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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2화


519화

실물의 일라이져를 그림 옆에 두니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똑같았다.

“외형은 같군. 그럼 속을 볼까.”

스르릉.

마르텔이 일라이져를 뽑자 맑은 검신이 드러났다. 이드가 애지중지하며 아낀 덕분에 검신에는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마르텔은 일라이져를 한 번 쓸어 보고는 내력을 주입했다. 순간 작은 떨림과 함께 일라이져의 검신에서 화사한 꽃향기가 쏟아져 나왔다

“과연, 일라이져가 확실하다.”

마르텔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라이져를 검집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잠시 일라이져를 쓰다듬어 보다 러셀의 손을 통해 이드에게 돌려주었다. 두 사람이 앉은 거리가 한참이나 멀어서 그냥 건네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르텔은 이드가 일라이져를 챙기는 것을 보며 말했다.

“본래 일라이져는 신전에 바쳐진 성검이었다고 하지. 보통의 검보다 검신이 짧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본래 만들어질 때부터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고 한다. 마인드 마스터는 그것을 뛰어난 무공으로 극복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서인지 일라이져보다는 라미아라는 이름의 이 검을 더욱 애용했다고 하더군.”

마르텔이 그림 속 이드의 손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라미아를 쓰다듬었다. 그의 눈에는 은근한 욕심이 넘실거렸다. 검사로서 좋은 검을 가지고 싶은 본능적인 욕심이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된 라미아는 여간 그 모습이 싫은 게 아닌지 이드의 손 안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변태 늙은이가 어딜 쓰다듬고 있어. 이드, 저거 좀 말려 봐요! 음탕한 손으로 절 쓰다듬잖아요.]

‘널 쓰다듬는 게 아니라, 그림을 만지는 거겠지.’

존경받는 검왕 블러디 혼이 짧은 순간 거짓말쟁이에서 변태로까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라미아가 빼액 소리를 질렀지만 이드라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물건도 아닌 물건을 만지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그저 라미아가 폭발하지 않도록 그녀를 잡은 손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다행히 마르텔은 금방 그림에서 손을 뗐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 라미아는 가치를 따지기 힘든 마법검이라고 하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한다면 일라이져보다는 라미아가 더욱 어울릴 터. 혹, 라미아를 가지고 있나?”

순간 그때까지 다른 곳으로 향해 있거나 눈을 감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이드를 향했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이드의 진정한 애검이라고 말해지는 라미아의 행방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 시선 속에서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되는 질문에 자신이 초대를 받은 건지 범죄자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제게 일라이져 말고 다른 검은 없습니다.”

이드는 라미아의 목덜미를 긁으며 말했다. 확실히 검은 없다. 대신 강철의 새가 있을 뿐이지.

“라미아의 행방은 알고 있는가?”

이드는 앞으로 몸을 숙이며 묻는 마르텔의 말에 멀뚱히 그를 바라보다 싱겁게 되물었다.

・제가 그것을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자네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임을 증명하기 위한 일이네.”

“그럼 증명할 생각이 없다면 말할 이유도 없겠군요.”

“이익…….”

마르텔은 이를 갈았다. 생각 같아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대답을 듣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지금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반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임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소드 팰러스에서는 자네를 신뢰하기 어렵네.”

“굳이 신뢰받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바로 소드 팰러스를 떠나겠습니다.”

이드는 싱글거리며 답했다. 하지만 정말 소드 팰러스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이드는 소드 팰러스에서 에단의 말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자신을 대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시르피를 찾기 위해서는 그녀가 납치당한 곳을 살펴야 할 필요도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억지를 부리는 검왕이라는 작자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야.’

이드가 떠나면 곤란하기는 마르텔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종의 이유로 이드를 견제하고 막 대하고는 있지만 그도 이드가 당장 소드 팰러스를 떠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마르텔은 한 번 더 참아 넘기기로 하고 말했다.

“후우. 좋아, 그럼 라미아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도록 하지.”

‘할 생각이 없다니까 그러네.’

이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뒤로 미룬다’고 표현하는 마르텔의 말에 내심 혀를 찼다. 끈질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저 인간들 라미아를 자기들이 가지겠다는,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드는 제발 그것이 아니기를 빌었다. 정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 소드 팰러스라는 곳에 실망이 클 것 같았다.

그때 이드의 눈에 마르텔이 다시 입을 여는 모습이 보였다

“자네가 라미아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 일이 쉬웠겠지만, 말하지 않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자네는 우리가 자네를 믿을 수 있도록 증명해야 하네.” 

“어떻게 말입니까?”

이드는 내심 이번에는 무엇을 요구할지 흥미롭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무공을 펼쳐 보게. 마인드 마스터가 검후께 전한 무공과 그가 제국에서 활동할 때에 사용했던 무공을 하나씩 보여 주게. 앞서 이야기했듯이 마인드 마스터에 대한 기록은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과 자네가 보여 주는 무공을 비교해서 자네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임을 인정하도록 하겠네.”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이 지닌 특징으로 출신을 구분하는 것은 강호에서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분법이기도 했다. 반대로 무인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출신을 증명하기도 한다.

이드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싫습니다!”

너무나 산뜻한 거절의 말이었다. 이드의 말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순간 자신이 들은 말과 전혀 맞지 않는 이드의 표정에 말을 잊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르텔은 얼굴을 붉히고는 책상을 내리쳤다.

쾅!

“지금 이 자리가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마르텔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전신에서 뭉클거리며 살 떨리는 기백이 뿜어졌다.

드르륵-

이드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앉아 있던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라미아를 한쪽 어깨에 올리고는 한쪽 손으로 탁자를 짚고 말했다.

“허, 장난이 아니었습니까? 저는 지금 돌아가는 모양을 보고 당연히 절 골려 주시려고 장난을 친다고 생각을 했지요. 설마, 장난이 아닐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하하하하!”

시원하게 웃음을 쏟아내는 이드였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처억!

“죄송합니다, 마스터!”

소드 팰러스에서 이드가 일리나와 머물도록 배정된 방의 문이 닫히자 에단이 무릎을 꿇었다.

“생뚱맞게 갑자기 무슨 짓이야?”

“오늘 소드 팰러스가 마스터께 저지른 무례에 대한 것입니다.”

“네가 시비를 건 것도 아니면서 무슨 죄송이야? 그거 오버다.”

이드는 말과 함께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이드에게서 뻗어간 경력이 에단의 전신을 휘감고는 그의 몸을 바로 세웠다.

에단은 그 힘에 크게 반항하지 않고 몸을 세우고는 이드와 일리나, 라미아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이드는 일리나를 데리고 방의 중앙에 놓인 소파에 가서 앉았다. 중앙에 놓인 탁자에는 물과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드는 일리나와 에단에게 물을 한 잔씩 건네고는 자신도 시원하게 들이켰다.

“후~ 물은 시원하니 맛있네.”

탁!

이드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접견실을 나올 때를 떠올렸다.

이드의 거절에 씩씩거리던 마르텔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잘도 그만한 경지에 올랐다 싶은 이드였다.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해지자 그때까지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있던 클라인 백작이 나섰다. 그는 복잡한 언변으로 상황을 흐지부지 흐리게 만들고는 러셀을 시켜 이드와 일리나를 방으로 안내하게 만들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던 이드는 에단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때?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짐작 가는 거 없어?”

[그래요. 여기 정말 에단이 자랑하던 그 소드 팰러스 맞아요?]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에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자랑인 소드 팰러스였지만, 본인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한 상황에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 에단이었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하기사, 당연한가? 트와이스에서 활동하면서 밖에 있느라 소드 팰러스의 소식은 좀 어두웠을 테니까.”

이드는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제가 나가서 무슨 일인지 한번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누구한테?

“제 상관입니다.”

이드는 에단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아무런 정보가 없는 지금 상황이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알려주지 않으면 너무 끈질길 필요 없어. 그렇게 얻는 정보는 별로 영양가도 없으니까 괜히 오버하지 말고.”

“흐흐. 걱정 마십시오, 마스터. 이래 봬도 나름대로 유능한 정보원입니다. 실력 발휘를 좀 하고 오겠습니다.” 

장난스러운 얼굴로 음침하게 웃어 보인 에단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일리나가 물 잔을 손에 쥐며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소드 팰러스를 떠나게 될 것 같지 않나요?”

“글쎄요. 전 빨리 떠나고 싶지 않은걸요?”

일리나와 눈을 마주친 이드가 악동처럼 웃어 보였다.


쿠웅!

러셀의 안내를 받으며 이드가 나가자 접견실 안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네 노인의 눈치를 보느라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듯 네 노인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접견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이 나선 문이 묵직하게 닫히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라발이 탁자를 내리쳤다.

콰앙!

마법으로 특수하게 처리된 탁자인 덕분에 탁자가 부서지지는 않았다. 대신에 탁자의 다리가 접견실의 바닥을 뚫고 박혀 들어가며 비싼 대리석이 부서졌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병신 같은 짓이냐!”

참고 참았던 라발의 화가 터져 나왔다.

“라발, 말이 심하다.”

카일란이 라발을 말렸다. 방금 전 이야기한 것은 오직 검왕 한 사람이었다. 라발이 욕을 한다면 그것은 검왕을 욕하는 것이 된다. 소드 팰러스에서 검왕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턱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남자가 클클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뭐, 어때. 틀린 말도 아닌데. 크크큭.”

언뜻 들으면 라발의 편을 들어주는 것 같은 말이지만 정작 라발은 그것이 자신을 조롱하는 말로 들렸다. 라발은 눈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대답해라, 카일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그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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