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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9화


526화

“그런데 저렇게 감정이 격양된 상태로 싸우면 다치지 않을까요?”

대작 영화의 오프닝을 보는 듯 기대감 어린 이드와 다르게 일리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무장 위의 두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괜찮을 거예요. 싸우는 모습을 봐서는 서로 많이 싸워 본 모양이니까요. 서로 다치지 않는 선에서 멈추는 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죠.” 적당한 선에서 멈추는 방법을 몰랐다면 많이 싸울 수도 없다. 어디 목검을 들고 하는 싸움도 아니고,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휘두르는 일에서 그쳐야 할 적당한 선을 지키지 못했다면, 벌써 누구 한 사람은 죽거나 불구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휘두르는 칼끝에 감정이 많이 실렸는걸요.]

라미아의 말대로 연무장의 두 아가씨는 외모와 다르게 치명적인 급소를 날카롭게 노리고 있었다. 뿐인가. 칼만큼 흉흉한 말들이 이쁘게 오고가고 있었다.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아랫입술을 잡아 살살 잡아당겼다. 확실히 그가 보기에도 두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뭐, 그때가 되면 저쪽에서 나서겠지. 그래서 있는 선배들이잖아.”

이드는 라미아의 걱정을 맞은편에 서 있는 두 남자에게 던져 버렸다.

소드 팰러스와 별다른 관계가 없는 자신보다는 소드 팰러스 소속의 두 사람이 나서는 것이 적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후배들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맡은 에단과 록이었다.

두 사람은 연무장 위의 후배들을 열심히 살폈다.

“실력이 대단하지?”

“실력만큼이나 외모도 빼어난걸?”

과연 제대로 그 책임을 완수할 생각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드의 말대로 네리베르와 케마란은 자주 싸웠다.

당연히 동네 꼬마들의 싸움 같은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 싸웠고, 차츰 라이벌로서 대련을 하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서로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싸워 왔다.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탐색전은 존재하지 않았다. 탐색이 필요 없을 만큼 서로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천박한 흉기를 버리지 않는 한 그렇게 엉성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네리베르는 링스피어와 충돌하며 튕겨 나간 검을 휘수하면서 어깨로 상대를 쳐 냈다.

빡!

이게 어디 스물도 되지 않은 아가씨들의 어깨가 부딪쳐서 날 소린가?

검보다 덩치가 큰 링스피어를 다루느라 움직임이 더뎠던 케마란은 급하게 네리베르의 공격에 대응하다가 손해를 봤다.

네리베르가 말한 대로 빈틈이 많고, 최적화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길이가 긴 만큼 유리한 면도 있지만, 움직임에 있어서 그만큼 신경을 써야 했다. 무엇보다 아직 케마란과 링스피어가 서로 알아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했다.

“그래서 그 흉기는 쓸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네리베르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칼을 들이밀었다. 망설임 없는 찌르기였다. 한 호흡이지만 중심을 잃은 케마란으로서는 보통의 방법으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순간 숨어 있던 에단이 움찔했지만, 옆에 있던 록이 씨익 웃어 보이며 말렸다.

그와 동시에 링스피어가 ‘부우웅’ 하는 벌 떼의 날갯짓 소리와 함께 크게 회전했다. 케마란은 애병에게 자신의 몸을 맡겨 공중에서 회전했다.

무기에 휘둘리지 말라는 무언(武言)에 따른다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방법이지만, 중병을 다룰 때는 이 또한 방법이었고, 싸움에서의 임기응변이었다. 무기에 휘둘리지 말라는 것은 무(武)를 관통하는 무언이지, 순간의 판단에 관계되는 핵심은 아니다.

‘떠벌떠벌. 싸울 때마다 시끄러워 죽겠다고!’

케마란은 코앞에서 스쳐 지나가는 검을 바라보며 링스피어를 눕혔다.

치르르르르릉-

링스피어의 날과 검날이 교차되었다. 케마란은 그 탄력을 이용해서 좀 더 높이 떠오르며 몸을 폈고, 링스피어는 무서운 소리를 내며 네리베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얼마나 박력 있고 흉흉한지,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네리베르는 침착했다.

그동안 케마란과 싸우면서 많이 겪어 온지라 링스피어의 괴상한 변초들이라면 익숙하다. 네리베르는 들고 있던 검으로 바닥을 찍었다.

퍼석!

검 끝이 연무장의 돌을 깨고 박혀드는 순간 네리베르의 치마가 화려하게 펄럭이며 뒤집어졌다. 그 사이로 파란 하늘색 부츠를 신은 네리베르의 다리가 하늘을 향해 뻗어졌다.

“아아앗!”

네리베르의 기합성이 울리고 연무장 안에 인상을 찡그릴 정도로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떠어어엉!

서로를 향해 쏟아낸 힘의 분류에 두 사람은 잠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잘 만들어진 이야기 속의 장면이었다. 공중에서 링스피어를 내려치는 케마란과 신고 있는 구두의 밑창으로 링스피어를 막아 낸 네리베르. 짧은 순간 두 여인의 눈빛이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향해 차갑게 빛났다.

““흥!””

그리고 동시에 다시 검을 휘둘렀다. 서로 이 정도로 해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두 사람은 들고 있는 자신들의 애병에 힘과 속도를 더했다.


“어우, 깜짝 놀랐네.”

눈이 휘둥그레진 이드의 말에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설마, 신발의 밑창에 철을 덧대어 놓았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당연했다. 아무리 내력이 생겼다지만 저런 기세로 떨어지는 칼 앞에 발을 내민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다리가 세 개가 되었으면 하는 엽기적인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네리베르는 케마란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같지만, 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통할 방법이었다. 특히 그녀에 대해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첫 대면의 상대라면, 이 한 수로 충분히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그렇기는 하죠.”

이드는 일리나의 말에 묘한 침묵을 더하며 대답했다.

이드가 놀란 부분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마 대놓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드는 방금 치마 뒤집어지는 모습에 놀란 거죠.]

라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드의 눈이 그녀를 피하다 헛기침과 함께 대답이 나왔다.

“커험. 뭐, 그냥………….. 당황스럽기는 했지.”

이드가 그렇게 대답하자 갑자기 옆에서 에단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역시, 마스터도 남자시군요. 당연합니다. 저 모습엔 모든 남자들이 설렐 수밖에 없죠.”

이드들의 옆에는 어느새 다가온 에단과 록이 서 있었다.

두 아가씨의 싸움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 있는 것을 기회로 느긋하게 이드들의 곁으로 넘어온 것이다.

록이 말했다.

“네리베르의 발기술은 꽤 유명합니다. 독특하고, 위력적이거든요. 그래서 저 속바지와 치마도 함께 유행하고 있죠. 치마 안에 바지라니,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드라고 합니다. 그쪽이 에단의 친구분이라는 록이라는 분인가 보군요.”

“저야말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크크 빈델이라고 합니다. 록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드는 록의 손을 살짝 잡아 흔든 뒤 연무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록의 말에서 궁금한 점을 물었다.

“유명한가 보죠?”

“네. 네리베르는 치마 안에 바지를 입고 수련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발차기는 케마란의 링스피어를 상대한 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링스피어에 힘으로 밀린 후에 얼마간 고민을 하더니, 신발에 쇠를 덧대어 발을 기용한 공격과 방어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하더군요. 특히 치맛자락이 발이 어디를 향할지를 가려줘서 상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위협적인 공격 기술이 되었습니다.” 

“호. 좋은 방법이네요. 특히 그 생각을 혼자서 했다는 게 대단하네요. 한 사람은 무기에, 한 사람은 기술이라.”

“둘 다 대단하죠. 특히 네리베르는 그녀를 따라다니는 팬도 있습니다. 그녀의 움직임과 발차기를 따라 날리는 치마를 보기 위해서 모였다던가요.” 

지구에서 아이돌을 따라다니는 사생팬 같은 사람일까? 이드는 소드 팰러스의 인상이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하하. 소드 팰러스가 조금 다르게 보이는군요. 처음 와서는 딱딱하다고만 생각했는데요.”

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따로 들은 일들이 있고, 에단과의 이야기를 통해 들었던 일도 있다. 이드의 입장이라면 딱딱하다고 생각해 준 것만도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본 것이다.

사람 살 곳이 아니라고 하지 않은 게 어디인가.

“아무래도 위에 계시는 분들은 조금 딱딱하시죠. 책임이 막중하시니까요. 하지만 그 밑에서 수련하는 기사들은 다릅니다. 세상 여러 곳에서 수많은 인종이 모여 있는 곳인 만큼, 기사의 절대 명제를 제외한 다른 규율들은 상당히 느슨한 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와 문화, 하다못해 식성이 다른 사람들조차 포용할 수 없으니까요. 개중에는 까다로운 자도 있지만, 검후님에 대한 존경으로 잘 참아 넘기더군요.“ 

록이 말했다.

이드는 대학교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은 이드와 찬찬히 대화를 이어가는 록을 고맙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이드들이 이야기하며 싸움을 관람하고 있을 때 연무장은 한층 살벌해져 있었다.

그때서야 밑에 있던 여검사들도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의 칼끝에 검기가 번쩍이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투기만 가득하던 눈빛에 언뜻 살기가 감돌았다.

두 사람 모두 감정의 고양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 듯 보였다.

“아무래도 이번엔 네리베르 님과 케마란 양 모두 위험할지 모르겠어요. 타미가 가서 기사님을 불러오세요.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긴장하고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에는 뛰어 올라가 두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아셨죠?”

“넷!”


과연 여검사들이 걱정할 정도로 연무장 위 두 사람의 싸움은 격해져 있었다.

치르르르릉-

네리베르가 링스피어의 중심점을 맞추며 흘려내고 그렇게 생겨난 틈을 향해 발을 찼다.

“캬악ᅳ 쿨럭.”

순간적인 고통에 케마란의 입에서 비명과 약간의 피가 섞인 기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보인 반응과 다르게 케마란은 상처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늑대처럼 난폭하게 앞으로 달려 나가며 링스피어를 휘둘렀다.

후웅~

빙글.

앞으로 쏘아져 나가던 링스피어의 날이 빙글 회전하더니 네리베르의 가슴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찌이이익!

급하게 네리베르가 물러섰지만 그녀가 입은 옷이 찢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가슴골을 시작으로 배꼽까지 찢어진 옷 사이로 하얀 처녀의 살결이 드러났다.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래쪽에 있던 여검사들이 소리쳤다.

“그만, 두 분 모두 거기에서 그치세요.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카깡!

“그만하라구요.”

따땅!

어디 개가 짖나?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두 사람은 아무런 소리도 귓가에 들려오지 않는 듯했다.

퍼억!

티리링!

쫘아아악!

“아이 씨, 이런 꼴통들이 진짜!”

순간 지금까지 고운 말로 두 사람을 말리던 여기사 슈슈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그녀 역시 성격이라면 두 사람에 지지 않았다.

하지만 실력은 두 사람에게 한참 미치지 못했다. 두 사람을 말리기 위해서 함부로 올라갔다가는 자신이나 두 사람이 다칠 수가 있었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서 도움을 요청할 기사가 빨리 와 주기만을 바랬다.

그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옆에서 들려왔다.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흠칫!

‘남자가 언제?’

슈슈는 반사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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