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48화
585화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어긋난 공간.
이드가 그 비정상적인 비틀림에 눈을 반짝였다. 그냥 눈으로 봐서는 끝도 없어 보이는 공간에 빈틈이 보였다.
그 사이 뱀은 점점 강해졌다. 강하게 조이고 불길을 토하더니 부식의 숨결을 뿜었다.
끼에에엑ᅳ
사계의 눈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녹아 내렸다. 연이은 마법에서 이드들을 잘 보호했지만 부식은 끝내 막아내지 못했다. 사계의 귀가 전해 오는 정보를 분석하던 비올라는 단말마 소리에 얼굴을 구기고 황급히 녹아내린 사계의 귀를 보충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부식이야.”
그가 다양한 용도로 다루고 있는 사계의 귀는 부식에 약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올라가 사계의 귀가 녹아 사라진 자리를 더 많은 사계의 귀로 채우자, 뱀의 마법이 한 바퀴 돌더니 쇳소리를 담은 뱀 소리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피라미드를 두드렸다.
그 모습에 다시 셀포 에스파스에 대한 분석을 이어 가려던 비올라가 번쩍이는 머리를 붉게 물들였다. 한 바퀴가 돌자 연계되는 마법의 강도가 배 이상 강해지면서 그에 들어가는 마력도 두 배가 된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력을 공급하는 상태로는 이곳을 나갈 방법을 연구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공격을 무시하고 연구를 하다가는 마법에 당장 죽게 생겼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개미지옥이다.
“이런, X벌! 멍하니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 봐라! 여기 구경 왔냐? 그냥 죽을래?”
비올라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시종장이라며 만만하게 생각하던 부관주의 마법을 혼자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했다. 듣던 것과 실제 경험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부관주의 마법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지독하고 무서웠다.
차분히 공간의 비틀림을 더듬던 이드가 비올라를 봤다. 참 과격한 도움 요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떼를 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니, 아이 같은 게 아니라 아직 아이인가? 지구 기준으로 미성년자지. 저 얼굴에 청소년은 반칙이지.’
얼굴도 얼굴이지만 저 대머리를 보고 신분증을 요구할 사람은 없다. 미성년자 출입 금지 업소도 완벽하게 프리 패스 보장이다.
순간 이드를 향해 비올라의 눈이 번뜩였다. 급한 중에도 자기 욕에 대한 감은 죽지 않은 모양이다.
“난 하도 자신만만해서 옆에서 구경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으윽.”
이드가 살살 비올라의 성질을 긁었다. 느긋한 상황은 아니지만 자신만만하고 안하무인격의 성격을 한 번은 꺾어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무엇보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반말을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내 나이가 얼만데!’
절대 나이대접 받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레센 족보가 좀 꼬여서 그렇지, 이드도 아직 이십 대다. 비올라보다 몇 살 더 먹었다고 대접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이대접 받지 않는 것과 반말을 듣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네 눈에는 내가 여유로워 보이냐. 사계의 귀가 녹아내리는 게 네 눈에는 안 보여?”
“뭐, 다 생각이 있나 보다 했지.”
“됐다. 어차피 멍청한 기사는 쓸모없으니까 넌 빠지고, 거기 아가씨가 여기 와서 마력 보충 좀 해.”
이드가 협조적이지 않자 비올라는 더 말을 끌지 않고 일리나를 보며 말했다.
“아니, 남의 여자는 왜 오라 가라야? 네가 자신 있게 끌고 왔으면 네가 끝까지 해결해야지.”
이드가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비올라가 얼굴을 붉히며 바락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빌어먹을 새끼야. 지금 그게 안 되니까 그러잖아. 뭐가 불만이야! 불만 있으면 이야기를 하든가. 아님 이 문제 해결하고 제대로 한판 붙어!”
“아니, 별다른 불만은 없어. 그저 네 생각대로 다 된다고 해서 믿었는데, 아닌 거 같아서 실망했을 뿐이지.”
그게 불만이지 뭐가 불만인가. 비올라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래서 어쩌라고!”
“별로. 뭘 어쩌라는 건 아니고, 넌 십 대에 높은 경지에 올라 천재 소리를 듣는데 난 이십 대인데 뭔가 싶어서.”
이드가 노력으로 커버할 수 없는 천재라는 존재에 의욕을 잃어버린 수재를 연기했다.
이드 등에 기댄 일리나가 소리 죽여 웃었다. 그녀는 인간의 말로 어이없다는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어디 이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비올라와 같은 나이에 전 대륙에 이름을 알렸던 인간이 할 소리란 말인가.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무공이 더 깊어지고 완숙해진 이드가 할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비올라가 천재라면 이드는 신의 실수였다. 제조 중에 실수로 재료를 너무 많이 넣어서 뽑힌 초고퀄리티 실패작. 재료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가성비가 최악이다.
“그. 래. 서. 어쩌라고!”
비올라가 한 자 한 자 씹어 뱉었다. 맥락이 맞지 않는 말에 속이 뒤틀렸지만 거기에 이드가 진짜 하려는 말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넌 십 대. 난 이십 대, 내가 반말 들을 나이는 아니라는 거지.”
“이………… 이…………… 그게, 지금. 상황에 할 말입니까!”
번쩍이던 비올라의 머리가 붉은 문어가 되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뽑은 카드가 꽝이 아닌가 싶었다. 도대체 저 말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 꺼낼 말인가.
하지만 복잡한 중에도 빠르게 판단을 한 비올라의 입에서 존댓말이 나왔다.
“지금이니까 하지 언제 하겠냐. 네 성질을 봐서는 콧등으로도 들을 것 같지 않은데. 그리고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혼자 감당이 안 될 것 같으면 정중히 부탁을 해야지. 내 길지 않은 인생에 그런 도움 요청은 처음 듣는다.”
“제가 급해서 그랬습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대신에 여기서 못 나가면 죽여 버릴 줄 아십시오!”
가시가 잔뜩 돋친 존댓말에 이드가 툭툭 비올라의 머리를 두드렸다.
“그래. 그렇게 예의를 지키면 얼마나 보기 좋냐. 그보다 저기 보이지?”
이드의 손에 기분이 상한 비올라가 이드의 손을 털어내려 했지만 허무하게 허공만을 갈랐다. 이드의 손이 어느새 그의 머리를 떠나 어둠의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분노를 더해 이드의 손끝을 노려봤지만, 눈으로 보이는 게 있었다면 벌써 찾았을 것이다.
“새까맣네…………요.”
‘그게 뭐’라는 식으로 대답하려던 비올라는 곧 생각을 고쳐먹고 사계의 귀를 던졌다.
사계의 귀는 이드가 가리킨 지점에서 다리를 길게 뻗어 더듬었다. 사계의 귀의 다리는 인간의 오감을 비롯해서 마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간섭하는 기관이 들어 있었다.
거기서 채집된 정보는 실시간으로 비올라의 머릿속으로 전달되어 입체적으로 가공되었다.
“이건! 공간가공흔? 마법사도 아니고 검사가 이 흔적을 감지했다고?”
태산처럼 쌓인 불만을 한 번에 날려 버린 비올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드를 바라보았다.
“존댓말.”
“요?”
“진실을 부정하면 마법사가 아니지.”
그렇게 말하면 우연이라는 핑계도 댈 수 없다. 무엇보다 공간가공흔은 우연히 찾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 사람은 그 위에 기둥을 박고 살아도 알지 못한다.
“그럼 다른 곳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비올라가 묻자 이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 속으로 삐뚤빼뚤한 선을 그어 보였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이런 식으로 이어져 있지. 어때, 나갈 수 있겠어?”
이드의 말투에는 네가 못 하면 어쩔 수 없이 내가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당연하지……………요!”
비올라는 그 말에 불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현실과 타협하는 곳. 마법 공간의 가장 약한 약점 부위를 알았는데 그걸 공략하지 못해서야 마법사라는 타이틀이 운다. 이 공간가공흔은 철을 용접해서 붙인 것처럼 마법사의 실력과 장비에 따라 그 강도가 천자 만별로 나뉘는데, 신과 같은 권능으로 공간을 창조할 수 없는 이상 무슨 짓을 해도 완전무결한 공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태생적인 약점이었다.
마법사로서 이 약점을 가리는 것도 능력이지만, 이드를 만나서 뽀록나고 만 것이다.
공간가공흔에 대한 확실한 위치를 언질받은 비올라는 빠르게 서둘렀다. 더 끌었다가는 방어막이 부서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드가 가리킨 흔적을 모두 확인한 비올라는 곧 사계의 눈을 꺼내 굴리며 말했다.
“그런데 내가 못 나가면 당신은 방법이 있어, 요?”
“있지. 좀 많이 난폭해서 그 반발력으로 네가 다칠지도 모르지만.”
“흥, 고작 반발력 따위에 그럼 그 옆의 아가씨는?”
“존댓말.”
“요?”
“당연히 내가 보호하지. 아내를 지키는 게 남편의 당연한 도리 아니겠어?”
“…………대단하십니다.”
비올라는 완전재수 없는 대답이라는 생각에 썩소를 날렸다. 그리고 마법을 걸었다.
“번뜩여라. 교활한 이빨!”
“마법 이름이 참.”
이드는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마법 시동어에 입맛을 다셨다.
괴악한 이름과 상관없이 효과는 확실했다.
목표 지점에 도달한 눈동자의 절반 부분이 쩍 갈라지며 상어의 이빨은 닮은 날카로운 이빨이 빽빽이 들어찬 모습이 나타났다.
비올라가 그 모습에 흉하게 웃으며 사계의 귀에 주입하던 마력의 방향을 바꾸었다.
순간 세 바퀴째 들어선 마법에 사계의 귀가 만들어낸 피라미드가 부서질 듯 출렁였다.
“야! 방어막 부서지잖아!”
“아, 그 정도는 알아서 해!”
“존댓말!”
“X벌이다! 저주하고 물어뜯어라!”
비올라는 정신없는 중에도 존댓말을 찾는 이드를 향해 욕을 날려 주고 명령했다.
딱. 딱. 딱.
그러자 교활한 이빨이 입을 열고 닫으며 딱딱거리더니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말을 지껄였다. 그것은 마법의 주문은 아니었지만 허수의 공간의 울림을 본떠 만들어진 사계의 언어로, 그 자체로 마나를 포함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교활한 이빨이 하는 말은 비올라의 명령 그대로 저주와 욕이었지만 마나의 힘을 받은 그것은 온전한 파괴의 힘이 되어 공간을 흔들었다. 끼끽!
그리고 한계점을 넘는 순간 검은 공간이 삐뚤어졌다. 교활한 이빨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공간을 물어뜯었다.
순간 검은 공간이 꿀렁거렸다.
쒜에에에엑!
이드들을 압박하고 있던 뱀이 시뻘건 눈으로 악을 썼다. 연계기의 순서를 뛰어넘은 듯 몇 배나 강력해진 힘에 사계의 귀가 한 번에 녹아내리고 피라미드가 부서지며 부식의 힘이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그때 이드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위에는 황금빛의 강환이 생성되어 있었다.
우우우웅!
다음 순간 강환이 넓게 퍼져서 수백의 벌 떼가 동시에 날갯짓하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이드와 일리나를 중심으로 비올라까지 감쌌다.
검은 부식은 황금의 강기막 위로 뿌려지더니 붉은 불꽃을 튀기며 스러져 내렸다.
비올라는 눈앞에 드리운 황금 강기에 고개를 돌렸다.
“뭐?”
“아니・・・・・・요.”
이드가 코웃음과 함께 말했다.
“존댓말 잊지 말고 잘해라.”
“…..네.”
싸움에 진 개처럼 꼬리를 내린 비올라가 전방을 향했다.
황금의 강기막이 다시 보였다. 자신의 사계의 귀는 막아내지 못한 부식의 힘을 황금 강기는 아예 소멸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상극 관계에서 오는 강도 차이 따위가 아닌, 그보다 더 근원적인 힘의 차이였다. 강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새삼 그 힘을 눈앞에 마주하고 나니 존댓말을 강요하는 이드에 대한 반발심이 슬그머니 사그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딱, 딱, 딱, 딱.
주인이 딴생각하는 사이 교활한 이빨은 이름과 달리 성실히 작업한 끝에 검은 공간을 길게 찢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