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서생 4부 – 15권 외전 : 칼시탈 OR 군시탈. 그리고..
외전. 칼시탈 OR 군시탈. 그리고..
“오오~ 죽인다, 쥑여!”
나는 숨김없는 감탄사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는 A4용지 두 배정도 크기의 나무 상자가 하나 놓여져 있으며 그 속의 물건이 그만 큼 내 맘에 쏙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머. 벌써 도착했나 봐요?”
대교가 주방에서 과일 접시를 내오며 곱게 웃었다.
“하긴, 오라버니께서 그렇게 흥분된 어조로 명하셨으니 어사조(御使組)들도 그만큼 더 신경을 썼겠지요.”
“응? 내가 그랬었나?”
“후후, 지금도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흐흣. 그야 뭐……”
이틀 전 점심 무렵이었지, 아마?
그 때 이 거실에서 울 이쁜 대교는 예비 대한민국 주부님답게(?) 막장 드라마 재방송에 열중해 있었고, 난 그 옆에 앉아서 정글이를 닦아주고 있었 다. 드라마 방영 막간에 광고가 나온다 싶었을 때, 무심코 던진 내 시선을 그대로 붙잡아 버린 것은 모 방송국 창사 특집 드라마의 홍보영상이었다. 흐… 정말 뜻밖이었지. 내 어린 시절 추억 속 작품들 중에서도 최고로 꼽힐 만한… 그 명작 만화 ‘각시탈’…! 그게 다시 세상에 나올 줄이야! 나는 처음 각시탈 드라마 홍보 영상을 보았을 때의 감동을 새삼 만끽하며, 이제는 실제 내 손에 쥐어지게 된 ‘지하무림표 각시탈’을 들어보았다. “이거 참. 거….”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노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던 어린 시절, 어느 좁은 골목 낯선 집의 창문 밑이었다. 그 집 굴뚝 옆에서 주운 만화책 쪼가리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거짓말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각시탈 만화의 배경은 소위 일제시대… 이 각시탈로 얼굴을 감춘 주인공이 일본인들이나 소위 친일 앞잡이들을 응징하는 그런 내용이었지. 더벅 머리에 각시탈… 항상 낡은 한복을 입어 그 흰 옷자락과 저고리 고름을 휘날리며 택견을 구사하는… 지극히 토속적이면서 그 어떤 서양 영웅물의 주인공보다 맛깔나게 멋졌던…………
“오호 주인님. 이거 드라마와는 느낌이 다르네요?”
“후후 그럴 거라고 했잖아, 요몽.”
“드라마 속의 주인공은 서양의 안경 가면 같은 걸 쓰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요? 제가 보기엔 왠지 좀 웃기거나 어색해 보일 때도 있었고… 그치만 이건 어색함이 없고 묘하게 더 시크한 느낌?!”
“요몽. 네가 보는 눈이 좀 있구나.”
“우히~ 저야 본래 한 안목 하잖아요.”
안목이 높다기보다는 나와 취향이 비슷한 셈일 것이다. 원작 만화의 각시탈은 얼굴 모두를 가리는 형태인데 어째서 드라마에서는 안경가면(?)으로 설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음. 어쨌건 간에 어디 나도 한 번………….
“와우~ 주인님도 나름 분위기가.. 아니, 심지어 드라마의 꽃돌이 주인공보다 괜찮아요! 어쩜~ 웬일이니~!”
…으음. 요몽이 호들갑을 떨며 칭찬을 날려주는 건 고마웠지만 정작 나 자신이 느끼기에는 드라마 주인공이나 나나 안 어울리기는 마찬가지로군. 하긴 애초에 원작이 만화라서 실사화되면 좀… 누가 써도 낯설 수밖에 없는 거겠지? 뭐, 그래도 착용감 자체는 생각보다 괜찮군. 난 얼굴이나 머 리에 뭐 쓰는 거 싫어해서 조금 걱정하기도 했는데 이 정도라면……….
“어, 근데 주인님. 그거 추억의 물건이라서 방에 장식해 놓으실 거 아닌가요? 굳이 최첨단 소재와 설계로 땀 배출과 호흡, 착용감까지 신경 써서 만 들 것까지는 응? 그거 계속 쓰고 다니시게요? 진짜? 레알?”
뒤늦게 내 두 번째 속마음을 알아 챈 요몽이 설마하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나는 그저 흐흐흐~ 각시탈스럽지 않게 웃어 주었다.
각시탈 확보 후, 며칠 뒤의 밤. 서울 시내 한복판의 모 상가 건물 옥상.
어둠 속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서 밤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21세기 각시탈’…! 당근, 이 몸이시지.
평소의 밤 마실 복장 그대로 전투화와 얼룩무늬 군복 차림에 각시탈만 썼을 뿐이지만 기분은 많이 달랐다. 사실 내가 뭔 짓을 하고 다니건 몽몽의 방어망 덕분에 얼굴 팔릴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에서는 살짝 불편했었던 것이다.
특히 오늘처럼 일반인(?)들 상대로 정글도 부림하고 싶은 날에는… 말이지.
-몽몽. 타깃은?
「예, 주인님. 약 12분전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인원의 예상 동선을 확보했습니다.」
-관련없는 일반 시민들은?
「정보대로 오늘은 타깃 인원들뿐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좋아. 그럼 가볼까?
나는 슬쩍 신형을 띄운 후 건물의 뒤쪽 어두운 골목으로 날아 내렸다. 대로 쪽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뒷골목의 비상구 앞에는 한적한 어둠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비상구에 걸린 자물쇠와 쇠사슬 정도야 가벼운 정글도 질로 잘라 주시고… 흠. 여긴 술(보나마나 가짜 양주)창고인 모양이군.
“누, 누구야? 너 뭐야? 억!”
놀라 지껄이는 깍두기 한 명의 턱을 정글도 옆면으로 쳐서 돌려주니 들고 있던 술 상자와 함께 맥없이 주저앉았다. 나는 여유 있는 걸음으로 창고 를 나와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작고 흐릿한 조명만 켜져 있는 복도 양옆으로 비슷한 모양의 문들이 늘어서 있는 전형적인 술집 복도였다. 내가 주 로 다녀 본 곳들에 비하면 상당히 고급스런 분위기라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빠악~!
두 번째 깍두기는 조금 더 강한 정글도 싸다구를 맞고 복도 끝의 갈림길까지 날아가 나뒹굴었다. 그제야 다른 복도 너머에서 어수선한 기척이 나는 듯 하더니 곧 욕지거리와 함께 시커먼 덩치들이 하나 둘 달려오기 시작한다.
「오호라~ 이런 거였군요.」
요몽이 뒷짐을 진 여유로운 자세로 날아올랐다.
「만화나 드라마의 각시탈은 당시의 일본인들을 혼내주지만 주인님 판 각시탈은 이런 건강 사회의 적들을 척결하는 정의에 용사!」
-훗. 그건 아니지, 요몽.
나는 고개를 저으며 몇 명의 덩치들을 더 날려 버렸지만 아직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정의에 용사라니… 내가 그런 인간이냐? 나 알면서……………
「에? 그럼 뭐죠? 이 사람들도 프리메이슨의 졸개들?」
-그것도 아니고………………
계속 가로막는 놈들을 기계적으로 해치우며 걷다보니 어느 사이 복도가 끝나고 널찍하고 밝은 공간이 나왔다. 본래는 많은 사람들이 춤추고 노는 메인 홀인 모양이지만 오늘은 중앙에 긴 테이블들이 수 십 미터나 주욱 붙어 놓여져 있었고 그 양 옆으로 수십 명의 조폭 깍두기들이 각자 쇠파이프 같은 귀여운(?) 무기를 들고 서있었다. 그래도 일단은 멈추고 모두를 스윽- 돌아보았다.
흠. 몽몽의 정보대로라면… 얼마 전 이 업소는 저기 저… 현재 내게서 제일 먼 끝자리 중앙에 앉아있는 중년 남자가 두목인 조직이 접수했다지? 그 리고 오늘은 그 자축파티라는 건데… 분위기로 봐서는 이 몸의 출몰에도 아직은 놀라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있지도 않은 몇 명… 저 치들은 축하해 주러 온 딴 조직들 두목급인 모양일세. 뭐, 그거야 어쨌든 요몽과 오늘의 타깃들에게 기본 설명은 해 줘야겠지?
“오늘 내가 여기 온 건 ・・・ 지극히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다. 나・・・ 21세기 군바리 각시탈은 항일 투사도 정의의 용사도 아니거든.”
목소리에 내공을 살짝 실어서 다들 또렷하게 들었을 텐데도 잠시 아무도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어색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일단 칼을 든 자가 쳐들어왔으니 긴장된 분위기가 주 인것 같기는 했지만, 곧 누군가 두목들에게 ‘저 놈 혼자입니다’라고 보고하자 분위기는 급격히 ‘어이없 음’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별 미친~!”
제일 가까운 위치의 놈이 나서며 쇠파이프를 치켜들자 다른 놈들도 일제히 인상을 긁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글아. 적당히 하자. 우리한텐 일반인들이다.
난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다른 팔의 힘을 살짝 뺐다. 정글이도 가끔 혼자(?) 싸우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번득! 칭! 퍽!
“으악!”
번득! 챙! 퍽!
“악!”
놈들의 손에 들린 흉기를 자르거나 튕겨 버리고 이어서 몸 어딘가를 찍어서 전치 15주정도 만드는 두 가지 동작이 거의 하나처럼 이루어진다. 나 야 정글이 움직임에 맞춰 손동작을 따라가 주는 정도지만 내게도 어느 정도 손맛은(?) 느껴진다.
번득! 칭! 퍽! 번득! 챙! 퍽! 번득! 칭! 퍽! 번득! 챙! 퍽! 번득! 칭! 퍽! 번득! 챙! 퍽!
훗! 앞으로도 이렇게 단순한 반복 동작이 필요할 땐 정글이를 시켜도… 응?
번득! 서걱!
“으허헉!”
내가 누굴 말릴 틈도 없이 회칼을 꺼내 든 놈의 회칼과 몸이 동시에 베어졌다.
에구. 우리 정글이가 칼과 살기에 민감하게 반응해 버리는구만. 물론 칼 맞아 싼 놈들이긴 하지만……………
번득! 서걱! 번득! 서걱! 번득! 서걱!
말릴까 말까를 더 망설이는 사이에 전치 15주 이상과 사망 사이의 어딘가 상태가 되는 놈들이 순식간에 쌓여(?)간다. 둔기류에서 칼 종류로 바꿔 꺼내든 놈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야말로 자기 무덤을 판 셈이었다.
이거, 적의 칼과 피를 본 우리 정글이가 갈수록 더 삘 받아 신명이 나는 것 같은데… 역시 일단 말리자.
– 정글아!
나는 정글도 손잡이에 다시 힘을 주어 정글이를 멈추었고, 그 사이 적들도 기가 죽어 일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흐음. 그래도 서울 시내 한복판의 고급 업소를 차지한 조직답긴 하군. 바깥 어디선가 더 인원이 들어와 보충되고 있으면서 두목급들도 아직 비교적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어.
“어디서 이런 괴물이… 조회장이 보냈나?”
먼저 입을 연건 오늘 내 목표인 두목이었다. 온갖 험한 꼴과 산전수전 다 겪은 자답게 나름의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도 했다.
“조회장? 그게 누구야?”
“…조회장이 보낸 게 아니라면 여긴 왜 왔나?”
그래. 니들도 이유는 알아야겠지?
“지금으로부터, 대략 2년쯤 전! 그 때도 당신은 이 업소를 차지하기 위해서 부하들에게 여길 습격하게 했었지? 기억나?”
두목은 잠시 2년 전일을 더듬어 보는 것 같았지만 나와 관련된 일을 기억해 낼 리는 없었다.
“그 당시, 난 군대에서 뺑이 치다가 감격적인 첫 휴가를 나왔었지. 그리고 너무나 보고 싶던 친구와 함께 여기 이 건물 맞은편에 있던 포장마차를 찾아 들었었지. 친구는 내게 맛난 쐬주와 꼼장어 안주를 시켜주었고. 정말 최고의 휴가 첫 날이었어.”
아아~ 그 날의 훈훈했던 포장마차 분위기, 쐬주 잔의 상큼한 감촉과 꼼장어님의 아름다운 살결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러~언데!”
썅~ 말하며 기억을 되살려보니 새삼 그 날의 슬픔과 분노가 솟구친다. 좀 전엔 내가 왜 정글이를 말렸지?
“왜 하필! 그 때!”
나도 모르게 목청이 높아지며 앞으로 나서자 놈들도 다시 우르르 달려들기 시작한다.
“니들은 왜 패싸움 질이야! 거리 난장판 되고! 포장마차까지 뭐 날라오고! 내 쐬주 병 깨지고! 주인아저씨 튀고! 꼼장어 접시 엎어지고! 내 피 같은 쐬주와 꼼장어!”
여기까지도 충분히 열 받는 일이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지!
“맘 약한 내 친구! 오늘은 일진이 사나운 날인가보다…하면서 집에 갔어! 난 혼자 차가운 밤거리에 빈 소주잔만을 들고 서서………”
-지소파천결(地笑破天訣)………
「주인님!」
-지파랑(地波狼)!
쾅!
바닥을 찍은 정글도, 아니 정글이가 내 분노를 대변하여 포효했다.
「우어어어어~!」
파츠츳=! 쿠콰콰앗~!
지파랑의 충격파가 사방으로 폭사되며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날았다. 실내의 모든 조폭들과 집기들이 마구 뒤섞여 함께 나뒹굴었다.
「주인님?」
-어. 그래, 몽몽. 걱정 마. 이제 좀 진정된다.
진정이 되건 안 되건, 뭘 더 할 것도 없이 한방에 정리되었군. 흐~ 차라리 진작에 이럴걸 그랬어.
원래 이런 자리에서 생사금마도결(生死金魔刀訣)까지 쓸 생각은 없었으나 막상 화끈하게 쓰고 보니 기분이 상당히 개운(?)해졌다. 나는 폭격 맞고 전멸당한 진지 분위기의 홀 중앙을 천천히 가로질러 두목급들을 향했다. 몽몽이 끼어든 덕분에 순간적으로 약간 힘 조절이 되었던 모양이다. 제일 먼 거리에 쓰러져 있던 두목 급들은 정신까지 잃지는 않은 듯 신음소리와 함께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때? 니들도 술 마시다 뭔 일 당하니까 기분 X같지?”
나는 두목들 앞에 서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니들끼리 싸우던 뭘 어떻게 지지고 볶든 니들 맘대론데… 우리 힘없고 돈 없는 서민들한테 피해는 입히지마. 또 오늘처럼 칼 든 각시탈 만나고 싶지 않으면 말이지.”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 내 앞으로 호릉~ 요몽이 날았다.
「뭐예요오. 피같은 쐬주와 꼼장어의 원한? 그것도 2년이나 지난 일로?」
-나 이런 놈인 거 몰랐냐? 뭘 새삼스럽게.
「으~ 그래도 너무했다.」
요몽은 계속 ’21세기 군시탈은 대박 쪼잔해’를 중얼거리며 날았지만 나는 벌써 다음 군시탈의 타깃을 고르고 있었다.
…그래. 결정했다. 다음 ‘블랙 타임’ 때는… 그 인간을 손보러가자.
다시 며칠 후. 또 밤이며 달리는 차 안.
「근데요, 주인님.」
나는 지금 키트 1.5호를 타고 두 번째 정식(?) 출동 중이다. 요몽은 운전대 앞의 대시보드에 턱을 괴고 엎드린 자세로 물었다.
「주인님께선 각시탈을 써도 결국 정의에 사도는 안 한다고 하셨죠?」
“당연하지.”
나는 생각을 잠시 정리해 본 후 조금 더 길게 대답해 주었다.
“요몽. 세상엔 참 많고 다양한 인간들과 사건들이 존재하는 법이야. 뭐가 정의고 누가 진짜 나쁜 놈인지조차 수시로 헷갈리는 세상에서 정의에 사 도니 뭐니 나설 생각 없어. 무엇보다… 귀찮고 싫어. 난 힘이 있지만 그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해 주려고 동분서주하고 싶진 않아. 그럴 시간 있으면 울 이쁜 대교와 뽀뽀 한 번 더 하겠다, 라는 것이 나란 놈이지.”
진심이다. 내가 왜 내 시간 쪼개서 남을 도와야 하는가. 난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각시탈을 쓴 개인적, 이기적 응징자일뿐 이다.
“어쨌든… 날 열 받게 했던 자들을 치면서 스트레스 해소가 되면 말이지, 그 건 자연스럽게 무공 수련시 잡생각을 줄여주고… 결국 프리메이슨과 의 싸움에 도움이 되는 거지.”
군시탈 활동에 약간(?) 억지스런 명분을 붙이자, 요몽은 비실비실 묘하게 웃었다.
「그치만 어제는 강도가 든 집에 뛰어들어 구해 주셨잖아요. 개인적인 원한도 없는 강도를 심히 패서 병원 보내고.」
“그거야, 잠깐 보조업무(?) 보러 가는 중에 비명이 들리니까 무심결에………….”
여기서 보조업무란 며칠 전 차안에서 화장하며 운전하다(?) 우리 차 앞에서 급정거 했던 아줌마의 차 뒷바퀴를 뽑으러 가던 걸 말한다. 또 운전 중 에 그딴 짓하며 타인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면 차를 통째로 한강에 던져 버리겠다는 경고문과 함께.
「웅~ 그리고 오늘 오전에는 교통사고 현장에서 찌그러진 차체를 단칼에 자르고 세 명이나 구해 주셨죠?」
“그거야, 대교 대신 콩나물 사러 가다가 우연히….”
물론 평소 대교가 나한테 그런 심부름을 시킬 리가 없다. 소위 ‘블랙타임’, 울이쁜 대교가 드라마 시청 중일 때는 내가 알아서 엄니 심부름을 대신 하는 것 뿐.
「음~ 주인님께서 무공수련이나 다른 바쁜 용무가 없는 시간대에 마침 대교님께서 드라마 보시느라 안 놀아 주시는 소위 블랙타임. 악당들은 이 시간에는 몸을 사려야겠고… 결국 세계 평화는 대교님께 달렸네요.」
“됐거든? 오버 하지 마, 요몽. 난 결코 정의에 사도 같은 건 안 키울 거………….”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주인님.」
“넌 또 왜, 몽몽. …뭐? 우쒸~ 차 돌려.”
잠시 후.
몽몽이 운전하는 키트 1.5호가 본래 오늘의 목적지와 관계없는 어떤 아파트 단지 부근 골목에서 멈추었다. 난 차에서 뛰쳐나옴과 동시에 공공보법 (空空法)을 펼쳐야했다. 몽몽의 보고대로 아파트의 고층에 불이 나서 창밖으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불난 집은 11층…? 소방차들이 도착해있으니 난 괜히 온 건지도… 에? 저거, 저거!
소방 사다리차가 아직 다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불난 집 바로 위층의 어느 집인가의 베란다 난간에 잠옷 바람의 여자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비명 을 지르고 있었다.
사다리 위의 소방대원들이 사다리 빨리 올리라고 밑에 무선 때리는 것 같지만 과연 우쒸! 할 수 없네!
난 공공보법을 최대로 끌어 올려 사람들 머리 위를 날아 소방 사다리차 지붕을 밟고 솟구쳐 올랐다. 그 직후, 난간에 매달렸던 여자가 무서운 속도 로 마주 떨어져 내렸다.
“으랏! 차차~!”
떨어지던 잠옷 처자를 한 손으로 낚아채 안으며 허공에서 함께 휘릭- 돌아 몸을 바로잡아 사다리 상단 공간에 착지!
와우~ 현천기공(玄天氣功)의 회천류(回流)가 아주 제대로 먹혔네?
본래 적의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을 흐트러트리거나 역공에 이용하는 기법이지만 얼떨결에 경공과 합쳐 효과적으로 쓴 셈이었다. 그로서 거의 모 든 충격이 완화되어 내가 잠옷 처자를 안고 착지한 사다리가 별로 흔들리지도 않은 것이다.
“내가 받았어요. 안심해요.”
팔 안의 처자가 감았던 눈을 겨우 뜨는가 싶더니 슈퍼맨, 아니 각시탈 얼굴을 보는 순간 꼴깍- 졸도했다.
쯧. 어둠 속에 떠있는(?) 하얀 각시탈이 뭐가 어때서…가 아니려나?
일단 잠옷 처자를 내려놓고 일어서 보니 소방대원 두 명이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어이구 수고가 많으십니다. 춥죠?”
짐짓 인사말을 건네 보았지만 뭐라 반응을 못하신다. 그 사이 사다리는 계속 작동해서 불난 층 가까이 올라와 있었다.
“가, 각시탈?”
“아, 예, 뭐. 암튼 오늘은 다들 천천히 들어오라고 하세요.”
“예?”
길게 설명할 틈이 없어서 일단 그냥 몸을 날렸다.
와장창!
불난 집의 창문을 깨며 뛰어드니 자욱한 연기 속의 희미한 불길들이 일거에 화악 폭발적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백 드래프트, 역류 현상! 알아, 안다구!
난 착지와 동시에 내 몸은 이미 크게 회전을 시작하고 있었으며 사방에 도기(氣), 아니 도풍을 날렸다.
쿠와아아아아-
실내의 유독 연기는 물론이고 창문이 깨지며 들어왔던 공기까지 일거에 날아가 버리며 불길이 거짓말처럼 스러져 버린다.
일시적이라도 산소가 차단되면 불이 꺼질 수밖에… 흐~ 평소에 ‘위기탈출 넘버원’처럼 유익한 TV프로를 애청한 보람이 있구먼.
단숨에 화원을 제압했으나 아직 숨 돌릴 틈은 없었다. 난 온갖 경신법을 동원하여 이집 저집, 이 복도 저 복도를 날아다니며 강제 환기로 유독 연 기들을 실외로 날려 보내야했다. 그 와중에 몇 군데의 장소에서 몇 명의 쓰러진 사람들을 발견하여 응급조치도 해주어야 했다.
하아~ 이거 웬만한 전투 상황 이상으로 바빴네.
나 같은 특수 능력자도 아니면서 이런 현장을 누비며 사람들을 구하는 119소방대원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내가 마지막 구조대상자가 있는 집의 거실에 도착하여 꼬맹이 둘을 안아 들었을 때, 소방대원들도 창문 밖으로 줄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 떨어진 잠옷 처자 말고는 대부분 내가 아니 없다고 해도 저 분들이 구출했겠지. 아슬아슬한 타이밍이긴 했지만 말이야.
“각시탈 진짜 각시탈이네?”
“어? 진짜?”
“누구…십니까, 선생님은?”
무선으로 얘기를 듣고 반신반의했었는지 다들 한마디씩 하는 가운데, 나는 꼬맹이 둘을 그들에게 넘긴 후… 잽싸게 튀었다.
잠시 후.
차안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자니까 요몽이 기다렸다는 듯 표릉~ 날아올랐다.
「정의에 사도, 안 하신다메요」
-응? 그랬지. 뭐, 방금은 그냥 지나던 길이니까 잠깐…………
「누가 봐도… 번개처럼 나타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정체불명의 신비로운 가면 용사! 딱 그 삘인데요?」
-야, 야! 그만해! 난 진짜, 진짜로 안 한다니까?
난 두 손과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 보인 후에야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요몽이나 그 누가 뭐라해도 내가 군시탈이 된 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 원한 정리를 통한 스트레스 해소다. 난 그저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일 뿐이란 말이다.
얼마 후. 서울 시내 모처의 고급 주택가.
-쳇. 시간이 좀 빠듯하겠군.
예정 외의 사고 처리하느라 블랙타임이 많이 흘러서 대교에게 돌아 갈 시간을 생각하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차에서 나오자마자 신형을 몇 번 날려 밤하늘을 가른 끝에 목표 저택의 담장 위로 내려앉았다.
-하긴, 저 안의 인간 얼굴 길게 봐 봐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 리가 없긴 해 본래 짧고 굵게(?) 끝내야 할 일이고 말이지.
「후후~ 그래도 저 인간은 주인님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나 봐요.」
이번 원한관계는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몽몽과 요몽도 안다. 이 저택의 주인은 현직 국회의원인 김모씨! 몽몽이 스캔해 주는 집안 거실에 그 가 혼자 앉아 있었다. 난 요몽몽을 시켜 조사한 저 김모 의원의 ‘비리와 추문 보고서’를 어제 미리 보냈고, 오늘 이 시간쯤 내가 직접 방문하겠다고 예고해 두었었다.
다른 식구들은 알아서 외출 시켜놓고 보디가드들만 몇 명 짱박아 놨군. 그거야 어쨌든…………
나는 훌쩍 담장에서 내려와 대문 옆 지하 차고 앞에 섰다. 내가 높은 담장 위로 먼저 갔던 건 만화 각시탈 분위기 한 번 내 본 거고, 진유준 식은 여 기부터다.
기이이잉-
몽몽이 무선 작동되는 차고 문을 해킹해서 열자 시커먼 중형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우우우웅~
오. 엔진음 좋고. 나도 의원님 전용 고급차 한 번 몰아 볼까나?
-몽몽. 몽드폰.
“…여보세요?”
전화 무지 잽싸게 받는군.
“어, 안녕하쇼. 어제 받은 건 잘 감상하셨소?”
“…누구냐, 넌.”
“내가 누군가보다, 지금 어디 있는 지가 더 중요할 텐데?”
“뭐?”
그와왕 콰직!
급 후진으로 차고를 빠져나와 일정 거리를 확보한 후, 가속페달을 힘껏 밟아 주었다.
우와왕~! 콰꽝~!
대문을 통째로 밀고 마당 안으로 진입성공.
“차 힘 좋네. 그래서 넘지 말아야할 선도 잘 넘나봐?”
“뭐, 뭐야 이건! 대체 무슨 짓을… 누구냐, 너언!”
“닥치고, 좀 비키쇼. 마저 들어갈 거니까.”
“뭐, 뭣?”
쿠와아아아앙~!
미친 듯 마당을 가로질러 돌진하자 마당 쪽으로 난 거실 창가에 서있던 김모 의원이 황망하게 대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꽝! 와장창! 쾅! 꽈직!
와우~ 정말 거실까지 들어와 버렸다. 집 구조를 보고 가능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훗! 다들 정신줄 놨군.
김의원은 물론이고 숨어있던 방에서 나온 보디가드들도 주저앉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차문을 부수다시피 열고 나와서 김의원 앞에 섰 다.
“가, 각시탈?”
드라마 보는 건 보디가드들 중 한 명 정도인 모양이군. 암튼……………
“20XX년 XX XX일. 당신이 탄 이 차는 멋대로 중앙선을 넘어서 교통사고를 냈었지.”
얼마 안 된 일인데도 잘 기억이 안 난다는 표정이로군. 역시 정치꾼다워.
“하긴, 나랏일에 바쁘신 몸이니 중앙선 좀 넘고 교통사고 좀 났어도, 바삐 가 버리셨겠지. 나랏일에 너무나 바쁘신 몸이니 사고처리도 빨리 빨리 피 해 차에 덤터기 씌워 끝내고, 언론 틀어막아 기사 내려, 대충 조용히 넘기고… 다아~ 나랏일에 바쁘신 몸이다 보니 우리 서민들은 알아도 그냥 대충 화 좀 내다가 또 그냥 잊고… 그럴 줄 알았지?”
“그・・・ 그 사고 차 운전자인가?”
“그 불쌍한 서민 운전자? 에이~ 멍청하시긴. 일반 서민이 단 며칠 만에 이런 걸 확보할 수 있겠어? 그 누가 비호해 주고 싶어도 안될 만큼 당신 비 리를 완벽하게 까발린 이런 자료말야!”
난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들었고, 이건 당연히 어제 보냈던 것과 동일한 ‘비리 및 추문 보고서’이다. 김의원의 눈이 한층 더 커지며 마른 침을 꼴 깍 삼켰다.
“허면, 넌 대체……”
“나? 그 때 도로가 막혀서 열 받았던 여러 사람들 중, 한 명!”
어이없어 하면서 믿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이지만, 달리 더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그 당시 난… 내 친구 성원이와 준엽이가 양아치들에게 당해서 구급차를 부른 참이었었다. 다행히 구급차가 늦었다고 내 친구들이 위험해 질 상황 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난 무지 빡 돌았었지. 당근, 난 그런 일 절대로 잊지 않는 인간이고 말야.
“왜? 길 막혀서 열 받아 본적 없어? 아아~ 맞다. 당신은 길 막히면 중앙선 넘어도 되는 귀하신 몸이지? 하지만 앞으론 명심하고 사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이 하찮게 여기는 서민들 중에는 나처럼 열 받으면 무서운 서민이 있다는 걸 말야.”
쯧. 이 몸이 귀중한 충고를 해 주고 있는데도 눈은 계속 내 손에 들린 자기 비리 뭉치만 힐끔거리는군.
“사실 당신이 선거 때 지껄였던 반의반에 반만큼이라도 되는 인간이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진 안했을 거야. 근데,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지만, 댁은 먼지 나는 정도가 아니라 먼지 덩어리 그 자체야, 아주 그냥.!”
“이, 이보게. 자꾸 그러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해보게. 그 때 일로 뭔가 피해 본 것이 있으면 내 다 보상해 줌세.”
정치꾼답게 협상을 걸어오면서… 보디가드들에게는 슬쩍 날 잡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목소리로 봐서 젊은 친구 같은데, 이런 일로 장래를 망치면 되겠나?”
“내 장래?”
나는 피식 웃으며 빡!빡!빡!빡! 딱 네 번의 정글도 꿀밤(?)으로 보디가드들을 전멸 시켜주었다.
“댁 장래나 걱정하쇼.”
“잠깐! 이건 내가 시킨게 아냐!”
「주인님! 일단 뒤로 세 걸음만 대피해 주셈!」
응? 요몽?
“오해하지 말게! 진정하고 얘기 좀 해. 그냥 가면윽?! 허푸! 어푸!”
흠? 불도 안 났는데 스프링쿨러가 작동했어?
부릉~ 부릉~ 부우우웅~
내가 몰고 들어 온 차에 다시 시동이 걸리더니………….
부와아앗~
바퀴가 고속으로 헛돌며 바퀴 밑의 가구 조각들이 김의원 쪽으로 마구 날았다.
“으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어쩔 줄 몰라하는 김의원을 뒤로하고 마당까지 물러났다. 거실 천장에서 또다시 심상찮은 진동음이 느껴졌 기 때문이었다.
쿠콰콰콰콰~
오우. 시스템 에어컨이 미치면(?) 저렇게 폭풍 같은 찬바람이 쏟아져 나오기도 하나보네? 흠뻑 젖은 채 저런 바람을 쐬면… 아, 게다가 지금은 본 래 한 겨울이지?
-요몽, 너……….
「헤헤~ 전 그냥, 실내의 전자제어 칩들이 우, 연, 히, 오작동하기 전에 주인님께 알려 드렸을 뿐인걸요?
멋대로 인간을 괴롭히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시치미 떼는 요몽.
-음, 그래. 우연이었군.
지금은 그냥 넘어가 주자. 난 경로사상이 너무나 투철해서 상대가 아무리 더러운 인간이라도 나이가 많아서 직접 손대지 못했던 건데… 훗. 기특한 녀석.
“으~ 후에쒸! 커흡! 그, 그건, 그건 주고 가야……”
“아참. 내가 왜 귀찮게 이걸 계속 들고 있었지?”
난 잠깐 타이밍을 잰 후, 손에 들고 있던 비리 보고서 뭉치를 김의원 앞에 던져주었다. 순간적으로 밝아지던 그의 안색이 어느 순간 흠칫 굳어진다. 휘이잉~ 불어 온 바람이 보고서들을 흩날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음. 순전히 우, 연, 히, 강한 바람이 불어주네?
「엄머? 그러게요?」
“저, 저, 저, 저거, 저거 줏어! 빨리! 뭐해? 전부 빨리 주워!”
김의원 자신은 물론이고 막 깨어난 보디가드들까지 허둥지둥 종이들을 줍기 위해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바람은 계속 무정하게 휘몰아 쳤고, 누가 신고했는지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 마아치고오서~」
그 사이 많이 늘은 요몽의 군가 소리와 함께 군시탈 일당(?)의 일과가 끝나고 있었다.
20XX년 새해 첫 날, 새벽.
대교를 비롯한 사랑하는 가족들과 재야의 종소리를 듣고… 새벽에는 대교와 함께 일출을 보자는 약속을 하고… 그리고 난 잠들지 못하고… 각시탈 을 쓴 채… 이렇게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군.
내가 지금 걸터 앉아있는 곳은 서울의 이름 모를 어떤 건물의 옥상 난간이다. 최근의 군시탈 행보 때와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겠지만, 현재 저 앞의 커다란 공공기관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내 기분은 평소와 너무나 달랐다.
「저어~ 주인님.」
꽤 오래 앉아 있었음에도 요몽이 이제야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저 안의 사람들… X등급, 주인님과 직접적인 원한은 없는 사람들… 맞죠?」
-그래. 맞아. 나나 내 주변 누구와도 연관이 없지.
「근데 왜………」..
내게서 너무나 잔잔하면서도 명확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지 그 것을 묻고 싶겠지.
「아, 하긴. 제가 봐도 저 사람들은 정말 너무했어요. 그 많은 어린 학생들을 버려두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으~ 정말 이기적이고 비겁한 사람들이 에요! 주인님께서 빡 돌아 손봐주고 싶으신 것도 이해가 되요!」
-그게 아냐, 요몽.
「예?」
‘그게 다가 아니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난 요몽의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커지길 바라지 않기 때문에 혼자 속으로만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직 군대에 있을 때 일어났던 그 대형 해난사고…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이 희생된 그 사고에서… 그 어린 생명들을 내팽개치고 누구보다 먼저 구조선에 올랐던 ‘선장과 선원들… 그들에게는 수많은 언론과 사람들의 분노한 질타가 쏟아졌었지. 그리고… 그 뿐.
당시의 내 군대 동료들도 모두 빡 돌아 총 들고 쫒아가 죽여 버리고 싶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역시 그 때뿐.
나 역시 마찬가지로 당장의 내 힘든 일상에 치여 흐지부지 잊고 세월이 흐를수록 분노의 감정도 희석되어 버렸을 거야. 만약 저들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며 비겁한 인간’… 그 정도였었다면 말이지.
요몽. 저 들… 특히 선장은 말이야. 단지 무책임했을 뿐이 아니야. 구조본부와의 무선 내용을 보면・・・ 선장은 구조본부의 상황을 묻는 질문에 건성 으로 대답하며 구조대가 언제 오느냐만 계속 되물었어. 그리고 구조대가 오자 승객을 가장하여 제일 먼저 구조되었지. 그 후에 그는 말했어. ‘바다 의 수온이 차서 사람들을 물에 뛰어들게 할 수 없었다고…………….
「…주인님?」
정황은 비교적 일목요연⋯! 선장은 젊은 승객들을 걱정해 준 게 아니라, 늙은 자신의 체력을 생각한 거야. 자기가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오래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래서 모두를 배아래 객실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배가 기우는 속도를 늦추려고 한 거야. 그건… 그 짓은… 대성공…! 선장과 그 걸 따른 선원들 모두 무사히 구조! 알겠어? 저것들은 일부로! 계산하고 판단하여! 저 어린, 저 불쌍한 어린 학생들을 차가운 바 다 속에 던져 버리고 자신들만 달아나! 젖은 돈을 말리며 기뻐했던 거야!
「주인님!」
「주인님!」
정글도・・・ 아니 정글이…………?
몽몽과 요몽이 동시에 소리치며 나섰지만, 어느 사이 내 감정에 동화 된 정글도가 스스로 내 등을 벗어나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 인간이길 포기한 살인자들을 향해서.
파창!
건물 어딘가의 창문을 깨고 들어가는 정글도를 보며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정글아, 멈춰! 오늘은 아니야.
잠시 후. 정글도는 날아갔을 때만큼 빠르게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왔다. 나는 정글도를 잡고 다독거리며 진정시켜야 했고, 그제야 정글이가 쳐들어갔 던 공공기관 건물 몇 군데의 불이 켜지며 요란한 소동의 기색이 느껴진다.
그래… 너도 잘 참았다, 정글아. 오늘은 아니야. 저 더러운 살인자들… 아니, 그저 ‘유해한 물질, 병균’일 뿐인 저것들! 하지만 지금 단칼에 숨을 끊어주는 건 저것들에게는 너무 지나친 사치란 말이야.
나는 정글이를 품에 안은 채 각시탈을 벗었다.
그래. 내가 오늘 여기 온 건 군시탈로서 보다도 인간 진유준으로서 다시 한 번 맹세하기 위함이었어. 난 저 것들이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사 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난 저 것들이 다시 정상적인 인간처럼 살 수 있다고 착각할 때… 행복감을 느낄 때 그 때 찾아 갈 것이다. 난 결코 잊지 않을 거다, 그 날을
오늘 정글이의 돌발 행동은 예정에 없었지만 저 것들에게는 ‘청소 될 운명’에 대한 예고가 되었을 것이다.
「주인님!」
-알아, 몽몽.
아무리 흥분했어도 주변의 이상 징후를 못 느낄 내가 아니지. 언제부터인가 옆 건물 위에서 날 지켜보던 시선 하나와 조금 더 먼 거리의… 흠. 가까 운 거리의 누군가가 먼저 움직이는 군. 예상대로 날렵하면서도 지극히 은밀한 신법…………!
“그 하얀 각시탈이 붉게 물드는 광경을 구경하게 될 줄 알았는데..”
내 뒤로 착지하자마자 낮게 지껄이기 시작하는 저 남자.
“뭐, 진유준씨의 그 칼이 이제 독립성까지 갖춘… 어엿한 마병기(魔兵器)임을 확인한 것만도 큰 수확이긴 합니다. 우리 업계에서도 그 정도 수준의 마병기 구경하기는 쉽지 않거든요.”
항상 검은 양복차림에 가늘게 웃는 얼굴의 이 묘한 남자의 이름은 ‘마신일’.
“아, 제가 너무 눈치 없이 굴었군요. 소위 빡돈 상태의 진유준씨께.”
“…뭐. 됐슈. 어차피 오늘은 더 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세계정화재단(世界淨化財團)이라는, 우리 지하무림 이상으로 수상한 비밀조직의 핵심 멤버라는 이 남자. 사실 난 이 남자가 그리 싫지는 않다. 뭔가 모를 ‘위험한 느낌’ 때문에 항상 거리를 두게 되긴 하지만 말이다.
“그보다, 마신일씨가 이런 시간에 여기 온 건・・・ 나 때문은 아니죠?”
내가 또 하나의 기운이 느껴지던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묻자, 마신일은 장난스럽게 딩동댕~ 소리를 냈다.
“정답입니다. 오늘 저의 업무는 바로 저 분… 최근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은거 중이던 ‘토착신’의 외유 근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뭐? 토착・・・신? 신발 말고 진짜 그, 신(神)? 저・・・ 검은… 기운 덩어리가?
예의 검은 기운은 좀 전에 마신일이 있던 건물 너머로 50여 미터 정도 더 떨어진 지점의 송전탑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마신일의 말에 놀라 내 공을 좀더 눈에 집중해 보려니까 그쪽에서 먼저 스윽- 움직여 날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는 건가? 점차 다가오면서 검은 안개 같은 기운이 흩어지며 그 안의 더 짙고 구체적인 어떤 형체가 마치 검은 깃발이 바람에 춤추 든 듯한… 장포자락…? 검고 옛스런 복장의 여자…? 뭐야, 이 어이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이건……
“검은… 선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마신일이 ‘땡~’소리를 낸다.
“아, 신이라고 했죠? 그럼 신녀?”
“뭐, 물론 신급 영체의 성별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르지요.”
윽! 설마……………
“하지만 저 분에 대한 역사적 기록에는 일관되게 남신으로 묘사되어 있답니다.”
이런~ 젠장맞을! 옛날 사람들은 다 눈이 삔겨? 저게 어딜 봐서 남자냐!
「엄머! 엄마!」
아니나 다를까, 요몽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고, 문제의 예쁘장한(?) 남신께서 우리 10여 미터 앞까지 도착하자 아예 뒤집어(?)진다.
「세상에! 세상에나! 어쩜! 원판씨 못지않은 미모에 애잔하고 신비로운 느낌은 오히려 능가하는… 아니, 아니 그렇다기보다… 원판씨가 만의 하나 뭔가 잘못되어 영혼상태가 된다면… 그럼 딱 저런 모습이 될 지도 모르겠어요. 그쵸, 주인님! 그쵸? 그쵸?」
쯧. 인간계의 원판도 모자라서 오컬트 계 최강의(?) 꽃돌이 등장…인 건가?
“오랜만입니다.”
마신일이 먼저 정중하게 상체와 고개를 숙여 보이자 심히 예쁘장한 토착신도 마주 예를 표한다.
“3년 전, 호불산(狐佛山)에서 만났을 때보다 많이 좋아 보이십니다. 역시… 당신의 그 분을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이겠죠?”
…내참.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와 홍조를 띄우며 살포시 눈을 내려 깔고 고개를 숙이는 저 모습…! 뭔 남자의 자태(?)가 저러냐구! 정말이지 보는 것 만으로도 같은(?) 남자로서 짜증이 젠장. 이상하잖아, 이거. 왜… 원판 때만큼 짜증이 나질 않는 거지? 사실 짜증이 나긴 나는데 그러면서도 한 편 으로는 왠지 그런 마음이 저쪽에게 미안하다는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하고……………
왠지 난감한 기분으로 뒷머리를 극적이고 있자니까, 문득 토착신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렇다고 내게 뭐라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고 나 역시 딱 히 할 말이 없어서 우리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 지금 나한테 고개 숙여 인사한거야?
반사적으로 나도 고개를 숙여 보이자, 심히 예쁘장한 토착신은 마신일과도 조용히 목례를 나눈다.
지금 가는 분위기? 뭐야. 이렇게 싱겁게?
「히잉~ 안돼요! 원판씨와 달리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르는데!」
요몽은 멀어지려는 심히 예쁘장한 토착신을 향해 날며 내게 외쳤다.
「주인님! 실체화 허락해 줘요! 제발요!」
아이돌 스타를 발견하고 돌진하는 오빠부대 선봉장 같은 요몽의 기세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말았다. 물론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서 보 안상의 문제는 없을 것 같기도 했지만 말이다.
“마신일씨. 저 사람, 아니 저 신, 말을 못해요?”
“아뇨. 그냥 좀 과묵할 뿐이죠.”
좀? 저건 심히 과묵한 거 같은데?
“그건… 그렇다 치고. 방금 여긴 뭐 하러 온 거죠? 당신과 인사하러?”
그런 것 치곤 내게도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그냥 기분 탓인가?
“아니, 저 분은 분명 진유준씨도 보러 온 겁니다.”
흠. 그럼 그 이유를 말해야지 왜 그냥 싱겁게 가?
“기본적으론 진유준씨가 자신과 같은 신인지 인간인지 궁금했겠죠. 그리고 아마도 진유준씨가 양보해 줬다고 생각해서 감사인사를 하러 온 듯 하네요.”
“…양보? 내가 무슨 양보를 했다고………….”
아? 설마?
나는 문득 뭔가 깨닫고 정글도를 잡았다. 토착신인은 검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아까 정글이가 쳐들어갔었던 공공기관 건물을 향해 날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저 토착신, 저승사자 같은 거였나? 양보? 그건 안 돼! 내가 오늘 왜 이를 악물고 참았는데! 그것들을 편히 죽게 할 순 없어!
“진유준씨의 심정과 뜻은 짐작이 되지만…….”
마신일은 내 살기가 부담스럽다는 듯 난처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굳이 ‘역신’과 다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역신?”
“예. 무서운 질병을 퍼트리는 역신(疫神) 말입니다.”
저 토착신이 그런 역신이라고?
새삼 검은 토착신 쪽을 보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용모며 분위기와 너무나 극단적으로 다른 실체였기 때문이다.
“본래 인간의 수명이란 쉽게 바꿀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진유준씨가 오늘 그들의 처단을 미룬 이유 혹은 명분. 그게 아무리 진유준씨 자신의 판단과 의지라고 해도, 사실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상위 신의 뜻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썅! 타임씨∙∙∙! 저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이 X같은 가능성!
“같은 이유로 하위 신인 저 역신의 치명적인 질병들도 저 안의 죄인들을 죽이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응? 가만?
“주어진 수명이 언제까지든… 저 아름다운 역신의 저주는 계속될 겁니다.”
그런 얘기가 되는 거였군.
나는 슬며시 정글도를 놓으며 저 심히 예쁘신 남자 토착신을 보았다. 그는 검은 날개 같은 옷자락을 펼쳐 날리며 그것들 머리 위로 내려서고 있었 다.
“저 역신이 왜 그렇게 슬퍼 보이는지 아십니까?”
슬퍼 보인다…? 아, 그거였구나.
“풀 한포기, 꽃 한 송이까지 사랑하는 심성을 가졌으나,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에 가까이 다가가면 병들어 죽게 되는… 역신의 운명…! 그래서 그는
항상 저렇게 슬프고 외로운 존재입니다.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세월 속에서 말입니다.”
그래. 그래서 내가 저 역신의 비정상적인 아름다움에 짜증을 느끼면서도 그게 왠지 미안해 졌던 거였어.
“…쳇. 다투고 말고 할 것도 없겠네요. 하지 뭐, 양보.”
난 짐짓 투덜거리며 마신일로부터 몸을 돌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저 친구(?)한테는 언제 쐬주 한 잔 같이 하자고 전해줘요. 난 튼튼해서 감기조차 안 걸리는 놈이라고 말요.”
긴 얘기는 전해 달라고 했지만, 오늘 날이 날인만큼 인사말은 직접 하는 게 좋겠지?
나는 신형을 띄워 날려 집으로 향하며 역신 쪽으로 전음을 날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슈!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분들도….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