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58화 : surprise in surprise. II
8. surprise in surprise. II
구중천・・・・・・
지하무림의 핵심이자 수뇌부를 일컬으며 때로 지하무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명목상이라고 할까…? 워낙 각자 따로 노 는 특성이 강한 지하무림이라서 구중천 또한 어쩌다 부정기적으로 모여서 의견 교환하는 정도의 이름뿐인 ‘친목 이사회’ 정도였다고 할까…? 그런 구중천이 정말 수뇌부의 모습을 보인 건 역사상 딱 세 번뿐이었다고 한다.
…뭐. 그게 전부 마군황과 관련된 일이었다는 거야 뻔한 일이고, 이번 나의 재출몰(?)과 함께 구중천 역시 재출범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어. 하 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거대하면서도 구.체.적.일 줄은… 으음. 신생 구중천에 대한 감상은 조금 미뤄야할 것 같군.
“언니! 혼자 먹을 생각하지 마!”
미령이가 살기(?)를 담아 외치자 뭔가 집어 들고 입을 벌리던 소령이가 찔끔 기가 죽는 태도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음식을 도로 내려놓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미령이와 초돌 합작의 화염이 불쑥 커지면서 온도가 3000도를 넘었었지..?
흐흠! 소령이가 음식 냄새에 홀려(?) 저만큼 이쪽으로 와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위험할 뻔했었네. 으음. 역시나 아직 방심은 금물! 게다가 아직 불안요소가 남아 있기도 했다. 들어올 때부터 얼굴을 뺀 전신에 방열복을 착용하고 있던 식신마군과주방장들은 미령이와의 거리가 좁 혀질 때쯤에는 그 얼굴까지 방염장비로 덮어썼고 그 썰렁한 비주얼로 인해 미령이도 현실을 깨닫고 이성을 되찾는 것 같았다. 녀석은 자기로부터 1, 2미터정도 거리에서 멈춰선 음식카트 두 대 위의 음식들을 지긋이 노려보며 잠시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흠. 내가 요령을 알려 줄…, 오! 역시 영특한…걸?
음식들 중 고기완자 몇 개가 사삭~ 하고 사라지더니 미령이의 손안으로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영특한 건 기본이고 손까지 빠른 우리 미령 공주!
“오우~, 초절정 스피드의 공수탈인(空手奪刃)… 아니 공수탈식(空手奪食)인 건가?”
내가 장난기를 담아 칭찬해주자 미령이는 한 손으로 V를 그리면서 양볼이 볼록해지도록 완자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곧이어 사삭~ 앙~(입 벌리 는 소리) 우물우물 쩝쩝. 사사삭~ 아앙~ 으쩝쩝쩝쩝…. 그런 소리와 기색이 몇 번 반복되자 주방장들이 하나 둘 방염마스크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 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떠오른 표정은………….
‘대체 우리가 뭔 뻘 고민을 했었던 거지?’
불길 속의 인체는 물론이고 착용한 의복까지 멀쩡한 현재의 상황에서는 단지 빨리 음식을 잡기만 해도 그 즉시 해당 음식물은 똑같이 안전해진다 는 원리를 이제야 깨달은 주방장들이 허탈해 하는 건 그렇다 치고 모두를 배고프게 할 만큼 오래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생요리(?)를 선택한 모 양인 식신마군이 오히려 더 입장난감・・・ 오호. 그게 아닌가? 역시 식신마군도 만만치 않군.
식신마군은 자기 카트의 중간 공간에서 긴 금속 꼬챙이 같은 걸 꺼내더니 그걸로 생닭 하나를 쿠욱- 찍어 올리더니 미령이 앞으로 내밀었고 미령 이는 문득 새액- 쪼개더니 한 손을 마주 내밀어 생닭 아래에 위치시켰다. 녀석이 편 손바닥 위에는 초돌이 붙어 있었고 그 초돌의 표면이 살짝 반투 명해진다 싶은 느낌이 들더니 화르르~ 작지만 분명 새로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것 봐라? 나도 이 정도까지는 예상 못 했는데 이렇게 빨리 미령과 초돌이 일심동체(?) 모드를 보인다는 건・・・ 배고프면 눈에 뵈는 게 없고 소도 잡아먹는다는 옛말이 맞…
음. 뭔가 좀 아닌 생각을 한 거 같긴 하지만… 여하간 이건 정말 뜻밖의 수확인걸?
화르르르르르!~
미초(미령+초돌) 콤비의 강력한 불길 속에서 생닭이 빠르게 회전하며 순식간에 특급 바비큐 요리로 변신하고 있었다. 느껴지는 화력에 맞춰 막대 꼬챙이의 회전 속도를 조절하느라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 같았던 식신마군이 문득 동작을 멈추고 두 팔과 막대 꼬챙이를 당겨 자세를 바로 했을 때는 이미 막대 꼬챙이가 비어 있었다.
찌이익~!
‘기집애. 지가 무슨 천음마군이라고 참 터프하게도 닭다리를 뜯어내네. 얼씨구~ 게걸스럽게 먹는 거까지 완전 천음마군… 으음… 꼬올깍!’
무심결에 군침을 삼킨 건 나뿐이 아닌 것 같았다. 이미 사방으로 퍼져있는 바비큐 냄새와 그걸 너무나 복스럽게(?) 먹고 있는 미령이의 모습은 그 어떤 먹방보다도 모든 이들의 식욕을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소령이가 견디지 못하고 빼액 소리를 질렀다.
“나도 한 입마안-!”
소령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한 입만 남겨달라고 징징거리고 있거나 말거나 생 까고 살점 한입은 고사하고 뼈까지 자기 혼자 먹어 치우겠다는 기세 의 미령이…! 소령이야 본래 어떤 사람들 앞에서라도 나름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이는 편이지만 저 고양이과 새침데기 미령이가 여러 낯선 사람들 앞에서 저렇게 이미지 관리 못한다는 건 아무래도…………….
“대교. GM녀석들… 혹시 평소에 애들 굶기나?”
사실 따로 짐작되는 바가 있긴 하지만, 당장 보이는 장면이 재밌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일단 농담을 던져 본건데 대교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 다. 잠시 대꾸가 없던 대교가 나도 처음 들어보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호.홋.홋. 우리 아이들 식사 예절이… 평소 이렇지는… 오늘 날씨가 참 좋죠? 홋.홋.홋.”
으잉? 대교가 웬 유체이탈화법?
난 안되겠다 싶어서 대교의 팔을 잡고 우리들 옆에 남겨져 있던 카트 앞으로 이끌었다.
“어, 천주? 죄, 죄송합니다! 곧 준비를………….”
“아냐. 괜찮아. 우리도 그냥 먹을게. 그게 더 편하니까 신경 쓰지 마.”
우리 담당 주방장이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난처해하다가 결국 정식 상차림과 식사 보조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난 고급스런 느낌의 테이블과 의자를 준비하던 어사조들에게 의자만 부탁하고 대교와 마주 앉았다.
이런, 이런~ 대교는 아직도 반쯤은 ‘과년한 딸내미가 근사한 사윗감 앞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일 때의 전형적인(?) 엄마 모드인 거 같군. 이거 아 무래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어.
난 왼손으로 슬며시 대교의 한쪽 손목을 잡아, 내 머리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오른손은 반대로 뻗어서 대교의 이마로 향했다. 내 손가락 끝이 톡 대 교의 이마를 건드림과 동시에 대교의 손에 내 이마를 들이밀어서 박치기, 아니 하여간 꿀밤 자진납세(?)를 했다. 그리고는 진짜 꿀밤을 맞은 어린이 포즈로 이마를 감싸며 아야야~ 소리까지 내려니까 새삼 무지 민망하긴 했지만…………
“대교! 우리말이야, 이쯤에서…..”
난 정색을 하고 자세를 바로 잡으면서 말을 이었다.
“둘 다 반성을… 그것도 아주 많이 해야 할 거 같아. 우린 이번에 미령이가 관련된 위기 상황 대처에 있어서 엄청 버벅댔어. 그건 아마도 우리가 미령이를 너무 믿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우린 결국 과보호 모드였던 거야. 미령이는 우리 없이도 십수 년을 씩씩하게 살아왔고 그래서 이젠 당당하고 어엿한 숙녀가 되었는데도 말이야.”
크흠. 현재 미령이의 굶주린 천음마군 모드의 비주얼로는 ‘숙녀’를 강조하기가 거시기하긴 하지만… 음. 어쨌거나 더 이상 뭐라 할 필요는 없을 거 같군.
대교는 내가 나 자신을 포함하며 질책 아닌 질책을 하는 정도로도 이미 얼굴을 들지 못하고 목뒤까지 붉게 물들인 채 머리위로는 하얀 김을 모락모 락 피워 올리는 것 같은 상태였다.
훗~~! 이런 대교는 오랜만이라 더 귀엽… 음?
“저어~ 오라버니.”
대교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서며 모기만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어… 아주 많이 반성하고 올게요.”
“응? 어, 그, 그럴래? 그럼 편한데 가서 천천히.. 음. 그러던가.”
내가 허락하자 대교는 즉시 총총걸음으로 날아가는 나름 신비로운(?) 보법과 함께 출입구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너도 배고플 텐데 먹으면서 반 성하지?’라는 말을 하지 못한 건, 그녀가 일어서면서 아까의 미령이보다도 빠르게 공수탈식을 펼치는 걸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흠. 대교가 옷 속에 뭘 챙겼는지까지는 못 봤는데, 어디… 고기완자랑 닭다리 하나는 확실하게 챙긴 거 같고 또 몇 개의 접시가 더 살짝 허전해진 거 같은데? 허어~ 과연 왕년의 마중제일녀! 명불허전의 손속이로고! 미령이가 아무리 일취월장했다고 해도 아직은 어림없겠어!
내가 혼자 웃고 있자니까 식신마군이 얼굴의 땀을 닦으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사이 미령 화덕(?)으로 몇 개의 요리를 더 만들어서 소미령이들에게 나눠주고 오는 모양이었다.
“… 천주. 천모께선 제 요리가 입에 맞지 않으신 것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혼자 다 먹어 버리겠다고 했더니 화가 나서 가버린 거라오. 그러니 수고스럽겠지만 우리 거처에 한 상 더 부탁해요, 식신 “마군.”
나도 많이 참았었기에 말을 마치자마자 급속 흡식마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반 이상의 접시를 비운 내가 손을 들어 엄지척! 해 보이자 식신마군이 껄껄껄껄~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 자리의 식신 후보자들! 모두 잘 보고 있는가?”
응? 식신마군 본인을 제외한 모두가 다음 식신 후보자였던 거야?
“오늘 우리의 마군황님과 그 가족 분들이 보여주시는 저 모습!”
윽! 흑…으~ 삼키던 고기가 도로 튀어나올 뻔했네. 저 양반 왜 새삼 굳이 나와 소미령이의 추태(?)를 강조하고 그래?
나 정도의 흡입은 아니었어도 여전히 만만찮은 먹거리 탐닉모드였던 소미령이들도 슬며시 동작 그만 상태가 되고 있었다. “이분들의 보여주시는 이 광경이야말로 우리들이 항상 꿈꾸고 목표로 하는 ‘식신의 낙원’이다! 다들 더욱 정진하도록!”
“…옛! 식신!”
주방장들 모두가 나름 감동의 분위기였지만 그 한편 뭔가 신기한 구경을 했다는 분위기도 적지 않았다.
후후. 정작 식신마군 본인도 엄청 흡족해 하면서도 매우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군. 하긴 저 양반・・・ 주성치 영화 ‘식신’ 때문에 이미지가 좀 거 시기해졌지만, 사실 저 양반은 내가 대뜸 하대하기가 꺼려질 만큼 항상 이렇게… 그래, 지금 다시 되찾은 저 모습. 너무나 단정하고 중후하면서도 남 들에게 매우 엄한 잣대를 요구하는 에~ 더 이상은 못하겠다. 그냥 전부 퉁쳐서 ‘매우 대하기 어려운 인상의 장년 남자’라고 하자.
“천주!”
“음? 나 아직 식사 안 끝… 아, 끝났나?”
난 바닥을 핥던 접시를 슬며시 내려놓으며 새삼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내 앞에 보통 알려져 있는 이미지로 돌아와 서 있는 식신마군 뒤로 식신 후 보자라는 주방장들 모두가 주욱- 좌우로 도열하고 있었다.
흠. 또 뭔가 연설을⋯ 아니 뭐든 정식 보고를 할 분위기 ・・・ 어? 은사마군은 또 왜 식신마군 옆으로 서는 거지? 어라라~? 자룡대주까지? 화상치료나 잘 받으며 쉬라니까 뭐 하러 반창고 붙은 얼굴로 여기에 오는 거야? 뭐야? 현재 상황에서 내가 모두에게 특별하게 보고 받아야 할 일이. 응? 으 ~응? 으와아아앗! 있었구나! 너무나 특별한 보고가!
난 당황하여 얼른 빨고 있던 손가락을 입에서 빼고 자세를 바로 해야 했다.
“후후-식신마군의 요리는 소문보다 더 대단하여 그야말로 신의 경지에 이른 듯하네요. 천하의 마군황계서 모든 제반 상황을 잊고 방심 상태가 되 신 것을 보면 말이에요.”
“그러게? 하핫~ 정말 최고였어, 식신마군.”
몇 번 더 식신마군에게 엄지척을 해보이며 ‘내가 방금까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스가 묻은 손가락까지 빨며 천년 전 ‘사영 어르신 식사 모드’를 보였던 건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어필해 보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이~ 민망해라.
지금 내 눈앞의 수하들은 물론이고, 이 신생 구중천 건설에 힘을 모은 지하무림 전체에 난 지금 너무나 민망하고 미안해해야 할 상황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현재 모두의 대표로 나선 자룡대주의 기색이 영 불길(?)했다.
“뭐. 우리 지하무림의 이상한 전통이랄지, 마군황께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시어…………”
자룡대주는 소미령이들, 특히 미령이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에 첫 왕림하시는 역사적인 날에도 잊지 않고 아주 사소한 재난을 달고 오시었습니다. 뭐, 저희들이야 준비했던 행사며 자축파티가 취소되어 편해지기는 했습니다.”
“자룡대주. 말에 가시가… 쪼오끔 있는 거 같네?”
“후후. 그럴 리가요.”
쳇. 지은 죄(?)가 있으니 오늘은 갈수록 더 민망하고 미안해지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 같긴 한데 이 아가씨 아예 날 잡은 거 같군. 코를 덮은 저 커다란 반창고가 왠지 더 장난꾸러기 같은 느낌도 주고…………
“어쨌든, 분위기는 이미 건전하게 파토 났고……”
“자룡대주. 그런 표현 어디서 배웠어?”
“지금 물으시는 분께요.”
으~ 이것도 결국 내가 지은 죄(?)의 연장선인가?
“어쨌건, 저희들도 각자 맡은바 임무가 막중한 관계로…어.떤.분. 덕.분.에. 취.소.된. 이번 자축행사는 차후로도 기획이 불투명합니다.”
“저기… 자룡대주. 나 지금 진짜 엄청 모두에게 미안.하거든? 그러니까……”
난 조금 망설였지만 결국 툭 던졌다.
“좀 봐줘.”
사실 나도 좀 억울하긴 했다. 내가 뭐, 재난이고 재앙이고 그딴 거 달고 다니고 싶어서 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소위 ‘식신의 낙원’을 만나면 누 구나 정신줄 놓게 될 거라고. 그렇게 항변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 무조건적으로… 모두에게 미안했다. 특히………… “…후후~ 송구합니다, 천주. 저도 언제든 한 번쯤은 이렇게 천주께 장난을 쳐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핑계김에 무례를 범했는데 너그럽게 받 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쯧. 갑자기 진지모드로 나오니까 왠지 더 민망하고… 미안해지는 건・・・ 그런 건 생각이 드는 거지? 미령이 문제 말고는 당장 긴장 타야 할 정도의 일은… 없는 거
그런 건데… 뭐지? 왜 나 지금 또 뭔가 놓치고 있다는… 그런 같은데…? 근데 왜 이렇게 뭔가 많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기분이…….
“천주. 역시 제가 지나쳤었나봅니다. 속하가 감히…….”
“아니, 아니! 잠깐만!”
난 손까지 저으며 자룡대주의 말을 막았다. 내가 지금 점점 더 이상한 기분이 되고 있는 이유 하나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룡대주. 지금 말야, 왜 당신이 거기 서있는 거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조금 전까지는 ‘내가 건수 잡았다고 너무 오버해서 지랄 같은 성미를 건드려 버렸나?” 정도의 걱정을 하는 기색이 강했지만, 빠르게 그녀의 얼굴에 번져가는 건, 좀 더 복잡한 감정인 것 같았다.
“내 말은… 그러니까, 오늘 나에게 이 구중천의 부활을 보고해야 할 사람은… 구양대주…! 그 양반 아니었나?”
나는 그렇게 물으며 자룡대주는 물론이고 내 앞의 모든 수하들을 새삼 돌아보았다. 식신마군과 은사마군은 살짝 의아해하며 ‘그러고 보니 그런 거 같은데…?’ 정도의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룡대주는 내가 구양대주를 확실하게 언급한 시점부터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며 살짝 창백해지기 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지하무림 전체가 한마음으로 이 구중천을 완성시켰다는 건 알고 있어. 어떤 누구라도 대표가 되어 내게 자랑스런 보고를 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하지만 다들 알고 있을 거야. 구양대주・・・ 그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이 구중천 건설을 주도해 왔다 는 사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진정 주인공이 되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구양대주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렇다. 난 아직 이 구중천에 관한 건 아주 기본적인 보고밖에 받지 못했지만 적어도 구양대주가 이 신생 구중천 건설에 얼마나 많은 세월과 노력 을 다 쏟아 부었는지는 들었었다.
내가 좀 더 구체적으로 짚어나가자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했다. 단 한 사람, 아까 비행장에서의 약식보고 때는 다른 어떤 사항에 앞 서 구양대주의 지난 세월을 먼저 언급했었던 자룡대주만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만 있었다.
…그래. 자룡대주가 전에 없이 나에게 말장난을 걸어온 것부터가 이상했었어. 자룡대주는 천성이 강해서 가끔 나에게조차 당돌한 언행을 하곤 했 지만… 오늘처럼 긴 패턴은 아니었지. 오늘은 무리를 해서라도 감추고 싶은 마음의 무언가가 있었던 거야.
“자룡대주. 구양대주는 왜 지금 여기에 없는 거지?”
“…천주. 구양대주・・・ 그, 그는…”
“설마, 내가 내린 ‘재난 대비’ 명령 때문에… 이곳에, 나에게 오던 길을 멈추고… 또 때마침, 어떤 일이 생겨서 다시 돌아가 버렸다…는 그런 변명을 준비했던 건 아니겠지?”
…했었군. 그런 정도의 허술한 변명 준비를.
하긴, 지금까지의 나라면 그보다 더 즉흥적이고 엉성한 변명을 들었어도 무심히 흘려듣고 말았겠지. 하지만 오늘은 적어도 오늘은 아니지. 만 약 이번에도 내가 그렇게 무심하고 한심한. 마군황이었다면 나중에라도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웠겠지.
자룡대주는 속마음을 읽힌 이답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한편 뭔가 더 복잡한 기쁜 듯 슬픈 듯, 뭔가 뒤섞인 감정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기색을 살피고 분석하는 걸 그만두고 시선을 거두었다. 그 대신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나와 구양대주의 지난 시간을 되짚 어 보았다.
…현시대로 돌아온 내가 처음으로 만난 지하무림인, 그가 바로 구양대주였어. 하은이와 성원, 준엽이를 데리고 신불산으로 향하다가… 스스로를 ‘구양 노인’이라 칭하던 그와 만나… 몇 수를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하아아- 난 지금도 그 순간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어. 지하무림이 천 년의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그 오랜 세월동안 날 기다려왔다는 사실 때문에 느꼈던 그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과 행복감…!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그 이후 내가 하고 이룬 모든 일들은 거의 다 구양대주의 전폭적이고 절대적인 지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도 모른다.
그런데도… 난 언제부터인가 구양대주를 직접 만나는 시간이 짧아지고 그 간격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오늘, 아니 바로 조금 전 까지도 말이야.
나는 가슴 한복판이 달빛에 베인 것처럼 시려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자룡대주는 나와 다시 눈을 마주치자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입을 열어 큰소리 로 보고 아닌 보고를 시작했다.
“보천구룡대의 첫 번째 용! 천룡대의 대주, 구양명! 그 지독한 고집불통 노인네는 결코 천주께 오던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돌아가지도 않았습 니다!”
처음 본다 싶은 격동의 모습으로 자룡대주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구양명대주는 천주의 부름이라면 그 남은 생명이 얼마가 되더라도, 반드시. 천주께 달려올 것입니다!”
・그랬군. 역시 그랬던 거였어.
구양대주가 해동, 한국에 왔던 건 자신의 후계자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 와중에 나를 만나고 이제 자신이 직접 내 옆에 서게 되었음에도 그는 성원 이와 승엽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나와 절친한 친구라는 특수 관계 때문에 나는 그 두 녀석이 내 수하가 되는 것을 꺼려했고 그런 내 반대의사 표명에도 구양대주는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건 더 이상 자신에게는 후계자를 찾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거야.
“…현재, 구양대주의 위치는?”
“보안레벨 B・・・ 아니, 그냥 바로 윗층・・・ 701호입니다. 참고로, 신생 구중천 멤버들과 보천구룡대의 거처는 모두 같은 층으로 내정돼 있습니다.”
자룡대주는 조금 전의 악을 쓰는(?) 형태의 보고 아닌 보고를 통해서 가슴 속에 쌓인 것들까지 토해내 버렸는지 어느 정도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 와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점점 더 감정과 이성을 함께 끌어 모으는 중이었다. 감정과 이성・・・ 아니 현재 상황에서는 간만에 봉인 중이던 ‘본능’이 와 ‘이성’이를 깨우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
보자… 미령이는? …음. 예상대로 미령이는 이쪽의 상황은 아랑곳없이 자기소파에 길게 누워 잠이 들어 버렸는지 여기서는 소파 등받이 위로 초돌 의 불꽃만이 평온하게 일렁이고 있군. 그런 미령이 못지않게 양껏 배를 채운 소령이 역시 자기 식탁 겸 테이블에 상체를 눕힌 채 행복감과 식곤증에 쌓여 살짝 혼수상태(?)・・・・・・!
난 소미령이들의 상태를 최종 점검한 후 녀석들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난 아까 미령이와 초돌 문제로 난감하고 산만했던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 린 상태이긴 하지만… 그건 최근 거의 완성된 ‘진유준 패밀리’의 ‘가장’으로서의 나였다. 이제는 지하무림의 가장… 마군황으로서의 진유준이 되어 야 할 되어야 할 차례였다.
「저어~ 주인니임~!」
언제부터인가 나와 있던 요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난 지금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
「히잉~ 모든 일을 먼저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치만… J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요몽. 넌 계속 찌그러져있어.
「아이 차암 어떡하지? 몽몽오빠. 주인님이 이번엔 정말 빡돌… 아니 하여간 많이 화나셨나봐!」
요몽은 ‘오빠가 어떻게 좀 해 봐’ 라고 종알거리며 몽몽 뒤로 몸을 감추었지만, 역시 언제부터인가 내 옆의 허공에 서있던 몽몽은 계속 조용히 침묵 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뭐. 평소라면 이쯤에서 몽몽을 닥달하여 내가 모르고 있던 일들을 모두 확인한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지 고민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 니지. 지금은 나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식신마군!”
“…예, 옛! 천주.”
당황하여 어설픈 반응을 보이는 식신마군과 그 옆의 은사마군 역시 조금 전까지는 구양대주의 현재 상태를 잘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식신마군. 구양대주가 좋아하는 술과 안주 정도는 알고 있겠지? 준비하도록!”
“보, 복명!”
「에? 주인니임! 그런 중환자에게 술은……………」
요몽이 끼어드는 걸 막은 건 몽몽이었다. 요몽 못지않게 순간적으로 반발 기색을 보였던 자룡대주는 요몽과 달리 스스로 빠르게 진정하는가 싶더 니 낮게 한숨을 흘려냈다.
“하아~ 오늘.. 구양대주는 저에게 앞으로의 모든 전권을 위임하면서 ‘이제는 참아왔던 술도 실컷 마실 수가 있겠군’이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전 위임된 전권을 이용하여 그것을 막을 생각이었는데………….”
자룡대주는 말끝을 흐리며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지만 더 이상 반대의사를 표명하지는 않았다.
“구양대주에게는 내가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마. 그리고 또 하나 준비할 건…….”
“…예? 생,사령・・・ 말씀입니까?”
생사(生死)! 내가 천 년 전 처음 마군황에 올랐을 때 나에게 주어졌었던 마군황만의 신물. 난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 고 앞으로도 사용할 생각은 고사하고 아예 거의 잊고 있던 그걸 준비하라고 한 것이다. 생사령의 본래 용도는 아니, 지금은 그보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자룡대주.”
“예, 옛! 복, 명!”
난 자룡대주가 명령을 수행하려고 움직이기도 전에 은사마군을 돌아보았다.
“구양대주에게 가자.”
“복명!”
이제까지와는 달리 군기발랄한(?) 태도와 움직임을 시작한 모두를 보며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새삼 군기 잡을 상황도 아니고, 굳이 그럴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쳇. 이건 나 자신부터 마군황이란 존재는 원래 이런 거라는 선입견 때문에 생긴 습관인 걸까?..
뭐. 지금은 아무려면 어때.
난 계속 ‘그냥 모든 일을 내 맘대로 해석하고, 내 맘대로 밀어 붙이고 싶다.’는 본능에 충실하기로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사마군의 안내를 받 아 구양대주의 거처로 향하는 길지 않는 시간동안 계속 그동안 보아 온 구양대주의 모습들을 처음 만났던 시점에서부터 되풀이해서 떠올려보았다. 그런 사이사이 엄청나게 찜찜한 영상이 겹쳐 떠올랐지만 반복해서 고개를 저으며 그 찜찜하고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며 마음을 다 잡았다.
“…천주.”
초사마군이었다. 내가 아까 지하8층에 도착하고 나서도 미령이와 초돌의 상태에만 집중해있을 때 잠깐 인사를 받고는 예의 무심하고 한심한 마군 황 모드로 ‘어, 이 사람도 왔었네? 아참. 초사마군이야말로 천 년 전의 자기 선조 때부터 구중천의 핵심인사였으니까 당연한 거군.’ 정도만 깨달았을 뿐 곧바로 관심 밖으로 밀어내 버렸었다.
“뭐. 그땐 이 양반은 물론이고 다른 일곱 명의 구중천 멤버들까지 미령이의 불꽃 소녀 상태에 더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어서 쉽게 그랬었던 거지 만… 흠. 그러고 보니 아까도 그랬고 지금 이 구양대주의 거처 앞 복도에 모여 있는 모두를 다시 헤아려 봐도 전부 여덟 명이군. 그건 천 년 전과 달 리 구양대주까지 구중천의 일원으로 추대되었다는 건가? 그리고 그럼에도 이들 역시 내게 구양대주를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걸 보면 이들 모두 구양대주의 ‘갑작스러운 병세 악화’를 알고 그랬다는 건데………………
난 새삼 미안한 마음을 시선에 담아 초사마군과 모든 구중천 멤버들 면면을 살핀 후, 최종적으로 초사마군이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쳐 들고 있는 예의 ‘마군의 신물’을 내려다보았다.
쯧. 그러고 보면 이 마군황의 신물 생사령도 주인의 무관심으로 찬밥 신세였군. 아니, 초대 마군황 패도광협 선배 때부터 찬밥 신세가 시작되었던 모양이니까, 찬밥계의 최고 고참인 셈. 훗, 나란 놈은 참. 이런 상황에서조차 썰렁한 생각패턴을 버리지 못하다니……….
난 쓴웃음을 지으며 ‘찬밥 신세 최고참 생사령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초사마군을 비롯한 구중천 마군들과 그들에게 내 명령을 전했던 자룡대주까 지 살짝 당황하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모두들 내가 취소된 ‘구중천 부활 및 생사령 전달식’ 쯤 되는 행사를 다시 하겠다는 걸로 이해했던 모양이군. 약식으로든 어쨌든 그럴 경 우 모두의 대표이며 생사령 전달자 역할에 구양대주를 밀어 줄 생각이었던 거고 말야. 다른 구중천들은 그렇다 쳐도, 구양대주와 라이벌격인 초사 마군이까지 죽어가는 동료를 위해 양보심을 발휘한 것이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쯧. 전제조건부터 틀렸다는 게 문제지.
난 구양대주의 거처 문 앞에 선채 양손으로 생사령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각각 시계방향과 반시계방향으로 힘을 주자 끼릭- 정교하게 맞물린 구 조가 산뜻하게 풀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 왼손에 들려지게 된 쪽은 백색, 오른 손에 들려진 다른 반쪽은 흑색, 이렇게 생사령은 본래 두 개가 합쳐 진 형태였다. 평소에는 양면에 똑같이 붉은 글씨로 생사령이라고 새겨져있지만 두 개로 나누어지는 순간, 각각 정반대의 목적과 의미가 실리는 것 이다.
먼저 이 흑색의생사령은 ‘흑사령(黑死令)’으로 불리며 이걸 받은 자에게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명령’이 되고, 백색 생사령은 ‘백생령(白生令)’이라 고 불리는… 그 어떤 죽을죄를 지었어도 용서해 준다는, ‘면죄부’였다고… 했지, 아마?
당연히 흑사령을 내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양대주가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니, 난 결국 어느 쪽을 사용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일단 자 룡대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내가 생사령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사용하려한다’는 걸 알고 더욱 놀라며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 었다.
“자룡대주. 구양대주에게 생사령을 받으라고 전해.”
“예? 어째서 구양대주에게 생사령을……….”
“자룡대주!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 했다!”
“…보, 복명!”
자룡대주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내 살짝 빡돈 모드에 겁먹고 떠밀리듯 구양대주의 거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룡대주? …뭣! 천주께서?!”
구양대주가 전에 없이 대경하여 터트린 음성과 기색이 조금 열려진 문틈 사이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내가 복도 중앙쯤이던 위치에서 조금 더 물 러나서는 사이에 방안의 놀람과 의아함, 그 밖의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기색이 빠르게 가라앉는 듯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리며 그 문을 안쪽으로 고정시킨 자룡대주까지 문 옆으로 물러서자, 비로소 구양대주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 냈다.
이, 이런 빌어먹을! 이건, 이런 건 내 예상보다 더 심하잖아…………!
처음 만났을 때는 물론이고 그동안 계속 보아왔던 구양대주의 정정한 모습 때문에 아무리 숨기고 있었다 해도 설마 이 정도까지 다른 행색일 줄은 몰랐다. 나는 어쩔 수없이 아까부터 부정하던 영상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얼마 전에 내 앞에서 세상을 떠난 ‘광염’ 어르신의 모습이 었다.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씨를 지펴, 이미 의학적으로는 죽음의 문턱을 넘은지 오래인 육신을 일으켜 나와 정글이 앞에 섰었던 그 광염 어르신……!
내가 구양대주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었지? 대체 언제 저렇게 저렇게 광염 어르신처럼 메마르고 창백한⋯ 아니, 아니야!
난 머릿속을 가득 메우며 전신으로 스멀스멀 내려오는 불길한 먹구름 같은 걸 가슴 속에서 치받혀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로 밀어붙이며 이를 악 물었다.
“구, 양, 대. 주!”
“…예. 천주!”
난 어느 쪽 생사령을 써야할지 결정을 하지 못한 채 두 개를 동시에 들어 올렸고, 그런 내 앞으로 구양대주가 주저 없이 나섰다.
“소인・・・ 제31대 천룡대주 구양명! 지엄한 마군황의 생사령을 받듭니다!”
음성에 약간 힘이 들어가 있기는 했지만, 거의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고 초연한 태도로 구양대주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이어 상체를 깊숙이 숙이며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얼핏 생각하면 백생령을 사용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구양대주가 지금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걸 사해? 백생령에는 당연히 목숨을 보장한 다는 뜻이 함께 있겠지만 나로 인한 죽음도 아닌데 으이썅~! 모르겠다!
난 두 개의 생사령을 합쳐서 끼릭- 다시 하나로 맞춰버렸다.
알게 뭐냐! 패도광협 선배나, 나나 한 번도 사용해 본적이 없는데 본래의 의미 따위 내가 알게 뭐냐구!
내가 백생령도 흑사령도 아닌 생사령을 내려놓자, 그제야 구양대주의 움찔, 하는 기색이 전해져왔다.
“천・・・주? 이건…….”
“구양대주!”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의 구양대주를 내려다보며 내가 먼저 묻기 시작했다.
“당신과 모든 지하무림인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생사와 운명을… 바친다’고 했었지? 안 그런가?”
“틀림없이 그러합니다, 천주. 천 년 전 선조가 그러했듯, 당대의 소인 또한 영혼을 걸고 맹약했나이다.”
“…그래 좋아. 난 마군황으로서, 지하무림 모두의 생사여탈권을 쥔 자로서, 그 생사령으로 그대에게 명한다! 그대는.
순간적으로 망설임이 스쳐갔지만, 나는 결국 멈추지 않았다.
“죽. 지. 못. 한. 다. 그대는! 알겠나? 내가 이 마군황이 허락하지 않는 한, 죽을 수 없다, 그대는!”
명령…? 아니, 이건 그냥 ‘지키지 못할 나의 공약’일 뿐인지도 모른다. 이 양반의 죽음이 만약 타임씨인지 뭔지 전능한 존재가 정해놓은 소위 ‘천 수’라면 나도 결코 막지 못할지 몰라. 하지만……………
구양대주는 이미 고개를 들고 자신이 받아든 생사령을 확인했으나, 대답은 고사하고 아직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조차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 았다.
“이 마군황의 생사령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내가 애써 차갑게 묻자, 구양대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습관적인 반응이었던 듯 구체적으로 입을 열지는 못하고 있 었다. 이윽고 구양대주는 생사령과 그걸 쥐고 있는 자신의 두 손이 떨고 있음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두 손을 가슴으로 끌어당기면서 상체와 고개를 조금 전보다 더 깊숙이 숙였다.
…제기. 그렇게 무릎을 꿇고 웅크린 자세로 전신을 떨고 있으면 내가 더 이상한, 너무나 못된 놈이 된 거 같잖아! 구양대주 이 양반아, 제발 빨리 뭐라도 말을 좀 해보란 말야~!
나는 그런 속마음과 달리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는 상태로 얼마간을 구양대주를 내려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엔장! 그냥 ‘묻고 따져 볼까…? 내 생사령에 담긴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지, 제발 좀 빨리… 음?
본래 작고 왜소한 몸을 웅크려 더욱 작아 보이는 모습으로 조용히 격동하던 구양대주의 떨림이 어느 순간 멈춰있었다. 그리고 빠르게 아직은 알 수 없는 어떤 기운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내가 원했던 ‘삶의 의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아니, 아니야! 더 이상 내가 앞서서 분석하려 들지 말자!
구양대주는 다시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바로 하더니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소인, 구양명. 마군황의 생사령을 받은 자로서, 그 지엄한 명에 따라… 죽.지.않.겠.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우면서도 당당한 눈빛과 음성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었고, 구양대주 역시 빙긋이 웃음을 떠올렸다.
더 이상은 무의미…겠지?
난 조금 전까지 내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인식할 수 없어서 일단 그 위에 대충(?) 쓴웃음을 덮기로 했다.
“…나아~참! 내가 당했네, 당했어!”
일변한 태도와 음성으로 누구에게랄 것 없이 목청을 높였지만, 다들 바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보니까, 꾀병이었네, 꾀병! 안 그래, 자룡대주? 당신도 한통속이었던 거야? 아니면 나처럼 당했던 거야?”
“…예, 예? 전, 아, 전, 저는…………”
자룡대주가 버벅대고 있으니까 갑자기 구양대주가 핫하핫~!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드물게, 아니 확실하게 처음으로 들어보는 구양대주의 나름 호탕한 웃음이었다.
“천주의 말씀이 맞습니다. 소인 딴에는 감쪽같다 했는데, 천주께는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려.”
구양대주는 후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에게 생사령을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소인 감히 무례한 장난을 하였는데, 천주께서 너그러이 받아주셔서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나는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다시 생사령을 받아 들었고, 구양대주는 내게 다시 한 번 포권해 보인 다음, 다른 구중천 마군들을 향해 돌아섰다. “허허허~ 다들 천주의 말씀처럼 노부에게 당하셨소이다.”
초사마군을 비롯한 구중천 모두가 여전히 얼떨떨한 기색으로 멍하니 서있자, 구양대주는 그들을 향해 휘적휘적 여유로운 걸음을 보이며 다가갔다. “다들, 특히 초사마군은 앞장서서 노부에게 중천의 자리 하나를 헌납하지 않았소? 꾀병도 가끔 부려볼만 하구려. 핫핫하~”
평소의 구양대주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공감할 수 없이 의도적 과장된 태도…! 흠. 하지만 결국 다들 이 뜬금없는 연극(?)에 동참하기로 결정하 는 거같지?
“허어~ 오늘은 제가 구양대주께 제대로 당한 모양입니다.”
짐짓 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데 이어 다른 중천들도 허허 하하 호호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찌 그리 깜쪽같으십니까, 구양대주!”
“과찬이십니다, 음선마군(音仙魔君).”
“나도 너무 놀랐소이다, 구양대주.”
“허허 지나친 과찬이십니다, 본극마군(本劇魔君). 노부의 꾀병연기가 어찌 마군의 눈에 차기라도 했겠습니까.”
본극마군의 직업은 ‘배우’라고 했던가..? 저 사람과 초사마군 정도만 어느 정도 자연스럽고 다른 구중천 멤버들의 연기는 살짝 어색하군. 다들 구 양대주와 환담 분위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는 모양새지만… 음. 역시 자룡대주는 이 모든 상황이 당장은 ‘슬픈 연극’이라는 사실을 거의 잘 이해하 고 있는 거같지? 약간의 문제라면 완전히가 아니라 ‘거의’만 이해하고 있다는 거야. 아니 지금 자룡대주가 내 명령에 의해 미리 준비된 ‘술 상’에 불안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건, 상황 이해를 하건 못 하건 무조건 걱정할 요소…려나?
자룡대주와 은사마군, 식신마군등은 나를 중심으로 구중천 멤버들과는 반대의 위치에 서있었는데, 난 몸을 좀 더 자룡대주 쪽으로 돌리며 자룡대 주에게 한걸음 더 다가섰다.
“아, 천주? 저, 전, 이번 일은………”
“흣! 이제 뭔가 설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난 손에 쥔 생사령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시선은 약간 먼 곳의 어딘가를 보는 척, 하면서 그 방향에 떠있는 몽몽과 요몽에게 그윽한(?) 미소를 그 려보였다.
“지하무림 역사에 최초로 쓰여진 이 생사령의 의미를 가볍게 보지 마.구양대주는 이제 내 허락 없이는 죽지 못하게 되었잖아? 그의 몸 상태가 현재 어느 정도인지 따위는 상관없어. 무.조.건.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맞지? 이 배.신.자. 인공지능 남매!
「우에~ 이번엔 분명 저희들이 잘못한 게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배신자라뇨! 그리고 주인님 맘대로 막 질러버리시곤, 뒷감당은 우리가 하라구 요?」
-셔럽! 넌 좀 있다 이거 받을 준비나 하고 있어.
난 슬쩍 생사령의 검은 쪽을 요몽에게 보여주면서 녀석이 더 뭐라 항의를 하거나 말거나, 다시 자룡대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처, 천주 속하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만… 잠시 잊고 말았었습니다. 천주께선 이렇게 이상한, 상냥한 마군황이라는 것을………….” 에고! 이 정도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이 몽롱한(?) 음성과 눈빛은.. 설마 ‘과도한 마군황 숭배’ 모드로의 회귀? 으~ 난 원래 이쯤에서 ‘그러니까 구 양대주가 오늘 술 좀 마신다고 어떻게 되진 않는다’는 말을 하려던 건데, 이 여자 또 내 말 안 들리기 시작한 거 같아.
“그래서 잠시지만 감히 천주를 원망하는 마음까지! 이제 어찌 사죄 드려야할지…..”
“어허~ 네가 정말 그렇게 큰 실수를 하였던 것이냐, 제니퍼!”
응? 자룡대주의 감정폭주를 막아 준건 고마운데… 지금 자룡대주의 이름을 부르고 하대한 건 구양대주…? 이 양반 언제 이렇게 가까이 온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하긴. 먼저 경망된 모습을 보여서 너의 총기를 흐린 것은 노부였으니 새삼 너의 사부 볼 낯이 없어지는구나.”
“아, 아닙니다, 사숙(師叔).”
어랏? 구양대주가 자룡대주의 사숙?
“그리 말씀하시면 저야말로 돌아가신 사부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뭐야, 이거? 각자 따로 노는 일인전승 체계가 지하무림의 특징 중에 특징인데 같은 대주끼리 이런 관계가 어떻게 성립되지?
“송구스럽습니다, 천주. 실은… 남들이 혹여 오해라도 할까싶어 비밀로 해왔습니다만, 자룡대주의 사부와 저는 오래전에 의남매의 연을 맺은바가 있습니다.”
흐음. 전부터 자룡대주는 다른 이들에 비해 구양대주와 친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어도, 이번에 보인 반응은 좀 많이 오버 아닌가 싶었었는데… 내 앞에서는 티내지 않았던 사적 관계가 그랬었단 말이지? 이거 이거… 내 생각보다 앙큼한(?) 사람들이었네, 그려?
“하핫핫! 구양대주! 지금 ‘남들이 오해할까 걱정해서 숨겨왔다’ 하셨소?”
응? 이번엔 초사마군?
“내 보기에 그걸 비밀이라 여긴 건 두 사람뿐인 듯하오. 구양대주와 초사매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니 말이외다.”
뭐시라? 지금 또 뭐냐, 이거? 구양대주와 자룡대주 사부가 의남매 이상의 사이라는 소문(?)은 그렇다 치고 초사마군은 또 자룡대주의 사부를 ‘사매 (妹)’라 칭한 거 아냐, 지금?
왠지 익숙한(?) 혼란에 빠진 나보다 구양대주는 예상치 못했던 초사마군의 반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거 같았다.
“무, 무슨 말씀이시오, 초사마군. 이제 와서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망언을 커허엄! 자칫 그녀의 청정함에 누가 될까 두렵소이다.” “호오~! 지금 과거의 연적 앞에서 사매를 그녀라 다정히 부르는 건, 오늘 나와 제대로 한판 해보자는 것이오?”
에헤라디여~ 경사났네. 경사났어~! 지하무림에 막장 드라마 꽃이 만발하는구나아~!
“처, 천주 안전에서… 흠. 그만합시다, 초사마군.”
결국 구양대주가 먼저 백기를 들자, 초사마군은 통쾌한 웃음을 참는 기색과 함께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포권했다. “송구합니다, 천주. 너무 오랜만에 옛 친구의 사적인 모습을 보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그만………….”
‘아니, 아니, 난 신경쓰지 말고 계속 방영(?)해도 돼요. 우리 대교 마님에게 중계방송이나 녹화방송이라도 해야 하니까.’ 속마음은 이랬지만, 그런다고 정말 계속 연장 방영해 줄 것 같지는 않아서 당장 급한(?) 스포 만이라도 묻고 싶어졌다. “저기, 두 사람 중에서 어느 한 쪽이 자룡대주의 숨겨진 아빠라던가…….”
응? 지금 두 사람이 동시에 움찔? 설마, 진.짜?
내 기대(?)와 달리 구양대주와 초사마군은 거의 동시에 높이 포권하며 역시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역시 천주께선 농도 잘하십니다. 그려!”
흐으음. 만만치 않은데? 조직 내 라이벌 관계인 줄로만 알았던 구양대주와 초사마군이 일사분란하게 손과 입을 맞추는 걸 보니까 어째 더 수상쩍 은데 말야. 그렇다고 다시 생사령을 들이대며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모든 사연을 스포질하라!’고 할 수는.. 응? 정말… 해볼까………?
상당히 강력한 유혹이 있긴 했지만, 난 결국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이상, 대교와 수다 떨 소스는 앞으로 엄청 쏟아져 나올 거 같고… 난 당장은 겸사겸사(?)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자룡대주.”
“예, 천주.”
“오늘 예정되었던 건, ‘구중천 부활 신고 및 생사령 전달식’ 쯤 이었겠지? 그건 이제 어떤 형태로든 했다고 치자구. 그래도 ‘건전하게 파토난’ 것보 다는 나았지?”
자룡대주는 아까 자신이 나름 과감하게 했던 말장난이 언급되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러니까. 이제 ‘자축 파티’ 차례로군. 훗. 설마 준비했던 것들 전부 싹 치워버렸던 건 아니겠지?”
“후훗. 그럴 리가요, 천주. 본래 자축 파티 장소는 아까의 ‘마군황 전용 연무실’이 아니었습니다.”
“좋았어. 그럼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이다. 이번 자축 파티 작전의 작전명은 ‘다 함께 허리띠 풀고 먹고 마시자’이다!”
음. 좀 유치한가? 뭐, 어때. 뜻만 좋으면 되지.
“작전 참여 병력은… 제한 없음! 작전 종료 일시는 ‘마군이 구중천을 떠날 때까지! 음. 그리고… 은사마군.”
호명되자, 즉각 자룡대주 옆에 각 잡고(?) 서는 은사마군.
“예, 천주, 하명하십시오!”
“훗. 바로 그럴까봐 부른 거야, 은사마군.”
“예?”
“이번 작전명 ‘다 함께 허리띠 풀고 먹고 마시자…! 즉, 은사마군과 어사조까지 열외 없다는 말이지.”
“아・・・ 하오나, 천주와 천모의 호위는…………….”
“필요 없어. 여기서는… 말이지.”
확실하게 말해주어도 난처해하며 자룡대주에게 도움말을 청하는 시선을 보내는 성실녀 은사마군.
“나도 좀 늦게 깨달아서 민망하긴 한데 생각해보니까 말이지, 여긴…….”
난 천천히 눈을 감고 고개를 조금 들어 뭔가 깊이 의미하는 기분을 만끽하며 말을 이었다.
“구양대주와 모든 지하무림인들이 한 마음으로 만들어 낸 마군황의… ‘나의 집’이야. 내가 내 집에서 따로 호위를 받아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겠어? 아, 뭐. 지금은 아직 강력한 적과 전쟁 중인 상황이니까 너무 방심하지 말아야겠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그래 이번만은 그냥 내 집처럼 쉬 었다 가고 싶어졌어. 내 말… 알겠어?”
눈을 뜨며 묻자, 전혀 다른 성격의 자룡대주와 은사마군이 드물게 비슷한 웃음을 환하게 머금고 있었다.
“자아~ 이제 그럼, 자축 파티 작전 개시!”
“복! 명!”
잠시 후.
자룡대주와 은사마군, 식신마군을 주축으로 하여 자축 파티 작전이 개시된 가운데, 나는 그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부터 살짝 발을 빼기 시작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두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약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은신술을 발동하면서 슬며시 적당한 복도 구석벽에 기대서는 것으로 좀 더 확실하게 모두의 관심 밖 존재가 된 것이었다.
파티 준비하고 있는데 대빵이 어슬렁거려 봐야 방해만 될 테고… 난 지금 반드시 확인해야할 사항이 있지?
-몽몽!
난 의식적으로 생사령을 만지작거리면서 몽몽을 돌아보았지만, 녀석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에 약간의 웃음기까지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가장 궁금해 하실 사항을 선행보고 하자면, 현재 구양대주의 신체를 잠식중인 암세포의 제거는 재발 위험 없이 가능합니다.」
훗. 그래. 그렇게 심플 삼빡하게 나와 줘야 도 닦고 하산한 몽몽선생이지!
요몽은 그렇다 치고, ‘CR 각성 프로젝트’에 매진 중이던 몽몽이 나왔으면서도 내 막나가는(?) 행동을 막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맘 놓고 생사령쇼(?)를 진행했었던 것이다.
「구양대주 본인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해당 질병의 치유에 필요한 밑준비는 이미 진행 중이었습니다. 일시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로부터 일주일 정도 후에는 본인도 암세포 증식 패턴 변화와 자각 증상의 경감을 인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후의 본격적인 치유 과정은 죄송 하지만, 요몽을 통한 추가 보고를 받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 그려, 그려. 당장 중요한 건 다 들은 거니까, 넌 이제 다시 CR애들 일에 매진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아참.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구양대주 병세가 지금… 음. 그러니까 술을 좀 마셔도 큰 문제는 없…으려나?
그래. 자룡대주에게 큰소리는 쳐 놨지만, 사실 이게 꽤나 마음에 걸리네. 욱하면 발동하는 내 습관이랄지, 습성이랄지… 하여간 딴 사람과 뭔가 풀 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술로 해결하려는 버릇은 좀 고쳐야…………
「…제가 환자에게 제공 중인 약제, ‘휴머노사이드’는 알콜류 병행 섭취가 권장되기도 합니다. 보다 상세한 기전 및 주의 사항은 요몽……………..」
-하핫! 퍼펙트! 그 휴~뭐라는 약제는 그야말로 따봉 항암젠가 보네? 하여간, 몽몽, 이번 너의 괘씸죄는 무조건 ‘대사면’이다!
내가 생사령을 다시 분리해서 백생령 쪽을 들어보이자 몽몽은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숙이면서 사라졌다.
「와우~주인님 감사해요오!」
-슬쩍 얹혀가려고 하지 마, 요몽. 넌 배신죄에 ‘하필 죄’가 더해져서 아직 완전 사면은 아니야.
「에? 하필 죄? 그게 또 뭐예요?」
-니 날개처럼 가벼운 그 입이 ‘하필이면 이렇게 큰일에 무거워진 죄’라는 뜻이다.
「그, 그건・・・ 아이참! 그래도 이런 법이 어딨어요. 이건 명백한 남매 차별법이라구욧!」
-흥. 내가 너희들의 국회, 입법기관이거든? 꼬우면 선거 때 잘 찍… 음. 하여간 넌 ‘흑사령 일시 보류’ 상태니까, 앞으로 잘해? 응?
「전 아직 선거권도 없는데 뭘 어쩌라구요. 치이~ 계속 이러시면 아무리 힘없는 인공지능이라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권, 주인님 보좌업무 파 업 같은 걸 할지도 몰라욧!」
헐~! 이 녀석 보게? 원칙적으로 저항권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는 녀석이 막가파 협박 분위기네? 아무래도 이 녀석, 눈치 봐서 여차하면 적반하장으 로 치고나가자는 작전을 미리 세워뒀었던 모양인데… 흠. 이거 진짜 흑사령 발동해 말아?
「아이 차암~ 저도 주인님처럼 그냥 한번 질러본거지, 아무렴 제가 뭔 파업 같은 걸 하겠사와요오. 자꾸 그 흉측한 건 왜 만지작거리고 그러세요 오.」
-흐으음. 네 녀석 말하는 게 왠지 많이 거슬리긴 하지만… 까짓거,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너도 과감하게 용서해주마.
「와! 진짜요?」
-그래, 임마. 광복절, 아니 생사령 특사 정도로 하지 뭐.
내가 생사령을 다시 합쳐서 흔들어 보이자, 요몽은 두 팔을 위로 뻗으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얏호! 만세! 정말로 내 작전이 먹힐 줄은 몰랐.. 하여간 만쉐에!」
특사 취소를 외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난 결국 생사령을 건빵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누구에게든, 장난이라도 나쁜 말할 기분이 아니긴 해. 오늘 모두에게 받은 선물들이 너무나 서프라이즈해서 눈물까지 찔끔 나올 뻔했을 정도니 말야.
게다가 이 구중천이라는 깜짝 선물 속에는 아직 개봉도 제대로 못한 선물 상자가 더 있다고 봐야겠지? 대표적으로는 애초 이곳 방문 목적이었 던 ‘CR 아그들이 완전체로 각성’ 하는 그 순간…………!
난 문득 그 귀염둥이 녀석들 생각이 강해져서 나도 모르게 복도 벽에서 등을 떼고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이곳에 도착하여 첫걸음 을 디딜 때도 좋은 기분이긴 했지만, 지금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충만감이 가슴 속에 밀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