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37화
574화
붉은 강기가 바람에 날린 벚꽃처럼 떨어지며 폭발했다.
한없이 압축되어 있던 기운이 풀어지며 창문도 없는 공간에 폭풍이 일고,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음을 만들었다.
원래 목표대로라면 화령인의 강기에 수십 명이 명줄을 달리했겠지만, 그들이 한뜻으로 만들어 낸 실드 마법이 강기를 막고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동기화된 실드가 막아낸 것은 절반의 화령인이었다. 나머지 강기의 꽃잎은 막지 못하고, 앞에 서 있는 마법기사들이 그대로 죽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가장 뒤에 서 있던 마법기사의 리더가 식은땀을 흘렸다. 미리 대비를 했는데도 상대의 공격을 완전히 막아내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등장과 함께 날린 공격 때문이었다. 설마, 말 한 마디도 없이 공격할 줄은 몰랐다. 숨을 몰아쉰 그가 크게 소리쳤다.
“애송이 교육 마법. 최대로!”
정말 애송이를 교육시켜 주는 마법이 있을까. 갑자기 튀어나온 엉뚱한 고함이었지만 그게 시동어였던 모양이다.
우웅!
공기가 내려앉는 느낌과 동시에 3층 공간 전체의 중력이 다섯 배로 증가했다.
개인을 향한 상태 이상이나 공격이 아닌 일정 공간을 조작하는 마법에 이드도 반응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주변 공기가 무게를 가지고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퉁!
바닥을 디딘 발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고작 그런 소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몸무게가 다섯 배로 늘었다.
“중력 증가? 본인들은 어떻게 움직이려고?”
이드는 양어깨 위에 이백 킬로그램짜리 역기 두 개를 올려 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마법기사들의 갑옷 일부가 은은하게 빛을 내며 그들을 중력 마법의 영향에서 자유롭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드는 그 모습에 핏 웃고 말았다.
“과연. 그래서 애송이 교육인가?”
나는 쌩쌩하게. 상대는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게.
괴롭히기에는 더없이 좋은 구도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실력이 좋은 신병이 들어와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드를 막기에 다섯 배의 중력은 약했다. 말 그대로 애송이를 괴롭히고 교육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일 뿐, 이드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다섯 배의 중력은 이드의 발길에 아무런 걸림이 되지 못했다.
“날 막으려면 백배 중력은 가져오라고!”
이드는 어딘가의 영화 대사와 닮은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마법기사들 속으로 달려들었다. 그 앞에는 줄기줄기 붉은 빛을 뿜어 대는 일라이져의 검강이 넘실거렸다.
“검후님의 검법을………”
쉴라는 이드의 검에서 난화십이식이 튀어나오는 모습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검후가 실종된 지금,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검법을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드의 검이 그려 내는 선 하나하나에 검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이드가 검후에게 전했던 검법이죠.”
일리나가 쉴라가 착각하고 있던 점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쉴라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전투에 대한 흥분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이 전투에 대한 분노는 있었지만, 열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 싸늘히 죽어 있던 열정이 검후의 검법을 보고서 깨어난 것이다.
쉴라는 똑바로 이드의 등을 바라보며 검을 들고 방패를 앞에 세웠다.
당장이라도 앞으로 밀고 나갈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일리나가 말했다.
“밖으로 나가면 중력 마법의 영향을 받을 거예요.”
“훗, 이런 마법 따위가 은색 기사단의 방패를 막을 수는 없어요. 저 붉은 꽃잎을 따르고 있을 때 은색 기사단이 얼마나 강한지 지금 보여 드리죠.”
쉴라는 남녀 가리지 않고 홀리게 만드는 멋진 미소와 함께 튕겨 나가듯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 증가된 무게가 바닥을 찍어 눌렀지만, 쉴라의 발걸음에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장갑차가 늪지를 헤치고 나가는 것 같아 보였다.
그녀는 곧게 이드의 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에서 보면 이드의 등을 노리는 것 같아 보였다. 당연히 진짜 이드의 등을 노린 것은 아니다. 이드의 곁으로 다가선 쉴라는 그때부터 이드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위성처럼 움직였다. 그녀가 먼저 나가는 법 없이, 이드를 향하는 적과 그 주변에서 빈틈을 보이는 자들을 노려 목을 벴다. 순간순간 이드의 앞을 막아서기도 했지만, 그 행동조차 불협화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딱 검식의 비어 있는 틈을 메우는 움직임이었다. 마치 이드가 풀어내는 난화십이식의 숨겨진 초식 같은 종속된 움직임이었다.
그 속에서 검후와는 다른 방향으로 난화십이식을 깊이 연구한 은색 기사단의 노력과 힘이 느껴졌다.
‘좋구나!’
이드는 입속의 혀처럼 움직이는 쉴라와 어울리며 기분이 좋았다. 중력이 증가되어 있는데도 오히려 몸이 가벼운 듯했다.
“하하하. 믿음직합니다. 쉴라 경과 함께 싸우셨을 검후님이 몹시 부럽군요.”
“저야말로 오랜만에 붉은 꽃잎의 가호 아래 있어 행복합니다. 단숨에 길을 내겠습니다.”
맹렬히 대답한 쉴라의 검이 가장 뒤에 서 있는 마법기사들의 리더를 겨냥했다.
이드는 난화십이식 사이로 뻗어 나오는 쉴라의 기운을 느끼며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또 자신이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난화십이식이라는 검법을 통해 서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서로의 빈틈을 메우고, 위력은 최고로 끌어 올린다. 이드는 이와 같은 감각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검진(劍陣)이다! 시르피와 은색 기사단이 검진을 만들었구나.’
검진의 축이 되어 같이 운행한 일은 없지만 견식해 본 적은 있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두 사람만으로도 이와 같은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이는데, 은색 기사단이 모두 나서면 어떤 모습일까. 이드는 쉴라가 만들어 내는 짧은 조화 속에서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검진의 진짜 모습은 강호대파의 정통 있는 검진에 뒤지지 않는다.’
이드는 이어질 검진의 모습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쉴라가 원하는 두 개의 초식을 연이어 뿜어냈다.
“혈뇌화(血雷花)!”
이드의 검 끝에서 뿜어진 검강이 날카롭게 찢어지며 뭉쳐 있던 마법기사들을 갈가리 찢어 냈다. 촘촘하던 그물이 구멍투성이로 변하는 순간. 쉴라가 은빛 포탄이 되어 쏘아져 나갔다.
“무도한 자들은 고개를 숙여라!”
“끄아아악!”
“이 미친…… 켁!”
쉴라 앞에 있던 마법기사들은 순식간에 그녀의 방패에 갈려 나가고 검날에 잘려 나가며, 그녀가 지나온 뒤로 잔혹한 길이 생겨 버렸다.
“뭐, 뭐해, 이 새끼들아! 죽을 거야? 시발, 덮쳐!”
쉴라가 향하는 길 끝에 서 있던 마법기사의 리더 한스가 발악적으로 외쳤다.
“생명의 관 안이기 때문에 마나를 아낄 필요도 없어! 마갑의 마법을 모조리 동원해서 막아!”
“이런, 씨이바알!”
한스의 말에 등이 밀렸는지 쉴라의 기백에 주춤 물러서던 마법기사들이 이를 물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검진의 흐름을 타고 있던 이드가 그 모습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이드는 쉴라가 만들어 낸 길을 메우며 달려드는 마법기사들을 베어내며 쉴라의 등을 지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이드를 뚫고 쉴라의 등을
노릴 수 있는 마법기사는 없었다. 차라리 정면에 서서 쉴라를 막아서는 게 더 빨랐을 것이다.
이드의 힘이 더해지자 쉴라의 검 끝은 더욱 빨라져 다음 순간 한스의 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르르륵-
검날에 찔린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쉴라는 주군의 명령을 기다리는 기사로서 버릇처럼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당황했다.
등 뒤에 있는 것은 검후가 아닌 이드였기 때문이다.
이드는 살짝 떨리는 그녀의 눈을 보며 그 속을 충분히 짐작하고는 아무렇지 않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정보 제공자로는 미친 마법사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끄덕.
“마지막으로 할 말은?”
쉴라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꼴깍!
한스는 눈앞의 금발미녀를 바라보며 삼켜지지 않는 침을 삼키고는 조각조각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협조하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덤덤한 말이었지만 한스의 눈에서는 그도 모르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쉴라의 눈초리가 꿈틀거렸다.
“네놈들, 기사가 아니구나.”
쉴라의 말에 경멸스러움이 묻어났다.
“아, 아닙니다. 마, 마법사들이 그리 부를 뿐, 저는 용병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쓰이는 용병일 뿐입니다.”
“이곳에서 하는 일은? 아래층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한스는 침묵으로 답했다.
대략 짐작만 할 뿐 그 정확한 목적을 알 수 없는 침입자의 말에서 적의를 느낀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자신의 일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치솟아 오른 때문이었다. 언젠가 이야기 속 정의의 기사가 나타나서 자신들의 목을 자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
흑마법사의 던전과 같은 생명의 관에서 일하는 하수인으로서 당연히 가지는 불안이며 공포였다.
‘흐흐흐. 악당의 최후가 오늘인 모양이구나.’
줄줄 흐르던 한스의 눈물이 멎었다.
“알고 있습니다.”
짧은 순간 한스의 목소리가 바뀌어 나왔다. 그러나 쉴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짧은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쓰이기만 할 뿐이라면, 가치 없는 쓰레기겠지.”
서걱!
쉴라는 한스의 진짜 가치를 말해 주는 그대로 검날을 질러 버렸다.
한스의 목이 떨어지는 모습에 순간 멈춰 있던 마법기사들 사이에 공포가 뭉클 솟아올랐다.
이드는 그들을 바라보다 옆으로 다가온 쉴라를 바라보며 오른쪽을 가리켰다.
“전 이쪽을 처리하죠.”
“그럼 전 이쪽을!”
“그럼 전 도망치는 자들을 막을게요.”
이제 막 3층에 발을 디딘 일리나가 저 뒤에서 소리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이드와 쉴라가 달려 나갔고, 마법기사들을 일리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웅!
마치 산이 우는 것 같은 괴성이 들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파동처럼 떠밀려 오르는 마나의 흐름에 마법사들이 걸친 로브가 펄럭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닥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마법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들은 현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 이건 뭔가 이상해.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중 가장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프뢰벨이 뚱뚱한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고작 세 명이 여기까지 밀고 들어오는 게 말이 돼? 그것도 여자가 둘이나 끼어 있는 놈들을 막지 못했다니,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 프뢰벨은 빽빽 소리치며 콧김을 뿜었다.
평소 그를 싫어하는 평마법사들이지만 이번만은 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소리친다고 있던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프뢰벨은 씩씩거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찌된 것이 자신과 같은 고위 마법사들이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하나는 1층에서 독에 당해 병신처럼 죽었고, 남아 있던 한 놈도 적에게 당했다고 쳐도, 나머지 여섯은 도대체 뭘 하고 있기에 이 자리에 없단 말인가!
‘그것도 이처럼 위급한 상황에! 이 미치광이 마법사 놈들!’
프뢰벨은 어쩐지 자신만 남겨진 것 같은 느낌에 불안하고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고위 마법사들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프뢰벨은 그 모습에 안심하고, 기운을 얻어 평마법사들을 닦달했다.
“뭘 가만히들 있는 거냐! 지금이 그렇게 여유 부릴 때냐! 꼭 명령을 해야 해! 빨리빨리 못 움직여!”
“아, 아닙니다!”
프뢰벨의 재촉에 평마법사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프뢰벨을 그를 향해 다가오는 고위 마법사와 위층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무얼 하다 이제야 오는 거요? 다른 분들은 어디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