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47화
584화
‘세이레크널이여, 불쌍한 영혼을 보살피소서.’
쉴라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기원했다. 어찌 보면 그녀가 만들어 내고 신께 바치는 영혼인 셈이다. 물론 이 영혼은 제물이 아니고, 세이레크널도 악신은 아니다.
‘그래도 조금 더 시간을 끌었으면 힘들어질 뻔했어.’
놈이 죽기 전에 손끝에서 회오리치던 마력의 흐름은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안도가, 다른 한편으로는 싸워 보지 못한 묘한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라이칸스로프가 죽어 버린 이상 안도도 아쉬움도 다 지나간 일이다.
쉴라는 마지막으로 희생자들을 위해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한 걸음 성장할 수 있었던 덕분에 그녀의 몸은 가벼웠다.
반대로 그녀를 기다리는 라미아의 반응은 미묘했다.
“왜 아직 뭔가 남았니?”
멀뚱히 눈을 마주치던 쉴라가 말했다. 새의 표정을 읽는 재주는 없지만, 딱히 반기는 말 한 마디 없는 라미아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쉴라 경의 처리는 완벽했어요. 그냥…… 어떤 데자뷰를 느꼈다고 할까요?]
“뭐가?”
[그러게요. 그게 좀 애매하네요.]
라미아는 말을 흐리고는 카린을 살폈다.
“……”
그 이상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는 모습에 쉴라는 입을 닫았다. 과연 어떤 점을 보고 데자뷰를 느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중요한 일이라면 어차피 나중에라도 알게 될 일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대신 카린 옆으로 다가가며 다른 걸 물었다.
“이드 님 쪽은 어때?”
[이드라면 저기. 옆방에 있어요.]
라미아가 폐기장의 한쪽 벽을 짚었다. 그리고 옆방이란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짓는 쉴라를 보며 말했다.
[비올라가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는 탑주의 마법이 폐기장 옆에 있었나 봐요.]
“죽음과 탄생이 벽 한 장을 사이에 뒀군.”
쉴라가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
6층에서 마법진으로 이동했던 이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공력을 돌려 빛나는 눈으로 어둠을 꿰뚫어 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가까이 있는 일리나와 비올라의 모습뿐이었다. 그 이외에는 기감에 걸리는 것 없는 어둠이었다.
비올라가 폭탄으로 짐작되는 사계의 눈을 먼저 보낸 것처럼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서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 상황은 예상 밖이다. 이드는 최우선으로 일리나의 손을 잡아 옆으로 당겼다. 꼭 쥔 그녀의 손을 통해서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일리나를 확인한 이드는 비올라를 찾았다.
어둠 속에 숨은 그의 얼굴은 자신만만하던 표정은 어디가고, 자신감과 함께 제대로 구겨져 있었다.
이드는 친절하게 그 위에 소금을 뿌려주었다.
“이게 뭐냐? 부관주는 너한테 안 된다며? 기본이라며?”
“윽…….”
비꼬는 게 확실한 이드의 말이었지만 비올라의 고개는 숙여지기만 했다. 앞서 빤빤한 얼굴로 해 놓은 말이 있어서다.
그때 일리나의 목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밝혔다.
“부름에 답하세요. 라이드!”
슈프르륵-
일리나의 말을 들은 빛의 정령이 소환되었다. 정령의 빛은 마법의 빛과 달랐다. 눈을 쏘는 강렬한 빛이 아닌 수만의 반딧불이 모인 듯한 은은하고 따듯한 빛이었다.
라이드를 중심으로 일대가 밝아졌다. 하지만 어둠의 공간이 얼마나 큰지 라이드의 빛으로 모든 공간을 밝히지는 못했다.
“야, 제대로 온 것 맞아? 부관주라는 자에게 당한 거 아냐?”
이드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비올라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어 대더니 벌떡 고개를 쳐들고는 소리쳤다.
“아악! 빌어먹을!”
미친놈의 발작에 화들짝 놀란 일리나를 끌어안은 이드가 마주 고함을 질렀다.
“내가 못할 말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비올라가 다시 머리를 벅벅 긁고 말했다. 반짝이는 대머리에 붉은 줄이 죽죽 생겼다.
“썅! 네 말대로 부관주에게 당했다. 셀포 에스파스. 우린 부관주가 만들어 낸 공간에 갇힌 거야.”
“잘못 이동한 건 아니고?”
“그래. 설마 부관주가 이동 마법진을 막아만 놓은 게 아니라 자신의 공간으로 차단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분리한 공간을 외부의 이동 마법과 연결시켜 놓는 일은 난이도가 두 단계는 다르거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느셨소? 부관주, 대답하시오!”
신경질적으로 설명하던 비올라가 사방을 돌아보며 바락바락 악을 썼다. 시종장이라고 무시하던 부관주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분했기 때문이다.
그때 어둠 속에서 자주색 빛이 빼꼼히 얼굴을 내비치는 모습이 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이드는 그 모습에 엉뚱한 곳에 소리치고 있는 비올라의 어깨를 두드려 빛을 가리켰다. 그때 빛으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이쿠, 소리치지 말게나. 자네 고함 소리에 내가 놀라서 이야기할 타이밍을 놓쳤잖아.”
느긋한 부관주의 목소리에 비올라가 이빨을 갈았다.
“으드득, 부관주!”
“자넨 그게 문제야. 마법사는 언제는 언제나 진중해야지. 셀포 에스파스도 알고 있는 사람이 무턱대고 달려들면 어쩌나.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나.”
“제기랄. 실력을 숨기고 있는 줄은 몰랐지! 탑주의 연구실을 드나들면서 실력이 늘었던 모양이요, 부관주.”
“그보다는 원래 실력이 좋았던 게지. 그래, 원하던 대로 일은 잘되고 있나? 내 언젠가 자네가 크게 사고 칠 줄 알았지.”
“흐…… 피차 똑같은 처지가 아니요? 나도 설마 부관주가 침입자가 있는데 그 일을 팽개치고 허락도 없이 탑주의 연구실에 침입해 있을 줄은 몰랐소. 부관주야말로 언젠가 크게 사고 칠 줄 알았소.”
“그렇게 생각했나? 나는 애송이 배신자가 생명의 관의 가장 큰 보물을 노릴 것을 대비해서 그걸 막고 있었을 뿐인데 말이야.”
“헛소리!”
“헛소리는 이곳에 무단으로 침입한 자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그보다 옆에 있는 침입자들을 소개해 주지 않으려나? 내 얼굴만 보고 자리를 떴거든. 설마 정령사가 같이 있을 줄은 몰랐지. 요즘 정령사가 참 귀해. 정령사를 보는 게 얼마만인지.”
이드는 마을 노인 같은 부관주의 말을 들으며 그의 말이 들리는 자주색 빛을 기감을 뿌려 탐색했다. 엉뚱한 곳으로 날아온 것이 아니라 임의로 만들어 낸 공간이라면 분명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자가 기분 나쁘게 일리나에게 관심을 보이자 짜증을 담아 비올라를 추궁했다.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 없어? 여기 들어올 때 사용했던 그런 거 말이야.”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은 다르다. 밖에 있을 때의 선택권은 내게 있지만, 셀포 에스파스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선택권은 부관주의 몫이지.”
셀포 에스파스에 대한 비올라의 설명에 부관주가 허허허 하고 웃었다. 비올라가 자기 자랑을 해 주는 것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이드와 비올라의 얼굴이 같이 구겨졌다. 비올라가 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내가 해결하겠다.”
“바로는 안 돼? 천재라며?”
이드의 재촉에 부관주가 웃으며 말했다.
“어허허허. 너무 서두르지 마시게, 젊은 검사. 셀포 에스파스 안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만 봐도 그는 천재가 맞으니까.”
비올라가 천재라는 건지, 그런 천재도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마법을 가진 자신의 대단함을 자랑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말이었다. 아니면 셀포 에스파스가 대단하다는 평가에 칭찬을 되돌려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명절의 칭찬 릴레이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 대단한 천재는 아닌 모양이요. 보는 순간 바로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는 걸 보면.”
“기사의 검은 모르지만 마법은 그런 게 아니라오. 해석이 필요하고 역설계가 기본이 되어야 하지. 마법의 계통이 한쪽으로 치우쳤지만 이제 곧 스물이라는 젊은 나이로 고 클래스의 경지에 올랐으니 분명 비올라는 천재지.”
칭찬인지, 잘못된 길을 간다고 비꼬는 건지 모를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다.
“곧 스물?”
다시 말해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반짝이는 대머리에 이십 대 후반, 머리카락이 있어도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비올라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뭘 봐!”
이드의 시선에 비올라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부관주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보다 더 처참하게 구겨졌다.
곧 삼십 대를 바라보는 얼굴로 십 대라니. 천재라는 마법 실력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계속 보고 있다가는 부관주보다 비올라가 먼저 적으로 돌아설지도 모른다.
“진짜 대단한 천재구나 싶어서.”
“지랄!”
이드가 둘러말했지만 그 말을 믿기에는 표정 관리가 안 됐나 보다.
비올라는 이드를 한 번 째려봐 주고는 부관주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이러는 거요?”
짧은 질문에 여러 가지 의문이 담겨 있었지만 같은 마법사로서, 또 오랫동안 생명의 관에서 함께 지낸 동문으로서 부관주는 그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말했다.
“다 각자 목적이 있는 게 아니겠나. 자네처럼 나도 내 목적대로 행동하는 것이지.”
“우리와 부관주의 입장은 다르잖소.”
끝없는 연구와 자기 개발. 그리고 경쟁이 필요한 마법사들과 달리 부관주는 생명의 관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부족한 것도, 경쟁에 밀릴 것도 없는 위치. 탑주의 마법이 완성되는 순간 탑주의 바로 아래 약속된 영광의 자리에 앉을 인간이 왜 지금에 와서 배신이라는 지저분한 똥물을
뒤집어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하지 않나. 지금의 입장보다 내가 가진 목적이 더 중요할 뿐이지. 이런,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야기를 계속하긴 어렵겠어. 자네의 천재성을 잘 발휘해 보시게. 닿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셀포 바이트!”
전화로 수다 중에 얹어 놓은 빨래가 생각난 것도 아닌데, 부관주는 급하게 말을 끊고는 속삭이듯 주문을 외웠다.
쉬쉬쉭. 쉬쉬쉭.
검은 공간 뒤로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 똬리를 튼 뱀의 형상을 한 기형의 마법진이 꼬리부터 생겨났다. 이미 이드들은 뱀의 품에 갇힌 형상이었다. 뱀의 형태가 점점 진해질수록 뱀의 위협 소리도 점점 커졌다.
“쳇! 부트보잇이냐. 와라, 사계의 귀!”
비올라는 뱀 소리가 무엇인지 아는 듯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물고는 손을 저었다.
그러자 부관주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몰래 주변으로 뿌려둔 사계의 귀가 나타나 세 사람을 중심으로 룬의 피라미드를 만들어 소리를 차단했다. 비올라보다 한발 늦게 마법을 준비하던 일리나가 손을 내렸다.
“소리를 이용한 정신계 마법이에요.”
모습을 바꾸고 있지만 귀가 큰 만큼 소리에 예민한 일리나가 제일 먼저 느낀 듯 말했다.
비올라가 긍정했다.
“맞아. 마나에 직접 간섭하는 정신계 마법으로 부관주의 가장 강력한 연계 마법이야.”
강력한 거에 비해서는 너무 쉽게 막혔다.
“강력한 거 맞아?”
“이제 시작이라 그렇지 강력한 거 맞다. 소리로 위협하고, 비틀어 조이고, 빛으로 부수고, 적셔서 녹인다.”
“뱀이네?”
“부관주가 가장 아끼는 마법 지팡이지. 지금은 사계의 귀로 막았지만 부관주의 마력이 강해지고 마법의 위력이 높아지면 끝없이 이어지는 공격을 막다가 지쳐 죽는다. 그 전에 이곳을 빠져나갈 길을 찾아야지.”
비올라는 사계의 귀를 한 주먹 꺼내서 뿌렸다.
“무엇보다 늦으면 부관주에게 탑주의 보물을 빼앗긴다. 절대 그 꼴은 못 봐! 그걸 뺏기는 순간 너하고 협력하기로 한 것도 끝이야!”
비올라가 지금 상황이 분한 듯 이드를 향해 짜증을 부렸다.
자신이 언제나 지고 마는 라미아도, 일리나도 아닌 대머리 남자 마법사의 짜증을 받아 줄 생각이 전혀 없는 이드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부관주한테 당하고서는 어디다 징징거리고 지랄이야.”
쉬쉬쉭.
짧은 사이 비올라의 말대로 부관주의 마법이 강해진 듯 들리지 않던 뱀 소리가 들리자 비올라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사계의 귀로 피라미드를 보강하고, 남은 사계의 귀를 날려 검은 공간을 탐색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뱀의 형태를 이룬 마법진이 이드들을 향해 조여들어 왔다.
소리에 이은 두 번째 고중량, 고중력 마법이었다.
이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 공간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쉬지 않고 기감으로 공간을 더듬고 있었다. 한없이 뻗어 나가던 이드의 기감에 공간의 단절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무한할 수 없는 만들어진 공간의 한계 표지였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