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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27화


564화

“빌어먹을, 도대체 왜 안 섞이는 거냐고!”

은 접시를 앞에 둔 마법사는 머리를 북북 긁으면서 짜증을 부렸다. 접시에는 초록색과 하얀색으로 가공된 몬스터와 인간의 피가 분명한 경계를 이루며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이번 과제도 실패하면 선배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깔아보는 눈으로 자신을 갈굴 선배의 얼굴을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법사의 시선이 방의 벽면에 박혀 있는 삼십 개의 유리구슬을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저번처럼 침입자라도 나타나주면 이 과제도 뒤로 미룰 수 있을 텐데.”

과제를 해결할 시간을 위해 적이 나타나길 바라는 괘씸한 발언이었다. 그 속에는 자신이 속한 생명의 관이 품고 있는 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숨어 있었다.

딸랑딸랑딸랑딸랑.

순간 한 구슬이 마법사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방울 소리를 내며 붉은색으로 반짝였다.

“럭키~! 침입자다!”

마법사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외치고는 반짝이는 구슬을 확인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선배님! 침입자 발생으로 MC-110이 기동했습니다. 과제는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경비 마법사의 외침은 곧바로 위로 보고되었다. 물론 뒤에 붙은 과제 이야기는 제외다. 고요하던 생명의 관이 오랜만에 분주해졌다.


트롤이 움직이자 그 뒤에서 인형처럼 굳어 있던 오크들도 컹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용히 지나가도록 허락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요.”

트롤의 하얀 눈이 똑바로 이드들을 향하고 있었다. 앞이 보이기는 하는 건지 의문스러운 하얀 눈으로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이드들은 확실히 보고 있었다.

하얀 눈에서 적의와 같은 마력이 서서히 높아져 갔다.

“확실히 여기까지인 모양입니다.”

쉴라는 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브의 끈을 당겨 어깨에 걸었다. 그녀의 어깨 갑옷에는 망토의 끈을 걸 수 있는 고리가 있었다. 로브는 한순간 회색의 망토로 변했다.

앞을 가리고 있던 로브가 사라지자 그녀가 입고 있던 화려한 은색의 갑옷이 나무에 부서진 햇살 아래 반짝이며 드러났다.

“호오, 명품이다!”

이드는 아름다운 갑옷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쉴라의 갑옷은 파츠 아머가 아니었다. 마치 파츠 아머화한 경갑처럼 보였다.

각각 분리되어 있는 부분이 확실히 보였지만, 그러면서도 목과 가슴, 등, 배, 팔, 다리를 확실히 방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갑옷의 표면을 장미 넝쿨이 아름답고 도도하게 휘감고 있었다. 이 장미 넝쿨은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칼이 들어왔을 때 넝쿨의 흐름을 따라 밖으로 흘려보내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실력이 높을수록 최소한의 부위만 커버하는 파츠 아머를 사용하는 최근의 트렌드를 비켜 가는 모습이었다.

이드는 문득 데일리의 풀 플레이트 아머가 생각나 물었다.

“데일리 경도 풀 플레이트 아머를 사용하고 있던데, 은색 기사단은 파츠 아머를 사용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쉴라가 방패와 검을 뽑아 들며 대답했다.

“데일리 경은 특수한 경우지만, 몇 몇을 제외하고는 파츠 아머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방어력을 높여 검후님을 보호하는 것이 은색 기사단의 최우선 임무니까요.”

즉, 공격보다는 방어에 신경을 쓰다 보니 순수 방어력에서 떨어지는 파츠 아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뜻이라면 가장 방어력이 높은 풀플레이트 아머가 제일 좋겠지만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가벼운 파츠 아머를 사용하면서 속도가 빨라진 기사를 무거운 갑옷을 입고 어떻게 따라 잡을 수 있을까. 방어력만 높이다 정작 적 기사의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멍청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 고민의 결과가 지금 쉴라가 사용하는 형태의 갑옷이다.

“무엇보다 파츠 아머를 사용하다가 흉터가 생긴 흉한 모습을 검후님께 보일 수는 없지요.”

‘그게 진짜 이유였구나!’

이드는 내심 소리치고는 일라이져를 뽑아 들었다.

“빠르게 처리하고 서둘러 진입하도록 하죠.”

마법으로 부려지고 있는 몬스터들이기 때문에 저들이 움직이는 순간 그 정보가 마법사에게 전달되었을 수가 있다. “제가 트롤을 처리하지요.”

쉴라가 가장 먼저 뛰어나갔다. 가장 강해 보이는 트롤을 자신이 빠르게 처리함으로써 빠르게 진입할 생각이었다. “그럼 이드는 왼쪽에서, 전 오른쪽에서.”

그 뒤를 일리나가 검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갔다. 그녀의 머리 위로 라미아가 날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두 여성에게 모두 뒤처져 버린 이드는 쩝 입맛을 다시고는 순식간에 일리나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트롤과 몬스터도 가만히 공격해 오길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실제 먼저 움직인 것도 몬스터였다. 그저 달리기가 느렸을 뿐이다.

쉴라가 트롤에게 검을 내리치는 순간 이드와 일리나도 오크와 마주했다.

“쿠와아앙!”

오크가 거친 워크라이와 함께 번뜩이는 팔치온을 휘둘러 왔다.

바우웅!

일반 오크보다 몇 배나 큰 근육에서 뿜어지는 힘은 실로 대단했다. 일반 병사라면 칼날이 아니라 옆면으로 맞아도 몸뚱이가 터져 나갈 것 같은 위력이었다.

일반 병사를 상대로 하면 말이다.

이드에겐 오크나 그레이트 오크나 이름이 길어졌다는 것 외에 다른 점이 없었다.

“그래도 힘은 확실히 그레이트할 정도로 좋구나.”

서걱!

팔치온이 끝까지 휘둘러지기도 전, 이드는 가장 앞에서 오크의 옆을 지나가며 그대로 목을 베어 버렸다. 다른 오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태풍에 떨어지는 사과처럼 십여 마리의 오크들 목이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마법으로 조종당하고 있는 오크라고 특별한 점은 없었다. 오히려 마법으로 제압당해 오크 특유의 야성이 사라지면서 공격 패턴이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마을 사람들 위협용이란 거지.”

“그보다는 이드의 실력이 너무 좋은 탓이겠죠. 그레이트 오크는 용병도 쉽게 상대하려 하지 않아요.”

열 번째 오크를 처리한 일리나가 이드와 얼굴을 마주하며 말했다.

이드가 스무 마리를 처리하는 동안 그녀도 열 마리의 오크를 처리한 것이다.

이드는 슬쩍 그녀 뒤로 떨어진 오크의 목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잘랐네요.”

“시온에서 비슷한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마법사가 아니라 몬스터였지만요.”

마법으로 조종당하는 경우 스스로의 고통에 무감각하다. 때문에 팔다리가 떨어진다고 멈추지 않는다. 심장이 찔려도 잠시 동안은 움직이며 무기를 휘둘러 온다. 의외로 이런 특징을 몰라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사람이 적지 않다. 일견 잔인해 보이지만, 결국 목을 자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럼 이쪽은 끝이 났는데, 의외로 쉴라 경이 오래 걸리네요.”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무슨 일일까요?”

“어, 그래요? 난 잘 모르겠는데.”

이드는 트롤에게 붙었다 떨어졌다 반복하는 쉴라를 살폈지만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생각도 읽지 못했다.

[클클클. 포기해요. 이드가 저 사람 표정을 읽으려면 최소 일 년은 같이 살아 봐야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저 트롤, 확실히 뭔가 이상하죠?]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지. 저렇게 찔렀는데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잖아?”

쉴라는 트롤과 가까이 붙어서는 순간 갑옷을 뚫고 세 번씩 검날이 보이지 않는 깊이로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그런데 트롤의 몸에서는 피 한방울도 새어 나오지 않았고, 트롤도 멀쩡히 쉴라를 향해 칼날이 삐죽삐죽 솟은 모닝스타를 휘둘렀다.

쉴라가 노린 곳은 트롤의 심장이었다. 그녀의 검 끝에 실린 검경(劍)이라면 심장을 걸레 조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트롤을 처리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심장을 터트리거나 목을 자르는 것이다. 아무리 재생 능력이 뛰어난 트롤이라도 심장이 한순간에 터지거나 머리가 잘리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쉴라와 마주한 트롤은 멀쩡했다. 갑옷에 난 칼자국이 아니라면 검으로 찔렀다는 사실 자체가 거짓말이 될 판이었다.

혹시, 저놈은 심장의 위치가 조금 다른 게 아닐까? 쉴라는 트롤의 심장이 위치한 곳에서 조금 벗어난 주변을 찔렀지만 역시나 효과는 없었다.

트롤의 옆으로 오크들을 모두 처리한 이드와 일리나가 보였다.

“칫!”

자신이 트롤을 처리함으로써 빠르게 진입하려던 계획이 틀어졌다는 생각에 쉴라의 맑은 미간에 골이 생겼다.

“크롸롸롸!”

모닝스타가 다시 날아왔다.

쉴라가 한 걸음 반을 물러섰다. 모닝스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리며 발 앞에 떨어져 내렸다. 쉴라는 그대로 모닝스타에 솟아 있는 날을 밟고 뛰어올랐고, 그녀의 검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펄럭!

다음 순간 그녀의 망토가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트롤의 목이 떨어져 내렸다.

찌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트롤의 목에서 피가 뿜어졌다.

쉴라는 바로 세 걸음 앞으로 나서며 피를 쏟아지는 피를 피했다.

“녹색? 트롤의 피는 붉은색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드가 쉴라 뒤로 뿌려진 트롤의 피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붉은색 맞아요.”

일리나가 이드의 기억에 힘을 실었다.

“심장을 찔리고도 말짱한 모습도 그렇고, 뭔가 마법적인 개조가 됐다는 뜻인가 보네요?”

이드가 일리나의 말에 목이 잘린 트롤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바우웅!

분명히 목이 떨어졌음이 분명한 트롤이 모닝스타를 휘둘렀다.

“쉴라 경!”

이드가 빠르게 경고했지만, 쉴라는 그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뒤에서 귀신처럼 덮쳐오는 살기와 공기의 흔들림에 본능이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트롤이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하기엔 반 호흡이 모자랐다.

쉴라는 빠르게 판단하고 방패를 들며 호흡을 내쉬었다.

“후우~”

몸속을 비워 낸 순간 그녀의 방패 위로 모닝스타가 떨어져 내렸다. 그 충격은 그대로 비어 있던 쉴라의 몸 안을 돌아 방패를 통해 모닝스타를 쳐 올렸다. 튕겼던 모닝스타는 다시 떨어지고 다시 튕겨 올라가길 반복했다.

투두두두두퉁!

마치 드럼을 치는 스틱 같았다.

그리고 충분히 힘을 죽였다고 생각한 마지막 순간, 쉴라는 몸속에서 공명되어 돌아가는 힘에 자신의 힘을 더해 모닝스타를 튕겨 내며 거리를 벌렸다.

그것은 눈 한 번 깜빡일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휘이익~ 대단하네. 일리나, 지금 봤어요?”

이드는 작게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네. 제가 여태까지 본 것 중 가장 뛰어난 방패술이네요. 그런데 이드, 그보다는 저 트롤의 목에 머리가…………….”

“에엑!”

일리나의 말에 고개를 돌린 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닝스타를 휘두르며 앞으로 숙여진 트롤의 잘려진 목 부위에 거품이 일어나는 것처럼 살이 부풀어 오르고 울룩불룩하더니 순식간에 잘려 나간 머리가 생겨나는 모습을 본 때문이었다. 새로 생겨난 얼굴에는 끈적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으웩………… 징그러!]

이드는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하고는 쉴라에 의해서 떨어져 나간 트롤의 머리를 찾았다.

그러자 한쪽에 아직 죽지 않고 이빨을 딱딱거리는 트롤의 머리가 보였다.

기존 입주자를 쫓아내고 새롭게 트롤의 몸에 입주한 트롤 머리를 보며 이드는 할 말을 잃었다. 잘린 머리를 대신해서 새로운 머리가 튀어나오다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경우다.

“뭐, 이런 경우가………….”


쉴라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트롤과 마주 서 있던 입장이라 빠르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검을 잡았다.

“그럼, 네 머리가 이번에도 다시 솟아나는지 한번 확인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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