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8화
525화
네리베르가 조각처럼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서로 이름으로만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죠. 예의를 지켜 주시겠어요, 케마란 양.”
케마란은 도대체 몇 번째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먼저 예의를 지켜 주시겠어요. 이 아이는 흉기가 아니라 링스피어라는 멋진 이름을 가지고 있답니다, 네리베르 양!”
“그렇군요. 그런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했지요. 하지만 당신을 제외하고 누구도 부르지 않고,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이지 않나요? 그래서 저도
자꾸 잊게 된답니다. 그 흉악하고 품위 없는 모습이 계속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군요.”
케마란은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무기의 모양은 기억하면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니.
‘돌대가리냐?’
“음? 혹시나, 제게 뭐라고 하셨나요?”
“아니에요. 숨소리가 컸나 보군요.”
케마란은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네리베르의 말에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자신의 생각이 무심결에 입 밖으로 흐른 게 아닐까 싶었다. 다행히 그건 아닌 듯 네리베르는 케마란의 말에 쉽게 넘어갔다.
사실 실제로 그 말을 들었다면 저런 질문이 아니라 그녀의 애검이 날아왔을 것이다.
케마란은 좌우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마무리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케마란은 빨리 끝내자는 생각으로 먼저 물었다.
“어머나, 설마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요?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일 때문이지 않나요? 뭐, 당신의 단순한 머리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시 이야기해 드릴 수는 있지만요. 케마란 양.”
씰룩.
케마란의 눈초리가 씰룩였다. 그녀는 머리가 나쁘다는 식의 말을 가장 싫어했다. 그건 그녀의 콤플렉스와 같았다.
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를 따라 제국을 떠돌아다녔다. 그는 검에 미쳐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를 학대하거나 굶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검에 온 정신을 쏟는 중에도 그녀를 보물처럼 아꼈다. 하지만 어딘가에 진득하니 오랫동안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정성 들여 검술을 가르치고 신체 단련을 시켰지만, 학문에 대한 공부는 시켜 주지 못했다.
때문에 소드 팰러스에 들어올 때 그녀는 검 실력과는 달리 교양 면에서는 겨우 글자를 읽고 쓰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평범한 학교였다면 문제가 심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입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발을 들인 곳은 소드 팰러스였다. 검에 대한 열정과 진정만 있다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바로 소드 팰러스였다.
부녀가 소드 팰러스에 인정을 받고 자리를 잡은 후 그녀의 교육 수준에 대해서도 알려졌지만, 그녀가 가진 검 실력에 의해서 그런 단점은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케마란에게 그것은 큰 콤플렉스였다. 그녀의 배움이 모자란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어른들뿐이었다.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받을 때면 언제나 홀로 따로 수업을 받아야 했다. 소드 팰러스를 찾아오는 수련자들이 모두 학문이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동기들은 유독 기본적으로 학문적 소양이 닦여 있었다. 읽고 쓰는 것은 물론, 책 몇 권을 읽지 않은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케마란의 약한 부분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놀리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소드 팰러스의 엄한 교육에 그런 아이들은 곧 사라졌다. 무엇보다 케마란 자신이 실력 행사로 모든 아이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던 것이 주효했다.
케마락은 아버지와 제국을 떠돌던 시절 이상으로 이를 악물고 악바리 근성으로 학문에 집중했다. 덕분에 그녀는 일 년이 지나기 전에 동기들의 수업을 충분히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 아버지 이외의 사람들과 섞이면서 가지게 된 콤플렉스를 그녀는 쉽게 극복하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머리가 나쁘다는 말을 싫어했으며, 학문이 깊은 기사나 학자를 어려워했다.
그리고 네리베르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음침한 악의는 없었다.
‘싸움은 언제나 전력으로, 최선을 다할 것. 약점은 당연히 최우선 공략 대상이에요.’
아름답고 교양 있는 모습에 반해, 그저 인정사정이 없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케마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래 주시겠어요, 네리베르 양. 제가 지금 땀을 흘려 머릿속이 가물거려서 그대로 말하다가는 언젠가의 당신처럼 말을 더. 듬. 을 것 같거든요. 네리베르 양이 직접 말해 주면 고맙겠어요.”
순간 연무장에 침묵이 흐르면서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렸다. 케마란은 네리베르의 턱이 바르르 떨리면서 그녀의 볼이 살짝 붉어지는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흥, 속은 너만 긁을 줄 아니?’
제대로 한 방을 먹인 것이다.
완벽 초인에 가까운 네리베르지만 딱 한 가지, 그녀에게도 극복하기 힘든 약점은 있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며, 사랑하는 검후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긴장한 나머지 말을 더듬고 혀를 씹어 댄 것이었다. 검후는 귀엽고 사랑스럽다며 네리베르의 머리를 쓰다듬고 웃어넘겼지만, 자신의 우상 앞에서 당당하고 기품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네리베르에게는 절망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녀는 그날 밤 밤새 펑펑 울었다는 소문이 있다.
순식간에 연무장을 자욱하게 채우는 긴장감에 네리베르와 함께 연무장을 찾은 아가씨들이 주춤 한 걸음씩 물러섰다. 그 외 두 곳에서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두근거리는 기대심으로 일을 지켜보는 가운데 겨우 화를 가라앉힌 네리베르가 말했다.
“좋아요. 케마란 양이 그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제가 다시 설명해 드려야겠죠.”
깊이 숨을 들이마신 네리베르에게서 귀족 특유의 아랫사람을 굴복시키는 아우라가 흘렀다.
“케마란 양, 당신에게 다시 한 번 정식으로 경고합니다. 그 흉한 모습을 가진 흉기를 들고 소드 팰러스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를 멈추세요.”
“네리베르 양, 제가 앞서 말했을 텐데요. 이 아이에겐 링스피어라는 이름이 있다고. 그리고 누가 그러던가요. 제가 소드 팰러스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있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이 아이를 들고 있는 것이 소드 팰러스에 해가 된다고.”
“당신이 귀를 닫고 있어서 듣지 못하는 것이겠죠. 많은 선배들이 케마란 양이 검을 들기를 원하지 않으시던가요. 그리고 또 다른 선배들은 검도 아니고, 창조차도 아닌 이상한 무기를 보며 불편해하고 있다고요.”
소드 팰러스에서는 출신이나 나이보다는 실력과 소드 팰러스에 입성한 순서를 기준으로 선후배로 나뉜다.
케마란은 네리베르의 말에서 까마득한 선배들 중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대의 선배들과 달리, 그들이 링스피어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흥, 이상한 일이군요. 제가 알기로 소드 팰러스의 누구도 검 이외의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실제 검 이외의 무기를 수련하시는 분들도 있으시죠.”
“하지만 그분들은 모두 검을 깊게 수련한 후 검을 더 알기 위한 방편으로 다른 무기를 배우시거나 해당 무기를 오랫동안 깊은 경지로 수련하신 분들이에요. 무엇보다 그분들이 다루시는 병기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병기들이지, 당신의 흉기와 같은 이상한 괴병이 아닙니다.”
“궤변이에요. 어떤 사람이 처음부터 높은 경지에서 무기를 잡을 수 있나요. 누구나 무기를 처음 드는 순간은 있어요. 저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죠. 오랜 시간 동안 실력을 쌓아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이죠. 제게도 그저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그리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이 아이에게는 링스피어라는 이름이 있다고 함부로 부르지 말아!”
흥분한 케마란의 말이 반말로 변했지만 격렬하게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흥,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지금 스스로 시간만 있다면 위대한 경지에 저절로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당신 혼자서? 꿈도 크군요. 케마란 양.”
“난…… 자신 있어. 넌 자신이 없나 보지?”
“대답할 가치가 없군요. 자신에 대한 과신이 넘쳐 오만이 되어 흐르는군요. 그래서 그런 흉기를 들었나보죠? 링스피어? 이름만 있으면 그게 무기가 되는 줄 아나요? 무기에는 태어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거예요.”
순간 케마란의 자세가 삐딱해졌다. 눈빛은 전형적인 시비를 거는 늑대의 눈처럼 변했다. 아버지와 떠돌아다니면서 몸에 익어 버린 거친 기질이 흥분으로 올라온 것이다.
특히나 케마란은 연무장 위에 있고 네리베르는 연무장 밑에 있어서 생기는 높이 차이로 인해, 케마란의 행동은 상당한 도발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이런 역시 귀하게 자라신 전통 있는 레이디인 네리베르 양은 모르시나 보네. 손에 들 수 있고, 사람을 해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무기야. 검도, 창도 원래는 나뭇가지나 나무뿌리를 휘두르다 태어난 것. 그것이 오랜 세월 발전을 거듭해서 지금의 검이 됐지. 손에 쥘 수만 있다면, 그것이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당신의 그 굽 높은 구두도 무기가 될 수 있어. 나는 확신해. 이 아이, 링스피어도 시간이 지나 많은 사람의 경험과 지혜가 쌓인 후에는 아름답고, 늠름한 무기가 될 거야. 지금의 검처럼.”
철컹-
케마란의 말과 함께 링스피어가 그녀의 손을 따라 한 바퀴 돌아 칼끝을 네리베르에게 향했다. 마치 그녀를 도발하는 것 같았다. 그와 세트처럼
케마란의 입가에도 늑대의 광기가 흘렀다.
네리베르는 기분이 나빴다.
그녀는 케마란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동기들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고 있는 케마란을 내심 라이벌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케마란이 갑자기 검을 버리고 창을 잡더니, 그 창을 서서히 이상하게 바꿔가면서 괴상한 무기로 만들어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케마란이 다시 검을 잡기를 원했고, 지금까지 꾸준히 충고를 주었다. 케마란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몇 번 싸우기도 했다. 그때마다 케마란은 동기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이라는 말과는 달리 네리베르에게 형편없이 밀렸다.
하지만 케마란은 포기하지 않았다.
똥고집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녀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자신만만한 태도로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오만한가요!’
특히나 오늘 케마란은 제대로 자신의 신경을 긁었다. 말을 더듬은 것? 아니다. 자신에게 반말을 한 것? 아니다. 자신을 도발한 것? 아니다.
“케마란, 당신 정말 바보 같아요. 설마, 지금 당신은 그 흉기가 감히 검과 같은 반열에 드는 무기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지금 그렇게 말한건가요?”
부스스스스-
케마란의 말은 네리베르의 가장 심부에 있는 우상 중 하나를 제대로 두드리는 말이었다. 분노한 그녀의 기운을 따라 가지런히 단장된 그녀의 금발이 하늘거렸다.
마치 터지기 전의 폭탄과 같은 모습 같았다.
다음 순간 그 폭탄의 스위치를 누르는, 늑대의 하울링 같은 케마란의 대답이 들렸다.
“물론이야!”
“이런 불쌍해라. 케마란 양, 당신의 망상이 당신을 망치고 있어요. 제가 지금 그 망상의 뿌리를 뽑아 드릴게요. 철저히 부숴서 말이에요.”
슈르르륵
하늘거리던 네리베르의 머리카락이 가만히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잠자리에 들 때를 제외하고 항상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그녀의 애검이 뽑히며 케마란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 망상에서 깨어나세요!”
쩌엉!
“제대로 불붙었구나!”
이드가 한껏 흥이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