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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8화


475화

“…..”

말없이 시선이 섞인다. 단 네 존재뿐이지만 눈동자의 수는 그 십수 배다. 그중 대부분이 왕의 것이다. 이미 버락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로브스도 없다. 마지막 생존자인 버락도 자신을 삼키려 드는 히드라의 입을 피해 사력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머지 여덟 개의 머리는 이드와 사이클롭스를 향하고 있었다.

슬금슬금.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드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옆으로 비켜서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하는 머리는 하나이고, 사이클롭스를 향하는 머리는 일곱이다. 이드는 왕의 관심이 자신보다 뒤에 있는 덩치들에게 더 많이 있다고 보고 그들의 사이에서 비켜선 것이다.

그런 이드의 생각이 정확했는지 아홉 개나 되는 왕의 입에서 일제히 혓바닥이 날름거렸다.

슈르르륵, 슈르르륵.

“이런 개 같은!”

버락의 입에서 거친 욕이 튀어나왔다. 등 뒤로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부하를 챙길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이대로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참혹해서 욕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이 버락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죽어 줄 수는 없지!”

버락은 바람에 펄럭이는 로브를 끌어 당겨 가장 위쪽에 달려 있는 새까만 주머니를 뒤적였다. 이어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청소기라는 별명을 가진 마나석 폭탄이었다. 비싼 마나석을 이용하는 만큼 그 폭발력 하나만큼은 좋은 이 물건은 단 한 번의 폭발로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해 버릴 수 있는데, 주로 임무 실패시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사용했다.

다시 말해 최악의 상황이라는 판단 아래 사용하는 자폭용 폭탄인 것이다. 버락은 히드라가 자신을 무는 순간 그 입안에 이 폭탄을 던져 넣어줄 생각이었다. 죽어도 그냥 죽지는 않는다. 그게 버락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버락이 자존심을 세울 기회는 없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와 쉑쉑거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버락이 뒤를 돌아보았다.

“없잖……아.”

버락은 반사적으로 멈춰 서서 주변을 경계하다가 저 뒤에서 히드라가 아홉 개의 머리를 빳빳이 들고 커다란 덩치의 사이클롭스를 바라보는 모습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그는 히드라가 자신보다 사이클롭스에게 더 큰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드의 행동이 의도치 않게 버락을 살리는 순간이었다.

“모두………… 죽었나?”

멍하니 히드라를 바라보던 버락은 퍼뜩 생각이 났는지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부하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버락은 히드라와 사이클롭스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사실 그가 부하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가지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어이없이 부하를 잃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부하들을 따라 죽을 생각은 없었다. 버락은 손에 든 폭탄을 다시 로브 안으로 집어넣고 달려가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숲 안이 아니라 밖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기다려라. 곧 뒤따라갈 놈들을 보내주마.”

부하들이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또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지 않도록 자신을 시온으로 보낸 상관을 이 지옥으로 밀어내겠다고 버락이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용맹한 건축가, 후퇴를 모르는 거인. 최초의 거인.

모두 사이클롭스를 이르는 말들이었다. 고대에는 몬스터가 아니라 이종족으로 취급받은 적도 있다고 전해지는 몬스터가 바로 사이클롭스였다. 한번 싸우기 시작하면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을 가졌으며, 뛰어난 손재주로 무기를 만들고, 심지어 상당한 건축 기술까지 가지고 있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철저히 힘의 논리와 약육강식을 따르는 몬스터일 뿐이었다. 용맹하고 후퇴를 모른다는 말과는 달리, 이드와 함께 히드라를 보고 멈춰 선 사이클롭스는 히드라와 잠시 눈싸움을 하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그들이 그 분지 안에서 다른 몬스터와 함께 모여 살던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저 히드라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주춤주춤 물러서던 사이클롭스는 왕의 아홉 개의 머리가 앞으로 나오자 더 보지 않고 뒤로 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런!”

이드는 자신의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던 그들이 도망가는 모습에 어쩐지 못마땅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자신의 공격에는 당당히 달려들었는데 말이다. 그런 이드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물처럼 흘러 순식간에 사이클롭스를 덮쳤다.

“무슨 뱀이 이렇게 빨라!”

도망치던 사이클롭스가 소리치며 왕과 부딪혔다. 자신들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왕에게서 도망갈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두 몬스터가 가까워지자 이미 그 결과가 훤히 보이는 듯했다. 대형 몬스터로 분류되는 사이클롭스였지만, 거대 몬스터로 분류되는 히드라 앞에서는 작은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것이다.

“라미아, 히드라가 원래 저렇게 거대한 놈이었어?”

이미 사이클롭스는 왕의 몸에 가려 보이지조차 않고 있었다.

[아니요. 보통 히드라는 삼십 미터에서 칠십 미터 정도예요. 저건・・・・・・ 비정상이에요.]

눈앞에 있는 왕의 몸길이는 이백 미터에 가깝다. 최대 크기의 두 배 이상이다. 사이클롭스가 아무리 크다고는 하지만 십 미터가 되지 않는다. 이 정도로 사이즈 차이가 난다면 힘 이전의 문제다. 그냥 지그시 몸으로 내리누르기만 해도 사이클롭스는 죽어 버릴 것이다. 더구나 왕은 그런 거대한 몸을 가지고서 사이클롭스를 따라잡을 정도로 빠르기도 하다.

“정말 왕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특별하기는 하네.”

그냥 뒀다가는 보통 문제가 아닐 것 같았다. 당장 왕이 지나가기만 한 자리에 잘게 부서진 나무 조각만이 남아 푹신한 길이 만들어져 있다. 왕이 몇 바퀴만 돌아도 시온이 사라질 것만 같다.

잠깐 사이 사이클롭스는 아홉 개의 입에 물려 산산조각이 나서 왕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씹지도 않고 사이클롭스를 삼킨 왕이 몇 번 입맛을 다시고 이드를 돌아봤다. 하나의 머리를 시작으로 아홉 개의 머리가 차례로 자신을 향하는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기괴한 것이었다. 괜히 전설에 등장하는 괴수가 아닌 것 같았다.

츄릿츄릿-

한번 목표로 삼은 것은 놓칠 생각이 없는 듯, 왕은 천천히 이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이 보기에 이드는 앞서의 로브스와 같은 작고 작은 먹이였기 때문이다.

“이번엔 내 차례라 이거지.”

이드가 일라이져를 빼 들었다. 평소 아끼는 검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초라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롱소드보다 작은 일라이져다. 저 거대한 왕을 찌른다면 가죽이나 제대로 파고들 수 있을까.

우우웅-

이드는 그런 생각은 깨끗하게 접고 일라이져 위로 푸른 검기를 뽑아 올렸다. 그리고 오 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검기가 날았다. 목표는 가장 먼저 이드를 돌아본 왕의 첫 번째 목이다.

치르릉!

그러나 검기는 그 목에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못하고 검고 촘촘한 비늘을 따라 미끄러지며 사라져 버렸다.

“역시 검기로는 턱도 없겠는데.”

앞서 사이클롭스의 모닝스타에 끄떡없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정말 단단한 가죽을 가진 것 같았다. 왕은 검기가 자신을 쳤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제가 처리할까요? 고위 마법이라면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드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라미아가 말했다.

이드는 검기를 강기로 전환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처리할게. 고위 마법을 사용하면 시온이 무사하지 못해. 그렇게 할 수는 없잖아. 지켜보다가 놈이 결계 쪽으로 움직이면 그것만 막아줘.”

[알겠어요. 조심하세요.]

“걱정 마.”

이드는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자신의 몸보다 큰 왕의 머리를 바라보며 나무를 차고 뛰어올랐다. 동시에 아홉 개의 왕의 머리가 확 퍼지며 이드를 포위하고 달려들었다.

따악! 터억!

이드를 노리고 달려든 입에서는 연신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왕의 입이 이드를 물려는 순간 허공을 차 내며 급가속을 한 덕분에 왕은 번번이 허공을 물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드는 순식간에 첫 번째 머리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순간 무형검강의 은백색 강기가 왕의 콧등을 두드렸다. 치리리리리링

하지만 이드는 이번에도 왕을 베지 못했다. 촘촘한 왕의 비늘 사이로 흐르는 검은 기운을 타고 타점(打點)이 격렬히 흔들리며 검이 튕겨져 버린 것이다. 동시에 옆에서 팔뚝만 한 이빨이 빽빽이 돋아 있는 왕의 입이 치고 들어왔다.

“흡!”

펑!

이드는 한 손으로 열린 입의 위쪽을 때리며 그 반동으로 높이 뛰어올랐다. 그런 이드를 따라 순식간에 위치를 바꾼 왕의 머리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이드는 일라이져를 휘둘러 팔뚝만 한 이빨과 콧등을 두드리며 순식간에 왕의 머리보다 높이 뛰어올라 잠시 숨을 돌렸다.

“휘유~ 저놈 도대체 뭐야. 검강을 막았어?”

이드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검강을 막았다. 검강은 드래곤의 비늘에도 상처를 낼 수 있는 힘인데 그걸 막은 것이다. 물론 비늘의 강도만으로 강기를 막은 것은 아니고 검은 비늘 위로 흐르는 기운이 검강을 막은 것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가 됐든 왕이 검강을 막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미 단순한 몬스터의 수준을 넘은 거라고 이드는 판단했다.

“그럼 거기에 맞는 대접을 해 줘야겠지?”

은백의 검강이 더욱 환하게 빛을 발하며, 무형일절에 따른 검강이 폭포수처럼 왕의 전신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드는 그 뒤를 따라 몸을 뒤집어 허공을 차고 왕을 향해 날아갔다. 그런 이드의 손에는 세 배나 커진 일라이져가 쥐여 있었다.

크르릉—

왕은 자신의 힘이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잠들기 전에는 엘프들의 빛나는 검에 의한 공격에 상처를 입었는데, 지금은 말짱했다. 지금도 허공에서 떨어지는 은빛 소나기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왕은 가슴에 품은 힘을 전신으로 뿜어내며 은빛의 소나기를 피한 뒤 이드를 향해 입을 벌렸다. 떨어지는 감을 받아먹겠다는 모양새였다.

“흥, 네 맘대로 될까 봐? 목구멍에 구멍을 내주마!”

이드는 자신을 향해 벌어진 세 개의 벌건 아가리에 콧방귀를 뀌며 일라이져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왕도 그렇게까지 단순한 괴물은 아니었다. 세 개의 붉은 목구멍이 순간 검게 물들며 검은 기운이 이드를 향해 뿜어져 나왔다.

[조심해요, 이드. 브레스예요!]

라미아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히드라가 별걸 다 해. 무형기류!”

이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전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은백의 검강이 미세하게 쪼개져 흩어지며 은백의 안개로 변했다. 이 안개는 절정의 검막과 같은 것으로, 새까만 히드라의 포이즌 브레스를 막아낼 수 있었다.

이드가 브레스에 피해 없이 날아오자 곧 브레스가 멈추고 왕의 붉은 아가리가 닫혔다. 동시에 앞서 날아간 무형일절이 왕의 전신을 두드렸다. 왕의 목을 두드린 검강은 비늘을 따라 흘러내렸고, 몸을 두드린 검강은 검은 기운을 깨고 몸에 작은 상처를 남기고 사라졌다. 하지만 워낙 거대한 덩치여서 상처는 크게 표시가 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미 짐작한 일. 이드는 무형일절의 결과를 무시하고 양 옆으로 달려드는 왕의 머리를 쳐내고는 눈앞으로 다가온 첫 번째 머리에 무형대천강의 힘을 내가중수법의 형태로 쏟아냈다. 순간 내가중수법에 당한 머리가 아래로 떨어지고 나머지 입이 열리며 비명을 토했다. 끄에에에엑!

‘이건………… 통한다!’

이드의 입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드는 떨어지는 순간에도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 첫 번째 머리의 목을 완전히 부숴 놓았다. 왕의 힘은 강하고 몸은 단단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속을 부수는 고급 기술에는 대응할 수 없을 거라는 이드의 생각이 제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왕은 고통에 다시 비명을 질렀고, 이드가 몸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몸을 굴려 이드가 몸 위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왕이 몇 바퀴 구르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축구장 몇 개 크기의 공터가 만들어졌고, 나머지 여덟 개의 머리가 동시에 이드를 향해 시커먼 포이즌 브레스를 토해냈다. 여덟 개의 거대한 브레스가 교차하며 지나간 곳을 녹여 버렸다.

그 방향으로 도망가고 있던 작은 동물과 몬스터, 그리고 나무, 심지어 땅까지 녹아 내렸다. 이미 독에서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 이드는 상관없지만 브레스가 지나간 자리는 당분간 아무것도 살지 못하고 접근하지 못하는 죽은 공간이 될 것이다.

이 이상 왕이 날뛰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 이드가 빠르게 다가가 또 다른 머리 하나를 부숴 나갔다. 그러면 왕은 다시 비명과 함께 몸을 구르고 브레스가 사방으로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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