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25화
562화
“억!”
촌장을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공포에 잠긴 눈동자만 또록또록 바쁘게 굴렀다.
이드는 호오하고 감탄했다.
“심(心)이 절정의 경지에 올랐구나.”
심살은 기세와 살기로서 적을 제압하는 단계의 하나다.
“네. 굉장히 자연스럽네요. 기세를 발하지 않고도 사람들을 완전히 제압했어요.”
일리나도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쉴라 경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카리스마 때문이에요. 쉴라 경을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죠.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 버렸잖아요.”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
“더구나 무공도 모르는 일반인을 제압하는 데, 내공을 이용한 기세까지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저렇게 방패를 들어 보이는 것만 해도 이들의 마음을 꺾기에는 충분하죠.”
그때 라미아가 깃털 하나를 펼쳐 손가락처럼 까딱거리며 말했다.
[에이, 그게 다가 아니에요. 저 방패가 어디 그냥 방패냐구요. 아티팩트잖아요.]
“그게 뭐. 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드가 쉴라가 든 방패를 보고 심드렁히 대답했다.
명색이 은색 기사단의 단장이다. 그녀가 가진 물건들이 보통 물건일까. 마법이 내장된 아티팩트 한두 개 정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당장 그녀가 들고 있는 방패가 그랬다. 정확한 성능은 알아볼 수 없지만 맑은 은색의 방패 테두리를 따라 복잡하게 엮여 있는 룬어는 신비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는데, 라미아는 바로 그 부분을 지적했다.
[저렇게 촘촘히 엮여 있는 룬어는 마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에 충분하다고요.]
“음………… 그러고 보면 그런 것도 같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거기 있는 아이들은 한쪽으로 비켜서라.”
그때 쉴라가 눈앞의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동시에 아이들을 제압하고 있던 기운이 걷히자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쉴라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두려움이 먼저였다.
“쯧쯧.”
이드가 그 모습에 작게 혀를 차고는 일리나와 함께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서 아이들을 안고 나왔다.
“쉴라 경, 이 두 사람은 심살을 거두세요. 힘줄이 잘려 있습니다.”
이드는 그 속에서 미리 살핀 두 사람을 가리켜 말했다. 도망가지 못하게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는 여자란 뜻이었다.
쉴라는 이드가 두 여성을 데리고 아이들 곁으로 빠지자 기운을 조정하고는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
버럭버럭.
질식할 것 같던 숨을 토해 내듯이 사방에서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썼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방에서 외치는 소리는 말이 되어 들리지 않았다.
쉴라가 그린 듯한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는 촌장을 제외한 사람들을 다시 제압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악하던 사람들은 다시 돌처럼 굳어 버린 입에 눈물만 주륵주륵 흘렸다.
“어, 어째서………… 어째서 이러십니까. 저, 저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혹여 기사님을 노엽게 한 일이 있다면 노여움을 거두시고……제발…….”
촌장이 애원했다. 주름진 얼굴에 땀과 눈물이 가득했지만 그를 보는 쉴라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네년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냐, 이 미친년!’
팔이 부러진 딸을 걱정하고 눈앞의 미청년을 욕해야 할지, 딸을 욕하고 죄를 빌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에 대한 처결은 정해져 있었으며, 그에 대한 판단 역시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이와 같이 변했다. 제국의 법에 따라라.”
쉴라는 덤덤히, 또 냉정하게 그들에 대한 결정을 알리고는 들고 있던 방패를 아래로 찍어 힘을 끌어 올리고 앞으로 뻗어냈다. 방패를 다루는 기본기 중 하나인 튕기기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단순하지 않았다.
땅의 힘을 빌려 끌어 올린 파동이 섬세한 방패의 흐름을 따라 굳어진 사람들의 정강이를 때리며 부러트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방에서 두두둑거리는 징그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촌장이 죽는다고 악을 쓰며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촌장은 다행이었다. 소리를 질러 고통을 토해 낼 수 있었으니까.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심살에 갇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시퍼런 혈관이 부풀어 오른 모습으로 입만 딱 벌리고 바르르 떨고 있어 섬뜩하고 처절하기만 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쉴라는 만에 하나의 틈도 남기지 않았다.
쿵!
쉴라는 다시 방패를 앞세우고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퀵 스매시.”
투퉁!
고저 없는 기합성과 함께 한 뼘. 은색 방패가 딱 한 뼘 움직여 허공을 때려 터트렸다. 역시 방패의 기본기 중 치기였다. 작고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앞서의 튕기기처럼 결과는 간단치 않았다.
방패 앞에서 쪼개진 힘이 정확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노리고 날아갔다. 실로 예술의 경지에 이른 방패술이었다.
촌장을 시작으로 그녀와 마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쇳덩이에 부딪치는 충격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창고에 갇혀 있는 사람도 있어요.”
아이들과 함께 떨어져 있던 한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어깨를 덜덜 떨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을 보면 절대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울면서 웃고 있었다.
여자들의 안내에 따라 마을의 성노로 고생하고 있던 두 여성을 구했다.
이드들은 아이들을 촌장의 집에 들여보낸 뒤 마을에 잡혀 있던 네 명의 여성을 앞에 두고 말했다.
“늦어도 정오가 되기 전에 탈탈 영지에서 기사와 병사들이 달려올 것이다. 우리에게도 급박한 일이 있어 그들이 올 때까지 함께 있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보는 바와 같이 이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고,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쉴라가 굳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 철저하게 제압한 이유였다. 정오까지 4시간만 기다리면 될 일이지만, 그 4시간이 실종된 기사에게는 목이 열두 번도 더 떨어질 수 있는 시간이라 지체하기가 어렵다 판단한 것이다.
대신 쉴라는 불안해할 여인들에게 한 가지 특전을 주었다.
“그대들은 탈탈 영지의 기사가 오면 그동안 겪은 일과 본 사실을 전하고 그들이 올 때까지 아이들을 돌보아라. 그리고 혹시라도 하늘에서 돌이나 칼이 떨어져 저들이 죽는지도 보고 있어라.”
도대체 비행기도 없는 그레센 하늘에서 돌이나 칼이 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될까. 비행기가 있어도 그런 일은 없다. 가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쉴라의 말을 들은 네 명의 여성은 그런 일이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양 의무감에 불타며 마을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분명히 보. 고 있겠습니다!”
이드는 한 글자 한 글자에 묻어나는 절절한 살기를 느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열 명 정도는 네 사람의 손에 죽겠구나 싶었다.
‘뭐, 그래서 가슴에 쌓인 분노가 조금이라도 사그라든다면야…………?
카린이 남겨 놓은 문제도 깔끔히 마무리 지었으니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이드들은 빠르게 준비하고 마을을 나섰다.
네 여자가 그들의 등 뒤에서 엎드려 절하고 있었다.
잠시 후 마을 안에서 기절했음이 분명한 남자의 비명 소리가 한참 동안 터져 나왔다.
탈랄 마을과 헬름 협곡은 멀지 않았다.
마을 사람의 걸음으로 두 시간 거리였다. 이드들은 이십 분이 조금 걸리지 않았다.
헬름 협곡은 긴 강줄기와 산줄기가 만나 이루어진 곳이었다. 지금은 강줄기가 말라 물은 없었지만 그를 대신해 빽빽한 수림이 물줄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아마, 그 속에는 마을 사람들이 채집하던 약초가 수없이 깔려 있을 것이다.
“음………… 여기서는 마차가 움직일 만한 곳이 없어 보이는데요.”
촌장은 방문자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마차가 지났을 만한 흔적은 없어 보였다.
“마차로 여기까지 와서 도보로 움직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드도 쉴라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때 이드의 팔을 당기며 일리나가 나섰다.
“이드, 저쪽이요.”
숲의 스페셜리스트가 나선 것이다.
“아차. 하하. 내가 바보짓을 했네요. 일리나를 옆에 두고.”
이드는 스스로 이마를 쳤다.
도대체 숲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인 엘프를 옆에 두고 뭘 헤매고 있었는지.
이드는 애교스러운 표정으로 일리나 앞에 두 손을 모아 말했다.
“은총으로 길을 보여 주세요. 일리나 님.”
“에헴. 대신 일이 끝난 후에 좋은 공물을 올려야 해요.”
일리나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말했다. 그녀도 오랜만에 이드가 의지해 주는 일이 생겨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수작질에 눈살을 찌푸리던 쉴라가 다가와 물었다.
“예. 이제부터 일리나를 따라가면 될 것 같습니다. 숲이라면 일리나가 엘프만큼 잘 알고 있거든요.”
“대단하시군요. 엘프만큼이라니.”
더도 덜도 말고 딱 엘프만큼. 일리나가 엘프이니 당연한 말이지만, 쉴라는 그저 숲에 대해 해박하다는 식으로 알아들었다.
“다행이군요. 하루만 지나도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라 난감했습니다. 혹여 카린 경이 흔적을 남겼다면 이와 같은 표식을 새겨 놓았을 것입니다.”
쉴라는 땅에 복잡한 리본 모양을 그려 보였다.
“참고할게요. 하지만 우선 저곳부터 확인하죠. 마차가 지날 수 있는 길처럼 보이거든요.”
일리나는 앞장서서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아무리 봐도 그저 빽빽한 수풀이 우거진 곳이었다.
하지만 일리나는 살짝 수풀을 뒤적여 딱 마차 폭에 맞게 두 줄로 놓여 있는 돌길을 찾아냈다.
“마차가 생각보다 협곡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나 봐요.”
“아무래도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 제대로 된 길도 찾았겠다. 안으로 들어가죠.”
이드의 재촉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