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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3화


500화

짧은 역적모의를 끝내고 이드와 에단은 대장의 안가를 찾았다. 티티와 함께 자작의 처리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안가 앞에 바글거리는 수백 명의 인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드와 자작의 전투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안가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그들과 달랐다.

우선 모두 손에 손에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팽팽한 긴장과 살기가 아슬아슬하게 공기 중에 흐르고 있었다.

‘이거 뭐냐?’

이드가 에단에게 눈짓을 해 보지만, 에단이라고 아는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에단이 양손과 어깨를 들어 보였다.

이드가 어깨에 메고 있던 티티를 바닥에 내려놓고 현장을 살폈다. 그러자 몇몇 눈에 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대장을 포함해서 벤을 넘겼던 동문 수비대장과 일락이라는 용병길드의 부지부장.

특히 대장과 동문 수비대장은 각자 뒤로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로 대치하고 서 있었다. 이드가 대장의 뒤에 서 있는 복면들을 가리키며 에단을 바라보았다.

“저 복면들 혹시 아는 사람들이냐?”

“본국에서 새로 파견한다던 인력인 것 같습니다.”

에단은 복면인들을 살피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영주성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본국 인력이 대장과 합류하다가 걸린 게 아닌가 싶은데요. 외곽에서 용병들이 포위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용병길드가 세워지면 해당 지역의 지배자와 서로 방위 협약을 맺는 것이 보통이다. 영지에서는 길드의 편의를 봐주고, 길드에서는 만약의 때에 영주의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때문에 실제 영지전에 있어서도 해당 영지의 길드 존재 여부가 중요한 고려 사항이기도 하다.

지금도 눈에 보이는 모든 용병들이 나서고 있었다. 저건 돈으로 고용해서 벌어질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기사들 자존심에 병사들까지 데리고 왔는데 용병을 다시 고용할 이유도 없었다.

영주를 공격한 일당이라는 판단에 따라 지부장의 명령으로 용병들이 무기를 들었다고 에단은 생각했다.

“음, 결국 우리 때문이라는 거네?”

이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사실 에단의 추리 내용은 틀렸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이드의 말대로였다. 설마 이드에게 원한을 가진 용병이 나서서 파이온에 대한 정보를 팔았을 거라고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정확히는 마스터 때문이죠.’

에단은 이드의 말을 자체 필터링을 통해서 들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작과 그렇게 요란하게 싸우지만 않았어도 도시 전체가 깨어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다시 돌아갈까요?”

에단이 바닥에 내려둔 티티를 다시 둘러매기 좋은 모양으로 늘어놓으면서 말했다. 사실 저와 같은 상황에 몰려 있는 상대에게 뭔가를 떠넘긴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할 짓이 못 되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드의 생각은 좀 달랐다.

‘행복은 나누면 두 배가 되지만, 고생은 나눠봤자 고생밖에 안 돼. 이왕 고생하는 거 나누지 말고 혼자 하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이드는 대장을 중심으로 주변의 상황을 찬찬히 살피다가 말했다.

“전음, 오러텅이라고 했던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걸로 좀 물어봐.”

에단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오러텅을 통해서 대장을 불렀다.

ᅳ대장, 저 에단입니다!

까딱!

갑작스러운 오러텅에 놀랄 만도 하건만 대장은 눈썹만 찌푸린 채 크게 티를 내지 않았다. 베테랑다운 모습이었다. 이후 한참 동안 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만 끄덕인 에단을 통해서 이드는 대략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음. 복잡한 상황은 아니군. 다행이네.”

“심각한 상황입니다. 다행이 아니라구요, 마스터, 까딱 잘못하면 나라 간의 전쟁이 될지 모른다고요.”

에단은 상황을 가볍게 보는 이드의 말에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하지만 이드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건 상황을 심각하게만 보니까 그런 거고! 대장에게 내가 파이온과 만났던 방에 티티를 두고 가겠다고 전해.”

“…………대장이 무지하게 싫어할 텐데요.”

싫어하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다. 티티와 자작의 뒤처리를 부탁하기는 틀렸다고 판단한 에단의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영주성 습격범의 일당으로 여겨지고 있는 마당에, 앞서 영주성을 습격하고 잡힌 산적까지 안가에서 나온다면 더 이상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이드는 에단의 말에 피식 웃고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티티의 뒷덜미를 잡아 안가로 숨어 들어갔다 나와서 말했다.

“거기다 한마디 더해 주면 좋아할 거야. 영주성 지하 감옥에 포식자의 증거가 있다고. 먼저 돌아간다.”

이드는 말을 마치고 바로 몸을 돌렸다. 신경 쓰이던 일도 처리했고, 밤도 늦었으니 방으로 돌아가서 편하게 쉴 생각이었다.

에단은 멀어져 가는 이드의 등을 바라보다가 작은 감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말을 전하면 싫어하지는 않으시겠네.”

에단 역시 이드의 말에 따라 대장에게 빠르게 말을 전하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싫어하지 않을 일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귀찮은 일을 떠넘긴 때문이었다.


과연 이드가 전해 준 정보는 확실하게 대장에게 도움이 된 듯했다.

이 후 여관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통해 들려온 이야기로는 수비대장과 대치하고 있던 지라지가 갑자기 허공중에 욕설을 토하고는 칼을 맞대고 있던 수비대장과 용병길드의 두 지부장을 불러서 쑥덕거린 후 일촉즉발의 상황이 해제되었으며, 그들은 각자 이십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영주성으로 사라져 그 밤 영주성에서 꼬박 밤을 새웠단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후 통제되던 하이탈의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영주성을 공격한 사건으로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런데 소문이긴 하지만 영주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영주성이 거의 쓸 수 없을 정도로 부서졌으면서도 오히려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자연적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별별 억측들이 쏟아졌다.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이들은 대부분 평민들과 상인, 용병들로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자들이었다. 오히려 며칠이나 늦어진 일을 서두르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들 이었다.

그리고 일부 계산이 빠른 자들은 공석이 되어 버린 하이탈의 주인 자리를 노렸다. 하이탈 자작에게는 그의 작위를 물려받을 자식이 없었으며, 하이탈이 왕실 직할지였던 때문이었다. 이렇듯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움직이면서 하이탈은 반나절 만에 국경도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선택된 존재는 고사하고, 자기가 책임진 영지의 주인 자리도 확실히 못한 인물이었군.”

사과의 의미로 일락이 알아봐준 아나크렌으로의 교통편이 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길드 앞으로 나선 이드는 주변의 모습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이에요?”

이드의 곁에 꼭 붙어서 있던 일리나가 이드의 말을 듣고 물었다.

“하이탈 자작 말이에요. 자신은 선택받은 위대한 존재라고 떠벌이더니, 실제로는 자신이 운영하는 영지의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것 같아서요. 그가 죽고 영주성이 무너졌는데, 평민들 중에는 그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요.”

[뭐, 처음부터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았으니까요. 결국 그 정도의 인물이라는 거죠.]

라미아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말대로였다. 제정신을 가진 인물이었다면 초인을 포식하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그 정성으로 영지를 다스렸다면 그의 운영에 호감을 가진 영지민들이 슬퍼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죽어 버린 상황에 후회를 할 수도, 재시도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쓸모없는 일보다, 일리나는 어때요? 어색하거나 하지 않나요?]

이미 죽어 버린 인사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져서 좋을 것이 없다. 그렇게 판단한 라미아가 이드의 이야기 중에 끼어들어 말머리를 돌렸다. 이드도 그런 라미아의 생각을 알았는지 더 이상 자작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고 일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라미아의 말에 새삼 신경이 쓰였는지 길게 늘어트려 묶어 놓은 머리카락 사이로 귓불을 만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언뜻 모습을 보이는 일리나의 귀는 엘프 특유의 날카롭고 긴 귀가 아니라 둥글고 작은 인간의 것이었다.

“조금 어색해요. 기분 탓인지 바람도 잘 엮이지 않는 듯하고, 소리도 분명히 들리지 않는 것 같아요.”

이드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엘프의 귀가 단순히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꽤 많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드는 일리나의 손이 가 있는 그녀의 귓바퀴를 만졌다. 귓불과 귓바퀴를 따라 이드의 손이 허공의 어떤 부분을 타고 올라갔다.

“가, 간지러워요. 이드! 쿠쿠쿡!”

순간 얼굴을 붉힌 일리나가 웃음을 참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순간, 주변의 시선이 미묘하게 두 사람의 주변으로 모여든 것은 착각이었을까.

일리나의 어깨에 올라 있던 라미아가 발끈한 모습으로 이드의 머리로 날아와 이드의 머리를 부리로 쪼았다.

[이드 바보! 사람도 많은 곳에서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엘프에게 그건 굉장히 진한 애정 표현이라구요. 이 바람둥이!]

지금의 말을 라미아가 육성을 통해서 했다면 사람들은 엘프에 대한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을 피해 마법을 사용해서 일행들에게만 말을 전하고 있는 라미아였다.

“컥. 바람둥이라니…………. 난 그냥 일리나가 불편하다고 해서 마법에 이상이 있나 확인했을 뿐이라구. 분명 환영마법으로 보이는 모양만 바꾼 건데 불편하다고 해서 확인해 봤을 뿐이라고!”

이드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변명했지만 라미아의 잔소리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정말 이드의 행동에 화가 났다기보다는 당당하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이제 둘 다 그만해요. 전 괜찮으니까요.”

그때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킨 일리나가 다가와 라미아를 두 손으로 감싸고 품에 안았다.

덕분에 라미아가 이드를 향해 운이 좋았다는 눈짓을 보내고는 일리나에게 물었다.

[일리나, 많이 불편해요? 가벼운 환영 마법이라서 보통은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게 일반적인데, 아무래도 엘프의 신체 중 가장 예민한 부분에 마법으로 인한 마나장이 발현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냥 빼 버릴까?”

옆에서 듣고 있던 이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일리나의 귓불에 매달린 노란색 보석의 아티팩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크게 이상한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에단의 말대로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보다 이게 좋은 것 같아요.”

일리나가 이드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러운 하이탈 자작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조사를 진행 중이었다. 당연히 자작의 초대를 받은 이드도 그들의 눈에 들었다. 엘프인 일리나가 함께하고 있어서 쉽게 눈에 띈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일리나가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깊은 의심은 받지 않았다.

대신에 더 이상 사람들의 의심과 관심을 받아서는 좋을 게 없다는 에단의 의견에 따라 엘프의 특징인 일리나의 귀를 감추고 모두 가벼운 변화를 주고 나와 있었다.

무엇보다 지라지 대장과 마찬가지로 이드를 찾아 시온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대기 중인 각국의 특수 기사단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것도 사양이었다.

하지만 이드로서는 일리나의 불편함을 대가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당당히 앞에 나서는 것이 낫다. 라미아가 그런 이드의 마음을 잘 살피고는 말했다.

[일단 오늘 밤까지만 참아요, 일리나. 그럼 내가 밤에 아티팩트에 있는 마법을 보완해 줄게요. 그러면 크게 불편하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까 이드도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아요. 샘난다고요!]

“피식, 알았어.”

가볍게 핀잔을 주는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가볍게 웃었다.

그때 그들의 곁으로 한껏 피곤한 얼굴을 한 에단이 다가왔다. 

“으어~ 다녀왔습니다.”

말을 하는 에단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절절히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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