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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3화


460화

대장의 물음에 에단이 테일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테일은 에단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급히 대답했다.

“네, 있습니다. 요정이 계약을 요구하고 있는데, 다행히도 에단 선배님이 아직 계약 내용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있습니다.”

“설명해 봐.”

테일의 말은 이랬다. 일단 에단의 몸속에 들어갔으면서도 얌전한 것을 보면 잔인하거나 사악한 요정은 아닐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 요정이 계약을 요구하고 있지만, 에단은 아직 계약 내용을 말하지 않았으니 이쪽에 유리하게 계약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고위 마법사가 있었다면 계약되기 전에 요정을 몰아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들의 곁에 그런 존재는 없으니 차선을 찾을 수밖에 없다. 요정의 계약은 특별했다. 그들과의 약속은 마족의 계약만큼이나 단단하고, 강력한 것이다. 만약 에단이 어떤 말을 해서 이미 계약을 해 버렸다면 아무도 풀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계약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계약을 통해 요정을 눈 안에 조용히 격리시켜 버릴 수가 있다. 그렇게 하면 요정은 계약이 유지되는 한은 조용히 눈 안에 머무르면서 에단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정말 그걸로 되는 거냐? 이놈을 내쫓지는 못하는 거야?”

에단은 자신의 몸 안에, 그것도 눈 안에 이상한 존재를 넣어 놓는다는 사실이 끔찍이도 싫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누가 좋아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네, 지금 저로서는 그것 말고는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에단은 테일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결정은 다른 사람이 내렸다.

“해라.”

“대장! 지금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시는 거 아닙니다.”

“그럼 어쩔 거야? 시온에서 나갈 때까지 그대로 있을 거야?”

에단은 대장의 말에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혼전 중에 생기는 빛에 취해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자신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눈동자의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솔직히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다. 무엇보다 그 역시 자신이 동료의 등을 베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알았습니다. 받죠. 테일, 너한테 맡긴다.”

“아니요. 선배님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사실 방법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악영향을 없애기 위해서 계약의 제물을 준비하고, 계약 내용을 말하면 된다.

“쉽군. 그럼 두 사람은 빨리 계약을 끝내라. 나는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겠다. 계약이 끝나는 대로 바로 움직인다.”

오래 있다가는 또 포위된다. 대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대장과 대원들이 다시 움직일 준비를 하는 동안, 에단은 테일이 불러 주는 말을 몇 번이나 연습한 끝에 그대로 전해서 계약을 끝낼 수 있었다. 그 과정이 너무 간단해서 자신의 눈에 기분 나쁜 세입자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였다.

테일이 준비한 제물은 빵이었다. 에단이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자, 테일은 요정의 힘이 크지 않으니 그만큼의 의미를 지닌 것을 제물로 올리면 된다고 했다. 꼭 살아있는 생물 같은 기괴한 것이 필요한 게 아니란다. 지금 에단에게 빵은 생명을 이어가게 만드는 생명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눈에 있는 존재에게는 이 정도의 의미만 담겨 있어도 충분하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계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첫째, 계약자의 신체 내에서의 활동을 금지한다.

둘째, 계약자의 신체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금지한다.

셋째, 계약자의 정신에 대한 접근을 금지한다.

넷째, 계약자와의 접촉을 금지한다.

네 가지 계약은 그 내용들이 비슷했는데, 모두 합치면 계약자와 절대 연관되지 말라고 못을 박는 내용이었다. 마법사의 지도를 받은 깔끔하고도, 핵심을 짚는 계약이었다.

[계약… 완료.]

계약 끝에 계약의 인장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순간 눈동자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그와 동시였다. 눈에서 뻗어나간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저 멀리 어떤 것에 다가가다가 막혀서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동자는 조용해졌다. 언제 말을 했느냐 할 정도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금 전 현상이 무엇인지는 에단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기운이 날아간 방향은 자신이 봤던 거대한 결계가 있는 곳이다. 혹시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려다 결계에 걸린 것뿐일까.

하지만 지금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에단은 일단 이 일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

씨익!

에단은 자신을 바라보는 대장을 향해 웃어 보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대장이 말했다.

“잘했다. 그럼 앞장서라. 최대한 안전하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인다. 가자!”

“오!”


쾅쾅쾅쾅쾅쾅!

“일리나, 이드. 큰일 났어요! 빨리 좀 나와 봐요.”

아직 어둠이 짙은 이른 새벽이었다.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드가 일어났다. 일리나도 일어나려는 것을 두고 옷을 입고 나왔다. 그의 머리 위로 분신처럼 라미아가 내려앉았다.

[폴라본,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대련에 바빴던 이드와 달리, 라미아는 일리나와 함께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던 엘프들 중에 끼어 있던 폴라본을 알아보고 물었다.

“라미아, 큰일이야. 테이가 없어!”

[네? 그 꼬맹이가요? 언제요?]

“어젯밤부터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 같아.”

마을 제일의 개구쟁이. 테이를 소개하는 라미아의 말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마을에서 사라졌다고? 이드는 갈무리하고 있던 기운을 풀어냈다. 무극신기(無極神氣). 이드가 가진 힘의 본질이다. 지난 팔 년간의 수련으로 식이 아닌 의로서 운용이 가능해진 무상한 기운이다. 그 힘이 눈앞에 선 폴라본을 감싸고 지나갔지만 그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기운에 특히 민감한 엘프인데도 말이다.

바람에 실려 마을을 가득 덮은 무극신기를 통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어수선한 상황이 느껴졌다.

“다른 분들도 모두 일어난 것 같은데, 결계 안을 전부 찾아 본 건가요?”

“마을 안은 다 찾아봤고, 지금은 마을 외곽부터 결계까지 수색 중이에요.”

그를 위해 마을의 모든 엘프가 동원된 상태라고 했다.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엘프에게 있어서도 어린아이들의 안전은 첫손가락에 꼽히는 중요한 일이었다.

“알았어요. 바로 준비해서 나오죠. 저희는 어떻게 움직이면 되죠?”

“장로님께 가세요. 저는 수색을 맡은 곳이 있어서 그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우리도 바로 움직일게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이드의 인사에 폴라본이 바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났다. 이드는 문을 닫고 돌아서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낮에는 봉인의 일로 시끄러웠는데, 밤에는 아이의 실종이다. 도저히 조용한 엘프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큰일은 아니겠죠?]

라미아는 그녀의 작은 친구가 걱정되는 것 같았다. 폴라본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침실에서는 이미 일리나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세 사람은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우디의 집을 향해 달렸다.

본래는 어두워야 할 마을은 마법과 정령의 빛으로 대낮처럼 밝아져 있었다. 평소에는 각자의 생활로 보기 힘든 엘프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있는 듯했다.

낮에 있었던 봉인의 일보다 테이가 사라진 일이 더 큰일인 듯 다들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물론, 낮에는 주요 관계자만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이드가 보기에는 그랬다. 아마도 그것은 엘프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이드는 생각했다.

이드들이 우디를 찾았을 때 그는 정령수 앞에 서 있었다. 그 앞으로는 열 명 정도의 엘프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곧 우디의 명령을 받고 마을 밖으로 달려 나갔다.

“와 줘서 고맙구나.”

“당연히 달려와야죠.”

[장로님, 테이는요?]

“아직 찾지 못했다. 무슨 큰일이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구나.”

우디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분명히 마을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일리나가 우디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

“일단 저희들도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저희들은 어딜 가면 될까요?”

“아니, 잠시 기다려라. 너희들에게는 따로 부탁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일까. 이드는 궁금했지만 일단 우디의 말대로 기다려 보기로 하고 그의 곁에 섰다. 우디는 테이가 언제 사라졌는지 이야기했다.

전날 봉인의 일로 상당히 흥분한 아이들은 밤늦게까지 놀았지만 모두 별 탈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테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모두 잠이 든 밤늦은 시간, 테이가 집을 나갔다. 테이의 부모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긴 했으나 이 장난꾸러기들이 밤 나들이를 하는 일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정령수와 결계가 지키는 마을은 언제나 안전한 곳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집을 나간 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테이를 찾아 나섰고, 마을을 모두 돌아본 후에도 테이를 찾을 수 없자 다급한 마음으로 우디를 찾아 온 것이다. 아이들의 일이기 때문에 우디는 빠르게 마을에 소식을 알려 수색에 나섰다고 한다. 동시에 자고 있던 아이들을 통해서 한 가지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었는데, 이 꼬맹이들이 봉인지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에는 무서워 잘 가지 않는 곳이었지만, 이번에 그 악마가 봉인에서 튀어나올 뻔했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게 두렵지만 강한 흥미를 유발한 것이었다. 아마, 무서워하면서도 공포 영화를 보는 심리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동안 계속된 두려움은 한순간에 쉽게 가시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어른들이 모여 한창 봉인을 보강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아이들은 결국 봉인지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이때 테이가 자신은 혼자서라도 가 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우디는 그 이야기를 듣고 테이의 밤 나들이 목적이 그것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 정령을 통해 확인한 테이의 행적도 봉인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행적이 마을을 벗어난 순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봉인지와 그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테이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마을을 벗어난 순간부터는 정령도 더 이상 테이를 볼 수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직 미숙한 테이에게 정령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재주는 있어도 정령의 시선을 피할 재주 같은 건 없었다. 어른들도 그런 기술은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령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우디는 이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침입자가 있을지 모른다.”

우디는 침입자에 의한 납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너희도 들었겠지만, 지금 시온에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몇 개의 무리가 들어와 있다.”

트론의 그림자가 남긴 본능의 조각들. 그것을 쫓아 마을 밖으로 나갔던 정령수의 가지가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어째서인지 난폭해진 몬스터와의 전투로 정신이 없어 보였는데, 정령수의 가지도 몬스터로 인해서 꽤나 고생을 했다고 했다. 일단 그들의 눈으로 확인된 것만도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두 개 무리가 있었다.

우디는 그들 인간들 중에 마을에 들어선 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라면 정령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기술이나 장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령수의 가지가 그들을 확인한 것은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또 마을을 지키고 있는 강력한 결계도 그들을 막고 있다. 이 결계가 어디 보통의 결계인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시온의 많은 몬스터를 대비해서 강력하게 만들어진 결계다.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 라일로시드가의 손을 거치며 새로워지고, 지옥 시스템상의 지옥로에서 짜낸 마력으로 강화된 상태다.

시온의 몬스터에 힘들어할 레벨로는 결계를 깨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조차 알아차리기 힘들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도 우디는 신중했다.

“그래, 강력하지. 하지만 그 강력한 결계가 어제 잠시 사라진 적이 있었지.”

“그건 한순간이었는걸요.”

“한순간이지만 사라졌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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