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56화 : 날을 세우는 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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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악서생 4부 – 56화 : 날을 세우는 비수.


6. 날을 세우는 비수.

미령이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자니를 구해내지 못한 나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우리에게 자니의 마지막 싸움에 대해서 듣고 난 후, 자니가 잠들어 있는 방향의 바다를 얼마간 응시하며 말 없이 서 있던 끝에…

“……바보.”

그렇게 짧게 한마디를 남겼을 뿐이었다. 자니가 미령이의 가슴 속에 어떤 존재로 남게 되었는지는 나도 대교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미령이는 계 속 자니라는 이름을 먼저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소교의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 온 후로도 말이다. 결과에 대한 연락을 미리 받았던 가족들 도…………… 이번 일을 새삼 언급하지 말자는 입장이고………… 으음. 모르겠다. 분명 겉으로는 다들………… 심지어 미령이 자신조차, 가벼운 해프닝이 있었던 정도로 치부하는 분위기이긴 한 데…………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미령이가 오히려 약간 불안하기도 했으나, 이제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는 셈이었다. 자니를 죽인 블랙 놈과 우리의 예정된 싸움도 굳이 미령이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고 말이다.

“참………… 애매하네.”

난 소교의 집 마당을 공연히 거닐며 옆의 대교에게 말했다.

“자니 놈은 딱히 나와 친했던 것도 아니고…………… 미령이와의 사이도 연인이었다고 하기엔 좀 그런 것 같고………… 그게, 참….. 내가 복수를 해준다거 나……… 어떤 감정을 앞세우기가 애매해.”

“예. 하지만, 그래도……… 그때는 정말로 화가 나신 것 같았어요.”

“그야・・・・・・ 그렇지.”

대교가 말한 ‘그때’는 자니의 죽음을 확인한 직후, 내가 블랙 놈에게 말을 걸던 순간을 말한다.


“블랙………! 이건 분명 니네 조직 안에서의 니네끼리의 일이었어. 나도 알아. 하지만…… 너도 지금 알지…………? 내가 쫌 열 받은 거.”

나는 그렇게 말했고, 블랙 놈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당신은 자니 같은 타입을 좋아하는 편인…………

“아니, 넌 내가 거두어들인 녀석을………… ‘내 구역’에서 죽였어. 그게 문제야.”

‘당신의 구역……? 이 바다 위가 말입니까?’

“내가 있는 곳이, 바로 내 구역이지.”

…………그렇군요. 당신의 그런 점을 깜박했습니다.’

“다음에 만났을 때…………… 너, 죽는다. 알지?”

‘……………훗. 새삼 기대되는군요.’


오간 대화는 대충 그랬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역 침범 어쩌고 보다………… 블랙 놈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난 기본적으로 자니처럼 제멋대 로 행동하는 녀석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니가 나름 순수한 녀석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내 기분을………… 더 일일이 따지고 싶지 않아………! 하여간 블랙 놈, 아니………… 에레보스 놈들 전부…………! 이번 싸움에서 확실히 밟아 주겠어!”

그래. 본심이야 어쨌든, 실질적으로는 결국 그게 중요한 거다. 그래야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내 눈앞…… 내 구역에서 일어나지 못할 테니까 말 이다.

「……주인님.」

“뭐냐, 아마추어 요몽.”

「에………? 아까 조금 실수했다고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진…………」

“조금 실수? 쌈질 할 때 그런 요소가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도 몰라? 오늘 만약 내가 직접 싸우는 상황이었고, 네가 그렇게 한 박자 늦은 보고 를 했다면………… 쯧. 하여간! 넌 아직 멀었으니까, 몽몽 밑에서 좀더 열심히 배워, 인마!”

「히잉~ 네에.」

음………… 그래도 실수를 인정하고 얌전히 야단을 맞는 걸 보니, 나름 성장하긴 한 것 같기도 하군.

“몽몽은? 아직…이래냐?”

「아………… 실은 그 얘기를 보고하려던 거였어요. 몽몽 오빠가 아무래도 이제 금방, 이번 분석 및 연구를 완성할 것 같아요.」

오~ 드디어 우리 몽몽 선생이…………!

「아직 완전히 끝내진 못한 것 같지만, 지하무림의 연구실에 구체적인 몇 가지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거든요?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거진 끝 난 거나 마찬가지라서…………… 며칠 안에 본격적인 CR 업그레이드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호라~! 경사로군! 좋아, 좋아………! 자니 일로 잠시 멈춰 있던(?) 내 머리 속이 다시 바쁘게 돌기 시작했다. 난 본래, CR애들이 불완전한 상태라 고 해도 이번 에레보스와 결전에 참가시킬 생각이었다. 불완전한 CR들로서는 에레보스를 감당할 수 없을 테니, 적당히 싸워보다가 위험하면 무조 건 튀라고 지시해 둘 거지만 말이다. 어떤 형태로든………… 프리메이슨에게 CR 애들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어필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세운 계획 인 건데 흐음. 잘하면 더 확실한 업그레이드된 CR들의 시험 무대가 될 수도 있겠군. …………

「글고・・・・・・」

응?

「헤헤~ 사실 이건, 몽몽 오빠가 나중에 백프로 다 완성하면 보고하라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입이 근질 거려서 못 참겠어요오~!」

“뭔데, 또?”

「주인님께서 예전에 지시하셨던 거・・・・・・ 예의, ‘상처를 한 방에 고쳐 버리는 시스템’….! 그것두 곧 완성할 수 있게 되었네요. 우히히~」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걸 지시한 적도 있었구나………! 그래… 수라문(門)의 ‘덕방’ 녀석과 처음 만나서 싸웠던 날이었어. 덕방 녀석 때문 에 악화된 부상을 치료 받는 시간이 갑갑해서 나왔던 말………….. ‘한방에 고쳐 버리는…………! 그런 수준의 시스템을………… 미래의 과학이 도입된 티가 나지 않게……… 몽몽이 아주 약간만 도와줘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요몽과 패티가 찾아냈었다고 했지……? 훗. 그래서 이 녀석이 지금 이렇 게 신이 났군. 자기 업적(?)인 셈이니 말야.

「주인님께선, 저희들 맘대로 일을 진행하라고 하시고는 계속 잊고 언급하지 않으셔서……… 아예 완성된 다음에 자랑하며 보고하려고 했었는 데…………

요몽은 계속 싱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요, 그 과학자는 한국인인데,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쫓겨나다시피 출국해서 중국에 머물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사설 연구소를 급조하 고 스카우트해서 우리가 원하는 연구를 먼저 하도록 유도하고 있었지요.」

음……………? 한국에서 쫓겨난 과학자…………?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인 건가…………? 뭐….. 나야 내가 원하는 결과만 얻을 수 있다면, 그 사람 행실이 어떤 지야 상관없지만…………

「어쨌든, 제 생각에는 그 사람 꽤 유능해서요. 이번 CR들을 위한 연구진에도 합류시켰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람인지 내가 먼저 직접 봐야겠으나………… 기본적으로는, 나도 무조건 그러고 싶군. 안 그래도 몽몽이 본격적으로 나서서 진행하는………… 시대 초월적인 과학 진화의 현장에 우리 나라 과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이 찜찜했었는데 말이야. ……아, 물론 닥터 제이도 있긴 하지만, 그 사람은 왠 지 우리 나라 사람이라기보다는 ‘세계인’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음. 암튼.

“내일 세계정화재단을 방문하려던 일정은 취소……! 당장 우리 연구소 먼저 가봐야겠어.”

다음 날. 나와 대교는 중국으로 향했다. 소교는 당연히 자기 집에 남지만………… 소령이와 미령이 는 지네들 GM 본부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고, 사영 어르신은 다시 미국으로 가서 얼마간 더 ‘캔들 리’ 경호에 참여할 생각이라니… 사실상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는 셈이군. 그래도 다들 크게 아쉬워 하는 눈치는 없었다. 원래 그 동안 계속 따로 따로 잘 살아왔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각자 세계 각지 어디로 흩어지더라도 언제든지 원하는 때 만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나부터도 지금처럼 홍콩에서 중국으로 이동하는 정도는 가볍게 마실 가는 정도일 뿐인 기분이 니….. 음. 하긴, 이번에는 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기도 하군. 홍콩과 본토까지도 지하무림의 홈그라운드인 만큼, 나와 대교를 태운 전용기는 홍콩 을 떠나서 곧바로 우리 연구소로 향했고, 거기에는 작지만 전용 비행장까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딱히 여행 기분을 내기도 전에 보이기 시작한 연구 소의 비행장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훗.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더니·

“예?”

“저기, 저…… 연구소 분위기 말야.”

대교는 내가 가리키는 지상의 풍경을 보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저 드넓은 들판에 작은 규모의 사설 비행장과 허름한 창고 분위기의 건물 한 채.. ! 하지만 저 건물과 비행장 아래의 지하에는 엄청난 시설의 연 구소가 숨어 있지…………! 난 방금・・・・・・ 우리 연구소가 ‘지하무림답게 은밀하고 좋다’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난 전에 프리메이슨 놈들 의 지하기지를 보면서 ‘기분 나쁘고 음흉하다’는 식으로 평가했었거든.”

대교도 그제야 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식으로…………… 팔은 안으로 굽는다도 이럴 때 쓰는 표현이겠네요.”

“훗. 그렇지, 뭐.”

비행기는 곧 나의 로맨스(?), 비밀 연구소의 비행장에 착륙했다. 밖으로 나가니 우리 앞으로 꽤 많은 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일제히 엎드렸다. 우 릴 처음 만나는 지하무림 수하들이 거룩한 신이라도 대하는 듯 인사하는 건 한두 번 경험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도 기분이 약간 색달 랐다. 흐음~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닥터 제이처럼 흰 가운을 걸친 과학자들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건 패한 묘한 느낌을 주는군.

“천주! 천모! 오랜만에 다시 뵙습니다!”

수하들을 이끌고 정식 인사(?)를 마친 연구소의 대빵, 승룡대주(乘龍隊主)가 사적인 반가움을 표하며 다가왔다. 천 년 전의 승룡대주는 소위 깍두기 풍의 험악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사내였으나, 현 시대의 승룡대주는 분위기부터 전혀 다르다. 실제 나이는 40대 초반이나, 잘해야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에… 지금처럼 흰 가운이 아닌, 어떤 차림이라고 해도…… ‘젊은 샤프한 학자’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스타일이랄까…………? 실제로도 중 국의 수많은 과학자 중에서도 최상위 그룹에 속한다는 젊은 천재에………… 수하들까지도 거의 다 젊고 유능한 과학자…………! 거참………!

“천년 전, 보천구룡대(保天九龍隊)의 두 번째 용이며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승룡대가……… 현 시대에는 과학자 집단이라는 거…………! 훗. 이미 들어 서 알고 있었고, 오늘 이렇게 직접 보게 되었으면서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군그래.”

나의 감상평(?)에 승룡대주가 쑥쓰러운 기색으로 웃었다.

“다 제 탓(?)입니다, 천주. 제가 무공보다는 골방에 틀어 박혀서 뭔가 연구하는 것에 몰두하는 성격인 탓에, 수하들도 이렇게 비슷한 타입들이 생기 고 말았습니다.”

“에이~ 뭔 겸손을 그렇게 떨고 그래. 다른 대원들은 그렇다 쳐도, 승룡대주는 무공도 장난 아니라는 거, 뻔히 보이는데, 뭐. 안 그래, 대교?”

“예. 제가 보기에도 승룡대주의 내력은 같은 대주들 중에서도 특별한 것 같아요.”

“아…… 하핫. 제 알량한 무공이 두 분께 칭찬을 받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승룡대주는 다소 소심하게(?) 웃으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나 차분한 분위기 아래에 정갈하게 감추어진 고수의 향기는(?) 분명 이 학자풍의 사내가 뇌룡대주(雷龍隊主) 못지않게 강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선룡대(先龍隊), 구양대주는?”

“아, 구양대주도 곧 도착할 것입니다. 그는 천주의 명령을 받자와, 한국에서 온 황박사’ 문제를 직접 처리하고………… 그를 데리고 올 것입니다.”

그 문제의 우리 나라 과학자, 황 박사는 지금 겉으로 는 몽몽이 만들어낸 연구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올 때부터 중국 정부에서 그를 암중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소속을 바꾼다거나 하는 운신이 자유롭지가 못한 처지라고도 했다. 구양대주가 직접 나서서 신병을 확보해야 할 정도라는 건, 중국 정부에서 꽤나 그를 탐낸다는 건데…… 그런 인재가 정작 조국인 한국에서는 푸대접을 받고 쫓겨났다 이거 지…………? 그 사연을 요몽에게 대충 듣기는 했지만…… 내,참…………! 나는 살짝(?) 나빠지려는 기분을 애써 접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 무래도 그 사람보다, 우리 일이 더 중요하고 급한 상황이었다.

“아, 그리고 닥터 제이…………! 그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응?”

“천주께서 보낸 자라서 특출한 능력을 가진 사람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건 도무지……”

흐음. 닥터 제이 얘기가 나오니까, 우리 뒤를 따르고 있는 승룡대 과학자들이 동요하는 기색도 여실히 느껴지는군. 닥터 제이 그 양반, 하루 사이에 꽤나 천재 중의 천재 티를 내셨던 모양이군. 승룡대주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저를 비롯한 제 수하들이 발표했던 모든 연구 논문을 낱낱이 알고 있는 건 물론이고, 그 데이터에서 저희들 자신도 지금까지 해결 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서………… 마치 농담하듯 가볍게 해답을 제시하질 않나… 하여간, 그런 사람은 처음입니다. 이 분야에서 저희들에게 이렇게 까지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훗. 왠지 학구파 버전 무협지 얘기를 듣는 것 같군. 학교 버전으로도 생각해 보면………… 각자의 학교에서 시험 1등을 놓쳐 본적이 없던 전교 1등들을 한 칼에 몰살 시키는 전국구 천재… 공부마왕(?), 공부지존, 닥터 제이…………! 음. 왠지 표현이 좀…

그 공부지존, 닥터 제이는 우리가 비행장 건물이자 지하 연구소의 입구로 들어설 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서 최신식 시설을 어느 정도 돌아보고 있을 때까지도 어디에 짱 박혔는지 나오지를 않았다. 그 양반은 그렇다 치고……. 으음. 여기 이 연구소……… 내 예 상 및 기대를 살짝 넘어서는군. 난 막연히………… 내 명령에 따라서 급조된・・・・・・ CR들 관련 시설만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생각했는데… 이건 아무래 도 기본부터 착실한 분위기야. 물론 프리메이슨의 시설에 비하면 조촐한 구멍가게 수준인지 모르지만, 이제 여기에…………

「……주인님.」

응?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오오오~ 드디어! 드디어 하산(?)한 거냐, 몽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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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깐! 승룡대주!”

난 즉시 연구소 시찰을 멈추고 조용한 장소를 찾았다. 승룡대주가 서둘러 안내해준 곳은 연구소의 전체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면 서도 깔끔한 인테리어의 호텔 같은 방이었다.

-우리 숙소를 따로 만들어 놓은 모양인데, 굳이 이럴 필요 없….는 건, 그렇다 치고……! 몽몽! 반갑다!

내가 비로소 편하게 인사를 건네자, 허공의 몽몽도 새삼 정중히 포권으로 인사하며 히죽~ 쪼갰다. 드물게 보는 몽몽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더욱 반가웠다. 대교도 한껏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후움~ 못 본 사이, 우리 몽몽이 더욱 믿음직해진 것 같아요!

-그러게 말야. 짱박혀 연구만 했다기보다, 뭐랄까………… 폐관 수련으로 고수가 되어 돌아온 듯한 분위기인 걸?

-맞아요. 게다가 한층 어른스러워지고 멋진 남자가 된 것 같아요.

-그래. 이젠 소년이라고 할 수가 없겠어. 오~ 멋진 청년, 몽몽.

「두 분 다, 지나친 표현이십니다. 전・・・・・・ 그리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반응은 우리가 생각해도 다소(?) 호들갑스런 구석이 있었고, 몽몽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기본 태도는 전과 같았으나 어딘가 많이 성숙되고 여유로운 느낌을 주는 건 사실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긴 기간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만・・・・・・ 그래도 그 기간 동안 몽몽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생각하며 지냈는지 알 것도 같군. 지금까지 어느 정도는 항상 제한되어 있던 감정 회로까지도…. 이번 연구의 ‘창의성’을 위해 서 완전 개방했다니… 으으음. 솔직히 그게 앞으로 계속 장점으로만 작용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일단….. 왠지 더 정이 가 는 녀석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드는구먼. 내 기분과 그리 틀리지 않는 듯, 대교도 몽몽을 더욱 사랑스러워하는 기색으로 보고 있었다. 몽몽은 그런 시 선이 부담스러운지 잠시 민망해 하긴 했으나, 곧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 연구소의 시설과 인력 구성을 확인해 보니.. 그 동안, 제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준비가 잘 이루어진 듯하더군요. 물론 몇 가지 장비가 더 추가되어야 하고, 전체적인 세부 점검 및 재조정도 필요하겠지만……」

다시 떠오르는 몽몽의 은근하고 여유로운 미소…………!

「추가 장비가 완비되는 시점으로부터 60시간 이내에 주인님께서 원하시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 다.」

-오오~

-어머나~

말투부터 우릴 계속 감탄 + 감동케 하는 몽몽. 그야말로 ‘왕의 귀환’ 분위기랄지………… 훗. 좋아. 프리메이슨, 너희들 이제 클 났어. 울 몽몽 선생도 드 디어 발동 걸린 모양이니까 말야.


몽몽의 귀환 및 각성(?) 이후, 연구소의 분위기는 더욱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와 대교는 다시 연구소 곳곳을 일일이 시찰(사실은 구경)했다. 사실상, 나와 대교가 ‘CR 업그레이드 프로젝트’에 직접적으로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칼질 전문 커플인 우리가 낯선 생물학 관련 시설과 장비들이 운 용되는 모습들을 아무리 계속 구경하며 설명을 들어 봐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거고 말이다.

….

하지만… 구경만 해도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드는구먼. 이 연구소 자체도 그렇지만, 그로부터 파생될 여러 가지 요소들이………… 비록 프리메이슨에 비해서 작은 규모라 해도………… 그런 만큼, 오히려 더 아기자기하게(?) 작전 짜보는 재미가 있다고 할까…………? 으음. 그나저나………… 나와 대교는 마지막 시찰 장소인 비밀 격납고(보안 레벨 1급이란 명패가 붙은)로 들어섰다. 대교는 격납고 안의 풍경에 다소 놀라면서도 흥미를 보였고, 난 그저 피식 웃 고 말았다. 천 평이 넘어 보이는 규모의 격납고 안에 가득한 ‘추억의 장비'(?)들은 그렇다 치고, 간만에 만나는 남자…… ‘케인 우디’가 문 앞에서 어 슬렁거리다가 나를 돌아보고는 화들짝 놀랐기 때문이었다.

“아!처, 천주?”

“훗. 당신이 날 그렇게 부르니까 왠지 이상하군. 암튼…… 반갑소. 간만이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자 닥터 우디도 손을 내밀어 악수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여전히 깡마른 체형의 이 금발 남자에게서는 이제 나에 대한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어렵고 두렵게 느껴지는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랜드 캐니언 전투에서 나에게 잡혀서 포로가 되었던……….. 프리메이 슨의 고위급 과학자…………! 닥터 제이가 추천(?)했었을 만큼 뛰어난 과학자이긴 한데… 흠. 근데 어째………… 이 남자, 나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두려 워하는 것 같기도 하군. 닥터 우디가 슬쩍 슬쩍 눈치를 살피는 건, 바로 내 뒤를 따라온 ‘은사마군’인 듯했다. 그녀도 그런 닥터 우디의 시선을 느끼 고는 새삼 차가운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훗. 그러고 보니까, 은사마군이 닥터 우디를 약간(?) 갈궜었지. 혐오스런 거미 로봇을 만들어서 우릴 공격 했었다고 말야. 그리고…………

“아, 저, 그, 아가씨……….”

“은사마군. 혹은 명부화(冥府花)· ! 저승에서 볼 수 있는 꽃이지요, 닥터 우디.”

“아, 그, 그래,요? 명,부화……씨. 어, 실은 그게…”

닥터 우디는 은사마군의 냉랭한 시선을 피하며 약간 허둥지둥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가 서둘러 챙겨서 들고 오는 걸 보면서 나는 큭큭~ 웃을 수밖 에 없었다. 이 남자, 전에 은사마군에게 협박받은 걸 잊지 않고 있었군, 그래.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은사마군이 닥터 우디에게 내린 협박성 농 후한 명령은 ‘혐오스런 거미 로봇을 전부 예쁜 모습으로 바꿔라’였다.

“할 일이 많아서 아직 못했지만…. 저기, 곧 전부 이 샘플처럼 예쁘게………”

닥터 우디가 머뭇거리며 내민, ‘예쁘게 꾸민 거미’는 정말이지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한 모습이었다. 진짜 거미 같던 질감의 피부(?)를 벗겨낸 것까 진 좋았는데, 금속 다리 여덟 개에 일일이 알록달록 리본을 매주고 중앙 몸통에는 커다란 꽃송이를 달아 놓았던 것이다. 명색이 세계 최상위 과학자가………… 무슨 초딩, 아니 유딩 여자애 같은 짓을………… 쿡! 이렇게 예쁜(?) 장식을 한 거미들이 몰려오는 게 오히려 더 무서울지도…………… “마, 마음에 들지 않……나요?”

은사마군은 웃음을 참느라 입가를 실룩이며 어색한 표정이 되어 버렸지만, 그게 닥터 우디에게는 더 무섭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어, 어떨지……”

“그, 그럼 꼬, 꽃을 하나 더 붙이면…

은사마군이 더욱 험악한(?) 표정이 된 것은 꽃을 하나 더 달아서 쌍꽃(?)이 된 거미를 연상했기 때문인 듯 싶었다.

“하핫~ 왔는가, 유준 군!”

불쑥 끼어 든 사람은 닥터 제이였다. 어디에 짱박혀 있나 했던 닥터 제이가 격납고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로서는 다른 무엇보다, 옛 수하가 새로운 터전에서 이루어 놓은 것을 확인해 보는 것이 재미있어서 말야.”

어쩐지, 저 양반이 자신의 옛 수하이자 순진한 과학자 닥터 우디를 꼬드겨서 저런 거미 장식을 유도했지 싶었다.

“음~ 우디. 어때? 다들 좋아하지?”

아니나 다를까.

“아, 저………… 그게, 아무래도 반응이 좀..

“후후~ 섣불리 판단해서 미리 실망하지 말게. 여기 이 무섭고도 아름다운 아가씨는 물론이고 세상의 그 어떤 여자라도 예쁜 꽃과 장식은 좋아 하기 마련이라네.”

“하, 하지만……”

“맞아요.”

음? 갑자기 은사마군이 나선다.

“저 역시 여자… 예쁜 꽃과 장식을 좋아하죠.”

오- 과연…………?

“다만, 닥터 우디 ・・・・・・ 당신의 감각에는 문제가 좀 있습니다. 잠시..

은사마군이 날 돌아봐서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여 허락해 주었다.

“절 따라오세요. 그………… 나름 귀여워진 거미를 가지고 말입니다. …………당장!”

“네, 넵!”

황급히 따라나서는 닥터 우디를 뒤에 달고(?) 은사마군은 격납고 밖의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교가 문득 웃었다.

“훗~ 은사마군이 장식에 대해서 한 수 가르쳐 주려는 모양이네요.”

“아니, 난 은사마군이 닥터 우디를 거미로 때릴 거 같기도…..”

“에? 설마요.

..설마…………… 음……”

우리의 걱정스런 대화를 들으며 닥터 제이가 큭큭 소리를 냈다.

“거, 순진한 사람 꼬셔서 장난치는 게 그리 재밌습니까?”

“이거 왜 이러시나, 유준 군. 자네는 남말 할 처지가 아닐 텐데?”

“어허~ 절 뭘로 보시고 그렇게 정확한 판단을….. 음, 암튼……”

내가 표정을 좀 수습하는 사이에 닥터 제이도 어느 정도 짓궂은 웃음기를 거두는 것 같았다.

“뭐・・・・・・ 장식 수준이야 어쨌든, 여태 그런 거만 연구하고 있었을 리는 없겠죠?”

“음……… 대충 봐도, 그 동안 닥터 우디는 이… 결함 투성이 KS(Killing Spider) 시리즈를 상당한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시켜놓은 것 같더군.”

닥터 제이가 돌아보는 방향의 거대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일일이 셀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거미 로봇 군단…………! 그랜드 캐니언 전투에서 나와 수하들을 위기에 몰아넣었었던 저 징그러운 녀석들이 이제는 더욱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얘기다. 물론 이번에는 적이 아닌 우리의 유 용한 도구로서 말이지……………!

“내가 좀더 자세히 체크해 봐야겠지만………… 자네가 쓰기에 따라서 꽤나 유용한 전력이 될 수 있을 거야. 어느 정도의 의외성도 도움이 될 테고…………….” 

그야 당연히 그런 생각으로 이 많은 거미 로봇들을 몰래(?) 짱박아 놓았던 거다. 그리고 난 그 동안 이 연구소에서 거미들이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 보고조차 받지 않고 주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언급을 피해 왔었다. 물론 이 거미들의 본래 주인인 프리메이슨에서 자신들의 병기가 어 찌되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을 리는 없겠지만, 우리가 이걸 이렇게 전부 알뜰하게 챙겨 모아서 업그레이드까지 시켰고………… 그리고 그게 자신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무기가 될 것인지……… 그런 부분까지는 신경 쓰지 못하고, 아니 않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사실……… 자네들 자신의 무서움에 비해서는 대단치 않다는 느낌이 강하긴 하네만, 그래도 왠지 묘한 감흥이 드는군.”

닥터 제이는 미묘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CR애들이나 KS 시리즈나………… 놈들로부터 버려지고 방치된 존재가 놈들의 심장에 박힐 비수가 되는 셈이니…….”

“훗. 듣고 보니 그렇군요. 솔직히 거미 로봇들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생각해보진 않았었는데 말예요.”

“음~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쪼까 민망하기도 하네요.”

나로서는 공연히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야 했다.

“그간 닥터 제이와 원판이 진행해 온 일들에 비하면 이건 그야말로 길에서 주운(?) 물건 재활용하는 수준이잖아요.”

음? 비유가 아니라 딱 맞는 표현을 하게 된 건가? 어쨌든…………

“게다가 이 KS 시리즈도 본래 당신이 저에게 준 거나 마찬가진데요, 뭐.”

“아니, 아니, 그건 아니야.”

닥터 제이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내 계획에서 KS 시리즈의 사용은 그랜드 캐니언이 마지막이었어. 자네가 지하 기지 공략에 역이용할 건 예상했지만, 그때 이후로도 이렇게 잘 챙 겨둘 줄은 몰랐어.”

으음. 닥터 제이가 단발성 도구로만 생각했을 정도니까 프리메이슨에서도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확인한 셈이긴 한데………… 그만큼 사방 에서 천대 받고 있는 이 거미 아그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잘했다고 동네방네 소문이 날꼬……?

“자네의 성향으로 보아, 아직 구체적인 활용법은 생각해 두지 않았을 것 같긴 하네만…………”

윽.

“어떤 형태로든 자네라면 멋지게 이용할 것이라고……… 지켜보겠네.”

“……뭡니까. 그 애매미묘한 표현은?”

“후후. 그보다. 유준 군.”

말 돌리는 것과 동시에 몸까지 반쯤 돌려버리는 닥터 제이.

“난 이제 몽몽 군과 자네 수하들이 하는 일에 참견하러 가야겠네.”

아직 우리가 몽몽의 귀환을 알리지 않았음에도 연구소 돌아가는 분위기만으로도 감 잡으신 모양이군. 자 신이 창조한 CR들이 완전체가 되는 과정 이 준비되는 중이라는 것을 말이야.

“지금의 몽몽 군에게는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만………… 뭐, 그럼 구경이라도 해야겠지?”

몽몽의 성장 정도까지 이미 짐작해서 ‘구경’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지금의 닥터 제이는 마치 자신이 직접 모든 일을 진행하듯 흥겨운 표정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전체 그림을 그린 사람이니 그럴 자격이 있겠지만………

“아, 잠깐!”

난 나도 모르게 닥터 제이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금 당신은………….. CR들이 완전체 병기가 되는……. 즉, 자신이 준비한 비수가 완전히 날이 서서 원수들의 가슴에 꽂힐 준비가 되는………… 그런 걸 기 뻐하는 건가요? 아니면 순수하게 그 아이들의 짧고 불안정한 수명이 정상화되어서…………… 그래서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게 되는………… 그쪽을 기뻐하는 건가요…………?’

이런 질문을 왠지 쉽게 할 수가 없었지만, 닥터 제이는 조금 전까지의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뭘 묻고 싶은지 알 것도 같군. 하지만 나도 대답 해주긴 어렵네. 말로 한다고 해서 진심이 전해지는 건 아닐 테니 말이야.”

닥터 제이는 보기 드물게 씁쓸한 기색으로 내게서 완전히 몸을 돌렸고, 이내 격납고 출구를 통해 사라져 갔다. 쳇…………..! 스스로 자길 믿지 말고 끊임 없이 의심하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와 새삼 섭섭해 하는 태도를 보이다니……… 응? 문이 다시 쓱 열리더니, 막 밖으로 나갔던 닥터 제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참참! 잊고 있었군!”

조금 전까지의 표정이 깔끔하게 사라진, 평소의 유들유들 모드……? 내참~!

“자네가 오면 묻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깜박했지 뭐야. 실은………… 미리 13호에게 연락을 받았었거든.”

조담놈? 쯧. 이곳의 통신 보안을 좀더 확실히 해야겠군. …………암튼, 자니와 블랙 크라우드의 출현, 그리고 싸움……… 그 얘기겠지?

“13호는 자신의 싸움 얘기만 늘어놔서 상황 파악이 어렵긴 했지만………… 결국 에레보스의 수장까지 등장해서 배신자를 처단했다는………… 그런 얘기 “지?”

“예. 그 정도면 요점정리 잘 하셨네요.”

“헌데, 에레보스의 수장이 하운 군을 닮았다고?”

“닮은 정도가 아니죠…….·전혀 모르셨습니까?”

“그 역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긴 했네만……… 음. 역시 하운 군의 복제 중 가장 성공작이라 평가 받던………… 그 아이가 에레보스의 수장이 되었던 모양이군.”

하여간 범세계적 마당발이시라니까?

“그것도 중요한 사항이긴 한데…… 그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체크 사항이 있네. 자넨 분명 그들의 싸움 현장에 있었을 테지?”

“……막지는 못했어요.”

나는 새삼 싸한 기분을 만끽해야 했고, 닥터 제이는 그런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물었다.

“혹시, 블랙… 그 아이가 자네에게 뭔가 주지 않았는가?”

“예?”

뭐………야, 이거 어째 얘기가 이상해지는데? 닥터 제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건…

“……자니의 유품・・・・・・ 이라고 뭔가 받긴 받았는데…י

“보여줄 수 있겠나? 아니, 작은 타원형의 오렌지 빛 보석 같은 물건이라면 볼 것도 없이………”

“그런 모양, 맞는뎁쇼.”

“그건 자니의 ‘핵’일 거야.”

“예? 핵? 대체 무슨 얘긴 거죠?”

“하여간 블랙, 그 녀석. 에레보스의 수장이나 되었으면서도 어렸을 때처럼 마음 여린 구석이 남아 있었던…

“저기, 닥터 제이이~? ‘핵’이 뭐냐고요, 핵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니는 아직 죽지 않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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