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 75화
그런데 지금 메이라의 나풀거리는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은 어느새 이드가 카리오스를 소드 마스터로 만들어 준다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메이라, 그게 생각해 본다고….”
“고마워요, 이드… 수도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도 이드 덕인데… 카리오스까지…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말을 맺은 메이라는 이드가 채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아버님이 기다리는 곳까지 안내하겠다며 뒤돌아서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왠지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누나가… 갑자기 무서워 보이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이드의 팔에 매달려 있던 카리오스 역시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평소의 얌전한 분위기와는 백팔십도 다른, 여우와도 같은 분위기에 말이다.
“카리오스… 너도 잊지 마라… 여자들은 누구나 여우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런 이드의 말에 이해한 건지 못한 건지 모르겠지만, 카리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멍해져 있는 두 사람에게 빨리 오라는 메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드는 메이라의 안내를 받으며 궁성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눈에 비친 라일론의 황궁의 모습은 아나크렌의 황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크기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아나크렌의 황궁이 아름답고 부드러움을 강조했다면 이곳 라일론의 황궁은 웅장함과 견고함, 그리고 직선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과 여인의 조각상으로 아름다움을 드러낸 아나크렌과 달리, 이곳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모습, 신화시대의 전투를 나타낸 듯한 그림, 그리고 궁에 늘어선 커다란 대리석 기둥조차도 아주 간단한 무늬만이 들어 있었다. 어떤 것은 아무런 장식조차 되어 있지 않은 것도 서 있었으니, 뭐라고 해야 할까… 단순호치?
아마도 라일론의 초대 황제인 영웅왕 라인론의 성격이 깔끔하고 담백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쨌든 이 궁은 라일론 황제 때 지어진 것이니 말이다.
‘단순함의 미도 괜찮지… 깔끔하고, 담백한 느낌이니까….’
궁에 자주 들렀던 카리오스나 메이라와는 달리, 이드는 여기저기로 시선을 던지며 메이라를 따라 궁의 중앙쯤에 위치한 깔끔하게 조금의 멋을 주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듯한 접대실에 들 수 있었다.
접대실의 내부에는 둥근 형태의 큰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런 테이블을 따라 꽤 푹신해 보이는 의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접대실의 내벽은 꽤나 아름다운 그림이 양각되어 있었으며, 몇 가지의 화분과 분재 등이 놓여 있어 접대실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접대실의 테이블에는 아침에 보았던 케이사 공작과 바하잔 공작, 그리고 벨레포 백작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바하잔 공작이 가장 먼저 이드가 들어선 것을 보며 미소 지었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도 이드가 들어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드의 팔에 매달린 카리오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던 케이사 공작이 이드에게 바하잔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권하며 아직 앉지 않은 메이라를 바라보았다.
“메이라, 가서 여황님께 기다리시던 손님이 도착했다고 말씀드리거라.”
“네.”
케이사의 말에 대답한 메이라는 곧바로 나가지 않고 카리오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케이사의 뒤로 돌아가 뭔가를 속삭이곤 들어올 때와는 다른 문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드는 메이라가 나가는 것과 같이 케이사 공작의 눈이 반짝이며 자신에게 향하는 모습을 보고는, 듣긴 했지만 듣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예상되는 말을 생각할 수 있었다.
‘아버지, 이드님이 카리오스를 소드 마스터로 만들 수 있으시대요. 카리오스는 그걸 조르는 거니까… 이드님이라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니, 아무 말씀도 마세요, 아셨죠?’
덕분에 케이사 공작 옆으로 앉아 있던 바하잔의 의아한 시선 역시 이드에게로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그 뛰어난 실력 덕에 별로 신경 쓰지 않더라도 메이라의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메이라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바하잔이었다. 물론 그것은 케이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드 마스터라니… 자신들이 알기로는 소드 마스터로 만드는 방법은 부작용이 대단한 카논의 마법사 게르만의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이드가 말한 것이니 그것은 아닐 텐데… 소드 마스터 만드는 방법이 그렇게 많이 있더란 말인가…
그렇게 케이사와 바하잔이 마치 이드의 얼굴에서 답이라도 찾겠다는 듯이 뚫어지게 바라볼 때, 밖에서 여황의 행차를 알리는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말에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일어섰다.
물론 카리오스 역시 그때까지 붙잡고 있던 이드의 팔을 살짝 놓았고 말이다.
사라락…. 스라락…..
많은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메이라가 접대실을 나섰던 문으로 백색의 화려하지 않고 단순함을 강조한 드레스를 걸친, 30대의 검은 머리를 잘 다듬은 여성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중후한 귀부인과 주위를 압도하는 듯한 장군의 분위기를 같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이드의 눈이 반짝였다.
‘꽤 갈무리된 마나군…. 여기서는 소드 마스터 초급에서 중급 정도의 경지?’
이드로서는 이 세계에서 처음 보는 여성 소드 마스터였다.
그때 접대실로 들어서며 테이블 주위의 인물들을 바라보던 그녀가 자신이 들어선 곳을 돌아보았다.
“빨리 들어오세요, 할아버님, 이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신 건 할아버님이시잖아요…”
순간 바하잔과 이드의 머리 뒤로 매달리는 커다란 땀방울…
방금 전까지 보았던 분위기는 간데없고, 마치 10대의 소녀 같은 그녀의 말투는… 어쩐지 배신감마저 드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에서가 아닌 그녀의 말에 놀라고 있었다.
할아버님이라니……
“그래 들어간다, 인석아… 허허… 어째 여황이라는 녀석이 그렇게 채통도 없이 행동하는 거냐? 손님들도 계신 자리에… 쯧쯧.”
청수한 목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인물의 모습에 사람들의 고개는 다시 한번 갸웃거려졌다.
아무리 봐도 30대인 여황에게서 할아버님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드는 그의 모습에 눈을 큼직하게 뜨고는 약간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지금의 자리도 잊고는 그를 불렀다.
“크레비츠 씨..!”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들은 중년인 역시 고개를 돌려 이드를 보고는 반가운 미소를 띠었다.
“허허허… 여기서 다시 보는구만, 이드 군…..”
“그렇네요, 저는 그 무기점에서나 다시 뵐 줄 알았는데….”
이드의 말에 크레비츠 역시 동감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드의 손을 맞잡았다.
그런 크레비츠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손주나 후배를 대하는 듯한 훈훈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 나도 마찬가지라네, 자네를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그 모습에 한쪽에 서있던 여황은 상당히 의아함을 느꼈다.
전혀 할아버지처럼 보이지 않는 그녀의 할아버지이자 이곳 라일론 제국의 전전대 황제인 크레비츠…
그가 케이사 공작의 설명에 따라 불러들인 이드라는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용병과 알고 있는 사이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의문은 나머지 일행들에 비한다면 그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그녀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지만, 그에 더해 크레비츠라는 예상밖의 인물에 대해 더욱 의아함이 든 것이었다.
“역시 그때 마법 대회장에서 있었던 일은 자네와 자네 일행들 때문이었구만, 그렇지 않을까 예상은 했는데 말이야.”
“얼떨결에 휘말렸죠. 그런데 크레비츠 씨야말로 이곳엔… 방금 여황폐하께서 할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것 같기는 했는데… 이곳이 집이셨습니까?”
이드의 말에 크레비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황을 손짓하여 조금 다가오게 했다.
“그렇지. 하지만 이곳에서 나선 지 꽤 됐는데 이 녀석이 도와 달라고 때를 쓰는 통에 푹 쉬던 것을 접고 나온 거지. 내가 소개하지, 이 아이는 나의 손녀이자 현 라일론 제국의 여황제인 베후이아 카크노 빌마 라일론이지.”
이드는 여황을 소개하는 크레비츠의 태도가 마치 평민이 자신의 손녀를 소개하는 모습과 같은 것에 대해 살짝 미소 지으며 정중히 허리를 깊이 숙였다.
하지만 여황의 할아버지가 저렇게 소개하는데 누가 나서 따지겠는가. 여황조차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라일론 제국의 여황제 폐하를 배알하옵니다. 저는 그래이드론이라 하옵니다만 그냥 이드라고 불러 주십시오.”
여황은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이드를 보고 고개를 약간 까닥였다.
원래는 용병에게 이 정도의 예의도 필요 없겠으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소개하는 인물이 아닌가.
거기에 더해 케이사 공작의 말로는 저기 카논의 공작인 바하잔 공작과 같은 그래이트 실버급의 강자라는 믿기 어려운 말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여황과 이드의 인사가 오고 가자 크레비츠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런 크레비츠의 말투는 여황의 할아버지라는 것을 밝혔는데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네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면, 그 혼돈의 여섯 파편인가 판때기인가 하는 것을 상대한 그래이트 실버 같다는 두 명이 있다는데, 자네가 그 하나인 모양이군.”
“헤헤헤, 어쩌다 보니, 그쪽 일까지 휘말려 버렸죠.”
크레비츠와 마찬가지로 이드 역시 신분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기에 처음의 말투를 유지했다.
그 모습에 여황은 요 며칠간 크레비츠로 인해 알아왔던 두통이 더욱 거세어질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과 함께 모두 자리에 착석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모두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고는 어느새 자신의 옆자리가 아닌 이드의 옆으로 앉아 있는 크레비츠를 자신의 신분과 나이도 잠시 잊고 째려봐 준 후 좌중에게 소개했다.
“정식으로 여러분께 소개 드리죠. 이분은 저의 할아버님이시자 라일론 제국의 제 15대 황제이셨던 크레비츠 모르카오 시드 라일론이십니다.”
여황의 말이 끝나자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얼굴에 놀람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크레비츠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들의 눈에 저런 젊은(?) 중년인에게 여황 같은 중년의 손녀가 있다는 것이 믿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황제가 일행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할 이유 또한 없기에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 믿고 정중히 허리를 숙인 것이다.
“브루에 하나시 케이사, 크레비츠 선 황제 폐하를 배알하옵니다.”
케이사 공작을 시작으로 좌중에 있던 나머지 세 명 역시 허리를 숙여 보이자 크레비츠는 대충하자는 듯이 앉으라고 손짓을 하며 간단한 인사를 받았다.
이어 그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앉자 여황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할아버님의 모습 때문에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할아버님의 외형은 전혀 나이에 맞지 않으신데 그것은 할아버님께서 초대 건국황제인 영웅왕께서 이루셨다는 그래이트 실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여황의 말에 좌중으로 찬탄이 흘러나왔다.
바하잔 역시 멀뚱히 크레비츠를 바라보았다.
바하잔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자신처럼 그래이트 실버에 달해 젊어진 사람을 말이다.
“지금의 자리 또한 할아버님께서 여섯 혼돈의 파편과 상대한 두 사람을 직접 보고 싶다고 하셨기 때문에 만든 것입니다. 두 분을 만나봐야 그 여섯 혼돈의 파편의 실력이 짐작이 가시겠다고 말입니다.”
여황이 그렇게 말을 끝맺자 크레비츠가 아까와 같이 장난스런 말을 한마디 던졌다.
“딱딱하기는….”
“할아버님.”
크레비츠의 말에 여황이 곱지 않은 눈길로 그를 째려보자 곧바로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올려 버리는 모습이 완전히 어린애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좌중을 몇 번 바라보던 크레비츠의 시선이 정확히 바하잔에게 가서 멈춰서는 빛을 발한 것이었다.
“자네구만, 카논 측에서 온 사신이자 그래이트 실버라는 사람이. 바하잔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크레비츠 전하.”
대답하는 바하잔의 눈 역시 크레비츠를 향해 있었다.
크레비츠는 바하잔의 말을 들으며 잠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얼굴을 굳혔다.
“그런데 자네 둘이 덤벼도 힘들었단 말이지…”
크레비츠는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다시 한번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본다고 크레비츠 역시 그래이트 실버급에 든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바하잔과 이드가 별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실력을 완전히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두 명이 합공을 했는데도 고전을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