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61화 : 실연자(失緣者)와 미연자(未緣者).
1. 실연자(失緣者)와 미연자(未緣者).
예정된(?) 타임 씨의 꼬장.
으~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 동시 다발적으로 기습을 펼쳐올 줄은……………!
나와 대교는 요몽의 서포터로 다소 어정쩡한 위치까지는 빠르게 달려간 상태였다. 세 군데에서 발생한 사건들 중에서 두 군데 장소로 가기 위해서 는 방향을 확실히 해야 할, 즉 갈림길에 속하는 지점이었다.
우, 우선, 천음마군 쪽은 패스! 솔직히 그쪽은 우리가 나서는 게 뭐할 정도의 치정사건(?)이고! 그러니까 미령이와 CR애들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 요한 기준이 있을 리가 없지! 젠장!
-요몽! 대교는 미령이에게! 난 닥터 제이! 안내해!
「옛썰, 주인님!」
요몽이 또 뭔가 먹고 있던 걸 뒤로 감추며 대교 쪽으로 붙었는지 내 쪽에는 화살표와 거리등의 간당한 안내 영상만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공공보법을 펼쳐 닥터 제이 쪽으로 날다시피 달리는 와중에도 호출기로 다시 닥터 제이를 불렀다.
“닥터 제이! 대체 무슨…………….”
“아, 미안! 미안!”
응?
“일단 멈추게! 미안! 미안!”
젠장! 설마?
나는 열 받음과 다행이라는 생각이 겹쳐서 어정쩡한 기색으로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방금 자네 반응을 보니… 내가 장난칠 타이밍을 잘못 쟀나보군.”
“장난? 자앙난, 이었다구요?”
“그래. 이쪽은 별일 없어. 하지만 다른쪽의 일은 진짜 중요하고 급한 상황이겠지? 그러니까 자네도 그쪽으로…………….”
우이쒸~!
어이없고 허탈해서 돌아가실 지경이었지만, 그런 감정에만 빠질 상황은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동시다발 사건이 난게 아니라면 다행이긴 한 건데 ・・・ 우이쒸! 두 건이 뺑끼면 미령이 쪽이 진짜 큰일이란 건가?
-요몽! 대교는? 도착했냐?…
「넵! 지금 막이요!」
-그럼 그쪽 연결해.
요몽의 대답은 여전히 목소리뿐이고, 망막 스크린 영상은 미령이 쪽에 설치된 기지 내 카메라를 통한 영상이어서 왠지 묘한 느낌이었다.
대교가 지닌 몽몽 하위체에는 영상 기능이 없으니까 저쪽 카메라를 이용하는 거야 당연한 거고, 당장 상황 파악하는 데는 저 쪽에 설치되어있는 카 메라 영상만으로도 충분할 듯…인 것도 그렇다 치고! 뭐야, 현재 저 상황은?
요몽의 ‘변괴’라는 보고를 듣는 순간에 떠오른 건 아무래도 초돌의 돌발적인 발화 폭주로 인한 대규모 재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여지는 영 상속의 상황은 그런 걱정과 다른 방향으로 날 당혹하게 하는 것이었다.
뭐야, 이거! 미령이와 초돌의 불꽃이 아예 없어졌어?
난 오히려 믿기지가 않아서 잠시 멍하니 미령이를 보았지만, 미령이가 초돌과 만나기 전의 상태라는 건 소령이가 미령이에게 바싹 붙어서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벌써 초돌의 화력이 다 떨어졌⋯을 리가 없겠지? 그렇다면 미령이가 벌써 초돌과의 ‘념에 의한 소통’을 해서 완벽하게 제어하게 된 거였으면야 경사난거지만, 그치만, 그렇다면 요몽이 ‘변괴’라고 할 리가 없잖아? 더구나 지금 미령이에게 천천히 다가가고 있는 대교의 기색도 뭔가 좀 이상하고…….
-대교!
-…예? 아, 오라버니?
-대교, 대교. 대체 어떤 상황인거지? 여기서도 보이긴 하는데 카메라 화질이나 각도가 좀 애매하네?
-아…! 잠시만요, 오라버니. 요몽!
…에? 뭐야? 요몽한테 카메라빨(?) 제일 좋은 위치를 묻는 건줄 알았는데 왜, 영상이 아예 꺼져 버리네? …에고! 그게, 그, 그렇구나! 조금 전까지 얼핏 보였던… 그 미령이의 몸에 생긴 변괴를 좀 더 확인하려면 어쩔 수 없이 미령이를 얼레리꼴레리 남사스런 상태로 만들 수밖에 없겠어.
난 공연히 머쓱해졌지만 그런 기분은 잠깐이었고, 오히려 지금이라도 나도 미령이에게 달려가 몽몽으로 정밀 스캔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 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다시 닥터 제이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고 공공보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래. 초돌은 어차피 몽몽의 스캔으로도 답이 없었어. 그건 닥터 제이도 마찬가지였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그래도 역시 그 양반과 상의를 해보는 편이… 음?
-오라버니!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대교의 목소리와 함께 영상도 다시 켜졌지만, 졸지에 전신 신체검사(?) 당한 미령이는 창피해서 숨었는지 대교만 나서서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민망한 부위로 번지지는 않은 거 같아요. 그리고 미령이 말에 따르면……….
과학적, 의학적, 뭐 그런 거보다 여자애로서의 미령이를 먼저 걱정한 관점이 드러나는 보고…인거야 아무래도 상관없고, 으으음~ 이거, 이거 아무 래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느려지기 시작한 내 경공은 닥터 제이가 있는 장소가 보일 때쯤에는 아예 보통의 걸음이 되어있었다.
“이런 젠장!”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지어야했다. 상황은 분명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감을 알 수 있었지만, 그만큼 내가 혼자 오버해서 과민반응을 했 다는 자각도 커졌기 때문이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결국 타임씨! 당신 말야, 당신이 그간 나한테 한 짓이 있으니까 내가 이러는 거 아니겠어? 긍께, 큼. 하여간, 당신한테 꼬장 상 황이라고 했던 거 사과 같은 거… 할 맘 없다구!
저 먼 미지의 공간속에서 ‘짜식이 잘해줘도 지롤이야.’라는 소리가 들려온 거 같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 생까고 당장의 현실에 집중하기 로 했다.
-…대교. 역시 미령이는 닥터 제이에게 보여야 할 거 같아. 하지만 닥터 제이에게 구중천 깊숙한 곳까지 보여주기는 좀 그렇고………….
-알겠어요, 오라버니. 장소가 결정되면 알려드릴게요.
대교와의 통화를 끝내고, 오전에 그녀와 함께 방문했었던 ‘비밀 격납고 앞에 서는 내 입가에 다시 쓴웃음이 번졌다.
쳇. 요몽의 문자 안내가 닥터 제이의 현재 위치를 여기 ‘거미로봇 격납고’라는 걸 표시했을 때, 그때부터 이미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긴 했었어. 여 러 가지로 추가 반성 및 정신 재무장을 해야 할 건 대교보다 나였던 것 같군.
“여어~ 어서 오게나!”
열려진 격납고 안에서 날 반기는 건 당연히 닥터 제이였다. 하지만 오전과 달리 그와 함께 있는 인물은 닥터 우디가 아니었다. 닥터 제이는 출입문 근처의 간이 응접실 같은 곳에 앉아있었고 그 앞의 테이블에는 간단한 주안상이 차려져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마주 앉아있던 묘령의 여인네 가 발딱 일어나서는 내 쪽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조아렸다.
“……흠. 은사도객 13호, 맞지?”
“예. 그러합니다. 천주.”
원래 은사도객 중에는 몇 명의 여자 살수들이 있었다. 그중 한명인 이 13호를 기억하는 건 조담놈과 같은 숫자의 코드명을 가지고 있어서였지만, 오늘 처음 복면을 벗은 맨 얼굴을 보니까 용모에도 은근 남다른 특성이 있어서 앞으로는 좀 더 확실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후후~ 저 지나치게 성실하고 과묵한 도객 아가씨를 겨우 꼬드겨서 술친구를 만들려던 참이었는데 말야.”
닥터 제이는 아쉬운 표정으로 흘끗 도객 아가씨 13호를 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우리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위치에 서서 조용히 대기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훗. 결국 아까는 심심해서 장난으로 절 부르려고 하셨단 거군요.”
“어, 그게 가장 중요한 초기 과정은 한 시간쯤 전에 끝났거든. 그래서 사실은 내 감시, 아니 호위를 서주고 있는 도객들의 이목을 속이고 이 구중 천 시스템 해킹 놀이를 해볼까 했네만… 음. 무엇보다 이곳의 보안책임자가 몽몽군이다 보니, 나도 엄두가 나지 않더군.”
아무리 천하의 몽몽이 상대라도 이 양반이 과연 얌전히 꼬리를 내렸을까 싶긴 하지만, 난 짐짓 모른 체하며 닥터 제이 옆자리에 앉아서 술병을 들 었다.
“…어디까지 알고 계시죠?”
내가 닥터 제이의 술잔을 채워주며 밑도 끝도 없이 묻자, 닥터 제이는 풋 웃었다.
“이 친구, 요즘 조금 걱정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군.”
약간 선문답스럽기는 했지만, 우린 결국 서로를 마주보고 피식 웃을 수 있었다. 닥터 제이는 내가 준 술을 가볍게 원샷 하더니 안주 하나를 집어 들 며 말을 이었다.
“뭐… 미령양이 벌써 이곳에 와서 자니의 핵과 접촉했을 거라는 정도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네.”
과연 닥터 제이. ‘CR각성 프로젝트’와 ‘거미 로봇 군단 재정비’, 이 두 가지 사안 외에는 구중천 내의 모든 일에 배제되고 은사도객들의 철저한 감 시 하에 지내는 사람이 잘도 다른 일들까지 꿰차고 있는 것이다.
「주인니임! 대교님께서 미팅 장소를 결정하셨어요. 바로 가실래요?」
때마침 등장한 요몽은 닥터 제이에게도 보이는 모드였기에, 우리는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해킹놀이를 할 틈도 없이, 바쁘게 해 드리게 될 것 같군요.”
잠시 후.
우리가 요몽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격납고와 같은 층에 위치한 무슨 실험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곳이었다. 몇 대의 실험장치가 눈에 띄기는 했지만, 50여 평의 실내는 거의 빈공간만이 보이는 휑한 분위기였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대교와 소미령이, 단 세 명이었다. 미령이는 아까 카메라로 봤을 때와 달리 밝은 레드 색상의 체육복차림이라는 점이 달랐다.
“어이 미령양. 한국에서 보고, 이틀 만인가?”
닥터 제이는 들어오며 태평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미령이는 왠지 쭈뼛대는 기색으로 살짝 목례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 미령이에게 3미터 정도 떨 어진 거리까지 다가간 닥터 제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대교가 옆에 바싹 다가서 있어도 괜찮을 정도로 아무런 기색이 없던 미령이의 몸에서 화 르륵~ 작지만 확실한 불길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아! 미, 미안, 언니!”
미령이가 당황해서 대교를 돌아보았지만, 대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웃으며 한손을 들어 미령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난 괜찮아, 미령아. 너무 긴장하지마. 그래야 네 친구도 진정할 수 있을 거야.”
불길은 아까 미령이가 지하 8층 소파에서 잠들었을 때보다 현저히 작았지만, 그마저도 빠르게 사르라지는 것 같았다.
“오호~ 대단한 걸? 유준군이 초돌이라 명명한 물질과 접촉한건 불과 몇 시간 전이라고 들었는데, 벌써 그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게 된 건가?” 닥터 제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건 정말이지, 기록적인 일이야. 그전 사용자인 자니 엠블럼. 그 친구도 알면 어이쿠 누님! 제가 졌습니다~ 그럴걸?”
닥터 제이가 자니를 언급하는 순간에는 순간적으로 굳어졌던 미령이가 결국에는 작게 미소를, 보일 듯 말 듯이긴 하지만 어쨌든 웃긴 한거 같았다. “미령. 혹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난 본래 의사였어. 심지어………”
닥터 제이는 내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빙긋이 웃었다.
“유준, 이 친구가 태어날 때 담당의이기도 했었지.”
“예? 지, 진짜요?”
미령이는 물론이고 소령이까지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나와 닥터 제이, 특히 날 주목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공연히 조금 민망해진 나는 어색하게 웃 을 수밖에 없었다.
“자아~ 그러니까, 미령양. 그걸 좀 보여주겠어? 앞으로 어린 아가씨 피부에 트러블이 생길지 어떨지 정도는 진단해야 할 테니 말이야.”
닥터 제이의 부드러운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미령이가 상의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문…신? 그것도 완전 노골적인 불꽃 형태의?
아까 먼 앵글의 카메라로 봤을 때나, 조금 전 옷 위의 목 부분에 일부 보인 형태만으로는 작은 꽃잎 같은 것으로 보였었다. 하지만 미령이의 쇄골 조금 아래부터 시작되어 양 어깨를 감싸고 목 주위로 일렁이는 형태의 저건 누가 봐도 고운 불의 꽃이었다.
최고의 문신사의 솜씨로 그려져 마치 진짜 생생한 불꽃 느낌의⋯ 아니, 저건 진짜 불꽃을 품고 있으니까, 진짜 불꽃이 문신을 가장한 셈인건가? 어 쨌거나 지금 몽몽 온도계(?)는 사람 체온정도만 측정되고 있으니 그냥 문신은 문신인 으~ 역시 개념잡기 난감하네.
“흐으음~ 일단 육안으로는 고착 및 융화 패턴에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이는군. 아참. 요몽! 자네가 스캔한 초돌의 본래 용적 데이터를 좀 보여주겠 “나?”
「넵!」
짧게 대답한 요몽은 먼저 보석 형태였을 때의 초돌 영상을 허공에 떠올렸다. 그 초돌 영상 위로 가늘고 섬세한 그물망 같은 선이 덧그려지고, 이어 서 주변으로는 뭔가 알 수 없는 숫자며 용어들이 깨알같이 타이핑(?) 되고 있었다.
…젠장. 여기서부턴 천재 전문가의 영역인가? 나였다면 중간과정은 다 때려 치고 그냥 언능 결과나 얘기하라고 했을 텐데, 저 양반은 저런 영상 데 이터를… 윽. 이번엔 현재 불꽃 형태를 분석한 영상도 떠오른다.
만능 천재 과학자 겸 의사께서 미령이를 진찰(?)하는 사이에 천재(?) 통박 전문가인 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상황 분석을 해보고 있었다.
으음. 닥터 제이는 아까 분명 자기도 자니의 핵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했었지? 그게 구라였고, 사실은 자니의 핵에 대해서 아주 잘 알 고 있었다던가… 그런 건 둘째 치고, 일단 지금 미령이에게 하는 말들이 전부 너무 적절하게 우리 입맛에 맞아… 예를 들어, 자니와 초돌의 공생관계 는 어떤 식이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인데, 닥터 제이는 굳이 자니를 초돌의 ‘사용자’라고 표현했지. 즉, 사기성이 농후해 보이지? 미령이를 속이 는 찝찝함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닥터 제이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1차 결론을 내리며 다시 미령이의 기색을 살펴보았더니, 녀석은 어느 사이 경계심을 많이 풀고 닥터 제이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흠. 아무래도 진화의 2단계가 거의 끝나가는 것 같군. 그러니까 미령양.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땀샘이라던가 여하간의 모든 피부 본연의 역 할도 정상화 될 거야. 다만 문제는 3단계인데 이건 미령양 자신이 새로운 친구이자 자신의 일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힘의 위험성을 관리하느 냐의 문제라서 나도 더 이상은. 음. 무슨 얘긴지 알겠지?”
닥터 제이는 자연스럽게 더욱 가까워진 미령이를 내려다보며 온화하게 웃었고, 미령이도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닥터 제이는 여 전히 온화하고 다정한 태도로 몸을 돌려 뒤에서 기다리는 나에게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다시 미령이를 돌아보았다.
“아참참! 혹시 모르니까 말야. 당분간 목욕하면서 때는 살살 밀도록 해.”
“예, 예?”
미령이가 얼굴을 붉히는 것과 동시에 문신화 된 초돌의 주홍색도 더욱 붉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화륵~ 불길이 점화(?)되고 있었다.
“와아- 미령이가 또 작은 불마왕 됐다!”
“언니!”
소령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웃는 것에 화가 난 미령이가 더욱 큰 불꽃을 일으키고 있을 때, 나와 닥터 제이는 이미 실험실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감사합니다, 닥터 제이.”
따라 나온 대교가 닥터 제이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그는 피식 싱겁게 웃었다.
“난 딱히 한 일도 없는데 뭐.”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께선 미령이를 충분히 안심시켜주셨습니다. 헌데…………….”
대교는 말끝을 흐리며 실험실 안을 살폈고, 문이 다시 닫히자 닥터 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 말게, 대교양. 미령양 본인이 초돌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런 방향으로 얘기하긴 했지만, 사실 저 초고밀도 에너지 집적물질은 너 무 위험해. 그러니 나도 여러 가지 대책… 여차하면 강제적으로라도 분리할 방법도 연구해 보겠네.”
“아… 역시.”
대교는 새삼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고, 닥터 제이는 빙글빙글 웃으며 날 돌아보았다.
“자네 말대로 얼마간은 심심할 틈도 없을 것 같군.”
잠시 후.
나는 닥터 제이와 함께 비밀 격납고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대교 자매들과 함께 지하 8층의 내 연무실로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아무 래도 지금은 닥터 제이에게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대충, 상당히, 왕창 사기 치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눈곱만치 근거는 있는 거겠죠?”
약간(?) 삐딱하게 물었음에도 닥터 제이는 예의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당연하지. 난 분명 자니의 핵을 연구하기는커녕, 직접 본 일도 없었어. 하지만 그런 초고밀도 에너지 집약체를 인체에서 받아들이고 이용하는 연 구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있어왔지. 후후! 자네야말로 그 산증인이 아닌가.”
“…제가 먹은 동천만년영삼, 공청석유・・・ 그리고 신수성녀를 치유할 때 썼던 ‘빙룡의 내단’ 같은 거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과 초돌은 근본적으로 다 른 거 아닌가요?”
“왜 다르다고 생각하지?”
“그, 그야… 과거의 영약이나 내단은 자연 발생한 거고, 초돌 같은 건 인위적으로 만든 거니까……..”
난 왠지 내 주장에 자신이 없어져서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인위적인 합성 물질이나 현상에 거부감을 가진 것은 이해하네.”
쳇. 이 사람의 진심이 항상 궁금하긴 하지만, 때로 이렇게 진지해지면 살짝 부담스럽기도 하단 말야?
“하지만, 유준군. 의학이든, 과학이든 모든 인간의 학문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야. 자연의 섭리를 탐구하고 보앙, 혹은 최대한 재현하 는 것, 그게 이 우주의 구성원들에게 가능한 학문의 본질이지. 보통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오컬트 분야나 초능력, 에스퍼의 능력 발현도 같은 원 리에서 벗어나지 않아. 이를테면 ・・・ 음? 아, 이런, 이런 더 계속하다가는 자네가 그 정글도를 뽑아들 거 같군, 그래.”
“아, 아뇨. 제가 학술적인 얘기에 약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까지는…………….”
“하핫핫! 아무려면 어떻겠나. 오늘은 자네와 지하무림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라지? 자네도 이제 다시 자네의 소중한 수하들과 어울리게나.” “어, 그건…….”
나도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닥터 제이가 오늘처럼 술을 마시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술기운에 조금이라도 방심상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닥터 제이와 좀 더 대화를 나눠보고 싶기도 했다. 나는 쉽게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고, 우린 어느 사이 비밀격납고 앞에까지 돌아와 있 었다.
“나도 사실 다시 해야 할일이 많아. 그리고 자네가 좋아하는 요점정리! 우선 미령양의 안전은 거의 확실해. 그 불꽃 헤나 형태도 미령양 본인의 의 식이 반영된 거 같고 말야. 그리고 우리 CR아이들의 각성 과정에도 문제가 없을 거라는 걸 나와 몽몽군이 보장함세.”
여기서 몽몽의 보장까지 당신이 하는 건 좀…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닥터 제이는 ‘바래다줘서 고맙네.’라며 혼자 격납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 다.
쳇. 우째 이번에도 뭔가 당한 거 같은 기분이드네? 그렇다고 딱히 시비 걸 소재도 마땅하지않… 음? 가만?
난 오늘 닥터 제이 담당인 듯한 은사도객 13호가 닥터 제이를 따라 들어가는 것을 보며 닥터 제이에게 전음을 날렸다.
-그 은사도객, ‘인천미녀’에게 계속 집적거리면 정글도 부림 나는 수도 있습니다. 이.모.부.
얼마 후.
나는 다소 정처 없이 걸으며 요몽을 호출했다.
-요몽. 좀전에 닥터 제이가 ‘인천미녀’가 뭔지 묻지 않던?
「아뇨. 그냥 크게 웃기만 하시던데요?」
내가 알려준 적이 없는 용어를 썼음에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건, 내 썰렁 작명 패턴까지 읽고 있다는 뜻이군. 쳇. 여러 가지로 방심할 수 없는 양 반이야. 역시 타임씨와 거의 쌍벽을 이룬다고 할까?
「어, 근데, 주인님. ‘인천미녀’가 누구예요?」
-은사도객 13호. 내가 보기엔 ‘인조같은 천연 미녀’…라고 할까?
「우에~? 그러고 보니까, 현시대 우리나라의 성형외과에서 선호하는 페이스였네요?」
-…뭐. 그쪽도 유행이라는 게 있어서 약간 변하기도 한다는 거 같긴 한데……
뭐가 어찌되었든, 우리의 인천미녀 입장에서는 상당히 억울한 상황일 것이다. 본인의 타고난 미모가 짝퉁 인조인간들 때문에 오히려 오해의 눈총 을 받아야하는 거니 말이다.
「으웅~ 저도 오해받지 않으려면 성형외과들 참고 데이터를 가끔 감시해야겠네요.」
얼굴은 물론이고 존재자체가 만들어진 녀석이 하는 소리치곤 어이없었지만 요몽은 나름 진지하게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어쨌든, 이제 대교 좀 연결해 줄래?
「넵! 참고로, 대교님과 동생분들은 이미 주인님 연무실로 복귀하셨어요.」
-…아. 오라버니?
-그래. 미령이는 좀 어때?
-지금은 한결 기분이 좋아졌어요. 후후~ 실은 이제부터 불꽃 헤나의 디자인을 조금 손봐야겠다고 소령이와 상의 중이에요.
흠. 하긴, 미령이는 아까 낮잠을 자기 전에 무심코 헤나에 대한 생각을 했었고, 자는 동안 초돌이 그 의식에 따라 변한 거라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디자인을 바꿀 수도 있겠군.
-음. 알겠어. 그럼 난………….
나야 아까처럼 계속 대교와 지하무림을 거닐고 싶었지만, 당장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어서 일단 참고 얼마간 따로 일정을 잡기로 한 것이다. 대략 삼십분 후.
내가 도착한 것은 지하 7층에 위치한 ‘중천’이란 곳이었다.
따라와서 내 옆에 서있는 자룡대주 말에 의하면, 구중천이 처음 성립되어 첫 회의를 가진 장소가 어떤 외진 산중의 정자여서 이런 명칭이 생겼다는 건데… 그래서 이렇게 육중한 나무문으로 분위기를 낸 건가? 문 크기로 봐선 거의 대궐 들어가는 출입구 같네, 그려. 그나저나….
내가 대교와 따로 움직이려고 했던 건, 계속 미뤄지고 있던 ‘구양대주와의 독대 술자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룡대주를 호출해서 ‘구양대주는 아 직도 다른 중천들과 즐거운 시간중인가’를 물었었다. 하지만 자룡대주는 뜻밖에도 구양대주와 다른 두 명의 중천 마군들이 먼저 내게 알현을 요청 해왔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그래서 여기… 구중천 멤버들의 회의실로 만들어졌다는 곳에 온 건데 말이야. 오늘의 분위기에서 구중천 3인이 내게 하고 싶다는 중요한 얘기는 대체 뭘까…? 세 명 중에서 구양대주와 초사마군은 그렇다 치고, 지금까지 몇 번 얘기해 본 적도 없던 음선마군, 그 사람은 당췌 감이 안 오네? “천주께서 납시었습니다!”
자룡대주가 문 쪽을 향해 알리자, 곧 크루룽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나의 예상 내지는 각오(?)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웅장한 궁궐삘 회의실이었다. 나는 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포권하는 구양대주와 음선마군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야 계속 놀랄 볼거리 많아서 좋긴 한데, 이 구중천 건설하다가 구양대주는 물론이고 많은 지하무림인들이 파산하는 거 아닌지 걱정이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천주. 초기 비용 조달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자신이 파산할 정도로 무분별한 지하무림인은 없습니다.” 여유롭게 웃는 구양대주는 물론이고 내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자룡대주도 웃음 띤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현재 약간 어려움에 처한 이들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조성된 지하무림 공동 예산은 곧 그들에게 합리적으로 지원될 것입니다. 천 주의 존재로 인한 무형의 자산은 일단 차지하고라도, 천주 직속의 해커팀에서 적으로부터 빼내 확보해준 기술력의 상업화를 통한 유형무형의 자산 을 단순 계산해 봐도… 흠. 간단히 말해서 저희들은 ‘남는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핫! 핫!!”
난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이 사람들아! 계속 이러면, 나 정말 천년만년 마군황 해먹고 싶어진단 말야!”
정말이지 솔직한 심정이었다. 난 언젠가 이들에게 ‘내가 원하는 수하들은 내 명령에 따라 불구덩이 속에도 들어갈 수 있지만, 그전에 꼭 방열복을 챙기는 사람들’이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의 바램은 이렇게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옴마나?」
응?
「에고, 주인님. 분위기 깨서 죄송한데요? 지금 막 뜻밖의 인물이 구중천에 도착했네요?」
…뭐? 그, 그 녀석이? 그녀석이 여기에 나타났다고?
난 살짝 굳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티를 내지 않으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어, 그러고보니 초사마군이 안보이네? 그도 함께 날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는 오늘 천주께 인사드릴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를 마중 나갔으니 곧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흠. 구양대주는 초사마군과 함께 올 녀석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모양이네? 오늘 분위기 좋으니까 다 같이 합심해서 곤란한 일처리도 오늘 몰아서 하자는 건줄 알고 살짝 불쾌해질까말까 했는데 에이~ 그냥 불쾌해지지 말자.
“그럼 뭐, 두 사람 얘기를 먼저 들어보기로 하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구양대주의 안내를 받으며 내 자리로 향했다.
“뭐? 정말 그 자가?”
자룡대주였다. 그녀는 이제야 누군가에게 보고를 받는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대충 무시해주며 내 자리에 앉았다. 천 년 전 비 화곡 대청각에서 앉던 의자처럼 근엄한 분위기 디자인이면서 폭신한 안락감도 좋은 의자였다.
실내 중앙에 커다란 원탁 테이블과 아홉 개의 의자가 세팅되어 있고, 그걸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내 의자가 따로 있는 그런 건 그렇다 치고, 흐음. 어디 구양대주가 음선마군과 함께 하겠다는 보고는 대체 에? 뭐, 뭐시라고라?
난 구양대주의 얘기가 보고를 포함한 간청임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가 얘기를 마치고나서도 얼마간을 뭐라고 반응해야할지 난감해 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그러니까 지금 당신들 두 사람이 내 친구들을 제자로 삼겠다고. 그런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천주. 일전에 천주께서 지적해 주셨듯, 천주와 친우분들의 우정은 매우 각별하여 저희들도 세분 사이에 지하무림의 주종관계 를 성립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두 사람이 내 친구들에게 진원진기를 전해주겠다는 거지?”
그래. 내가 방금 들었던 건, 구양대주와 음선마군이 각각 준엽이와 성원이를 맡아 자신들의 진원진기를 주겠다는 말이었다. 자신들 무공의 바탕을 이루는, 무림인들이 흔히 ‘목숨보다 소중한’이라고 하는 그 진원진기를 말이다.
“전부는 아닙니다, 천주. 저도 병마와 싸울 최소한의 기력은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구양대주가 돌아보자 음선마군도 비로소 입을 열었다.
“천주. 아시다시피, 저는 본래 구양대주보다 젊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구양대주를 통해서 그 두 사람을 살펴보니, 그들의 흥겨운 춤과 노래를 즐기 다보면 수명이 몇 곱 늘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조금 비우더라도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야 준엽이와 성원이의 춤과 노래, 특히 춤은 정말 끝내주지만, 이 음선마군은 성악과 오페라가 전공이라고 하지 않았나? 우리 애들과는 장르 가.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구양대주와 음선마군은 내가 쉽게 그들의 간청을 수락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는지 계속 더 뭐라고 명분을 내세울 기색이었지만, 나는 손을 저어 그 들의 말을 막았다. 난감했다.
제엔장! 농담처럼 웃으며 말하고 있는 데도 진심이 팍팍 느껴져. 내 친구들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주고 싶다는 마음, 그러면서도 뛰어난 재능의 후계자를 포기하겠다는 것도 진심..!결국 자신들의 생명과도 같은 진원진기를 바쳐서 나라는 놈의 마음을 조금(?) 편케 해 주겠다고 이러는 건데. 아놔~ 이 사람들 진짜!
“…천주. 속하들이 공연히 천주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죄송합니다. 다른 때 다시………….”
다른 때는 개뿔. 결국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거잖아. 그 정도 마음이면 내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일수가 없잖아, 이거.
“하아아~ 설마 이걸 하루에 두 번이나 쓰게 될 줄이야.”
“예?”
난 의아해하는 두 사람 앞에서 건빵주머니 속의 ‘생사령’을 꺼내들었다.
“아까 애써 격식과 예를 갖췄던 구양대주에게는 미안하지만, 음선마군도 당장 이 생사령을 받으시오! 약식으로 대충!”
음선마군은 살짝 당황하여 어정쩡하게 서서 상체만을 숙이며 생사령을 받아 들었다.
“댁도 오-오래 사시구려! 후계자 찾아서 차기 음선마군 물려주고… 아니 내친김에 그가 당신의 중천자리를 물려받는 날까지 말이오!”
살짝(?) 욱해서 악담을 한 기분이… 음? 뭐야. 이 양반, 음선마군. 그리고 구양대주까지 왜 이렇게 싱글벙글이야?
“어허! 음선마군은 이 지엄한 생사령이 그렇게 우스운거야?”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속하 음선마군! 지엄하신 마군황의 뜻을 받들어… 크흠. 앞으로 생길 저의 제자 놈과 천주께서도 지겨워하실 때까지 아 주 오~래 살겠습니다!”
최소한 천몇백 년을 놀다가(?) 오늘 바빴던 생사령은 곧 다시 내 건빵 주머니 속으로 복귀했고, 구양대주와 음선마군은 흡족한 표정과 태도로 물러 나고 있었다. 나는 정말 앞으로는 지겹게 오래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삼 음선마군을 살펴보았다.
본래 성악가로 명성을 떨친 사람답게 지금도 풍채가 꽤나 넉넉하군. 음? 체형도 체형이지만, 이제 보니 얼굴도 어디선가 본 듯한… 아, 그래. ‘개그 콘서트’ 초기 멤버인 백재현을 닮았구나. 백재현 얼굴에 주름살 좀 그려 넣고 머리를 백발로 하면 얼추 비슷할 것도 같네. 음, 근데 개그맨 백재현은 언제부터인가 개그맨보다 뮤지컬 쪽을 한다고 했던가? 음선마군은 오페라…? 뮤지컬과 오페라는 물론 다르겠지만. 근데 그 차이가 뭐지? 뭐가 다 른 건지 생각하려니까 생각이 잘…….
「주인님!」
-・・・ 땡쓰, 요몽.
「예? 뭐가요?」
내가 요몽에게 고맙다고 한건 나의 무식한 상념 흐름을 끊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냥. 그보다 넌 왜 날 불렀냐?
「어, 그게,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네요.」
요몽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까 보고 드린 그 사람말예요. 전 초사마군이 그 사람을 부른 건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게 아닌 거 같아요. 그게 그러니까… 그 사람은 현재 혼 자서 움직이고 있는데, 목적지가 여긴 아닌 거 같아 보여요. 그리고 초사마군은 지금 또 다른 사람과 이곳으로… 음. 오 분쯤 후에 도착 예정이예 요.」
뭐야, 이거?
요몽의 보고가 애매한 걸 탓하기는 어려웠다. 나 역시 그 녀석은 당연히 초사마군이 불러서왔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 소군황. 지금 어딨냐?
그래. 아까 요몽이 놀라서 보고하고, 자룡대주 역시 당황했던 건 소군황 놈이 구중천에 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주인님께 게기다가… 아니, 죄송. 하여간 지하무림 최초이자 마지막 반란 시도 사건의 주역이었던 이 남자는 지금.. 음. 일단 ‘도시’ 구역으로 막 진입했어요. 아까 주인님과 대교님이 함께 입장하셨던 출입구 B3-2예요.」
요몽은 모니터 영상까지 출력해 주고 있었지만, 몽몽의 기능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수준의 영상이다 보니 상황이 확실하게 와 닿지는 않았다. 일단.. 여전히 잔뜩 모여서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모두가 소군황 놈이 나타난 걸 모르는 것 같고… 소군황 놈도 굳이 누구와도 아는 체하지 않고 그냥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가는 분위기? 뭘까? 정말 암 생각없이 그냥 파티를 구경하기 위해서 왔다는 거야, 뭐야?
「우이~ 띠! 주인님 갑갑하시겠다. 저두 ‘고백’이구요. 그냥 보안 패턴하나 해제해 버릴까요?」
-보안 해제? 나한테까지 적용되는 보안이 있었다고?
「예. 깜박하고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몽몽 오빠는 닥터 제이가 구중천 내에 있는 동안에는 모든 장소의 영상 장비들까지도 락을 걸어두라고 했거든요.」
과연 우리의 몽몽 선생. 꼼꼼하게 닥터 제이를 마크하고 있었군.
「그러니까 주인님께서 지금이라도……………」
-됐다, 요몽. 그건 그냥 두고… 현재 영상도 꺼라.
「예? 진짜요? 어, 물론 주인님께선 저 남자의 도전을 살포시 박살내 주신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두 저 남자가 만약 재기하면 장난이 아닐 거라고 하시기도……….」
-그건 그런데, 하지만 좀 정신없다. 순서대로 하자구, 임마.
「아, 맞다. 저 남자의 사부, 초사마군! 그가 문밖에 도착했어요.」
・자룡대주!
-아, 예, 천주.
-초사마군을 들여보네. 하지만 소군황이 구중천에 왔다는 건 알리지 말고.
-…복명.
자룡대주는 긴장해있는 기색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크게 티를 내지 않고 나가서 초사마군을 입장 시켰다.
“천주! 오늘 천주께 좋은 소식을 하나 더 알려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환하게 웃으며 포권하는 초사마군에게서는 어떤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아 먼저 인사부터 드리게나.”
초사마군이 옆으로 물러나주자 그를 뒤따라 들어왔던 콧수염의 남자가 성큼성큼 내 앞으로 나섰다.
“소인 편복마군(蝙蝠魔君)! 실연자로서, 첫 인사를 올립니다!”
넙죽 엎드려 오체투지하는 남자의 자기소개가 순간적으로 소군황을 신경 쓰는 마음까지 밀어내고 있었다.
“편복마군? 당신, 살아있었던 거야?”
고개를 든 편복마군이 히죽 웃었다.
“천주께서 오랜만에 복귀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천년만의 내 마군황 복귀를 아주 편하게 말해주는구먼.
“하지만 제가 좀 바빠서 장가계 소집에 응하지 못했습니다.”
얼씨구. 갈수록?
“벌을 내리실 것 같아서 계속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사마군이 오늘 오면 천주께서 벌보다 술을 내리실 것이라고 해서 왔습니다.”
“…초사마군이 날 잘못 봤군.”
초사마군은 흠칫 긴장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정작 편복마군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긴 말상의 얼굴에 찰리 채플린 스타일의 콧수염, 체형처럼 마른 얼굴에 비해 커다란 눈망울, 삼십대의 나이에도 왠지 장난꾸러기 소년같은 분위기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 남자………….
“난, 깡술 안 좋아해. 안주도 같이 내려주지.”
“오오~ 과연! 돌아오길 잘했습니다!”
이 인간. 내 싱거운 말장난에 격한 리액션을 보여준 건 고마운데… 나한테 인사할 때는 한번이더니 술과 안주를 준다니까 두 번 머리를 조아렸지? 술과 안주가 고마운 건 진심이군.
난 결국 쿡, 쿡, 웃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 이 사람… 아세요?」
-아니. 오늘 첨 봐.
「에- 저희 데이터에도 분명 그렇고, 환생자도 아닌데… 근데도 분위기는……………」
-훗. 그냥, 뭐, 딱 ‘생각했었던 대로의 남자’…라고 할까? 달리 더 설명해주긴 어렵다.
그랬다. 편복마군이라는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가 지금의 이 당대 편복마군의 모습이었다. 천 년 전의 편복마군은 자신 의 힘으로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것이 목표인 남자였다. 그 중국판 이카루스는 박쥐의 날개를 흉내 낸 장치를 개발해서 어느 정도 비행까지 성공했 기 때문에, 아니 그 전대부터도 박쥐를 많이 연구했기 때문에 편복(박쥐)마군인 것이다.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대대로 끊임없이 실험과 도전으로 하늘에 도전해 왔다는 편복마군들의 보편적인(?) 이미지에, 그런 타입의 사람들에게 가진 나의 개인 편견적 이미지가 합쳐진 이런 걸 요몽에게 이해시키기는 좀 어렵겠지? 뭐, 그거야 어쨌든…………….
빠르게 준비된 술을 따라주자 기쁘게 원샷하는 편복마군을 보며 그에게 어떤 것부터 물어야할지 망설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실종된 상태의 소위 ‘실연자들 중에서도 생존 자체가 의문이었던 사람이니 궁금한 점도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자룡대주. 당신도 뭔가 할 말이 많은 것 같군.”
내가 슬쩍 자룡대주에게 바통을 넘기려는 뜻을 보이자, 그녀는 즉각 편복마군에게 다가왔다.
“아, 미스 제이. 오랜만・・・ 인가, 우리?”
편복마군이 먼저 애매한 인사를 건네자, 자룡대주는 살짝 웃으면서 한편으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11개월 만이에요, 말콤. 아니, 매드 윙, 크레이지 버드… 어떻게 불러 드릴까요?”
“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방금 재계약했으니까, 이젠 다시 정식 편복마군이 된 거 같군.”
편복마군은 내게 받은 술잔을 들어 보이며 다른 손으로는 안주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자룡대주는 천연덕스럽게 입을 우물거리고 있는 그를 보며 더 욱 눈살을 찌푸렸다.
“좋아요, 편복마군. 당신이 선대 편복마군과 함께 사고를 당해서 실종되었던 삼십년 전부터의 사연을 전부 캐물을 생각은 없어요. 이십년 전, 말콤 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돌아와서 살아온 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당신들은 대대로 자신들만의 세계 속에 갇혀서 지하무림인이라는 자각조 차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십년 전쯤부터는 얘기가 달라지죠.”
오~ 과연 자룡대주. 잘도 시기별로 정리해서 요점정리를 해주는구먼.
“당신은 그때부터 거의 매년 대회에 참가했어요. ‘슈퍼 에어’ 일곱 번, ‘에어 피쉬’에서 다섯 번, ‘랜드 플라잉’에서도 다섯 번 우승했어요. 게다가 그런 당신에게 난 몇 번이나 구애를 했었구요! 그런데도 당신은………….”
에? 지금 뭐라고? 자룡대주가 편복마군에게 구애를?
“아, 지금 얘기는 그냥 스카웃 제의를 했다는 뜻입니다! 천주!”
에고, 놀래라. 왜 갑자기 나에게 따지듯 설명을 하는 거야? …큼. 하여간, 대회 명칭으로 봐선 보통 항공사들이 개최하는 무슨 날기 대회(?) 같은 거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보여 왔다는 얘기 같지? 그런데 같은 식구이기도한 그가 스카웃 제의를 거절해 온 것에 앙심을 품고 아니, 그게 아니지. “편복마군. 당신은 어째서 지금까지 저에게 자신의 정체를 숨겨왔던 거죠?”
음. 그래. 그러니까 그동안 실연자였겠지.
“며칠 전 당신 소식을 듣고 제가 얼마나 놀라고 황당했는 줄 아세요? 대체 왜 그랬던 거죠?”
나도 심히 궁금했지만, 자룡대주의 날카로운 추궁에도 오히려 고개를 갸웃하는 편복마군을 보니까, 왠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내가 말 안 했었던가?”
역시나.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자룡대주는 좀 더 뾰족한 목소리를 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이미 표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하아아 좋아요. 알겠어요. 브라운 박사가 왜 그렇게 당신을 좋아하는지 알겠어요.”
브라운 박사? 그… 초음속 항공기 ‘미스 화룡’의 개발자 말이로군. 하긴, 그 전형적인(?) 매드 사이언티스트(이거 맞나?) 입장에서는 동족으로 느 껴지긴 하겠어.
“천주.”
날 돌아보는 자룡대주의 표정은 이미 환한 웃음기만 있었다.
“천주께서 허락해 주시기까지 했는데, 송구스럽게도 저로서는 더 모진 신고식을 진행할 수가 없겠습니다.”
이 아가씨, 분위기 잘 안 잡히니까 어물적 나한테 토스하는군. 난 그냥 궁금했던 거 대신 물어봐 달라고 한 거지, 딱히 신고식을 하라고 한건 아닌 데 말야.
“훗. 신고식은 무슨… 음. 그보다… 그럼 초사마군은 어떻게 편복마군을 알아봤던 거지?”
나 역시 초사마군에게 토스~!
“아, 전・・・ 일 년쯤 전에 자룡대주가 주관하는 랜드 플라잉 대회를 참관하러갔다가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그 친구를 스카웃하 고 싶어서 접근했었던 건데…
자룡대주가 짐짓 샐쭉해지며 째려보기 시작하자 초사마군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반년쯤 전에 우연히 그 친구와 온천욕을 하다 보니… 흠. 미안했네, 자룡대주.”
“아니, 그때는 천주가 계시지 않았던 시기였잖아요. 사업상의 어떤 트러블이라도 이해해요. 다만 그런 남자들만의 커뮤니케이션이 이유였다니, 그것이 좀 불쾌하네요.”
자룡대주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뿌리 깊은 남성위주 사회에서 여자라는 핸디캡을 딛고 당당하게 능력을 인정받는 여장부이다. 그런 만큼 지금 얘기 가 정말로 불쾌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초사마군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우정을 쌓아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아니라네. 그때 온천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편복마군의 붉은 용이 포효했기 때문이라네.”
아하~ 그런 얘기였군. 일백마군의 상징인 ‘포효하는 붉은 용 문신’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온도 변화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특징이 있지. 편복마군은 한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 너머 등 쪽을 툭툭 쳐 보였지만, 그전에 자룡대주도 이미 ‘아’ 하고 탄성소리를 냈었다.
“그런거였군요. 훗~ 앞으로는 실연자로 추정되는 사람을 발견하면 모두 온천에 집어넣어야겠네요.”
자룡대주의 나름 합리적인(?) 결론에 모두가 웃었다.
흐음. 분위기가 이젠 자연스럽게 흐뭇해졌군. 그건 좋은데 이젠 어쩐다…? 이 좋은 분위기에서 ‘나한테 개겼던 놈이 왔으니까, 목숨 걸고 칼부 림하고 나서 다시 분위기 화기애애하게 계속하자’고 하는 건 아무래도 좀 거시기하지?
-요몽. 아직 별다른 상황 없냐?
「아, 예. 계속 놓치지 않고 지켜봤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계속 천천히 어슬렁거리고 있을뿐 아무하고도 접촉하려고 들지도 않고……………」
-요몽. 생각해보니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상황체크가 빠진 거 같다. 저 녀석・・・ 지금 정신이 돌아오긴 한 거냐?
그래. 저 녀석은 마군황 반대파의 대표로서 느물느물 깐족 신공을 펼치다가 나에게 찍혀서 집요한 육체적 정신적 시달림을 받다가 결구 스스로 정 신적 자살을 선택했었지. 그 후로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계속 마네킹 모드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큼. 누가 들으면 내가 디게 나쁜 놈인 줄 알겠네. 크흠. 흠.
「우음. 조금 전에 병원으로 연락해서 확인해 봤는데요. 바로 어제까지는 별다른 차도를 보이지 않았었데요.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갑자기 뜬금없 이 말짱한 모습을 보였데요. 전담 간병인을 어떻게 구워삶아서 탈출 협조를 받았는지, 병원에서는 제가 전화할 때까지 탈출사실도 몰랐나 봐요.」
이것봐라? 설마 처음부터 미친 척 연기를 했었다는 건가?
나는 순간적으로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나와 몽몽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연기파였다면 그날 그렇게 쉽게 나에게 당했을 리도 없지. 그렇다면 그동안 천천히 회복되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번쩍 정신이 들었다는… 그런 추측이 가능하려나?
-어쨌든, 지금도 니가 보기엔 어떠냐?
「어~ 그게,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만・・・ 음.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별로 나빠 보이지는 않아요.」
-나빠 보이지 않다고? 그리고 여전히…라고?
「예. 사실 전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땐 주인님께서 하도 빡 돌아 계셔서 말씀은 못 드렸지만요.」
-…요몽. 니 얘기 들으니까 왠지 저 녀석보다 내 쪽이 진짜 나쁜 놈이라는 거 같다.
「에고.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죄송해요.」
-일단 그 얘긴 됐고. 여하간 니 눈에는 저 녀석이 이제 최소한 환자는 아니라는 건데… 뭐, 까짓거, 너의 의견을 채택해주마. 넌 저렇게 꽃돌계열 녀석들을 판단할 때만은 제법 날카로운 것 같으니까.
「에? 그게 뭐예요. 절 인정해 주신 거예요? 아닌 거예요?」
-그 얘기도 됐고. 니 의견이나 더 내놔봐라. 저 녀석이 대체 오늘 여기 온 이유가 뭔거 같아?
「어- 그게, 만약 저 사람이 여러 가지 의미로 정신이 들어서 주인님께 용서를 빌려고 온 거라면 제가 비슷한 경우였다고 하면요, 사부님인 초사 마군이 눈치껏 주인님 비위를 맞춰 준 다음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거 같아요.」
사실 그게 가장 무난한 분석일 거 같기는 했다. 나 역시, 녀석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었다.
하, 지, 만, 정작 녀석을 이끌어 내 용서를 간청해야할 초사마군은 지금 엉뚱한 편복마군을 데려왔을 뿐, 지 제자인 소군황은 아예 온 줄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단 말야? 초사마군이 내 수준의 사악연기파라면 몰라도………….
“천주.”
음? 초사마군의 선수치기?
“천주의 소환 명령에 따르지 못했던 편복마군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셨으니, 이제 그를 다른 친구들에게도 소개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선수치기가 아닌가…? 흠.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초사마군에게는 내가 지금 할 말이 좀 있어.”
그 정도만 얘기했지만, 구양대주는 알아서 음선마군과 함께 편복마군을 챙겨서 나가기 시작했고 자룡대주도 뭔가 망설이는 것 같기는 했지만 결구 회의실 문밖까지는 나가는 것 같았다.
“…천주. 제게 따로 하명하실 일이란 혹시 편복마군에 관한 일이십니까?”
응?
“사실 저도 최근 그가 완성한 ‘배트 윙’을 처음 목도했을 때부터 그것이 천주의 대업에 작게라도 보탬이 될 것이라 판단했었습니다.”
뭔 얘기여? 배트 윙? 편복마군이 박쥐 날개 형태의 신무기 같은 걸 만들었다는 얘긴가? 만약 그렇다면 환영할 일이긴 한데……
“허나, 천주께서도 그를 보셨으니, 그가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지도 간파하셨을 것입니다. 그의 날개를 병기화하는 것은… 음. 얼마간의 말미를 주 시면 제가 반드시 그를 설득하여………….”
“저기. 무슨 얘긴지는 알겠어. 하지만 난 지금 그런 얘기하려고 초사마군을 남긴 거 아니거든?”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자 초사마군은 눈에 띄게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제, 제가 그런, 그만..! 죄송합니다, 천주!”
훗. 이 양반, 장가계 이후로는 거의 ‘나 죽었습니다’ 분위기로 조용히 지내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까 과거의 뻘짓을 만회하고 싶은 욕심으로 남 몰래(혹은 나몰래?) 열심히 과욕만땅 모드로 지내왔었던 모양이군.
“사실 나도 지금 편복마군 얘기를 더 듣고 싶긴 해. 하지만 그건 편복마군이 뭔가 대단한 걸 만들었다는 걸 알고 싶어서가 아니야. 그와 같은 실연 자가 우리에겐 반드시 되찾아야할 소중한 인연이기 때문이지.”
현재 상황에 맞춰 뭔가 있어 보이는 대사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일찌감치 복귀한 은사마군과 전황마군처럼 실연자였던 이들을 보면서 계속 느껴 왔던 점을 얘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지금 또 다른 형태의 실연자가 있기도 하지. 아주 인연이 끊기지는 않았지만, 어쩌다보니 실연자 못지않게 인연이 약해진… 훗. 난 이들 을 ‘미연자’ 정도로 칭하고 싶군.”
이 역시 평소 생각해 왔던 거지만, 초사마군이 공감을 하는지 어떤지 확인하는 건 무서우니까(?) 일단 생까고 계속하자.
“그 미연자 중에서 한명이 오늘, 이 구중천에 스스로 왔더군.”
난 고개를 돌려서 한쪽 벽면에 설치되어 있는 초대형 모니터를 턱짓해 보였다. 요몽이 재빨리 켜주는 모니터 화면을 보기 시작한 초사마군의 두 눈 이 커지며 입까지 따악 벌어지고 있었다.
“저, 저 아이가, 저 아이가 어떻게, 어떻게 여, 여기에…………….”
흠. 은근히 간만에 보는 무협지 공식 ‘경악과 불신의 표정’이로군. 그나저나, 소군황 녀석이 왜 갑자기 이렇게 가까이 전신샷으로 나오는 거야? 게 다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거 같아서 나도 괜히 조금 놀랐네.
-야, 요몽. 니맘대로 카메라 보안 해제했냐?
「아, 아뇨. 이 사람이 조금 전부터 카메라 가까이 다가와서 그래요. 시선 각도와 움직임으로 보아, 현재 저쪽 모니터에 떠있는 많은 지하무림인들 의 영상창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는 거 같아요.」
흐으음. 그렇단 말이지? 아까 여기 도착해서 조금 전까지 계속 특별한 의미나 의도 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았다는 것도 그렇고, 이 녀 석 아무래도…………….
나는 좀 더 가만히 소군황 녀석을 보면서 녀석이 전과 어떻게 틀린지를 가늠해보았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이상한 눈싸움 을 계속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저쪽, 소군황과 화상 연결해.”
일부러 전음이 아닌 목소리를 냈더니 초사마군이 흠칫 놀라며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모니터 속 소군황의 눈도 조금 커지면서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곧 안정되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짜아식이! 제법 초탈한 눈으로 날 볼 줄도 알게 되었네? 정신 병원에서의 정신수양이 나름 성과가 있었던… 음?
진짜 눈싸움(?)은 그리 길지 않았다. 녀석이 문득 시선을 내리더니 천천히 몸을 낮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매우 정중한.. 오체투지?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도 왠지 묘한 기분이………….
“천주. 저 구, 목, 인사 올립니다.”
“…뭐? 지금 네 이름을 뭐라고 한 거지?”
소군황은 대답에 앞서 어느 정도 몸을 일으켜서 반듯하게 무릎을 꿇은 자세로 한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렇게 천주께서 손수 저의 얼굴에 써 주신…….”
…그래. 녀석의 얼굴에 나무 목자 칼집을 냈던 건 분명 나였어. 하지만 그건 싸우다가 얼결에 뭐, 물론 열십자만 얼결이었고, 나중에 두 획(?) 더 그어서 나무 목자를 만든 건 일부러 그런 거였긴 하지만 그래도 뭔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아는 한자가 몇 개 없다보니까. 하여간, 지 금 보니까 흉터도 얕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구먼, 그게 또 왜 니 이름이 되는 건데? 개명이 뉘집 개이름이냐?
“꿈을 꾸었습니다. 아주 오랜 꿈을.”
정말 꿈꾸는 듯한 그런 눈빛?
“전 그동안 너무나 오랜 꿈을 꾸어왔습니다.”
이, 이 녀석 설마… 지금 앉아서 조는 건 아니겠지?
“당신께선 저의 악몽이었습니다. 또한, 꿈 자체였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일찍 조기 퇴원한 거 같은.. 아니, 이 녀석은 그냥 튄 거라고 했지, 참.
“그리고.. 이제 당신께선 다시 꿈꾸라하십니다.”
어이~ 간호사! 여기 탈출 환자있어요오~!
“…천주. 천주께서 내리신 이름으로, 저 구목이 감히 청합니다.”
소군황인지 구목인지 하여간 녀석은 천천히 허리춤의 칼을 빼어들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부디 진심으로 저를 상대해 주십시오.”
…짜아식! 결국 그럴 거면서 뭔 애매청승 대사를 길게 늘어놓고 그랬어?
난 나도 모르게 녀석을 향해 웃었고, 내 손은 이미 정글도를 잡고 있었다. 아아~ 타임씨, 당신・・・! 요즘 내 정글도 액션씬(?)이 너무 적었었다 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