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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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경은 딱 검은 비단이 찢겨지는 모습이지만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다만 까맣기만 하던 공간에 균열이 생기고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올라가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성을 질렀다.
“됐다!”
“되긴 뭐가 돼? 저걸 보고도 그딴 소리가 나오냐!”
이드는 비올라의 뒤통수를 두드리며 말했다.
셀포 에스파스를 완전히 해체한 것도 아니면서 환호성은 일렀다. 물론 틈을 벌려 놓은 것이 해체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맞을 일은 아니지만, 그와 동시에 일어난 일이 문제였다.
셀포 에스파스에 균열이 가는 순간 계속해서 이드들을 공격하던 뱀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더니 잔상이 겹치듯 흔들리며 다섯 마리로 늘어나 버린 것이다.
하지만 비올라는 당당했다.
“저게 어때서? 셀포 에스파스의 마지막 발악일 뿐이야. 숫자는 늘었지만 힘도 머릿수대로 나눠졌을 거고, 그럼 너 정도 강자가 상대하긴 더 쉬워진거잖아.”
기세가 오른 비올라의 입에서 다시 반말이 튀어나오자 이드의 손이 날았다.
쫘악!
반질거리는 대머리라 손이 쫙쫙 붙었다. 화끈한 통증 덕분에 비올라는 자신이 뭘 까먹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크으…… 요!”
“아무래도 널 천재라고 했던 부관주의 평가가 굉장히 후했던 모양이다. 다시 봐라. 저게 약해진 건가.”
이드는 친절하게 비올라의 머리를 돌려 그 눈에 다섯 마리로 늘어난 뱀 새끼들을 넣어 주었다. 잠시 후 비올라의 입이 벌어졌다.
“……어! 저러면 안 되는데.”
비올라가 안 된다고 해서 멈추는 세상이 아니다.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눈앞에서 뱀이 변하고 있었다. 형태는 뱀이지만 마법진을 몸으로 삼고 있어 시각적인 부담이 전혀 없었던 뱀의 몸에 가죽이 입혀지고, 공간이 만들어 내던 뱀 소리가 실제 현실에서 흘러나왔다.
이드는 투정 같은 비올라의 말에 이제야 나이에 어울리는 말이 나왔다 생각했다.
“안에서 나가려고 하면 밖에서는 그걸 막는 게 당연하지. 네가 안 된다고 밖에서 손가락 빨고 기다려 주기라도 할 줄 아냐?”
“부관주!”
비올라가 뿌드득거리며 부관주를 씹었다.
교활한 이빨이 물어뜯은 덕에 셀포 에스파스에 틈이 생겼지만, 그로 인해 부관주가 강력한 마력을 주입한 것이다. 덕분에 셀포 에스파스의 일부였던 뱀은 힘의 손실 없이 다섯 마리로 실체화되었다. 부관주가 비올라의 이론을 사뿐히 지르밟아 버린 것이다.
다섯 마리로 늘어난 뱀은 사방에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뱀 소리가 입체 음향이 되어 사방에서 울리고 중력 마법으로 무거워진 꼬리가 채찍처럼 강기막을 두드렸다. 실체를 가진 뱀은 연계 마법을 입력된 순서대로 사용하지 않고 두 개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다. 꽈광. 꽈과광. 콰쾅.
꼬리가 담은 힘이 얼마나 큰지 강기막과 부딪힐 때마다 바닥이 들썩였다. 비올라는 그때마다 몸이 붕붕 뜨는 것을 느끼며 침을 꼴깍 삼키고는 사계의 눈을 꺼내 들었다.
‘에라이, 이젠 죽어도 시종장이라고 못 부르겠다.’
이 순간 비올라가 가지고 있던 부관주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도대체 이런 막강한 힘을 가진 시종장이 어디 있어서 그를 시종장이라고 부를까.
거기다 그런 시종장에게 당하는 자신은 그럼 어디까지 떨어져야 할지 생각하니 스스로의 위치가 끔찍했다.
“최대한 강기막을 유지해 주세요. 그 사이 내가 뱀을 처리할 테니까.”
“이 공간을 파괴하는 건 어쩌고?”
“무슨 소리야? 셀포 에스파스를 해체하기 전에 강기막이 먼저 부서질 텐데. 당연히 뱀을 먼저 처리해야죠.”
반말과 존댓말이 왔다 갔다 했지만 이드는 넓은 아량으로 눈을 감아 주고는 말했다.
“그럼 그 사이에 밖에서는 가만있고? 네가 뱀을 처리하는 동안 부서진 만큼 복구될 텐데? 그럼 또 몰린다.”
“아, 그럼 어쩌자고!”
“존댓말.”
“지금 그게 문제예요?”
“나한텐 그게 가장 큰 문제야. 넌 서열 정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라? 서열이 무너지는 순간 이 세상은 혼돈으로 돌아간다.”
“뭔 개소리요!”
이드가 말하는 서열은 나이라는 숫자 놀음을 수십 칸 뛰어넘은 깊은 뜻이었지만 비올라는 알지 못했다.
“계속 셀포 에스파스를 해체하라는 말이다.”
“그러다 당신 강기막이 깨지면 몽땅 죽으라고요?”
강기막을 두드리던 뱀들이 이제는 불까지 뿜고 있어서 황금빛 밖으로는 붉은 불길만 넘실거렸다. 강기막이 열기만 통과시키면 이 안에서 명품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좋은 화력이다.
“쯧쯧. 확실히 네가 부관주보다 딸리긴 하는가 보다. 도대체 내 뭘 보고 날 재단하고는 그런 소리야? 누가 그래? 내가 저 뱀 새끼들에게 밀린다고.”
“그거야 나이를 생각했을 때 상식적으로 쌓을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
“너 천재라며? 넌 상식적이냐?”
“……”
비올라의 입술이 굳었다. 확실히 자신도 상식선에 있지는 않았다. 스물이 되지 않은 나이에 고위 마법사의 타이틀을 달았다. 그래서 스스로 천재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올라의 판단은 이드를 그와 같은 천재로 보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데.”
“그럼 내가 그 정도를 넘어선 초천재인가 보지.”
“……아, 재수 없어.”
이드의 초천재 커밍아웃 발언에 비올라가 침묵하다 작게 혼잣말했다.
그리고 천재라고 당당히 밝히는 일이 정말 재수 없다는 사실과, 그동안 자신의 천재라는 사실 주장에 왜 마법사들이 그렇게 질색을 했는지 그 이유도 깨닫게 되는 유익한 기회였다.
“그러니까 넌 내 말대로 해체나 계속해.”
이드에게 등을 떠밀린 비올라는 다시 교활한 이빨에 마력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다년간의 천재 경험으로 봐서는 초천재 발언이 진짜 진심인 것 같으니까 한번 믿어 보자. 확실히 평범한 천재 레벨의 힘은 아니었으니까.”
비올라를 돌려세운 이드는 일리나에게 그의 안전을 부탁하고는 강기막의 중앙에 섰다.
이드는 뱀들의 위치를 살폈다. 다섯 마리의 괴수를 한 번에 상대하려면 일단 상대의 시선을 자신에게 모을 필요가 있었다. 그 후 괴수를 한데 모아 공격해야 했다. 그래야 비올라가 안정적으로 셀포 에스파스를 해체할 수 있으니까.
‘뭐, 그걸로 끝나는 일은 아니지만.’
셀포 에스파스를 나서는 그 앞에 부관주가 온 정성을 다한 손님맞이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도 염두에 두어야겠지.’
계속 상대에 맞춰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스으으ᅳ”
긴 숨소리와 함께 이드가 가볍게 떠오르더니 푸른 안광을 흘리며 비수처럼 강기막 너머 불길 속으로 날아들었다.
펑!
다음 순간 삼미터 두께의 불길 옆구리가 터져 나가며 이드가 튀어 나왔다. 이드는 곧장 그 앞에서 불길을 뿜으며 꼬리를 휘두르고 있는 뱀을 향해 달려들었다.
뱀은 묵묵히 공격을 막아내기만 하던 이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응이 한발 늦었고, 그 사이 이드는 꼬리를 휘두르며 꿈틀거리는 뱀의 아랫배에 닿아 있었다. 쿠웅!
이드는 강한 진각으로 다리를 땅에 박아세우고 척추를 통해 땅의 힘을 빌려 거대한 뱀을 어깨에 짊어졌다.
철황권(鐵拳) 우공이산(愚公移山).
순간 이드라는 연결 고리를 통해 땅에 자신의 무게를 넘기고 깃털처럼 허공에 뜬 뱀은 허공을 부유하는 새로운 경험에 당황한 듯 꿈틀거렸다. 하지만 우공이산의 진짜 모습은 지금부터다. 이드는 땅이 품고 있던 뱀의 무게를 다시 뱀에게 돌려주며 쳐냈다.
퍼엉!
굉음과 함께 공기가 둥글게 터지며 주위광경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이드에게 부딪힌 뱀의 몸이 튕겨 나가며 나뭇가지에 걸린 지렁이와 같은 형상으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뱀에게서 생전 처음 듣는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끼리에에엑ᅳ”
“헐~ 뱀이 저런 소리도 내는 줄 처음 알았네.”
이드는 초식의 한계를 넘어선 무게의 이동에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뒤돌아섰다.
그 순간 어느새 뻗어온 다른 뱀의 꼬리가 이드의 옆을 지났다. 이드는 기다렸다는 듯 그 꼬리를 잡아 꼬리에 머무른 무게 중심을 꼬리 끝으로 밀어내며 뱀을 매쳐 버렸다.
“켁!”
생각지 못한 반격에 뱀의 머리가 격렬히 꺾이고 짧은 순간 허공을 비행한 뱀은 먼저 날아가서 처박힌 뱀 위로 도리깨의 회초리처럼 떨어져 내려 부딪혔다.
뿌득. 뿌드드득.
두 거체가 부딪치자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드럼 소리처럼 요란하게 났다.
순식간에 두 마리의 뱀이 나가떨어지자 남은 뱀이 강기막을 버려 두고 이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 인간 도대체 정체가 뭐야?”
교활한 이빨에 대한 마력 공급을 계속하면서 이드에게 집중하고 있던 비올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비록 셀포 에스파스라는 마법 공간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뱀은 실제와 다르지 않다. 그 말은 저놈의 무게 역시 이 공간 안에서 실재한다는 말이다.
일반인이라면 던지는 것은 고사하고 놈의 제일 얇은 꼬리에도 깔려 죽을 무게인데 그걸 던져 버린 것이다.
비록 기사가 강력하기는 하지만 그들을 무기를 들고 파괴하는 힘이 강력한 것이지, 저런 무식한 무게를 들어 던지는 힘이 강한 것이 아니다. 저건 도저히 ‘기사’의 테두리 안에 둘 수 없는 힘이다. 도대체 기술인지 순수한 힘인지 알 수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인간인지 의심이 간다.
“우락부락한 근육도 없으면서………….”
비올라의 눈이 슬그머니 일리나를 향했다.
“부부는 닮는다는데, 당신도?”
일리나가 그 말에 부끄럽게 웃었다.
“호호. 전 이드만큼 강하지 못해요. 그냥저냥 트롤 정도라면 던져 볼 수 있지만요.”
“..커험.”
비올라는 불편한 얼굴로 이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뱀을 던지는 이드의 힘에 경악했다면, 날씬한 라미아의 힘에 남성으로서의 패배감이 간질거렸다.
뱀 두 마리가 골골거리는 사이 이드는 남은 세 마리도 한곳으로 모는 데 성공했다. 남은 놈들은 앞의 두 마리를 의식한 듯 직접적인 육탄돌격보다는 소리와 불, 부식 가스를 이용했다. 뱀 주제에 상당히 머리가 좋은 놈들이었다.
하지만 이무기도 되지 못한 뱀의 머리의 한계는 분명했고, 놈들이 이드에게 몰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때 먼저 날아가 있던 두 마리도 육체를 회복한 듯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머리를 들고 쉭쉭거렸다.
일반적인 생명체라면 몸의 뼈가 산산조각 나며 죽었겠지만 놈들은 마법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에 마력의 공급만 충분하다면 무한한 회복이 가능했다.
그러고 보면 이런 마법을 유지하는 부관주의 마력도 심상치 않았다. 일반적인 마법사가 가질 수 없는 마력이었다.
마력을 유지하기 위한 특별한 아티팩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런데 해체는 아직이야?”
이드가 붉은 수라의 그물을 던져 뱀을 묶어 두며 말했다.
“곧 됩니다. 그런데 놈들은 왜 안 죽이는 건데요?”
이드의 실력에 뱀의 처리는 완전히 이드에게 넘기고 교활한 이빨의 조종에 집중한 비올라가 말했다. 그 말대로 이드는 다섯 마리의 뱀을 죽을 수 있는데도 죽이지 않고 그저 몰아넣어 두고만 있었다.
“다 쓸데가 있어. 해체할 수 있으면 신호해.”
“지금 해체합니다.”
잠시 후 비올라의 신호가 오르고, 검은 그림자 위로 거대하면서도 교활한 이빨의 모습이 떠오르더니 성이라도 삼킬 커다란 입으로 검은 공간을 베어 물었다.
화아아악-
거대한 이빨 자국이 검은 공간에 박히자 검은 어둠이 부서지며 그 뒤로 밝은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동시에 부관주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쉽게 나올 줄은 몰랐군. 이건 선물이네. 소닉 트위스트!”
콰콰콰—
부관주의 시동어에 따라 대기하고 있던 허공의 마법진이 번쩍이며 푸른 칼날 같은 바람을 뿜어냈다.
“그럼 난 앞서 받은 선물을 반품하지.”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이드는 셀포 에스파스가 부서지며 그대로 굳어 버린 뱀들을 우공이산의 수법으로 허공에 띄워 부관주의 마법을 향해 던져 버리고는, 다섯 마리 뱀의 무게를 고스란히 응축해서 마법 뒤에 서 있는 부관주를 향해 내뿜었다.
“이건 그 이자로, 다섯 마리 뱀의 원한이다. 오두광뢰파(五頭洸壘派)!”
꽈르르르릉!
공격 마법 앞으로 던져진 다섯 마리 뱀이 그 모습을 비통하게 노려보며 장렬히 산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