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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7화


524화

서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른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다 각자가 지칭했던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스터? 설마 저 애송이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케마란? 뭐하는 아가씨야?”

다시 눈을 마주친 에단과 록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

마치 자존심 싸움 같았다. 하지만 길게 가지는 못했다. 호기심이 좀 더 강한 록이 빨리 이야기를 듣고 싶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연무장에서 창을 들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는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케마란은 사 년 전에 토니를 따라 소드 팰러스에 들어왔다.”

“토니가 누구야?”

“케마란의 아버지다. 당시 그녀의 나이가 열다섯. 토니는 검에 미친 인간이라 어린 그녀를 데리고 제국을 떠돌아다니며 검을 수련했다. 덕분에 케마란도 어린 나이에 거친 일을 많이 겪었지. 또 어릴 때부터 토니에게 검술을 배워서 실력도 나쁘지 않아. 소드 팰러스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실력은 또래 중에서 가장 뛰어났지.”

에단이 그 말에 이상하다는 듯 손을 흔들더니 연무장의 케마란을 가리켜 보였다.

“어이, 어이. 이야기가 안 맞잖아. 검을 수련했다면서 저기서는 왜 창을 들고 있는 건데?”

에단의 질문에 록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눈초리를 파르르 떨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춘기다.”

에단은 혹시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팠다. 그리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얼굴이 무너졌다.

“………열아홉에 사춘기는 아니잖냐?”

“고생을 많이 해서 좀 늦게 온 것인지도 모르지. 아니면 반항기라고 해도 좋고. 증상의 이름이야 뭐면 어때. 케마란은 토니의 강요에 대한 반발로 창을 들었다. 올해로 삼 년째지.”

삼년이라면 단순한 반항으로는 상당한 시간이다.

“토니라는 양반은 가만있고?”

“소드 팰러스에 들어온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듯이 그도 검에 미쳐 있다가 소드 팰러스에서 안정을 찾았다. 덕분에 스스로 딸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지. 초반엔 그가 참으면서 케마란을 달랬어. 하지만 말을 듣지 않자 치열하게 싸웠지. 서로 피를 보기도 했다. 주변의 기사들과 검사들이 나서서 케마란을 달래기도 했어. 그녀가 가진 검에 대한 재능이 가볍지 않았거든.”

“어린 아가씨가 고집이 대단하네.”

에단은 소드 팰러스의 기사들과 검사들이 움직였다는 소리에 혀를 내둘렀다. 록의 말대로 소드 팰러스의 사람들은 검에 반은 미쳐 있는 사람들이다. 오로지 검을 외치는 그들 사이에서 아직까지 창을 놓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만큼이나 고집이 세다는 뜻이다.

‘소드 팰러스에서 검 이외의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지.’

에단은 검 이외의 무기를 들었을 때 주변에서 벌떼처럼 달려들었던 미치광이들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그들을 이겨 낸 케마란이 대단할 뿐이었다.

“그런데 창술은 어때? 삼 년 동안 고집을 부렸다면 실력은 제법 늘었나?”

“끙. 늘었지. 오히려 실력이 많이 늘어서 문제야.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는데 실력이 늘었다는 것 말이야. 의외로 창 쪽에도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야.”

록은 정말 문제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소드 팰러스의 사람은 오로지 검!’을 외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에단은 록의 이야기에 눈을 빛내며 연무장 위의 아가씨를 바라봤다. 혼자서 익혀 실력이 늘고 있다면 보통의 재능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제 네가 말해 봐라. 저 허여멀건 애송이가 이드라는 놈이냐?”

“어허! 애송이라니! 놈이라니! 감히 마스터께 무슨 말버릇이야? 너 입조심해라. 다시 그러면 내가 가만 안 둬.”

에단이 발끈했다.

록이 바로 손을 들었다. 게일에 대한 호감에 비례한 반감이 쌓여 있지만, 반대로 에단이 자신만큼이나 저 애송이를 존경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다. 내 실수다. 다음부턴 조심하지.”

“좋아. 그 사과 받지. 네 생각대로 저분이 마스터가 맞다. 아직 젊으시지. 하지만 내가 이야기했지?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신 분이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겠지.”

록은 에단이 열성적으로 떠벌리던 이야기를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드를 살폈다.

‘덩치는 오히려 작다. 근육이 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느껴지는 기운도 없다. 에단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너무 샌님 같은 모습이 아닌가.’

록은 에단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미터가 넘는 키에 커다란 근육을 가진 거한을 상상했다. 그런데 현실은 왜소하지는 않지만 검사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스타일의 청년이었다. 무엇보다 록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햇볕 한 번 받지 않은 듯 하얀 손과 얼굴이었다.

소드 팰러스의 사람 중에 저런 하얀 손과 얼굴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모두 수련장에서 수련을 생활화하면서 햇볕에 그을린 얼굴과 손을 가지고 있었다.

록의 마음속에 이드에 대한 반감이 불뚝 솟아올랐다.

그때, 록은 짧은 순간 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시원한 느낌이 드는 눈빛이었다.

‘후우~ 아니다. 꼭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할 게 아니야. 에단의 말도 있으니 나쁘게 생각할 건 아니지. 생각해 보면 게일과 비슷하잖아? 게일도 그렇게 울룩불룩한 스타일은 아니니까. 그리고 잘 타지도 않는 체질이고. 그래, 좋게 생각하자. 저놈도 게일처럼 햇볕에 잘 타지 않는 타입인가 보지. 둘 다 부러운 놈들이야.’

록은 반감을 꾹꾹 눌러서 게일과 이드를 함께 욕하는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소드 팰러스의 날카로운 가시 같은 여기사들을 제외하고 귀족가의 아가씨들은 하얀 얼굴의 샌님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여자 앞에서는 자신을 제외하고 여자에게 인기 있는 모든 남자가 적인 것이다. 설령 그것이 게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자식이 왜 이렇게 말이 없지?’

에단은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이드를 살피고 있는 록의 모습에 내심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드의 얼굴을 그려서 척살대상이라면서 에단 명명 ‘게일 일파에게 뿌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소드 팰러스 내에는 아직 이드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뭐 더 궁금한 건 없냐?”

“있어. 저 아름다운 레이디분은 누구시냐?”

은근히 묻는 에단의 질문에 록이 한 사람을 가리켰다. 에단은 록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헛꿈꾸지 마라. 마스터의 아내분이시다.”

“부럽다!”

오늘 하루 에단과 주고받은 이야기 중 가장 진심 어린 록의 말이었다.


“훗!”

이드는 록의 말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일리나를 보고 자신을 부러워하는 말은 어쩐지 자신에 대한 칭찬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왜 그래요?”

“저기, 에단이 그가 이야기하던 친구와 함께 서 있잖아요. 제가 일리나의 짝이란 걸 알고 그가 부럽다고 말했거든요. 그 말이 기분이 좋아서요.”

에단과 록이 이드들을 발견한 것처럼 이드와 일리나, 라미아 역시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건 제가 지금 마법으로 변해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 마법을 풀면 다르게 말할지도 몰라요.”

“물론이에요. 그때는 그냥 부러운 게 아니고, 엄청나게 부럽다고 하겠죠. 하하하.”

뿌듯하게 웃는 이드의 모습에 일리나가 살짝 볼을 붉혔다.

[이그, 팔불출. 그렇게 크게 웃다가는 여기 있는 게 들킬 거예요.]

라미아가 삐쭉이며 말했다.

이드가 그 말에 소리를 죽이고 일리나와 라미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녀들의 머리 너머로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케마란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여기서 미첨도(眉尖刀)를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 기형창의 이름이 미첨도인가요?”

일리나는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케마란이라는 아가씨가 들고 있는 창을 자세히 살폈다. 언뜻 보면 핼버드와도 비슷한 듯했지만, 확실히 달려 있는 날이 달랐다. 묵직한 도끼 같은 날이 달려 있지 않고 외날의 검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자루도 일반 창보다 조금 짧았다.

“네. 제가 있던 곳에서는 미첨도, 이웃한 나라에서는 협도, 또는 나기나타라고도 하죠. 모양은 조금 어설프지만.”

하지만 모양이 어설픈 미첨도를 케마란이라는 아가씨는 능숙하고 위력적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스승도 없이 익혔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었는데, 에단과 록의 이야기처럼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저런 재능이라면 검보다는 이쪽이 나아. 반발심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건 아닌 것 같은데.’

[이드, 에단이 이쪽으로 와요. 친구라는 사람을 소개할 모양이에요.]

생각에 빠진 이드를 라미아가 불러 올렸다.

그녀의 말대로 건물의 모퉁이에 서서 몰래 케마란을 지켜보고 있는 이드와 마찬가지로 다른 건물의 그림자에 멈춰 서 있던 에단과 록이 막 이드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몸을 바로 세웠다. 누군가를 몰래 살피는 모습을 보여 줘서 서로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양측은 작은 연무장 안으로 우르르 몰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고 부랴부랴 몸을 숨겨야 했다.

연무장에 들어선 그녀들은 소드 팰러스에서 극소수인 여검사들이었다.

“오호! 캣파이트. 장미 전쟁이다!”

보기 드문 여검사들 간의 싸움을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성급한 행동이었다. 

[“이드,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번쩍!

칼날처럼 날카로운 라미아와 일리나의 시선이 이드를 향해 날을 세웠다.

“아하…………… 아하하………… 난 그냥…………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변명을 생각하던 이드였지만 곧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아까 전과는 달리 이 순간만은 연무장 건너편 마음 편히 희희덕거리는 두 남자가 부러운 이드였다.

생각 없이 쏟아져 나온 말에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힐끗거리며 상황을 보게 된 이드였다.


“무슨 일이야?”

케마란은 휘두르던 창을 내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그녀들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녀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가 항상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케마란 양. 여전히 괴상한 흉기(凶器)를 휘두르고 있군요.”

여검사들의 가장 앞에 선 금발의 아가씨가 풍성하게 주름진 치마를 한 손으로 살짝 잡아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네리베르.”

케마란은 나긋한 말과 몸짓에서 말 그대로 ‘레이디’의 모습을 보고 한쪽 머리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교육 기관과 비슷한 포지션에 위치한 소드 팰러스지만, 진짜 교육 기관은 아니다.

검을 수련하기 위해 꾸준히 소드 팰러스를 찾아오는 검사들이 있지만 그들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같은 학번이라고 할 만한 서열은 없었다. 하지만 대략적인 입궁 시기와 나이를 맞춰서 수련하는 동기랄 만한 그룹은 있었고, 네리베르와 케마란은 그렇게 분류된 그룹에 함께 속한 동기였다.

다만 서로가 불편한 동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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