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70화 : 천사가 지옥문을 열다.
10. 천사가 지옥문을 열다.
풍지도심, 마도제?
-왜? 바람의 검심은 아니고?
난 기막혀 할 수밖에 없었지만, 요괴칼은 흥분한 기색으로 정신없이 자기 얘기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요괴 ‘호라’님께 들은 바 있다. 천 년 전의 어느 날, 대륙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날아온 마인이 있었다. 그 무서운 마인은 우리 요괴보다 더 사악하 게 웃었고, 아무리 강한 요괴라도 도망쳐 떨게 할 만큼 흉폭한 마도를 휘둘러 요괴들을 사냥하며 즐거워하는……………
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요괴칼의 손잡이를 쥐고 들어올렸다.
-야! 야! 그만해!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
원래 요괴칼을 적당히 겁먹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오버고, 부담스런 누명이었다.
-내가 천 년 전에도 싸움 좀 하고 다녔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사람이건 요괴건 그렇게 막 죽이고 다닌 건 아니었어. 게다가 당시에는 일본에 가본 적도 없단 말야.
‘당신이 그 풍지도심 마도제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천 년 전에는 당신과 같은 자가 또 있었단 말인가? 아?’
-글쎄, 뭐. 나 못지않게 강하거나 더 강한 이들이 있어서 몇 명 만난 적도 있긴 해. 내가 알기로는 현시대에 존재하는 건 나와 대교뿐이지만 말야. 내가 먼저 떠올린 이들은 소림성승(疏林聖僧)과 북천여제(北) 자옥령, 같은 이들이었다. 하지만 오컬트 계열에서는 수라혈불(修羅血佛)’도 꽤 짱짱했을 거 같기도 했다.
‘미, 믿을 수가 없다. 천 년 전의 대륙에는 그토록 무서운 마인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단 말인가?’
-어, 그땐 좀 그랬지.
왠지 어린 후배를 앉혀놓은 술자리에서 ‘우리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얘기를 하는 선배 기분이 되는군, 그래.
‘아~ 그랬었군’
요괴칼 녀석,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이 난걸까?
‘대요괴 호라님도 천년 이상 전에 대륙으로부터 건너 온 분이라고 했었다. 당시에는 대륙과 반도에서 건너 온 요괴들이 많았고, 그들 대부분이 우 리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분들은 본래 당신과 같은 마인들을 피해서 이곳, 세상의 동쪽 끝 섬까지 왔었던 것인가?’
중원과 우리나라에서 도주한 현상수배(?) 요괴들이 일본에서 신으로 모셔졌다…? 이젠 아예 신화로 가는구먼.
-이봐. 네 얘기가 나름 흥미롭긴 한데, 넌 대체 왜 나를 그 마도제인가하는 마인으로 생각한 거냐? 그 사람은 전 일본의 모든 요괴들을 혼자서 다 쓰러버리고 다녔다며? 근데 난 아까 너처럼 허접한 요괴 하나하고도 꽤 오래 싸웠잖아.
‘나는, 결코 약하지 않다!’
요괴칼은 발끈했지만, 내가 인상을 긁으며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슬며시 꼬리를 내리는 기색을 보였다.
‘다, 당신, 당신이 너무 강한 거다. 나는… 어리석게도 당신과 그 마도의 본성을 의심하면서도 설마, 했다. 당신은 내 병법에 계속 말려들었고, 당신 의 마도는 내가 말을 걸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응? 이 요괴칼 녀석이 정글이에게도 따로 말을 걸었었다고? 그건 몰랐었네?
‘나의 착각이었다. 당신은 나의 병법 따위는 쉽게 간파하고 속아주는 척 하며 날 비웃었던 것이고, 당신의 마도는 단지 나를 하찮게 여겼을 뿐이었 다.’
나에 대한 건 그렇다 치고, 정글이의 ‘암 생각 없음’을 상당히 오해하고 있는 거 같네. 그렇다고 굳이 실상을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과거 ‘오다’라는 자의 손에 있을 때, 특히 많은 인간들의 피를 먹고 원념을 끌어 모아 강해졌다. 그때 이후로는 대요괴 호라님도 나를 인정했 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나였는데도, 당신과 마도의 단 일격에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릴 줄은……………’
요괴칼을 쥐고 있는 손을 통해서, 놈이 새삼 전율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놈은 정말 인간처럼 한숨을 내쉬는 기색까지 보이고 나서야 다시 말을 잇 기 시작했다.
‘만약 당신이 전설의 풍지도심, 마도제가 아니라고 해도 나에게는 마찬가지이다. 당신과 마도가 장난치듯 가한 일격으로 인해 나는, 요괴로서의 나 는 이미 죽은 셈이다. 나는 프리제타라는 여자를 이용해서 당신에게 저항할 생각이 없었다. 난 그저 당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
으으음. 내가 ‘천년 묵은 군발’이라는 얘기는 괜히 꺼냈나? 나와 정글이의 일심동체 모드만으로도, 이미 요괴칼 놈이 충분히 겁을 먹었던 모양인데 말이지.
난 새삼 찬찬히 왼손에 든 요괴칼을 내려다보았다. 놈은 이제 처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처연한 기운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좋아, 요괴칼. 다른 얘기는 그렇다 치고, 네가 본래 사람이었다는 말은 믿어주기로 하지.
나는 그렇게 말해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연을 듣고 보니, 나도 널 없애고 싶지는 않아졌어. 하지만 넌 아무래도 인간들에게 너무 위험한 존재라 그냥 두기도 좀………….
‘그, 그 점은 걱정 마시오. 나를 다시 그 천, 평소 나를 감싸고 있는 천으로 감싸면 되는 거요. 그건 과거 어떤 승려가 나를 봉인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오!’
훗. 다급해지니까, 지가 지 봉인법을 막 부는구먼.
-알겠다. 일단 그러기로 하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바닷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근데, 아까 겨울의 여왕이 동생에게 칼을 건네 준 다음에 그 봉인용 천을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 하긴 뭐, 사실은 상관없지만 말야.
난 계속 천을 찾으러가는 것처럼 걸음을 떼며 요괴칼에게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나야 마도제가 아니니까 상관없지만, 일본 요괴들은 마도제를 꽤 미워하고 있겠네?
그야 당연… 아, 아니. 그렇지 않아. 마도제는 너무 무서워서 복수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존재야!’
짜식. 걸렸 들었군.
난 걸음을 멈추고 다시 아까 요괴칼을 올려놓았었던 돌 두 개가 놓여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아~ 역시 그랬군. 네가 날 그 마도제라고 알고 있는 한, 언제고 소문이 나겠어.
‘그, 그렇지 않아! 난 결코 당신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을 거야! 날 믿어줘!’
-날 마도제로 생각하는 거 맞네, 뭐. 역시 널 살려두면 귀찮은 일이 생길지 모르겠어.
난 다시 요괴칼을 돌들 위에 올려놓았고, 어디쯤 쳐야 잘 빠개질지 가늠하듯 도신을 통통 두드려보았다.
‘난 사람! 인간이었다! 마도제는 인간을 위해 우리 요괴들을 친다고 했었다!’
-난, 그런 사람 아니라고 했다?
나는 정글도를 들어 장작패기 모드로 돌입했고, 요괴칼의 마음의 소리는 더욱 처절해졌다.
‘사, 살려줄 것처럼 해놓고! 안 돼! 이 마도제보다 더한, 이 극악한……’
-됐거든? 잘 가라, 아베!
난 처음으로 녀석의 본명을(?) 불러주며 정글도를 진짜 전력으로 내리쳐버렸다.
꽝!
‘꾸에에엑!’
이번엔 정말 멱따는 소리가 들린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칼은 또 깨지지 않았군. 영력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고, 정글이도 시큰둥한 상태라고는 해 도, 나름 전력을 다한 건 맞는데, 그런데도 버텼어. 요괴칼이 되기 전에도 꽤 명검이었다고 봐야겠어.
-야, 야! 많이 놀랐냐? 장난이었어, 장난.
요괴칼로 부터는 대답이 없었고, 그 대신 손잡이 부분의 눈알모양 장식이 투욱 떨어져 내렸다. 이미 금이 가있었던지, 모래바닥에 떨어졌음에도 허무하게 퍼석 부서져버렸다.
「어머? 이상한 에너지 반응이 싹 사라져버렸네? 저 흉측한 장식이 요괴의 진짜 본체였었나 봐요.」
-그랬나보다. 나도 이제 놈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난 이제 요괴칼이 아니게 된 칼을 들어 올리며 사사키 쪽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지만, 나는 이 칼을 사사키에게 돌려 줄 생각이 었다.
「이 칼을 돌려주시려고요? 아까 주인님께서 못쓰게 만들어버린 칼 대신에?」
-응. 그래서 요괴 놈의 얘기를 계속 들어본 거였어. 계속 거짓말을 늘어놓아서 짜증이 나긴 했지만. 뭐, 결과적으로 잘된 거 같군.
「잘 끝내신 건 저도 기쁜데, 근데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뭐, 별거 아냐. 난 그냥 놈이 어떤 거짓말을 꾸며대든, 다 들어주면서 봐줄 것처럼 하다가, 결국 마지막 일격을 먹여줬지. 어차피 요괴 아베 놈 말 은 전부 헛소리일게 뻔했고, 난 놈이 어느 정도 안심할 때 칠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었는데, 놈이 마도제인지 뭔지 이상한 얘기로 자폭하더군. 아, 물론 기회는 줬어. 놈이 내 마지막 일격을 버텼다면 정말 살려줄 생각이.. 음. 있었나?
나의 애매한 설명에 요몽이 으~ 소리를 냈다.
「역시 몇 백 년 묵은 요괴보다 더 사악한 울 주인님!」
-어허~ 이렇게 선량한 모범 청년이 어딨다고 그런 가짜 뉴스를 만들고 그래?
난 사사키와 프리제타 쪽으로 가서 사사키 옆의 땅바닥에 요괴, 아니 이제 그냥 칼을 내려놓았다. 물론 아직도 요괴가 날 속이고 깊이 숨어있을 가 능성이 있기에 마무리 멘트 전음을 잊지는 않았다.
-오늘은 이정도로 봐주지. 하지만 앞으로 또 어떤 요괴가 날 찾아와서 귀찮게 하기라도 하면.. 알지?
크흠. 여기 일은 이정도면 된 거 같군. 사사키가 이 칼을 다시 사용할지는 녀석이 결정할 문제고 말야.
-요몽. 우리 아그들과 겨울의 여왕 쪽 상황은 어때?
「4분쯤 전에 비에이와 불꽃슛 형제, 그리고 또…
-에? 그렇게 많이 출동했어?
「예. 비에이와 불꽃슛 형제는 본래 오기로 했었지만, 세이렌 자매까지 이렇게 빨리 합류할지는 저도 몰랐었어요.」
아쿠아린 형제와 같은 계열의 세이렌 자매, 그 녀석들이 바다로 오는 건 몽몽의 시스템으로도 확인 못했단 말이군.
난 아무래도 궁금해져서 경공을 발동, 근처에서 가장 높은 나무위로 올라가 보았다. 하지만 그사이 싸움터가 더 먼 바다로 옮겨져 버렸는지, 겨울 의 여왕 눈보라가 더 작게만 보였다.
「그런데 주인님. 겨울의 여왕은 아직 기가 죽지 않은 모양이에요. 다함께 덤벼보라고 허세를 부리고 있어요.」
-흐음.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뭔가 명분을 줘야하는데, 비에이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지?
「어, 그게요. 비에이는 겨울의 여왕보다 자기편 진정시키기도 힘든가 봐요. 특히 코드명 ‘세이렌 자매들이 겨울의 여왕 도발에 흥분해 버려서 비 에이도 난감해하고 있어요.」
이런. 항상 조용하고 얌전해보이던 세이렌 자매들이 흥분해 버렸다니, 이런 전개는 생각 못했네.
-요몽. 녀석들에게 내 메시지를 전달해줘.
난 요몽에게 메시지를 불러주고, 프리제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프리제타. 넌 겨울의 여왕과 어떻게 연락 하냐?”
당연하다는 듯, 스마트 폰을 꺼내드는 프리제타. 하여간 요즘은 스마트 폰 안 쓰는 애들이 없다니까?
얼마 후.
프리제타의 섬에는 적과 아군을 가릴 것 없이 모두 함께 모여 앉게 되었다. 내가 양측에 보낸 메시지가 다행히 잘 통했던 것이다.
「’밥 먹고 하자.’라는 주인님의 메시지에 겨울의 여왕까지 동의할 줄이야!!
-그게 뭐가 놀랍냐. 어쩌니 해도 결국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들이니, 당연한 거지.
「호홍~ 알겠어요. 그럼 저희들도 아점 맛나게 때리고 오겠사와요.」
-그래라.
동틀 무렵 이 섬에 왔는데, 지금은 요몽 말처럼 ‘아점’ 시간대였다. 다들 쌈박질에 시간가는 줄 몰랐지만, 사실 상당히 출출한 시간일수밖에 없었다. 근데 자룡대주, 이 아가씨. 나의 명령인 ‘푸짐하게’를 정말 잘 따라주었군. 저 넓은 돗자리 두 개에 사람은 앉기 어려울 정도로 음식 접시가 빼곡히 놓여 지는구먼.
사실, 분위기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겨울의 여왕은 이 섬에 돌아오자마자, 동생 사사키와 프리제타를 데리고 떠나려고 했었다. 하 지만 때마침 깨어난 사사키가 어찌어찌 지 누나를 설득하여 함께 남기로 했던 것이다.
겨울의 여왕. 이 아가씨는 아직 우리 일행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차려지는 음식들에 자꾸 눈길이 가는 걸 자제하긴 힘든 모양이군. 뭐, 어떤 누구라도 우리 흑해 1호의 임시 주방장, ‘식신마군’의 요리 냄새를 맡으면 저렇게 되기 마련이지.
“아무래도 나와 대교는 이쪽으로 붙어야겠군.”
CR 아그들의 머릿수를 핑계로, 나와 대교는 겨울의 여왕 일행과 합석을 했고, 겨울의 여왕은 못마땅한 기색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모른 체 했다. 그리고 시작된 식사 시간.
흠. 이거 분위기가 너무 대조적이군. CR 아그들은 야외로 소풍 나온 듯 신나는 분위기인 것에 비해, 우리 자리의 분위기는 직장상사와의 억지 술자리 분위기랄까?
“이봐, 겨울의 여왕. 네 이름은 ‘나타샤’라며? 그러면 사사키와는⋯, 음. 알았어. 그런 건 묻지 않을게.”
기집애. 가정사(?) 좀 물었기로서니, 그렇게까지 잡아먹을 듯 노려볼 건 뭐람.
“사사키와 난, 어렸을 때 각각 다른 나라에 입양되었어요.”
오~ 그래도 답변은 해주네?
“쓸데없는 오해가 싫어서 밝혔을 뿐이에요. 그리고 난 사사키의 부상을 생각해서 두 시간 정도의 휴전에 동의했을 뿐,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진 않군요.”
쳇. 누가 겨울의 여왕 아니랄까봐, 계속 찬바람 분위기로군. 그렇다면 타깃을 좀 바꿔볼까?
“사사키. 몸은 좀 어떠냐? 이제 외상은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만, 내상은 아직 회복 안 된 거야?”
•쯧. 그냥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다니, 이 녀석도 이제 침묵의 유령 모드로 돌아간 건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프리제타.
“프리제타. 넌 저기 저 녀석들과 꽤 오랜만일 텐데, 녀석들과 식사하는 건 어때?”
“잠깐! 우리 프리제타에게 이상한 말 하지 말아줘요.”
겨울의 여왕 나타샤가 끼어드는군. 이 썰렁한 아가씨가 여기서 또 무슨 뻘 소리를 하면 분위기가 난감해질 가능성이…………….
“우리 프리제타가 한때 저 실패작들과 지냈다고 해서 그들과 동급으로 여기면 곤란해요.”
에구. 기어이
CR 아그들 자리를 돌아보니, 다행히 사내 녀석들은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지만, 세이렌 자매들은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일어서고 있었다.
저 세이렌 자매들은 각성 전에도 나름 예쁘장한 어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두 발로 걷는 인어공주로군. 근데 그보다, 이 녀석들이 이렇게 호전 적이었나? 무표정으로 조용히 화내니까 왠지 더 무섭네.
“세이렌 자매. 뭐 먹다말고 싸우는 거 아니다.”
내가 조금 엄한 음성과 함께, 앉으라고 손짓해 보이자, 다시 슬며시 앉기는 하는데, 눈은 여전히 겨울의 여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야 원. 내 주위에는 왜 이렇게 살벌한 아가씨들이 넘쳐나는지 모르겠네. 아까 CR 아그들이 섬으로 모여들었을 때, 프리제타와 CR들의 반가워 하는 태도로 봐서는 지금도 어울려 식사하기를 원할 거 같은데, 분위기가 이래서야 어디……………
「주인님. 원판씨 연락이에용.」
밥그릇 들고 나타난 요몽이, 원판 나오는 화면을 띄우고는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다.
-뭐냐. 밥 먹는데.
“바로 그 자리 때문에 연락드린 겁니다.”
-이 자리가 뭐 어때서? 싸워도 밥은 먹어가면서 해야지. 안 그래?
“식사 자체를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유준 형님. 현재 그 자리에 모여 있는 CR들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입니다.”
원판 녀석. 꽤 심각한 표정이로군. 물론 저게 다 연기겠지만 말야.
“우리 프리메이슨의 치부, 많은 연구소에서 파생된 실패작들로 이루어진 부대, 컨피던셜 레이더스…! 그들 중 몇몇의 달라진 면모를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쫘식. 연기 잘하네. ‘CR 각성 프로젝트는 전부 지가 기획한 거면서 말야.
-뭔 설명? 우리 쪽에 CR들의 창조주인 닥터 제이가 있는데, 쟤들의 불완전한 부분을 고치는 건 당연한 거 아냐?
“형님께서 닥터 제이를 거두어들였다는 사실까지 감안하여 묻는 것입니다. 아무리 닥터 제이가 천재라고해도, 그가 유준 형님과 함께하게 된 기간 이 너무 짧습니다. 납득할만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것 봐라? 꽤 강하게 나오네? 설마, 벌써 원판을 의심하는 사도가 있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여기서 내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원판 녀석 이 위험해지겠군.
문득, 지난번 원판이 강판(?)되고, 구원투수랍시고 원판의 나쁜 점만 가진 복제 원판이 설쳤었던 생각이 났다. 그 원판 복제는 주가혜였던 시기의 대교까지 함부로 해치려 들어서, 결국 내가 쓱싹- 해버렸었다.
그래. 또 그런 일이 생기면 곤란하지. 그러니까 신중하게 대답을………….
“유준 형님!”
-아, 거, 밥 먹는데 귀찮게! 끊어!
에고. 신중은 어디다 팔아먹은거냐, 진유준.
“유준 형님! 닥터 제이는 당신의 이모부이기도 합니다. 그 점을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 닥터 제이? 원판이 아니라 닥터 제이를 의심하는 거라고? 하지만 닥터 제이는 원판과 달리 아예 노골적으로 배신 때리고 나에게 와 있잖아. 근 데 새삼 뭘 의심하고 말고 해? 이건 아, 그런가? 닥터 제이의 귀순(?) 시기, 타이밍은 문제가 될 수도 있겠구나.
-훗. 닥터 제이가 최근이 아닌, 훨씬 전부터 나에게 협조해 왔었던 건지, 그걸 의심하게 되었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는 12인의 사도로까지 추천되는 인물입니다. 그에 관한 사항은 매우 중요합니다.”
원판이 의심받다가 다른 위험한 놈이 내 담당이 될지도 모를 상황이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닥터 제이가 프리메이슨에게 더 마크당하는 상황도 많이 껄끄럽긴 해. 원판 말대로 닥터 제이는 내 이모부이고, 하은이의 아빠니까 말이야. 하지만… 닥터 제이는 왠지 딱히 걱정해줄 필요가 없는 인간이 라는 느낌이 강하니까, 그 양반 보호는 일단 신경 끄기로 하고, 이참에 또 편법 알바나 해볼까?
-그거 알려주면, 얼마 줄 건데?
“유준 형님. 이런 성격을 어떻게 숨기고 살아오셨습니까?”
-내가 뭐! 넌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자’라는 말도 모르냐? 큼. 어쨌든, 그게 말인데, 이틀 전쯤에 ‘먹깨비’로 추정되는 여동생이 생겨버렸거 든. 그 아이 뭐 사주는 돈까지 수하들에게 손 벌릴 수는 없잖아. 내가 직접 알바 뛰는 건 니들과 싸우기 바빠서 못하고… 암튼, 내가 닥터 제이에 대 해서 말해주는걸 원하면 현금 좀 쏴 봐!
원판은 잠시 다른 누군가와 상의하는 눈치더니 곧 싱겁게 웃었다.
“승인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도들께서도 당신의 장난기에 동조하는 것을 즐기시게 된 거 같군요.”
내 요구를 곤란해 하지 않고 재밌어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거슬리는군. 이번 용돈 마련을 끝으로 삥 뜯기는 그만둬야겠어.
-오케이. 그럼 내가 아는 걸 말해주지. 당연히 나도 닥터 제이의 깊은 속마음은 잘 몰라. 하지만 그가 내편이 된 건 그쪽에서 알고 있는 시기가 맞 아. 우리가 CR들을 이렇게 빨리 각성시킬 수 있었던 건, 우리 몽몽의 진화가 요즘 더 빨라졌고, 또 운도 따랐기 때문이지.
닥터 제이가 배신을 번복하고, 프리메이슨으로 역귀순 해야 할 가능성까지는 지금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기본 밑밥은 유지해 둬야지. “지금 ‘운이 따랐다’고 하셨습니까?”
-응. 그래. 내가 사실 좀 많이 싸우고, 다치고, 뭐 그런 신세였잖냐. 그래서 상처를 한방에 고치는 의료시스템을 만들어보라고 예전부터 몽몽에게 지시해 두었었지. 근데 몽몽이 그거 개발하다가 덤으로 CR들 각성 방법까지 알아내 버렸네? 게다가 몽몽이 필요로 하는 장비들을 지하무림에서 빨 리 구해줘서 일이 더 수월했어. 이게 다 잘난 내 복 아니겠냐.
아놔. 이거 왜 이렇게 거짓말이 술술 잘 나와 주는 거야?
“…알겠습니다. 미래 로봇과 지하무림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칭찬은 고마운데, 나 지금 식사 중이잖냐? 니들은 밥 안 먹냐?
“훗. 알겠습니다. 이만 끊도록 하죠.”
으으음. 원판 녀석의 표정이 점차 밝아지는걸 봐선 내가 대처를 나름 잘 하긴 한 거 같은데… 그래도 쪼까 찝찝하네. 난 진짜 거짓말을 모르는 순진 덩어리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꼬? 이건 어디까지나 거짓말 잘하는 적들을 자꾸 만나다보니 어쩔 수 없는, 그런 거야. 즉, 프리메이슨 놈들과 의 악연을 정리하면 해결될 문제일거야. 암. 난 다시 대한민국 모범청년으로 돌아갈 수 있어. 나의 모범성이야말로 굳건한… 큼. 흠. 암튼.
난 기분 전환 겸해서 요리 접시 하나를 집어 들며 CR들 쪽을 돌아보았다. 불꽃슛 형제 초이와 무이가 똑같은 포즈로 음식을 흡입하고(?) 있는걸 보니, 먹기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저 녀석들은 원래 실제 나이와 비슷한 용모였었기 때문에 각성된 지금도 외견상으로는 별 차이 없긴 하지만 녀석들은 아까 이 섬으로 오면서 엄청 업그레이드된 능력을 선보였었지. 겨울의 여왕이 만들어낸 얼음 덩어리들을 자신들의 불꽃으로 하나하나 녹여 없앴는데, 초이 녀석은 전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불꽃을 빠르게 만들어 냈고, 무이 녀석은 그걸 탁구 선수처럼 초고속으로 연사했어. 게다가 그 많은 얼음덩어리들을 맞추는데 한 번의 오차도 없었고 말야.
다음은 흑인 소년 비에이. 이 녀석의 각성 후 현재 모습이 가장 극적이었다. 난 녀석을 계속 ‘비오소’라는 별명으로 불렀었는데, 그건 녀석이 ‘에고, 허리야. 비가 오려나~?”라는 대사가 어울릴 정도로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각성된 현재는 당연히 열 살짜리 본연의 탱글탱 글하고 귀여운 얼굴이 되어있었다.
저 비에이 녀석의 주특기는 겨울의 여왕 나타샤와 같은 냉각능력인데, 그래서 그런가? 다른 형제들과 달리 겨울의 여왕을 보는 눈에 적의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군, 아니, 적의는커녕 꽤 호의적인 눈빛인 거 같기도 하네?
난 혹시나 해서 겨울의 여왕 쪽을 다시 보았지만, 겨울의 여왕 나타샤 양은 여전히 차가운 무표정으로 묵묵히 음식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세이렌 자매들의 갈굼이나 비에이의 호의적인 시선, 심지어 이 몸의 관심조차 무시하며 오직 식사에만 매진하는 모습이었다.
겨울의 여왕 나타샤, 이 아가씨..! 예의 ‘기숙사 사감 스타일’로서 정감이 잘 안가는 분위기 만땅인 건 틀림없지만, 그래도 먹는 거 하나는 꽤 복스 럽네. 프리제타도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는 모양새면서도 은근히 끊임없이 먹고 있는데, 침묵의 사사키만 깨작깨작 음식을 쪼아(?)먹고 있군. “이봐, 사사키. 넌 부상이 심했고, 능력도 많이 썼는데, 그렇게 먹어서 되겠어?”
난, ‘니 누나를 봐라’는 의미로 겨울의 여왕을 턱짓했다. 겨울의 여왕은 잠시 멈칫하는 듯 했으나, 곧 개의치 않고 예의 ‘복스럽게 먹는 태도를 고수 했다.
“충분합니다. 이정도면.”
“충분하긴 뭐가 충분해.”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끼어든 것은 겨울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막 해치운 음식 접시 하나를 내려놓으며 동생 사사키를 흘겨보았다.
“넌 교육이 잘못되었어. 지나친 자기 절제는 좋지 않다고, 누나가 늘 말해도 듣지 않는구나.”
훗.’지나친 자기 절제’를 강요할 것 같은 분위기로 반대의 얘기를 하니까, 왠지 묘하군. 겨울의 여왕, 나타샤 이 아가씨, 생각보다 썰렁한 스타일 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네.
겨울의 여왕은 말이 나온 김에 더 잔소리 설교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꽤 자주 동생에게 ‘밥 좀 팍팍 먹 어라’, ‘말 좀 하고 살자’ 같은 소리를 해왔지만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좋아요, 진유준씨. 식사도 얻어먹었으니, 오늘 우리는 여기서 물러나기로 하죠.”
흠. 마무리도 나름 쿨하군.
‘그건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에? 누구지? 어디서 이렇게 낯설고 이중으로 겹치는 텔레파시가 아. 쟤네들?
“세이렌 자매. 이런 거리에서 웬 텔레파시냐? 너희들, 말 못하는 거 아니라며.” “왕대장님! 그건요.”
새초롬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세이렌자매 대신 나선 것은 비에이였다.
“세이렌 누나들도 훈련을 시작하긴 했는데, 아직 음성 조절이 잘 안되나 봐요. 그러니 누나들이 지금 말을 하면 우리 모두 깊은 바다 속에서 수영을 (?) 하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아참. 세이렌 자매들의 특수 능력 중 하나가 ‘미혹의 노래’라고 했었지? 각성하면서 그 능력까지 강해져서 이젠 신경 써서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입만 열면 듣는 사람을 최면에 빠트려 바다에 뛰어들게 할 정도라는 건가?
“알았다. 그럼 그냥 텔레파시로 얘기해. 하지만 둘이 동시에는 좀 그렇고, 대표로 한 명씩, 알겠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세이렌 자매. 그러나 누구도 곧바로 텔레파시를 보내오지는 않았다. 조금 전에는 발끈해서 나섰지만, 본래는 매우 말수가 적고, 비사교적인 성격이라고 들었던 생각이 났다.
“으음. 더 들을 것도 없이. 쟤들은 겨울의 여왕, 너와 싸우고 싶은 모양이네. 아까 바다에서 꽤 심한 설전이 있었던 모양이지?”
내가 다소 난감한 기분으로 겨울의 여왕 쪽을 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비에이를 제외한 CR쪽 사내 녀석들이 하나같이 손을 들어 겨울의 여왕을 가리켰다.
“맞아요! 그 누나, 우리한테 심한 말을 많이 했어요! 얼음보다 더 차가운 말이었어요!”
“그래?”
겨울의 여왕은 주저 없이 CR들 쪽으로 걸음을 떼며 말을 이었다.
“난 본래 겨울의 여왕이야.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하지. 어떤 말이 가장 아팠니? 너희들을 실패작이라고 한 거? 거기에 ‘주제를 모르 는’이라는 표현을 덧붙였던 거? 아니면 발육부진 계집애들’이라고 부른 거? 내가 또 무슨 말을 했었지?”
아이고야. 나름 훈훈해지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네.
난 CR 아그들을 막을 명분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정글도를 잡았다. 이미 양측 다 음식 접시를 내려놓고 상당히 위험한 기운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프리제타와 사사키는 모르겠지만, 겨울의 여왕은 아직 꺼내지 않은 히든카드가 있어. 그건 아마도 저 목걸이와 팔찌겠지?
겨울의 여왕은 일견 흑진주처럼 보이는 검은 보석 목걸이와 팔찌를 하고 있는데, 나는 그걸 ‘자석’으로 판단했다. 극저온(極低溫)하에서 강한 자성 을 지닌 물체를 이용한, 어떤 공격법이 있을 거라는 건, 나의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겨울의 여왕은 지금 처음으로 두 손을 앞으로 모으며 손목의 팔찌를 살며시 매만지고 있었다.
“잠깐! 멈춰!”
난 일단 내공을 실은 목소리로 흐름을 끊은 후, 정글도를 어깨에 걸치며 일어섰다.
“굳이 다시 싸우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오해를 하셨군요, 진유준씨.”
“뭐?”
겨울의 여왕은 내 쪽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저는 자주 오해를 받곤 하죠. 진유준씨 표현대로 ‘썰렁한 인상과 말투 때문에 말이에요.”
겨울의 여왕 나타샤는 다시 CR들 쪽을 돌아보면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난 진유준씨의 감정을 흔들기 위해 여러분들을 비하하는 말을 쓰기 시작했어.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어. 왜냐하면… 나와 내 동생도 여러분들과 같 은 실험체로 탄생했으며, 실패작이었으니까.”
윽. 이건 내가 한방 먹는 기분이로군.
이번엔 다른 의미로 모두를 얼려버린(?) 겨울의 여왕은 CR들을 향해 꾸벅 고개와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이, 이런 전개가 가장 이상적이긴 한데. 근데 우째 이런 일이?
난 겨울의 여왕이 보여준 반전이 기쁘면서도 의아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겨울, 아니 반전의 여왕(?) 나타샤,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약간 어색해하는 미소를 떠올렸다.
“이상하네. 난 미움 받는데 익숙해서, 이번에도 굳이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반전의 여왕께서는 다시 내게 돌아서서 물었다.
“진유준씨. 당신은 이미 우리 남매의 실체를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던 거죠?”
“어. 그래. 언제부터인가 그런 느낌이 들었었지. 그래서 자연스럽게 너희들에게 하대를 하기 시작했던 거고 말야.”
“훗. 과연 감이 빠른 분이로군요. 맞아요. 저희 남매도 보기보다 어려요. 전 열 다섯, 사사키는 열 네 살이죠.”
으음. 그래도 CR
아, 그들보다는 조금 연상이었군.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초기 프로토 타입’인가하는… 그중에서 성공작이었던 건가?”
“그런 셈이죠. 부작용도 거의 없었고요. 하지만 처음에는 능력 발현도 제한적이어서 오랜 시간 실패작 신세였었죠.”
“그랬었군. 음. 그래. 그랬군.”
난, 이 보기보다 어리며, 보기보다 사근사근한 면도 있는 반전의 여왕에게 더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어물쩍 말을 맺을 수밖에 없 었다. 난 언제부터인가 이 남매의 실체를 감 잡기는 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걸 모르게 키워졌거나, 알면서도 자신들만은 소위 ‘성공작’이라는 자부 심에 사로잡혀 있는 거라고 판단했었다.
내가 이 남매를 너무 띄엄띄엄 봤었던 거군. 그래도 이런 경우는 즐거운 오차라고 해야 하려나?
“사사키. 프리제타. 우린 이제 가자.”
“아, 잠깐.”
나는 주저 없이 일어서려는 프리제타와 사사키에게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나타샤! 분위기 좋아졌는데, 왜 굳이 가려고하냐?”
CR 아그들은 나타샤의 태도 변화에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말하는 것을 알았는지, 곧바로 적의를 푸는 것 같았다. 세 이렌 자매들만 아직 약간 뾰로통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역시 뚜렷한 적의는 아니지 싶었다.
“블랙 놈이 싸움 끝나면 어딘가로 가서 대기하라고 한 거야?”
“아뇨. 싸움 시작도 끝도 우리가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여기 더 머물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왜 없어. 아직 음식이 많이 남았잖아. 그리고 사사키는 억지로라도 좀 더 먹여야하지 않겠어? 이거 봐봐! 이게 침묵의 유령 모습이야? ‘굶어죽은 유령’이지.”
내가 노골적으로 사사키의 깡마른 얼굴을 가리키며 외치다시피 말하자, 프리제타가 먼저 푸읏- 웃음을 터트렸다. 나타샤도 쿡쿡- 소리를 내며 동 생에게 다가섰고, 사사키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안되겠네. 너의 코드명이 바뀌지 않으려면, 식생활만이라도 어떻게 하긴 해야겠어.”
그래. 누나가 그렇게 나와 줘야지.
난 나타샤와 프리제타가 사사키에게 어떻게 음식을 먹이는지 구경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대교에게 식후 산책을 제의했다.
잠시 후.
나와 대교는 알고 보니 친척(?)쯤 되는 아그들을 숲속에 놔두고 둘만 바닷가로 나왔다.
-대교. 아무래도 말이야. 이건 ‘식신마군’ 덕분인거 같아.
-식신마군이요?
…아. 그렇군요.
역시 대교. 구체적인 설명을 하기도 전에 알아채 버리는군.
-이번에 보내진 요리에 쓰여 진 식재료는 ‘원기 회복’과 ‘심신안정’에 주안점을 둔 것 같았어요. 게다가 식신의 요리는 항상 먹는 이에게 행복한 만족감을 주지요. 그래서 겨울의 여왕이 쉽게 마음을 열었던 거 같아요.
-그치? 난 그 양반을 ‘장가계의 숨은 영웅’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도 위험한 전개로 갈수 있었던 싸움을 막아 준, 숨은 영웅이었던 셈이야.
제목은 잘 생각 안 나지만, 언젠가 본 영화에서 ‘맛난 요리로 다툼이 심한 마을 사람들을 화해시키는’그런 스토리가 있었던 것 같았다. 앞으로도 끝장을 봐야 할 정도로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를 만나면 식신의 요리로 평화 모드를 조성하는 것도 괜찮지 싶었다.
「주인님!」
-어, 요몽. 너도 밥 잘 먹었냐?
「예. 그런데, 첫 번째 섬의 상황이 심상치가 않네요.」
-첫 번째 섬? 거긴, 전기 인간 녀석이 있는 곳이던가?
「예. 코드명 ‘전격의 악마, 토르’가 대기 중입지요. 그런데 약 3분 20초 전에 그곳의 모든 장비가 일시 마비되었었어요. 원인은 강력한 전압에 의 한 충격이었고요.」
토르 녀석. 기다리다 짜증을 낸 건가? 자니만큼 단순하지는 않아도, 자니정도로 성격이 급한 편일 거 같기는 했지?
「아. 원판씨 측에서 토르의 섬 시스템을 모두 복구했어요. 토르 쪽에서 화상 통화를 요청중이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연결해 줘.
…음. 이 녀석. 저 화려한 금발 삐죽 머리는 여전하군. 복장도 어설픈 락커스타일 그대로이고 말야.
“하이~ 진유준.”
토르는 긴 비치의자 같은 것의 중간쯤에 앉아서 여유롭게 한손을 흔들었고, 나도 마주 손을 들어주었다.
“나도 하이~ 토르.”
“나한테는 언제 올 거야?”
“글쎄? 순서를 미리 정해 놓은 건 아니라서… 음. 기다리기 지루하냐? 그럼 너도 침묵의 유령처럼 니가 쳐들어오든가.”
“아니. 난 이 섬에서 움직이지 않을 거야.”
짜식. 못 참고 먼저 연락한 녀석이 튕기는 척 하긴.
“그래? 그럼 마냥 기다리던가. 너한테는 맨 마지막에 갈게.”
“오케이.”
응? 뭐?
내가 잠시 굳어있는 사이, 토르는 태연하게 긴 침대형 의자에 누워버리더니 카메라로부터 등을 돌린 자세가 되었다. 다시 10여초가 흐른 후, 카메 라가 꺼졌다.
뭐야, 이거. 토르 녀석, 빨리 싸우고 싶어 하는 게 아니었나?
「호오~ 코드명 토르의 ‘밀당’ 솜씨가 제법이네요.」
“밀당? 웬 밀당?”
「딱 토라진 척하는 아가씨잖아요! 이제 어쩌실 거죠? 이번엔 주인님 쪽에서 연락해서 싸움 일정을 잡으실 건가요? 아니면 그냥 집으로(?) 쳐들어 가서………….
“뭔 소리야. 어찌되었든, 마지막에 싸우기로 합의 본거잖아, 방금.”
「우에~ 재미없어! 주인님. 대교님 만나시기 전까지 연애한번 못해 보셨죠?」
“어, 맞아. 난 그런 거 모르는 대한민국 대표 순진남이었어.”
「으~ 대교님 옆에 계시다고 내숭 모드를 끼워 넣으시다니! 하여간 주인님은 어? 주인님!」
요몽이 당황하여 날 부른 것보다 빠르게, 나는 고개와 상체를 옆으로 틀었다.
피!
날카롭게 내 눈앞의 공간을 가른 무언가가 모래땅에 박혔다. 흔한 말로 간발의 차로 피한 셈이었다.
「조개껍질! 조개껍질이에요!」
조개껍질을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거리에서 날렸다고? ‘고요의 저격수’! 그 놈인가? 방향은… 쳇. 어차피 당장 반격은 힘들겠군.
나는 물론이고 대교도 이미 몸을 낮춘 채, 조개껍질 탄환이 날아온 방향을 경계하는 태세를 취한 상태였다. 하지만, 난 왠지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 어서 먼저 자세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날아든 방향의 섬이 너무나 까마득히 먼, 여덟 번째 섬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괜찮으세요?
-어, 난 괜찮아. 그리고 이건 아무래도 본격적인 공격이라기보다 ‘초대장’ 정도의 의미인거 같아.
내말에 대교도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조개껍질이라는 탄환 소재가 특이해서 그렇지, 냉정하게 보면, 지난번에 서울 시내에서 내 머리를 노 리고 날아들었던 국화꽃보다도 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주인님! 저격수의 탄환으로 쓰인 조개껍질 말인데요. 거기에 뭔가 새겨져있어요.」
-뭐?
요몽은 스캔된 모래속의 조개껍질을 영상으로 보여주었고, 표면에 뚜렷하게 새겨져있는 건, 아무래도 알파벳 ‘S’인거 같았다.
흔한 패턴으로, 자신을 상징하는 이니셜일까? 아니면, ‘궁금하면 와서 물어 봐’라는 식의 수수께끼 장난? 암튼 여러모로 ‘초대장’의 의미가 강한 셈 이네. 적극적으로 덤빌 줄 알았던 토르는 어울리지 않는 밀당 흉내를 내고 있고, 적어도 중반 이후까지는 조용히 기회를 엿볼 줄 알았던 저격수 녀석 은 벌써 오라고 성화인 건데……..
-요몽. 바다 형제, 자매들 중에서 우리 운송 지원자 받아라.
얼마 후.
우리가 탄 보트는 세이렌 자매들의 힘에 의해 바다 위를 달리게 되었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원판 녀석이 연락해 왔다.
“고요의 저격수. 에레보스 멤버들 중에서도 특히 베일에 쌓여있는 인물을 상대하게 되셨군요.”
“뭐. 견습이라고는 해도, 같은 에레보스인 ‘초롱’이도 본적은 없다고 하긴 하더라.”
“그런 만큼 더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기록상, 에레보스에서 행한 암살 중에서 절반 이상이 그의 짓이었습니다.”
“어쿠. 그런 놈이었어? 무서워서 안 되겠네! 세이렌 자매! 방향 바꿔라!”
내 다급한(?) 명령에 따라 세이렌 자매는 8번째 섬으로 향하던 항로를 6번째 섬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대교와 세이렌 자매에게는 미리 전음으로 알려두었기 때문에 군말 없이 따르는 것이 당연했지만, 전혀 모르고 있던 원판도 놀라는 기색이 없어서 다소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저격수의 초대에 응할 생각이 없으셨군요.”
“재미없게, 놀라는 척도 안하냐?”
“앗! 유준 형님! 어째서!”
“…미안하다. 괜한 거 시켜서.”
“예. 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으음. 세이렌 자매들도 아쿠아린 형제 못지않게 빠르군. 원판과 잠시 노닥거리는 사이에 벌써 목적지인 6번째 섬에 도착했어.
“고요의 저격수는 초대를 무시당했음에도 참아주는 것 같군요.”
“그러게?”
사실, 다른 녀석들과 싸우면서 계속 저격을 신경 쓰느니 고요의 저격수를 먼저 치는 것이 정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곳으로 먼저 온 것 은 최소한 이곳까지는 먼저 처리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럼, 이번에도 살아서 걸어 나오셨으면 좋겠군요.”
“아예 악담을 해라, 악담을!”
패티의 위성 영상으로 미리 확인해 두었던 대로, 이번에 도착한 섬은 프리제타의 섬보다 세배정도 컸고, 바위투성이의 복잡한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와 대교는 한쪽의 작은 모래톱에 상륙했는데, 불과 이 십여 미터 정도 위쪽의 바위들 사이에 한 여자가 서있었다.
낯익지만 반갑지 않은… 재수때기 여자, ‘환영의 천사’…! 이번에도 명품으로 도배한 된장녀 스타일이네. 쯧, 보자마자 또 재수 없게 웃네.
“잘 오셨어요, 지옥의 섬에….”
퍽!!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대교의 섬광분소지가 작렬했다. 이마가 꿰뚫린 환영의 천사(?)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눈사람이 녹아내리는 영상을 빨리 돌린 듯한 모습이었다.
-대교. 저게 헬게이트가 사념체로 만든 가짜라는 거, 알고 그런 거야?
-아, 아뇨. 저 여자 보니까, 저도 모르게 그만.
으음. 역시 맛난 떡볶이와 라면 사리의 원한은 깊고 무섭군.
‘호홋. 여전히 난폭한 분이로군요.’
흠. 전투력이 약한 이 여자가 숨어서 텔레파시만 보내는 건 이해가 된다. 하지만.
“헬 게이트는?”
‘방금 당신 애인이 죽였잖아요. 아주 끔찍하게.’
우린 무의식중에 흠칫했지만, 곧바로 피식 웃을 수 있었다. 아마도 헬게이트 소년이 대교의 공격으로 끔직한 몰골이 된 환영을 보여주려 했던 모 양이지만, 우리는 환영이 채 떠오르기도 전에 지워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대단하네요, 두 사람. 제가 거는 ‘동조’를 그렇게 간단히 무시하다니 말이에요.’
“댁의 수법을 알게 된 후부터 훈련 좀 했지. 마인드 컨트롤인지 뭔지를 말이야.”
대교야 원래 멘탈 갑이라 스스로 했지만, 나는 몽몽을 통해서 꽤 빡시게 이 여자와의 싸움에 대비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쉽게 방심할 수는 없는 것 이 환영의 천사 역시 전보다 강하면서도 왠지 더 자연스러운 텔레파시를 쓰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근데, 댁도 전보다는 뭔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그것까지 벌써 눈치 채셨나요? 그래요. 전 평소 능력에 락을 걸어두고 지내죠. 타인의 너무 깊은 마음속까지 보게 되면 저 자신도 너무 힘들어서 요.’
“이거 어째, 텔레파시 능력뿐 아니라, 다른 뭔가도 달라진 것 같네?”
‘맞아요. 전 평소 인격의 일부까지 락을 걸어둬요. 보통 ‘재수 없는 여자’ 컨셉으로요. 음. 사실 지금의 저도 그렇게 재수있는 타입이 아니긴 하죠. 무엇보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져 버려요.’
젠장. 이거 목소리만 같을 뿐, 완전 다른 사람 아냐?
-대교. 우리 아무래도 좀 더 긴장을 해야 할 거 같다.
-예. 왠지 위험한 느낌이 들어요, 이 여자.
역시 대교도 지금 환영의 천사가 전에 봤던 그 재수때기 여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군.
아참. 당신들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건, 나의 헬게이트도 마찬가지에요.’
뭐? 그 녀석도 뭔가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가?
추아악!
우리 등 뒤의 바다에서 뭔가가 요란하게 솟구쳤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내 시야 가득히 거대한 아가리가 벌려져있었다.
거대 상어? 이렇게 얕은 수면에서? 이익!
내게는 너무나 낯익은 상어의 아가리 속에 삼시전결을 날렸다. 하지만, 그와 함께 몸도 옆으로 날려 피해야 했다.
콰콰콱!
상어가 모래땅에 처박히는 소리가 왠지 이상했다. 상어는 마치 미꾸라지가 진흙 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격렬하게 요동치며 모래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그 여파로 모래가 물처럼 사방으로 날렸다.
-대교! 괜찮아?
-예. 걱정 마세요.
대교는 비교적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상어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모래 지면 위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설마, 진짜 상어는 아니겠지요?
-당연하지. 헬게이트 녀석이 만들어낸 사념체일 텐데. 젠장. 더럽게 실감나네.
천년 전 연옥도에서 부터 현 시대 바다에서도 지겹게 상어를 접해온 나였다. 그런 만큼 헬게이트 놈의 이번 사념체가 얼마나 정교하게 실제와 같 은지를 알 수 있었다.
헬게이트의 사념체 괴수들은 전에도 흉측했었지만, 그래도 디자인이 비교적 단순해서 현실의 짐승 같은 느낌은 아니었어. 그런데 이 자식, 뭔 업그 레이드를 하필 이런 식으로… 웃!
쿠르르르~
기분 나쁜 땅울림이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곧바로 현실이 되고 있었다.
스으윽!
상어 영화의 전형적인 연출처럼, 우리 전방의 모래 속에서 크고 소름끼치는 삼각 지느러미가 올라오고 있었다.
사삭! 사삭!
두 개의 지느러미가 더 모래위로 모습을 드러내더니, 천천히 모래 속을 유영하며 우리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대교!
난 대교와 등을 맞댄 자세로 정글도를 모래땅에 꽂았고, 대교의 청명검도 동시에 지파랑을 펼쳤다.
쿠오오오~!
양쪽으로 폭사된 지파랑의 충격파가 세 마리(?) 모래 상어괴수들을 덮쳐버렸다. 바다 속을 헤엄치듯 모래 속을 오가며 소름끼치게 했던 삼각 지느 러미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추욱-늘어졌다.
스르륵 눈 녹듯 사라지는 건 역시 사념체답군. 헬게이트 녀석, 전에는 괴수들을 떼거지로 불러내더니 비주얼 향상시키느라 마리수를 줄였… 아, 아 닌가? 우이씨!
사악- 사악- 사악- 사악- 사악- 사악-
가까운 바다 위는 물론이고, 모래 지면에까지 무수한 삼각 지느러미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일일이 헤아릴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대교, 일단 피하자.
우린 급히 도약했고, 그 직후 우리가 서있던 지면위로 솟구친 모래 상어의 아가리가 닫히며 콰직 소리를 냈다. 우리가 일단 피한 곳은 근처의 나 무 위였는데, 모래 상어들은 우리의 냄새를 맡기라도 한 것처럼 나무 주위로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놈들의 파괴력을 생각하면 이런 나무로는 버티지 못해. 마릿수가 몇이든, 수가 정해져있다면야 그냥 맞짱으로 가볼 텐데, 이건 대체 얼마나 끝없이 만들어질지를 알 수가 없으니………….
-오라버니!
이번엔 대교가 빠르게 찾아낸 루트를 손짓하고는 먼저 공공보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이동하였고, 우리는 오래지않아 몇 톤은 됨직한 바위위에 올라설 수가 있었다. 모래 상어들은 만들어진 놈들임에도 진짜 상어처럼 한정된 조건, 즉 모래 속 밖에는 헤엄칠 수가 없는 듯, 바위 주위로 새카맣게 모여들기는 했어도 더 이상 공격 움직임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일단 다행이 아니라! 우이쒸! 무적의 우리 커플이 상어 떼 따위에 쫓겨 피하다니, 이게 뭔 꼴이야?
-몽몽! 환영의 천사와 헬게이트, 아직 못 찾았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요몽과 교대해서 나온 몽몽이 섬 전체 지도와 몇 군데 포인트를 보여주었다.
「현재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도착하시기 전까지의 이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선정된 장소들입니다.」
과연 몽몽. 다섯 군데의 포인트에 각각 찍혀있는 숫자는, 녀석들이 있을 가능성 수치겠지? 그렇다면, 먼저 64퍼센트 지점부터 쳐들어 가보자. 그러 자면 저 동남쪽으로 몇 백 미터 상어 떼를 뚫고 가서………….
-오라버니!
돌파 작전을 짜고 있던 나를 부른 대교는 천천히 손을 들어, 내가 가려던 방향의 좌측 숲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이 향한 곳으로 안력을 높여보니, 뭔가 꿈틀꿈틀 징그러운 연상이 되는 움직임이 잡히기 시작했다.
몽몽. 저 나무숲 속, 가득히 꼬물꼬물 대는 것들이 그, 비암이냐? 영어로는 스넥, 아니 스네이크 맞냐? 「그렇습니다, 주인님. 코드명 헬게이트의 사념체로 추정되므로 실제 파충류의 위험성을 상회할 것으로 판단되며,」
으~ 제대하면 더 이상 뱀과 상종하기 싫었는데 미치것네.
난 산에서 매복 훈련하다 까치독사와 눈싸움을 하던 아리따운 추억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천 년 전, 비화곡 성지 탈출 과정 에서 단신으로 거대 뱀, ‘이무기’와 맞짱떴던 대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대교. 우리 최대한 빨리 저것들을 뚫고 가서, 환영의 천사와 헬게이트를 아작 내주자.
난 전의를 불태우고 몸을 일으키며 정글도를 어깨에 걸쳤다.
-오, 라, 버, 니.
-응? 또 왜?
이번엔 대교의 손끝이 애매하게 허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얼핏 뭔가 보이기 시작하긴 했지만 바로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내력을 좀 더 눈으로 집중 하려니까, 대교는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애애에에~ 앵!애애앵~!
청력을 높이자마자 들려오기 시작하는 너무나 익숙한 날개 소리.! 이건… 모기? 이 계절에 웬 미친 모기가 있어?
생각해보니, 모래 속을 헤엄쳐 다니는 상어 떼에 둘러싸여있는 처지에 계절을 무시한 모기떼도 별로 이상한 것은 아니지 싶었다.
그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뭔 모기가… 사람 머리통보다도 큰 거 같네, 그려. 아이고 애앵~ 소리 시끄러워라. 청력은 반 대로 닫아야겠네.
점차 가까워오는 모기 항공대(?) 앞에서 살짝 유체이탈을 시작한 내 팔을 대교가 톡톡 건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은 또 어딘가를 향했다.
-대, 대교. 이제 니가 그런 표정으로 어딜 가리키면 나도 무섭………….
「주인님! 돌파 작전 재고를 권고하며, 추천 회피 루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회피? 뭘? 저기 저, 산위에서 막 흘러 넘쳐 나오고 있는, 검은 용암 같은 거?
「주인님과 대교님의 현명한 판단을 위하여, 근접 촬영된 화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몽몽은 우리의 정신건강을 우려해서인지, 아주 짧은 몇 초의 영상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우리는 홍수처럼 밀려오고 있는 물결 이 진짜 물결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네, 바퀴벌레, 거미… 난 지식이 짧아서 다른 더 이상한 것들은 이름을 모르겠네. 하여간… 벌레군. 저언부 벌레야. 그것도 하나같이 주먹만한. ‘어떤가요, 진유준씨
여전히 들척지근하면서도 어딘가 건조한 느낌의 텔레파시가 전해져왔다.
‘이 정도면, 지옥의 문이 약간은 열린 것 같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