룡대주에게 자랑하신 거라구요.]
뭐시라? 대교가? 대교가 정말 그런… 터무니없는… 아, 아니 터무니없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래도 말도 안 되⋯엘 것까지 없지는 않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여튼 대교가 그랬단 말야?
물론, 아무리 대교라도 때로는 보통 소녀들처럼 애인의 문자를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기도 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나와 대교가 지금 굳이 따로 다니고 있는 건・・・ 수하들에게 독립적인 이미지의 대교를 각인시키기 위함이야. 그래서 제대로 통화도 못하고 몰래 문 자만 주고받(고 있삭제)는 중인데… 근데 그걸 자랑해? 대교와 자룡대주가 그렇게 주종간을 넘은 절친한 사이였나..? …어, 물론 따지고 보면 대교가 주가혜였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니까 만난 지는 좀 된 거고… 나름 친해지는 것 같기도 했으며… 요즘 둘이 같이 다니느라 더 친해졌을 수 도 있기는 있는 거지만… 그게, 그러니까… 둘은 사실, 나 때문에라도… 진심으로(?) 친해 질 수는 없을… 그런 사이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으~ 모르겠다. 여하간 결국 당장 문제는 내가 X팔려 미치겠다는 거야! 그딴 문자를 봤으니 자룡대주가 저렇게 나올 법. 응? 가만?
나는 문득, 그냥 넘길 뻔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나에게 이런 문자를…? 뭐야, 이거! 대교랑 좀 친해졌다고 나까지 띄엄띄엄 보게 된 거야? 그렇다면 담에 만나면 다시 군기를 잡⋯을 수 있을까..? 으~ 젠장! 그러기에는 명분이 너무 X팔리잖아!
문득 깨달은 것도 영양가 없긴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응징(?)을 받아야 할 녀석은…………
“요모옹! 너, 이 자쉭~!”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뾰롱~ 도망가버리는 요몽.
“…몽몽! 너 진짜 요몽 관리 똑바로 안 할래?”
[죄송합니다, 주인님. 원하신다면, 요몽의 권한설정을 재조종하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 대교님 관련 사항도 제가 다시………….]
쯧. 그건 또 아니지.
“그건 됐어. 넌 지금도 중요한 일 많잖아.”
사실, CR애들에 관한 데이터 분석이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지.
[알겠습니다. 현재의 포메이션을 유지하면서도 요몽의 교육에 성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특단의 조치’를 시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응? 그런 게 있어? 뭔데?”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 문제만큼은 사후보고를 허락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어, 응. 그래, 그럼.”
몽몽이 모처럼 ‘부탁’을 해서 무심결에 허락을 하고 말았네. 근데. ‘특단의 조치’…? 대체 어떤 방법이기에 몽몽이 그런 표현을 으으
“저기, 몽몽.”
[예, 주인님.]
“…아니다. 됐어.”
쳇. 내가 무슨 정치인도 아니고, 금방 말을 바꿀 수는 없잖아. 괜히 나중에 보고하라고 그러는 바람에 은근히 아니 솔직히 더럽게 궁금하잖아, 이 거.
“몽몽.”
[예, 주인님.]
“힌트라도 좀…. 아, 아니 됐다.”
아놔. 내가 왜 이리 구차하게…………
[주인님. 미스 카이가 오고 있습니다.]
“응? 어… 그래.”
쳇. 어째 쉬었어도 쉰 것 같지가 않네.
“저어・・・ 진유준 씨?”
미스 카이는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런 태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요?”
돌아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비로소 마음을 놓는 기색이 느껴진다.
“운기… 뭐라고 하던데, 고수들이 그런 걸 할 때는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들어서 망설였어요.”
흠. 확실히 개념 없는 여자가 아니긴 해.
“하지만 아무래도… 마물들의 눈치가 심상치 않아서요.”
응?
“아시다시피, 그들과 전 항상 어느 정도는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뭔가 위험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빨리 그 놈들을 처리해 달라고 수를 쓰는 걸까? 아니면 진짜……
“당신의 소환수…….”
내 소환수? 아, 라프 말이로군.
“그 새끼 늑대를 해치려는 것 같아요.”
뭐시라?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지그시 눌러 참았다.
우선, 라프는 해친다고 쉽게 해쳐질 녀석이 아니야. 물론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겠지만… 저 청순가면의 여우 아가씨의 말에 너무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는 좀 그렇지? 게다가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면 몽몽이 먼저 알려줬을 텐데 말야.
“몽몽.”
[영상 체크만으로는 아직까지 코드명 미스 카이의 주장과 일치되는 상황이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몽몽이 24층 마계 출장소(?)의 상황을 영상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몇 개 층이 합쳐진 공간을 수많은 마물들이 가득 채우고 앉아 있는 정경! 흉악한 괴물들이 무시무시한 이빨 사이로 시퍼런 불길을 날름거리고…… 징그러운 촉수가 사방에서 꿈틀대는 지옥의 중심부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 중 한 괴물의 무릎 위에 편안히 잠들어 있는 라프…! …음. 고 녀석 참. 잠든 모습은 진짜 강아지처럼 귀엽기만 하군.
처음 모든 마물들은 라프가 사방으로 촐랑촐랑 뛰어다니며 장난치는 걸 마지못해 받아주며 놀아주었다고 했다. 마치 거대 조폭 두목의 아이를 봐 주게 된 동네 양아치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성격 더러운 양아치들은 대부분 참을성도 없다.
몽몽의 말에 의하면… 내가 떠난 후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어떤 마물이 라프에게 살짝(?) 깨물리며 순간적으로 빡 돌았었다고 하던가? 그러나… 그 마물이 라프를 한 입에 집어삼킨 직후, 뱃속으로부터 작렬한 라프의 충격파! 결국 그 마물은 사방에 구멍이 뚫려 사망(?)…! 그 이후 다른 마물 들은 다시 라프의 기분을 맞춰주는데 주력하더라나…………?
몽몽에게 마지막으로 보고 받은 건, 결국 한참 뛰어놀다가 지친(혹은 질린?) 라프가 동족에 가장 가까운 라이칸스로프의 무릎 위에서 잠들었고 그 제야 마물들도 한숨을 돌리고 쉬는 분위기가 되었다는 그런 상황까지였다.
일견, 지금도 계속 그런 분위기인 것 같기는 한데… 흐으음. 다시 생각해보면 저 양아치 마물들이 계속 같은 분위기라는 게 오히려 수상하기도 하 군. 저런 양아치들이 얌전할 때는 보통 음모를 꾸미고 있기 마련이니 말이야.
“뭐, 어차피 약속을 한 일이니까……”
나는 비교적 느긋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봅시다, 까짓 거.”
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 주석궁에 왔을 때는 모든 엘리베이터가 작동 불능이었지만 지금은 전부 복구해 놓은 상태이 다. 미스 카이는 슬쩍 내 옆으로 따라 붙으며 물었다.
“생각보다 침착하시네요? 물론 당신의 소환수가 어떤 특별한 존재의 아들이라고 하는 얘기는 저도 들었지만·
“아니, 녀석은 내가 소환한 게 아니야. 사실은 라후의 혈족 아들도 아니고 말요.”
“예? 그럼……………”
“본래는 그들 중 하나의 꼬리였었는데………….”
“자, 잠깐만요!”
갑자기 내 말을 끊은 미스 카이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뭔가 강렬한 느낌을(텔레파시?)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주인님! 24층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몽몽 역시 다급하게 경고하며 영상을 띄워주었다.
이런, 이런… 얌전한 척하고 있던 마물들이 일제히 슬금슬금 라프의 주위로 모여들고 있네? 영상만으로도 분명히 수상한… 아, 아니, 보기에만 그 런 게 아냐! 젠장! 나에게까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아직 먼 거리의 나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마물들이 동시에 엄청난 살기와 마력을 발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 참을 만큼 참았다. 단숨에 끝장을…..”
미스 카이가 천천히 중얼거리는 소리는 놈들의 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쳇! 이것들이 기어이……………
“몽몽!”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달려가자 엘리베이터문이 열리며 어두운 공간이 드러났다. 몽몽은 따로 명령할 것도 없이 알아서 엘리베이터 박스(?)를 한 칸 위로 올려 치워준 것이다.
여긴 48층이고 24층까진 대체 몇 미터나 되는 건지… 알게 뭐냐!
난 대뜸 빈 공간으로 뛰어들어 쮸우우우~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정말 마계로 떨어지는 구멍에 뛰어든 기분이었다.
으읏! 비루한 경공이라도 써서 속도를 줄여야 윽? 자, 잠깐? 이익!
파팟! 콰콱!
한 쪽 벽을 발로 차 몸을 반대편으로 밀며 정글도를 그 쪽 벽면에 박아 넣었다.
카카카카카칵~!
날카로운 금속성 굉음과 함께 불꽃이 튀며 서서히 낙하 속도가 줄었고, 결국 완전히 멈출 수가 있었다.
아~ 쓰바! 팔 땡겨 죽갔네! 하, 하지만 아무래도 멈춰야 할 것 같아서…………
[현재 위치는 26층! 탈출 루트는 뒤쪽!]
몽몽의 안내와 함께 열리는 26층의 문으로 몸을 날려 탈출했다. 몽몽도 나도 ‘탈출’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 건, 24층의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기 때 문이었다.
24층은 분명 강력한 결계가 설치되어 있어서 마계의 괴물들이 어지간히 날뛰어도 외부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했었어. 하지만 문득 느끼고 도피까지 하게 한… 이 거대한 기운..! 결계고 뭐고… 지진이 난 것처럼 건물 전체를 울리고 있는 이 어마어마한 마력은 물들이 모두 힘을 합쳤다 해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라프가 아무리 늑대 마신(魔神)의 분신이라고 해도 위험하다! 그런 판단과 동시에 새삼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방금
젠장…! 마
본능적인 위기감 때문에 회피 행동을 했고, 실제로 지금의 난 저런 거대 마력을 감당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몽몽! 놈들의 위치를 보여줘!”
이대로 두 개 층 너머의 놈들을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정글도에 맺히기 시작한 도기가 그 어느 때보다 시퍼런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주인님! 진정하십시오!]
“야! 이럴 때 진정은 무슨…….”
[이미 마력이 결계의 한계치에 달했습니다! 지금 결계를 건드리면 모두가 위험합니다!]
“뭐?”
젠장! 내가 지금 결계를 가르면 그 안의 마력이 폭발하듯 발산될 거라는 얘긴가…? 여기가 다른 곳이었다면 그래도 상관없겠지만.
[정확한 피해 정도는 계산하기 어려우나, 같은 건물 내의 백신 제조 시설에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질 가능성은 80% 이상입니다.]
그래. 그게 문제지..! 10만이 넘는 인간들을 구해야 하는 시설이 파괴되기라도 하면 으- 어쩐다?
[약 2분 11초 전, 24층의 CCTV가 모두 파괴되어 현장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적들의 지속적인 마력 발산 패턴으로 보아 코드명 라프의 생존은 확실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라프가 아직 당하지 않았으므로 계속 공격하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건 계속 내 발 밑의 바닥에서 우릉- 쿠릉~ 느껴지는 진동으 로도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느껴지는 기운 속에 라프의 기운이 없다는 거야. 놈들에게 둘러싸여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다는 건데… 우이 쒸! 안 되겠다!
“물귀신 남매들(아쿠아린 형제+ 세이렌 자매) 어딨어! 빨리 호출해!”
나는 그렇게 외치며 복도의 반대편 끝으로 달렸다. 거기엔 건물 바깥으로 난 유리창이 있었다.
전에 녀석들의 물줄기를 타고 주석궁 옥상까지 단숨에 올라갔듯이, 또 녀석들의 물줄기를 이용하면 ・・・ 그러면 건물 밖의 허공에서 결계의 옆을 칠 수 있어. 폭발의 방향이 옆이라면 위층의 시설들은 무사할 수 있을 거야!
[해당 병력의 현재 위치는 10.3KM밖의 수로입니다. 호출하긴 했습니다만…….]
이런 썅! 걔들은 왜 하필 이런 때에… 으~ 남 탓 할 일이 아니야! 내가 마물들을 너무 얕보고 대비를 안 해서 이런 사태를 맞은 거라구!
반성도 반성이지만, 먼저 선택을 해야 했다. 물귀신 아이들을 기다릴 것인지, 그냥 다른 방법을 강행할 것인지를 말이다.
…기, 기분 탓인지 몰라도. 방금 라프의 비명소리를 들은 듯한.. 으아! 못 참겠다! 당장 가야겠어!
[주인님! 현재 시행하시려는 행동은 위험도가 너무 높습니다!]
몽몽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재빨리 천잠사(天蠶絲)를 꺼내고 유리창을 열어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천잠사는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쓰기가 쉽 지 않은 아이템이지만 할 수 없었다.
[아, 주인님! 멈춰 주시………….]
“말리지 맛!”
[그게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뭐?
멋지게 몸을 날리려다 급정거…가 좀 늦었다. 벌써 몸이 반 이상 건물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젠장!
투욱- 애매모호 허전무쌍하게 떨어진 다음에 대롱대롱~ 천잠사에 매달려 있자니까, 몽몽의 보고가 이어졌다.
[다급하여 확정적인 표현을 썼으나, ‘그럴 필요가 없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 변화가 있는 것으로 추정됨으로 정정하겠습니다. 또한, 정보 제공 타이 밍에 문제가 있었던 점을 사과드립니다.]
“…됐고. 됐으니까, 구체적인 보고나・・・ 아니, 그것도 됐다.”
과정이 애매해서 그렇지, 어쨌든 결국 난 지금 24층 높이의 건물 벽에 매달려 있게 된 셈이었다. 다만, 24층은 창문이 없어서 아직 안을 볼 수가 없 었다.
하지만… 알 수 있어. 마물 관리용 결계가 파괴되기 직전까지 팽배했던 살기와 마력이 어느 사이에 거의 느껴지지 않게 되었어. 그 대신 새롭 게 느껴지는 이 낯익은 기운은… 이건 분명… 라프이면서도 라프가 아닌 이런, 이런… 설마 라후의 혈족, 존귀한 삼형제 분들께서 친히 왕림하 신 걸까…? 자식(?)의 위기를 느끼고?
나는 천잠사를 좀 더 풀어서 한 층 더 아래로 내려간 다음에 그곳의 구멍(지난번에 BB형제가 뚫어 놓은)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24층의 결 계는 에너지 차단 전용이라 호신강기도 없이 그냥 들어갈 경우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시 계단을 올라 24층으로 오르는 사이 에라혈삼(라후의 혈족 삼형제) 강림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뭐랄까. 라프 이상의 기운은 분명하면서도 라혈삼과는 또 미묘하게 다른 것 같은데…? 그럼 대체 뭐가 등장하고 어떤 상황이 된 거지?
직접 현장에 도착했음에도 바로 의문이 풀리지 않은 건, 24층 안이 매우 짙은 안개 같은 것으로 가득하여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기 때 문이었다.
[현 세계의 안개는 아닙니다. 이는, 다수 비공인 에너지의 충돌로 인해 파생된 잔여 에너지가 통상 대기에 일으키는 복합적 반응 현상의 한 패턴 으로…………….]
“됐다. 그냥 마계의 안개 정도로 생각할 게.”
예의 ‘마계의 안개’는 비교적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차츰 안 쪽으로… 그러니까, 마치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서 사라지고 있는 듯한 형국이었다.
그거야 어쨌든… 이거야, 원.
안개가 걷히며 드러나는 공간 여기저기에 대형 마물들이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 라프의 충격파에 당한 듯한 녀석들도 많았지만, 중심부 쪽으로 갈수록 땅에 떨어진 레고 꼴이 된 녀석들이 더 많았다.
저건 나의 검기나 검강 못지않은 공격이 가해진 흔적이야. 역시 라혈삼의 발톱질..? 라혈삼들은 발톱으로 다섯 줄기의 검강을 한꺼번에 날리는 것 과 같은 공격이 가능하니… 아, 그런데, 아직 살아 있는 놈들도 있다. 하나, 둘, 셋. 음. 일단 세 마리인 것 같군.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겨우 서 있는 것이 고작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 죽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중 한 마리는 라혈삼의 후손 격인 라이칸 스로프였다.
“요, 용서를… 부디 무례를 용서……………”
라이칸스로프는 누군가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다른 두 마리 마물들도 같은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걷힌 안개의 자락들이 허공에 떠 있는 한 마리의 늑대를 휘감아 돌았다. 양아치 마물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차원이 다른 분위기의 늑대 형상을 한 마신(魔神)이었다.
라혈삼의 몇 번째 형제인… 아, 아니, 그 누구도 아닌듯? 그럼 또 다른 라후의 혈족…? 그것도 아니야! 라…프? 저게, 라프라고……..?
완전히 다 자라 위풍당당한 늑대의 모습을 하고, 눈에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눈매며 주둥이매 (?)가 분명 어딘가 라프였다.
마물들의 연합 공격에 자극을 받아서 급속 성장…? 혹은 일시적인 변신…? 이, 이거・・・ 가급적 후자였으면 좋겠…지? 그게, 그러니까… 거실에서 대형 늑대를 키웠다간 어머니께 부지깽이로 맞는 수가……………
한가한(?) 걱정을 하는 사이에 성인 버전 라프로부터 어떤 메시지가 전달되기 시작했다.
〈크르르~ 모두 잘 들어라!〉
전음? 그럴 리는 없고 정신에 직접 전달되는 일종의 텔레파시로군.
<이것은 나의 분신… 내 영혼의 일부…! >
어? 이건 라혈삼의 첫 째, 대빵의 음성 같은데?
〈인간… 진유준과 우리의 약속의 증거! 인간 진유준이 우리 혈족과 동등하다는 증표………!
아… 맞다. 라프와 오래 지내다보니 깜박하고 있었는데, 라프는 본래 독립적인 존재라기보다는 나의 신분증(?) 비슷한 ‘무언가’였었지?
<봉인을 연・・・ 마계의 피조물들아… 바람이 되어 나의 뜻을 실어 나르라! 메아리가 되어… 나의 뜻을 전하라………!〉
이거 어째… 녹음된 음성을 듣는 것 같은 분위기지?
<봉인을 연・・・ 마계의 피조물들아… 바람이 되어………〉
흐음. 역시 같은 메시지를 반복하는군.
라프를 통해 전달되던 라혈삼 대빵의 메시지는 두 번째 반복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멈춰졌다. 그와 함께 라프의 성인 버전 형상도 스르르르- 작아지고 있었다.
오…! 다행이다. 다시 집에 데려 갈 수 있겠어.
성인 버전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새깽이 라프가 곤히 잠든 모습으로 있어줘서, 나는 안도했다. 그러나 라이칸스로프를 비롯하여 간신히 생존한 마물들 세 마리는 새깽이 늑대로 돌아온 라프도 여전히 두려운 듯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어이~!”
내가 부르자 그제야 내가 나타난 걸 알고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 당신…! 지, 진짜 그분들과… 아?”
말하다 말고 문득 뭔가를 상기하는 것 같더니, 세 마리 모두 털썩 무릎을 꿇고 내게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라혈삼이 ‘현생에서 우리와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했을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전혀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거야 원. 난 이제 마계에까지 이름을 떨치게(?) 된 건가? 라혈삼들도 참 그런 약속은 굳이 잘 지키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사실 별로 한 것도 없이 유명인사가 되는 것도 달갑지 만은 않은데다, 이 약속의 끝에는 결국 라혈삼과의 재대결이 기다리고 있으니 더더욱 난감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뭐,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몽몽. 미스 카이, 내려오라고 그래.”
잠시 후.
24층으로 내려 온 미스 카이의 태도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전멸에 가까운 상태가 된 마물 군단의 상황을 천천히 돌아보며 은근히 안타까워하는 기 색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역시 여우라니까? 속으론 좋아 죽겠으면서…………
이런 생각을 담은 나의 시선을 살포시 무시해 주면서, 미스 카이는 생존자 아니 생존마물들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처음 내려왔을 때는 다른 마물들은 물론이고, 그녀의 열성 스토커라는 라이칸스로프마저 그녀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자신들 앞에 서서 안쓰러워하는 시 선을 던지자,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풀이 죽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미스 카이가 날 이용해서 자신들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건 눈치채고 있었겠지…? 그래서 먼저 선수를 치느라 라프 부터 공격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내가 뭘 어쩌기도 전에 지들이 스스로 잠자는 늑대를 건드렸다가 개피 본 거니 누굴 원망하 기도 난감한 모양이군. 음・・・ 하지만 그래도 그녀를 원망하고 증오하려고 들면 아주 명분이 없는 건 아닐 텐데… 결국 포기하는 저 모습은………….. “아아~ 가여운 나의 전사들…! 난 당신들이 나와의 가혹한 운명의 사슬을 끊고 자유의 몸이 되길 바랐을 뿐인데… 어쩌자고 이런 무모한 짓을… 목숨을 걸고 마신의 힘에 저항하는 용기를 보이고 말았나요. 가여운 나의 전사들이여………….”
미스 카이는 찔끔 눈물까지 한 방울 흘리며 열연을(?) 펼쳤고, 결국 라이칸스로프와 그 외 마물 두 마리도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 미스 카이..! 비, 비록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우린・・・ 당신과의 계약을 기쁘게 마족 전사의 긍지를 가지고 수행하였으며 그 자랑스러운 세월의 기억을 붉은 심장 속에 담아… 언제까지나……….”
라이칸스로프의 음성은 자못 비장했지만, 옆에서 보는 난 그저 쓴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저 여자, 마물들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시달림 받은 것처럼 말하더니… 역시 뻥~이었어. 물론 다루기 힘든 녀석들인 건 분명했겠지만, 저 여잔 그래도 능숙하게 어르고 달래며 꼬드겨서 잘 이용해 먹었을 것 같으니 말이야.
어찌 되었건, 이미 패거리가 거의 전멸 상태인데다 저 가엾은 수컷들은(?) 미스 카이에게 보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들을 마계로 돌려보내는 일은 어렵지 않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미스 카이가 품에서 꺼내 든 건 작은 손거울…? 저런 게 계약의 매개체 같은 거였나…? 저걸 바닥에 놓고 뭔가 주문을 외우니까… 오~ 작은 거 울에서 뿜어져 나오는 주황색 빛이… 허공에 커다란 원형의 출입구 같은 걸 만드는군. 응? 가만…? 그뿐이 아닌데……………?
사방에 널 부러져 있던 마물들의 몸이 조각 하나까지도 희미한 빛에 쌓이고 있었다. 거울에서 나온 빛에 덮인 마물들의 잔해가 하나 둘 떠오르는가 싶더니 하나 둘 출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계약이 된 건 뭐든 되돌려 보내는 건가..? 살아 있는 세 마리가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건 당연한 거지만, 죽은 녀석들까지 빛에 쌓여 빨려 들어가 는 모습은… 음, 뭐 나름 볼 만하구먼.
요 몇 년 사이 워낙에 별꼴 다 봐왔던 나에게 크게 놀라운 장면은 아니었으나, 여하간 마계로의 출입구는 마물들의 흔적 하나까지 남김없이 빨아들 이고 난 후에야 스륵~ 닫혔다. 이어서 완전히 빛이 사라져버린 손거울은 이제 약간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평범한 소품에 불과해 보였다.
수년간 마물들의 추근거림과 스토킹에 시달렸었다는(자기 말로만?) 미스 카이의 지금 표정은… 훗. 저 아가씨도 참. 놈들이 사라지자마자 대뜸 환 하게 쪼개는군. 아까 놈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표정 연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어.
“아아~ 정말 감사해요! 솔직히 이렇게 간단히, 깔끔하게 해결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 뭐… 난 결국 별로 한 일도 없으니까, 내게 감사할 것도 없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더욱 생글생글거리며 다가왔다.
“후후~ 물론 그들이 자멸한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그 무서운 마신의 후예는 진유준 씨가 데려온 거잖아요.”
“그야 뭐…….”
“아~ 저에게도 그렇게 작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든든한・・・ 그런 소환수가 있었다면 떨쳐내려 애쓰지도 않았을 텐데…..” 떨쳐내는 건 고사하고, 지금 미스 카이가 내 품안의 라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탐욕(?)의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택도 없는 생각 마쇼!”
“아이~ 참. 제가 뭘요. 누가 감히 당신의 품에 있는 걸 노릴 수 있겠어요.”
흥. 군침을 삼키면서(?) 잘도 시치미를 떼는군.
“여하간, 이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녀석이 아냐. 이 녀석의 모체 격인 마신들과 내가 나중에 다시 한 판 붙을 때를 위한 증표 같은 거란 말요.”
“아… 그러고 보니, 처음에 그런 말을 하셨었군요. 아까 제 능력으로(천리안) 싸우는 모습을 보니, 새끼 늑대도 정말 어마어마한 괴물이던데… 그 어미들과 싸우기로 했단 말이죠? 하아~ 진유준 씨는 정말 알면 알수록 놀라운 분이로군요.”
…암. 놀랍지. 나도 내 처지가 너무 어메이징하고 판타스틱에 매니악(?)해서 돌아가실 지경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야.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스 카이는 다시 곱게 웃으며 덧붙였다.
“전 이제 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밤, 아무리 무서운 남자가 찾아온다고 해도 말예요.”
…쯧. 그래. 이제 그 일이 남아 있군. 계속 이 민폐 아가씨의 패턴에 말려드는 건 불쾌하지만… 더 이상 괜히 무심한 척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어.
“그 무서운 남자, 일단 내가 아는 자인 건 틀림없는 것 같고… 심지어 나와 같은 편에 서 있는 자 같은데. 맞소?”
“으음. 실은 그래요.”
사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뻔한 부분이었다. 이 아가씨는 비록 원판에게 고용된 몸이라서 그랬다고는 해도, 어쨌든 나의 적이었으며 지금도 아군이라고 하기는 상당히 애매하다. 그런 여자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문의 습격 예정자’의 신분이 우리 쪽 계열일 가능성을 높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 아가씬 그자의 신분을 내게 숨기고 싶어하니… 당연히 상대는 나와 적대 관계가 아니야. 또한, 아까 나누었던 대화에 섞여있는 힌트들을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의외로 쉽게 용의자가 좁혀지기도 하지. 물론, 이 아가씬 약간 엉뚱녀 기질이 있어서 정상적인(?) 추리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게 문제지만 말야. 카이 케이 케인… 이걸 연상 힌트라고 줬던 여자니…
“……뭐, 사실은 누구인지 일찌감치 짐작은 하고 있었소.”
“오우~ 진짜요?”
“……”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유력 용의자의 이름을 낮게 중얼거려 봤더니, 미스 카이의 웃음기가 살짝 가신다.
“이런…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제가 너무 많은 힌트를 드렸었나요?”
에? 이번엔 나름 정상적인 힌트였었나……………?
미스 카이가 처음 ‘의문의 습격자’에 대해서 언급할 때, 은연중 반복되었던 표현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오늘 밤 위험… 즉, 주로 ‘밤’에 대한 것 이었다. 그리고 조금 아까 해가 질 무렵 몽몽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용의자로 꼽을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현재의 자기 위치를 벗어난 이는 한 명도 없다고 했다.
주 활동 무대가 밤이며, 미스 카이와 인연이 있고, 그 어떤 곳에서도 이렇게 외진 섬까지 아무런 장비 없이 단숨에 올 수 있는… 비인간적 능력! 그렇다. 최근 밤의 귀족이 된 전직 사신(死神), 현직 뱀파이어 (Vampire) ・・・ ‘에스’, 그 양반뿐이다.
이렇게 처음 생각보다는 쉽게 정답을 맞출 수는 있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또 문제는…………
“대체 왜…….”
“그 분이 저를 죽이려고 하는 거냐고요?”
“…그렇소.”
“후후후~ 미리 너무 많은 것을 알면 재미가 없지 않겠어요?”
“그을쎄올시다? 난 그럴지도 모르지만, 정작 당신이 문제 아닐까? 난 이제 그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 버리는 바람에 투지가 사라져버렸… 아, 아니 지. 이젠 아예 손 뗄 수 있겠어.”
“아, 그건…….”
“됐소! 얘기 끝났소.”
나는 산뜻하게(?) 선언해 버리고는 즉시 몸을 돌려 버렸다. 주저 없이 그녀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자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자, 잠깐만요! 죄송해요. 장난이 지나쳤나봐요. 하지만, 그 분은 정말 절 죽일지 몰라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 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요! 시간 이 너무 없어서 아, 아무튼, 제발 도와줘요! 아시잖아요, 당신밖에는 그 분을 막아줄 사람이 없다고요!”
훗. 처음으로 저 여우 아가씨를 당황하게 한 것 같군.
“아이~ 참!”
결국 미스 카이는 급하게 내 앞으로 달려와 가로 막아서며 울상을 지었다.
“너무해욧! 정말 제가 죽게 내버려두실 건가요?”
“…훗. 어차피 쉽게 당할 사람도 아니면서 뭘 그러슈? 그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부신 줄행랑’ 솜씨를 발휘하면 될 거 아니오.”
그래. 그때의 미스 카이는 나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남겼었지. 수법이야 어쨌든, 그날 밤 테네시의 저택에 모여 있던 인간들 중에서 ‘사신 에 스’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지킨 건 이 아가씨뿐이었어.
“그게… 그때와는 달라요.”
미스 카이는 체념한 듯 힘없는 미소와 함께 고백을 한다.
“아니, 그날 밤에 전 이미 그 분.. 죽음의 신에게 사로잡혔는지도 모르죠. 전 이제 달아날 수 없어요.”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우리의 에스씨에게 필이 꽂혔다는 얘긴데… 그건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런 상대를 꼬시기 위한 방법이 너 무나 비정상 적이잖아…? 물론 에스 그 양반이나 이 미스 카이나 결코 정상적인 인종들이 아니라곤 하지만…………
“저기, 에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럼 그냥 가서 만나면 되지, 뭐 하러 이상한 상황을 만든 거요?”
“음・・・ 우선, 그 분은 자기 자신보다도 사랑하는 존재들 ‘캔들 리’와 ‘에메랄드 킬러’의 곁을 쉽게 떠나지 않을 남자죠. 그들에게 닥친 위험을 제거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선 말이죠.”
“…그래서, 그럼……….”
“예.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겠지만, 어쨌든 전… 그 분이 절 죽여야만 그들이 안전해 질 거라고 믿게끔 공작을 꾸며 두었어요. 더구나 반드시 오늘 밤 안으로 절 죽여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거예요.”
내참. 뭐 이런 황당한 아가씨가 다 있냐? 남자 꼬시기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구만.
“몽몽.”
[・・・ ‘페트라’ 양에게 부탁하여 코드명 에스의 러브 하우스를 재확인한 결과, 그의 ‘관’은 현재 비워져 있으며 캔들 리의 저택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 다고 합니다.]
역시 이쪽으로 출동한 모양이군. 에스는 뱀파이어가 된 지 얼마 안 되었다고는 해도, 워낙 막강하고 특별한 귀족의 서브라서 마스터 급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영화 같은 데서 나오는 것처럼 ‘거대 박쥐’로 변신하여 날아오기라도 하려나..? 비행 속도는 과연… 으으음~ 새삼 싫다 싫어. 마계 녀석들도 그렇고, 오늘 무슨 세계 괴물 특집 방송하는 것도 아니고……………
[주인님.]
“왜.”
[미스 카이의 소지품 중, 그녀가 ‘시간이 없다’고 표현한 상황의 근거로 추정되는 물품을 발견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다른 얘긴 대부분 설명이 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오늘 안으로 그를 오게 하려고 애를 쓴 건지에 대한 얘긴 없었구나? 나는 몽몽이 스캔하여 보여주는 미스 카이가 품속에 소중하게 감추고 있는 ‘어떤 물품을 확인하고서야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이, 이게 그, 그… 핫! 나 원 참! 뭐 이런… 핫! 하핫! 이 아가씨 진짜 못 말리겠네!
“갑자기 왜… 제 얼굴을 보면서 그렇게 웃는 거죠?”
“아, 아니 그냥 좀… 하핫핫! 알겠어. 좋아! 내가 졌어! 졌다구!”
미스 카이는 나의 ‘졌다’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이 되었지만, 나의 ‘패배선언’은 진심이었다. 계속 이 여우 아가씨의 패턴에 말려 드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며 삐딱하게 대하려 노력했지만, 이제 부턴 그냥 암 생각 없이 도와주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에스, 그 양반. 내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스 카이에게 ‘진상을 설명할 시간을 주면 좋겠지만, 캔들 리와 흑주의 안전에 관한 일이니 다짜고 짜 살수를 날릴 가능성도 높아. 그래서 미스 카이도 날 굳이 방패로 삼고 싶은 것일 테고 말야. 으으음.. 게다가 이건 미스 카이가 멋대로 벌인 일이 니 만큼, 에스가 사정을 알게 되어도 무조건 쓱싹- 해버릴 가능성도 크겠어. 생명 존중 사상이 꽤 결핍된 양반이라서, 공연히 캔들 리 곁을 떠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는데, 새삼 손아귀에 힘을 들어갔다. 이번 적(?)은 최고의 살수가 뱀파이어의 마력까지 손에 넣은 그야말로 밤의 제왕인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