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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7화


494화

좋은 방이었지만 편하지 않았다. 특히 에단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연신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에게는 맹수 우리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일 것이다. 편하든 불편하든 시간은 흐른다. 서서히 해가 졌다. 하녀들이 들어와 방에 불을 밝히고 곧 저녁 만찬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왔다.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던 자작이 만찬을 준비할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손님일까. 그런 생각에 하녀들의 발걸음이 조용하다 못해 유령 같다. 움직이는 기척이 하나도 없다. 살수로 직업을 바꾸면 대성할 듯하다.

완전히 해가 지고 이쁘장한 어린 하녀가 저녁 만찬이 열릴 장소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드들을 위한 소수의 만찬이었다. 그렇다고 음식이 부실한 것도 아니었다. 각국의 유명한 요리들이 화려한 접시에 담겨 거대한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높은 천장과 기둥에는 라이트 마법이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하이탈 자작에 대한 두려움은 어디다 팔아먹고 에단은 식탁 위의 요리를 보고 연신 침을 삼키고 있다.


뒤이어 집사를 앞세우고 자작과 중년의 기사가 들어섰다. 그는 스스로를 골드로드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라고 소개했다. 골드로드 기사단은 하이탈 자작가가 보유하고 있는 기사단이었다. 길 비얀이라는 이름의 기사는 서글서글하게 웃는 모습으로 일행들과 악수를 하며 호감을 보였다. 옷의 칼 같은 주름과 화려한 장식, 그리고 깐깐해 보이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겉모습으로만 봐서는 웃음보다는 깔보는 시선이 어울리는 인간이었다.

이드는 그의 행동을 보고 그가 하이탈 자작에게 무언가 언질을 받았을 거라 생각했다.

동시에 상황이 정말 우습게 돌아간다 싶었다.

단순하게 보면 다른 맘을 품고 숨어든 암살자들과 인재를 알아보는 영주로도 보일 것이다. 어쩐지 자신들이 악당이 된 것 같아 손해 본 느낌이 드는 이드였다.


“자네는 초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찬이 거의 끝나갈 무렵 붉은 와인을 들고 하이탈 자작이 물었다.

이드는 일전 라미아가 초인에 대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글쎄요. 저는 신의 변덕이나 실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쯧, 그렇게 답을 회피하는 자들도 있지. 아니면 답을 구하기를 포기했거나 말이야. 하지만 그래선 안 돼! 명심하게. 우리 초인은 선택받은 존재들이야. 바로 이 세상과 신들에게서 이 세상의 새로운 지배자로 선택받은 존재! 나는 그것이 바로 우리들 초인이라고 생각하네. 우리는 인간보다 더 강하고, 빠르고, 특별해. 초인이 어째서 생겨 났을까? 명심하게. 이유가 없는 탄생은 없는 거야. 다른 종족 중에서 초인이 나타났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어. 오로지 인간 중에서만 초인이 태어난 것은 그만큼 큰 뜻이 있다는 소리와 같아.”

열정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친 하이탈 자작은 이야기가 끝나자 일리나를 향해 실례했다며 무례를 사과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정말 자신이 무례했다고 생각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일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넘겼다.

엘프인 그녀의 입장에서 하이탈 자작의 주장은 이전의 인간들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이 대륙에는 수없이 많은 종족이 살고 있으며, 인간이 감히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종족도 있다. 인간도 그들을 인지하고 그들이 있는 곳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신들을 대륙의 지배자라고 칭한다. 그녀와 같은 이종족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들이 자신의 땅이라며 엘프와 싸우는 것도 아니고, 같은 종족끼리 서로 피 흘리며 싸우는 일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분명히 명심하게. 우리들 초인은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들임을 말이야.”

식사를 마치며 자작은 다시 한 번 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초인에 대한 우월 의식이 아주 쩔어 주네요.]

만찬이 끝나고 늦은 밤, 쉴 방으로 안내 받으며 라미아는 자작의 주장에 대한 핵심을 그렇게 일축했다.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에단을 바라보았다. 하이탈 자작이 이드를 바라보며 열심히 떠들었지만 사실 삽질이다. 초인이 아닌 이드를 향해서 그렇게 떠들어 봤자 이드에게는 헛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진짜 초인인 에단이 듣기에는 어땠을까?

“자작의 말, 초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해?”

에단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미친 소리로 생각합니다. 전형적인 초인병입니다. 거기다가 상당한 중증으로 보이는데요. 저건 고치지도 못하지 싶습니다.”

에단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초인병은 크게 설명이 필요 없다. 앞서 자작이 이야기했던 그대로 생각하고 있는 초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신은 특별하다고,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귀족들보다 평민이나 노예 신분이었다가 각성한 초인에게서 많이 보이는 증상이다.

병이라는 말에 일리나가 관심을 보였다.

“치료 방법이 있나요?”

“일종의 정신병이라서………… 딱히 정해진 방법은 없습니다만, 꼭 고치려고 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어떤 방법인데요?]

라미아가 재촉했다.

“초인들이 투입된 전장에 세우는 겁니다. 그곳에서 싸우다 보면 그런 웃기는 생각은 깨끗하게 사라지거든요.”

이드가 에단의 대답을 듣고 웃었다.

“크크큭!”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방법이기는 했다. 에단의 말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다 보면 초인이 선택을 받은 존재인지, 신들의 장난감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게 된다. 누구라도 목이 잘리고, 심장에 구멍이 뚫리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팔, 다리, 배에 상처가 크게 나도 많은 피를 흘려 죽게 된다. 같은 초인이 아니라 일반 기사나, 평범한 병사의 창에 찔려 죽을 수도 있다.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곳에 와서는 입이 삐뚤어지고, 혀가 꼬이지 않는 한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드는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그가 창가로 다가가 하얀 커튼을 살짝 열어 밖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자작이 초인병이든, 부자병이든 무슨 상관이야. 우린 놈의 목을 노리고 왔는데. 죽으면 그런 거 다 소용없어. 해도 졌으니 천천히 움직여 봐야겠다.”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이번엔 혼자 움직인다. 일리나, 이번엔 방에서 기다려 줘요. 라미아, 두 사람 좀 부탁해.”

“조심해요. 이드.”

[맡겨 두세요.]

“……전 뭐 없습니까?”

이드의 말에 답하는 일리나와 라미아의 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던 에단이 말했다.

이드가 그 말을 듣고 에단을 멀뚱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가 예쁘다고? 그냥 조용히 있어라.”

끼이익.

문 앞의 기척을 살핀 이드가 문을 살짝 열어 그 사이로 은밀히 몸을 들이밀었다. 

“다녀올게.”


“다녀와라.”

톰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명령하는 제리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주고 싶었다.

“대장이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요?”

“나는 밖에서 네가 억울한 일 당하지 않게 무게추 역할을 해야지. 밖에서 용병대장이 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너에게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 아니냐.”

“뭐?”

·거참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무게추 나셨네요.”

“아니, 그렇게 무게추 역할을 할 필요가 있냐는 거죠. 대장이 용병대장 직위를 내밀고 이야기하면 더 먹히지 않겠냐는 겁니다.”

“아니야. 왕눈깔 정보인 만큼 삽질일 수도 있어. 엉터리 정보라고 목을 날리려고 할지 누가 알겠냐. 거기다 산적이 거기 있다고 해도 돈을 주지 않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밖에 내가 있으면 안에서도 함부로는 못하지 않겠냐?”

개소리다.

톰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겨우 진정시켰다.

‘야, 이 빨간 문어야. 아우, 빌어먹을 새끼. 자작이 하찮은 용병 하나 죽이려는데, 누구 눈치를 봐? 그것도 이 하이탈의 주인이 죽인다는데, 쓰펄. 네가 아니라, 길드 지부장 부하라도 얄짤없겠다. 거기다 하이탈에서 가장 부유한 자작이 그깟 푼돈이 아까워 돈을 안 줘? 자작이 너 같은 줄 아냐? 아우, 이걸. 내가 진작 이따위 용병대는 나갔어야 하는 건데.’

그러나 끓어오르는 속과는 다르게 결국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톰이었다. 분명히 자신보다 모자라는 머리를 가졌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제리였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 못하겠다고 발을 빼면 저 성격에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지. 특히 용병 세계의 주먹은 광속이야. 쓰펄.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겠냐.’

톰은 결국 자신이 성 안에 들어가기로 하고 깊은 한숨과 함께 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는 정보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영주가 아니라 용병길드를 찾아가려고 했었다. 길드가 이 정보로 산적을 잡게 된다면 하이탈에서 길드의 위치가 확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엉터리 정보였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다. 용병끼리의 일이기 때문에 가벼운 벌금이나 잔소리 정도로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이번 일의 핵심인 엘프 일행이 영주의 부름을 받고 성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순간 자신들이 가진 산적에 대한 정보가 똥이 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산적과 한패가 아니라면 저들이 먼저 산적에 대해서 영주에게 꼰지를 수도 있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톰과 제리는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성으로 달렸다.

설마 제리가 자신을 성으로 들여보낼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쓰펄. 두고 보자. 내가 이 빌어먹을 용병단은 꼭 그만두고 만다. 내가 네 개떡 같은 성질이 무서워서가 아니고, 그래도 같이 칼 밥 먹었던 놈들이 생각나서 움직이는 거야. 분명히 알아 둬라.”

톰은 천천히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다가가다 슬쩍 제리를 돌아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좀 더 목소리를 높여서 입을 열었다.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제가 제보할 게 있는데 말입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밑에 둘 만한 초인을 만나고, 그에게 초인으로서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실로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이었다. 술과 함께 그 여운을 즐기고 있던 자작에게 집사가 급하게 다가왔다.

“자작님, 파이온에 대한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뜻하지 않은 말에 자작이 술잔을 내려두고 앉았다.

“사실이냐?”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용병 하나가 용병대장의 심부름으로 정보를 가지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러셀 경이 그 용병의 이야기를 듣고 알려왔습니다.”

“하하하. 좋다, 좋아. 좀 더 골치를 썩일 놈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허술한 데가 있는 놈이구나. 그래, 놈은 어디 있다더냐?”

“그것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이 용병놈이 감히 정보에 대한 대가를 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명령만 하시면 러셀 경이 용병의 입을 열게 만들겠다고 합니다.”

말을 하는 집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감히 용병 따위가 자작성에 찾아와 건방을 떠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이탈 자작은 파이온의 정보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그저 즐거운 듯 가볍게 손을 저어 보였다.

“정보만 확실하다면 넉넉히 내주어라. 내 골칫거리를 뽑아내게 해 주었다면 그 정도 상은 주어야지. 무엇보다 용병이지 않느냐. 대가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하하.”

자작의 말에 집사는 얼굴을 풀고 몸을 돌려 나갔다. 그의 주인이 괜찮다면 괜찮은 것이다. 그는 충성스러운 하인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뜻하지 않은 정보에 집사는 조금 전보다 더욱 굳은 얼굴로 자작을 찾았다.

자작은 평소와는 다른 집사의 모습에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혹 가짜 정보라도 되느냐?”

“그것이 아니옵고………… 자작님, 용병의 말로는 파이온의 모습을 발견한 곳이 타국의 정보 요원들이 사용하는 안가중의 한 곳이라고 합니다.”

순간 집사의 말을 전해 들은 자작의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그럼 이번 일이 파이온 놈의 단순한 발악이 아니라는 말이지 않느냐!”

말과 함께 그의 눈에 곤혹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정말 타국의 힘이 관여되어 있다면 그쪽으로 자신의 정보가 흘렀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집사의 보고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옵고, 그것을 확인하는 중에 오늘 저녁 만찬의 손님들이 안가에 들렀던 적이 있다는 이야기 또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하하.”

순간 딱딱하게 굳었던 자작의 얼굴이 풀리며 어이없는 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그의 눈가로 웃음과 반대되는 붉은 살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이거 내 꼴이 우습게 된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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