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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2화


469화

달깍.

베일이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 앞으로 찻잔을 놓고 물러섰다.

“고마워. 베일.”

잔을 받은 일리나가 베일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드도 그녀를 따라 인사를 건네고는 마주 앉은 에단을 바라보았다. 그는 베일이 신기한 듯 멍하니 베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는 별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페르디움에게 에단을 마을로 들이는 것을 허락받은 이드는 네 명의 엘프와 함께 남은 트와이스 대원들을 숲 밖으로 내보내 주고는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은 테이가 돌아오면서 벌써 평소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뒤늦게 돌아온 그들에게 가볍게 수고했다며 손을 들어 줄 뿐이었다. 옆에 서 있는 에단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리나를 따라 처음 마을로 들어오던 때가 생각나는 반응들이었다.

오히려 에단을 보고 평범하게 놀라는 라미아의 반응이 반가웠다. 이드는 에단을 데려온 이유를 묻는 그녀와 일리나에게 시르피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두 사람도 짧은 이야기에 반가워하는 동시에 안타까워했다. 곁에 있던 우디에게는 그가 원하는 대로 헨리를 넘겨주었다. 이드가 그에게서 들어야 할 것들은 이미 들었다. 이후 그를 구워 먹든 삶아 먹든 그것은 테이의 가족들이 결정할 일이다.

우디에게 에단의 이야기를 하고는 그의 응접실을 빌렸다.

신혼집과 같은 자신들의 집에까지 그를 들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살짝 이야기를 더하자면 세 사람을 제외하고 아직 그 집에 들어왔던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자, 여기는 당신이 조심해야 할 사람도 없으니 듣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 봅시다. 일단 당신의 정체부터 말해 봐요.”

트와이스에서 혼자 뚝 떨어져서 나온 그의 정체가 가장 궁금했다. 이드가 보기에는 트와이스 소속으로 보였는데 행동은 그게 아니었던 탓이다. 이드의 말에 신기한 듯 베일을 관찰하고 있던 에단이 이드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럼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에단 웍입니다. 현재 아나크렌 제국 특수 기사단 트와이스에 소속된 기사이며, 동시에 소드 팰러스 특수대 소속의 검사입니다.”

[…………어지간히도 특별한가 보네. 특수 기사단에 특수대. 특수가 계속 붙어.]

에단의 말에 테이의 일로 그에게 감정이 남은 라미아가 꿍얼걸렸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특수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수대에 배속된 소드 팰러스의 검사죠. 트와이스에서는 제가 소드 팰러스의 검사라는 사실을 모를 겁니다.”

쉽게 말해 스파이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어쩐지 복잡한 문제를 복잡한 입장의 인간이 가져왔다는 생각을 하며 이드가 말했다.

“그런데 그 대장이라는 남자는 당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던데 말이죠.”

숲 밖에서 에단은 이드와 함께 남는다는 사실에 트와이스의 대원들은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대장이라는 남자는 그들과 다르게, 그동안 수고했다며 에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이유를 묻는 대원들을 이끌고 시온을 떠났다.

그것은 에단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눈치가 좀 빠른 분이라서요. 지금쯤이면 아마, 다른 대원들도 알았겠지만 말입니다.”

솔직히 에단으로서는 이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었다.

트와이스에는 딱히 미련이 없었다. 물론 정들었던 몇몇의 얼굴이 떠오르기는 해도 어차피 시커먼 남자 놈들이라 섭섭함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가장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왔고, 서로의 생명을 지켜 줬던 대장과 헤어지는 것은 아쉬웠다. 물론 그건 대장의 인품과 자신과 나름대로 잘 맞는 성격도 포함해서다. 이제는 대장이 트와이스를 나오지 않는 한 같이 일하기는 힘들 것이다.

개인적으로 얼굴을 보는 것이야 어려울 것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대장에게 좋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대장, 이참에 직장 옮기지 않으실라나.’

솔직히 대장에게는 트와이스보다 소드 팰러스 쪽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에단이었다.

“그럼 당신은 시르피의 사람이라는 말이네요.”

·그렇습니다. 태대공녀께서는 전대의 분이라 현 마스터의 명령이 우선하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시르피가 우선인지 현재의 마스터가 우선인지 잠시 헤맨 듯 반 박자 늦게 에단이 대답했다. 

“그럼 이 쪽지에 적힌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시르피에 대해서 말이죠.”

이드는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탁자의 중앙으로 밀어냈다. 쪽지에 적힌 내용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실종이라는 단어에 내심 한숨이 나오는 이드였다.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에단의 말에 이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묻고 답할 정도로 서로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건 아니지만, 무엇에 대해서 묻는지는 들어볼 생각이었다.

이드가 허락하자 에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혹시 말입니다, 처음부터 태대공녀님을 이름으로 부르시던데 이드라는 이름이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이름이신지요. 그러니까 제 말은, 당신이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시냐는 겁니다.”

스스로의 생각에 흥분했는지 에단의 입에서는 두서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 본인입니다.”

“앗……!”

에단은 터져 나오던 비명을 간신히 삼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비명과 환호가 정신없이 터지고 있었다. 그것이 밖으로 나왔다면, 시온에 사는 몬스터를 모두 불러 모으고도 남았을 것이다.

에단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드가 시르피를 편하게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선대와 인연이 있다고 하면 오히려 더 예의를 차려야 했다. 거기다 황족인 태대공녀의 이름은 그렇게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의문을 가지자 거기에 따른 몇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태대공녀의 소식에 대한 반응을 보고 가능성을 하나씩 지웠고, 그래서 남은 마지막 답이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 이드의 후손이 아니라 본인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가능한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에단은 그런 예를 실제로 접한 적이 있었다. 바로 시르피였다. 그녀도 세월을 이기고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

그러고 보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한계를 넘었다고 전해지는 강자들 중에는 백 년 이상, 혹은 수백 년을 살았다는 전설들이 적지 않게 남아 이어지고 있다. 시르피의 경우는 전설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에단이 봤던 시르피는 세 자릿수를 넘긴 나이에도 60대의 모습을 한 호탕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여기사의 모습이었다. 마인드 마스터의 가르침을 이었다고 전해지는 시르피가 이렇게 젊은 모습으로 생존해 있다면, 그녀에게 가르침을 준 마인드 마스터가 살아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

물론, 이드의 액면가가 너무 젊기는 했다. 시르피도 세월은 이겼지만 세월의 흔적까지 피하지는 못했는데, 그보다 나이가 많은 이드의 얼굴이 너무 깨끗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를 이드 본인이라고 생각지 못한 것이리라.

이에 에단은 간단히 생각했다. 강자인 시르피는 세월을 이겼다. 그렇다면 그녀보다 강한 이드는 세월을 거꾸로 돌린 것은 아닐까.

에단의 질문은 그런 의문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맞았다. 자신이 지금 그 전설의 마인드 마스터를 직접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에단은 당장 아나크렌의 수도까지 뛰어가 소리치고 싶을 만큼 흥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에단은 마음속으로 모든 신을 찾고, 대장을 찾았으며, 손수건의 주인인 레이디애나를 찾아 마음을 진정시켰다.

“소드 팰러스 6급 검사 에단 웍, 다시 인사드립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로 이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마음속으로 찾은 인물들이 그의 흥분을 완전히 진정시켜 주지 못한 듯했다. 이해 못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지구식으로 말하면 주문받은 상품을 배달하러 갔더니 거기 집주인이 자신이 사랑해마지 않는 가수였다는 경우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갑작스러운 에단의 태도 변화에 이드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에단의 힘찬 인사에 반사적으로 어벙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 그래요.”

“그럼, 악수 부탁드립니다!”

“…..”

이드는 불쑥 앞으로 내밀어진 에단의 손을 보고 뒤늦게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쪽에서 에단을 바라보고 있던 라미아와 일리나의 시선이 차게 식어 있었다. 도저히 특수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기사단에 입단해 있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졸졸졸.

이드는 마법의 힘으로 각 집으로 흐르는 물에 야채와 과일을 씻는 일리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초인에 시르피에 아나크렌까지. 복잡하구나.’

흥분을 가라앉힌 에단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들은 모두 들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조용한 곳에서 나누어야 할 이야기들이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그에게 쉴 수 있도록 비어 있는 집을 내주고 마법으로 출입을 봉인해 두었다. 아직 그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시르피는 괜찮을까요?”

한숨을 내쉬고 있는 이드를 바라보던 라미아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드도 그렇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도 시르피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다지 상황은 좋지 않은 듯했으니까.”

에단은 개인적인 사견이라며, 시르피의 실종은 납치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르피의 결혼은 여타 귀족가의 아가씨들보다 한참이나 늦은 스물아홉이었다고 한다. 상대는 셰인 혼 백작이라고 했다. 이드는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그를 어려워하는 시르피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려워하더니 결국 그와 결혼을 한 모양이구나 싶었다.

두 사람의 결혼에 관심을 보이는 이드에게 좀 더 자세히 설명한 에단의 말에 따르면, 시르피에게 반해서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아나크렌 내에서도 제법 유명하다고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결혼이 늦은 데에는 이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에단은 말했다.

다름 아니라 시르피가 그 나이까지 결혼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이드가 그녀에게 전한 마인드 로드를 꼽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강력한 기사를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비전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황궁에서 그런 방법을 쉽게 손에서 놓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시르피가 시집을 가 버린다면 그것은 그대로 그녀의 힘이자 그녀 남편의 힘이 되어 버린다. 황실이 아닌 특정한 귀족 가문이 강력한 힘을 가지는 걸 황궁은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내용을 바로 전할 수도 없었다. 이드가 무공을 글로서 전하지 않고 그녀의 몸에 심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타인에게 전수하기 위해서는 그 힘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익히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시르피 본인의 의지도 있었지만, 그 수련 방법을 알고 싶었던 황궁의 전폭적인 지원에 등을 떠밀려 그녀는 오랫동안 여자를 잊고 수련에 몰두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수련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드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거기에 걸린 최소한의 시간이 바로 십오 년, 그녀 나이 스물아홉이 되었을 때였던 것이다. 가장 활기차고, 아름다워야 할 이십 대가 땀 냄새와 함께 흘러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는 순간 그녀는 저주에서 풀려난 공주처럼 셰인 혼과 혼인하고 황궁을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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