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1화
518화
에단은 양측의 신경전을 바라보며 입안이 바짝바짝 탔다.
‘빌어먹을 늙은이들, 이런 말은 없었잖아. 중요한 분이라고, 조심해서 모셔 오라고 해 놓고는 이게 뭐하는 지랄이냐고!’
에단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에 삼검왕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전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그들은 모두 전 대륙에 이름을 떨친 유명하고 유능한 기사였고, 장군이었다. 한때 막강한 권력을 가졌고, 그만큼 존경받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검에 모든 것을 바치며 그때까지 누리던 모든 것을 버리고 소드 팰러스를 찾았다. 마지막 은퇴까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영웅과 같은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기사를 꿈꾸는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소드 팰러스를 찾아오는 수련자들에게도 꼭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꼽히는 최강의 기사들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단도 존경해 마지않는 기사들이었다. 이전이었다면 감히 눈도 함부로 마주치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마인드 마스터인 이드와 만나 그와 큰 허물없이 지낸 경험이 있었다. 그러고 나니 삼검왕이 크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검왕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이름이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보다 대단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마스터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에단은 이후 이드를 볼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소드 팰러스가, 그리고 제국의 모든 기사가 당신을 간절히 원한다는 식으로 온갖 미사여구를 구사해 가면서 데려와 놓고는 정작 이런 대우를 하고 있으니.
에단은 이드에게 거짓말만 늘어놓은 것같이 되어 버린 지금 상황에 머리가 아팠다.
그런 한편으로는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 거냐고.’
에단도 이번 일을 시작하면서 직접 명령을 내려 받은 것은 아니었다. 평소와 같이 은밀하게 작전을 전해 받았다. 하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명령을 적은 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말이다. 에단은 그 속에서 분명히 급하게 이드를 원하는 분위기를 읽었다.
뿐인가. 며칠 전 이드에 대한 소식을 전할 때 그들은 확실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분명 거기에는 어떤 거짓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들이 연기였다는 듯 반대되는 반응들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리되지 않는 머리를 굴리던 에단은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설마 명색이 소드 팰러스의 기사들이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에단은 이드를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삼검왕의 모습에서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체스의 말로 보는 수도의 정치인들이 떠올랐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고, 믿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에단이 알고 있는 소드 팰러스는 이런 곳이 아니었다. 고결한 기사의 성지가 바로 소드 팰러스였다. 헌데 지금 그 소드 팰러스에서 묘한 악취가 나는 것 같았다.
‘만약 정말 그런 생각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판을 뒤집어 줄 의향이 있었다.
지금 상황에 놀라고 곤혹스럽기는 라발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이드를 향해 무릎을 꿇을 정도로 마인드 마스터를 존경하는
라발이었다.
무엇보다 에단의 보고를 받고 그들이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지금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떠나서, 이것은 명백히 초대한 손님을 맞는 예의가 아니었다.
“이게 지금…………….”
결국 라발은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묵직한 손길로 라발을 막는 사람이 있었다.
라발은 손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카일라’
그는 흑색 기사단의 단장으로, 마음이 맞는 친구이자 오랜 전우였다. 그가 라발의 손을 잡고 살짝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게 막는다고 얌전히 있을 만큼 라발의 성격은 유순하지 않았다. 라발이 카일란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손을 흔드는 순간 다급한 카일란의 오러텅이 라발의 고막을 두드렸다.
ᅳ멈춰! 라발.
─카일란, 지금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앞에 두고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 무엇보다 그는 우리가 귀하게 초대한 손님이다. 이것은 예의가 아니야. 지금 이런 행동은 기사의 수치다.
오러텅으로 전해 오는 라발의 화난 목소리에 카일란의 안색이 흐려졌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 지금은 참아라, 라발.
―이유는 무슨 이유. 이 소드 팰러스에서 기사도를 어길 만큼 중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나.
―검후님과 소드 팰러스를 위해서야.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 부탁이다. 지금은 그냥 있어라.
카일란의 말에 콧방귀를 뀌던 라발은 검후와 소드 팰러스라는 말에 조용해졌다. 소드 팰러스에 몸을 담은 후로 검후와 소드 팰러스는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었다.
라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복잡한 눈으로 이드를 바라본 후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우리야말로 먼 길을 달려와 주어 고맙네. 우선 거기 앉는 게 어떻겠나.”
이드는 일리나와 함께 테이블의 가장 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두 개의 의자에 가 앉았다. 에단은 호위 기사처럼 두 사람의 뒤에 버티고 섰다. 지금 상황에 노골적으로 항의를 표시하는 모습이었다.
이어서 함께 들어온 러셀이 준비하고 있던 차를 꺼내와 내려놓았다. 하지만 누구도 거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러셀은 창가로 가서 조용히 섰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군. 나는 마르텔 켈로이드네.”
마르텔이라는 이름의 노인은 거만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마치 내 이름을 듣는 순간 넌 내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레센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드에게 마르텔 켈로이드라는 이름은 행인 1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앞서 말했듯 이드라고 합니다.”
이드는 귀찮다는 듯 다시 자기 이름을 밝히고는 마르텔을 멀뚱히 마주 보았다.
순간 마르텔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며 그의 눈에 매서운 빛이 돌았다.
호오. 자존심도 없는 멍청이는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감히 날 모른 척해?’
마르텔은 이드가 일부러 자신을 모른 척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실제 소드 팰러스의 삼검왕은 유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만 들으면 그들의 간단한 프로필은 줄줄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마르텔 켈로이드라는 이름은 피투성이 붉은 뿔, 블러디 혼(bloody horn)이라는 이명으로 유명했다.
“알고 있네. 자네에 대해서는 이미 에단을 통해 보고를 받은 적이 있지. 그의 말로는 자네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말했다고 하더군.”
으드득.
‘빌어먹을!’
순간 두 눈을 감고 있던 라발이 턱을 덜덜 떨며 이빨을 꽉 물었다.
분노하는 것은 라발뿐만이 아니었다. 가만히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던 라미아도 마르텔을 째려보았다.
[이런 무식한 영감탱이가 어디 이드를 거짓말쟁이로 몰아! 이게 다 에단 때문이라구요. 소드 팰러스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말하더니 이게 뭐예요!]
퍼덕퍼덕!
라미아가 바락 소리치며 날아올라 에단의 머리를 두드렸다.
“우와! 잠깐, 잠깐 우왁! 내가 잘못했어. 그만해, 그만.”
“자, 자, 참아, 라미아.”
변명하기 힘든 현 상황에 에단이 그대로 맞고만 있자 이드가 나서서 라미아를 진정시켰다.
그 모습에 마르텔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티팩트인가? 실제로 하늘은 날며 새처럼 움직이는 물건은 처음 보는군.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주머니에 넣어 두거나 잠시 꺼두는 게 좋지 않겠나?”
“하하하. 그럴 수는 없지요. 그녀는 제 파트너니까요.”
“그래도 그건, 이런 중요한 자리에 대한 예의는 아니라고 보네. 그리고 조금 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자네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겠나?”
이드는 라미아의 목덜미를 살살 긁어서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건 제가 주장한 것이 아니고 갑자기 찾아온 트와이스와 에단이 그렇게 말한 것이니까요.”
이드는 말을 잠시 끊고는 빙긋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억지로 증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구요.”
“으음.”
마르텔은 작게 신음했다.
그는 이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스스로의 혈통과 출신을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자신이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이만저만한 모욕이 아닐 터였다. 마르텔은 그 일로 이드가 흥분하고, 동요하기를 원했다.
차분히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도권을 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일을 자신들의 뜻대로 풀어 나갈 단초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스스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고 한다. 에단이 그렇게 불렀을 뿐이란다. 에단이 잠입해 있던 트와이스가 그렇게 불렀단다.
무엇보다 증명할 생각도 없다고 한다.
마르텔은 감정의 동요도 없이 그저 빙글거리는 이드의 얼굴에 눈을 감았다.
‘교활한 것인가, 대담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인가.’
마르텔은 다시 눈을 뜨고 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의 가능성을 지웠다. 누구라도 자신의 출신과 혈통을 의심받는 상황에 아무 생각이 없을 수는 없다.
“어리군, 이드 군. 가문은 중요한 것이네. 그렇게 가볍게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이야. 내 듣기로 자네에 대한 이야기 중에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임을 증명할 중요한 단서가 한 가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네. 바로 마인드 마스터가 쓰던 일라이져라는 검이지. 자네는 그 검을 가지고 있나?”
“가지고 있기는 하죠. 하지만 이 검이 무슨 증명이 되나요? 어디서 주웠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렇지 않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인드 마스터가 쓰던 검이네. 그 검이 아무 곳에나 굴러다닐 이유는 없지. 그리고 소문에 자네와 함께 다니고 있던 다크 엘프가 있다고 하던데, 그녀는 어떻게 되었나? 그녀가 있다면 자네 신분에 대한 확실한 증인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이드는 다크 엘프라는 말에 관심을 보였다.
‘다크 엘프라면 채이나를 말하는 건데, 그럼 에단이 아직 일리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건가?’
이드는 삐딱하게 에단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에단이 이드가 궁금해하는 부분을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나에 대한 이야기를 아직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녀라면 자신의 볼일을 보고 있겠죠. 절 도와주던 일은 이미 끝났으니까요.”
“그런가. 아쉽군. 그럼 우선 일라이져라도 볼 수 있겠나?”
“어려운 일은 아니죠.”
이드는 일라이져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일라이져를 알아보실 수는 있으신가요?”
“물론. 이드에 대한 기록은 그림과 글을 통해 자세하게 남아 있지. 특히 그가 사용하던 두 자루의 애검에 대해서는 더욱 자세하게 말이야.” 마르텔이 말과 함께 러셀에게 손짓했다.
러셀이 방 안에 놓여 있는 상자에서 커다란 비단 두루마리를 가져와 펼쳤다.
촤르륵-
순간 일리나와 라미아의 입에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탁자 위에 또 다른 이드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와! 저거 가지고 싶어요.]
비단 위에는 사진과는 다른 멋을 풍기는 이드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런 이드의 허리와 손에는 라미아와 일라이져가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