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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62화


599화

‘세레니아…………’

이드는 마음 한편이 쿵 내려앉았다.

혼돈의 파편과 한 세트로 묶여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이드가 사라진 후 가장 앞서서 혼돈의 파편을 감시하고, 그 소식을 일리나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 그녀였다.

일리나가 말하기를 세레니아는 마지막으로 혼돈의 파편에 대한 의심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녀뿐 아니었다. 이드도 직접 다녀왔지만 라일로시드가의 레어도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드는 그들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들이 중간계의 수호자이며 최강의 종족이라고 불리는 드래곤이지만, 혼돈의 파편 역시 세상의 시작에 관여되어 있는 초월적인 존재들이다.


이드는 세레니아가 준비했다는 통신수단을 이용하고도 그녀와 연결되지 않자 몇 가지 추측을 했다. 그녀가 일리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기준으로 한 추측은 모두 긍정적일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가장 최악의 경우가 혼돈의 파편과의 전투로 인한 양패구상이다. 그 다음이 혼돈의 파편에 의해서 잡혀 있는 경우다. 앞서와 다른 것은 패하긴 했지만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연락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없을 만큼 큰 부상을 입었을 경우다. 드래곤은 이 경우 깊은 잠에 빠져 회복에 힘을 쏟기 때문에 연락되지 않는 것이 설명 가능했다. 하지만 이 부분도 왜 한둘이 아닌 모든 드래곤에 대한 소식이 끊어졌는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추측이 가능한 이유가 세레니아뿐 아니라 혼돈의 파편도 사라진 듯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서 메르시오가 튀어나왔단 말이야. 젠장.’

세레니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이때 메르시오의 등장은 도저히 좋은 의미로 해석되지 않았다. 하기사 이드가 내어 놓은 추측의 결과가 모두 좋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살아 있어야 할 텐데…………’

세레니아에게는 이드가 실종되어 있던 시간 동안 일리나를 돌봐 준 빚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드래곤답지 않게 부드럽고 친절한 여자였지.’

멀게 느껴지는 이드의 눈에 세레니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물론 붉은 머리를 하고 있는 인간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에서는 도저히 지금의 안타까운 마음이 유지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 거대하고 동산만 한 몸뚱이의 어디를 걱정하면 좋은 것인지?

크르릉.

순간 세레니아의 모습 뒤로 붉은 드래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이야기는 환상도 화나게 하는 것일까.

[에이, 쓸데없는 추측은 그만해요. 확인할 수도 없는 추측을 아무리 늘어놔 봤자 스트레스와 걱정만 생길 뿐이에요.]

라미아가 무거운 분위기를 적절히 가르고 들었다.

이드와 일리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미아의 말이 틀리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런데 정말 의외예요. 여기서 메르시오를 찾을 줄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에요.]

라미아는 메르시오로 이야기의 초점을 돌렸다.

“그렇긴 하지. 카린 경을 찾으러 와서 메르시오를 볼 줄이야. 의외의 소득이라고 해야 하나?”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언젠가 혼돈의 파편을 찾기는 해야 했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차원의 인. 그 마지막 완성의 조각이 혼돈의 파편에 달려 있었다. 그 전까지는 이십 년마다 한 번씩 지구와 그레센을 오가는 나그네 생활을 해야 한다.

차원의 인이 말했던 자유로운 여행자는 개뿔!

유랑자 신세가 따로 없다.

“그렇긴 해. 설마 혼돈의 파편에 대한 일을 미루고 시르피를 찾아 나선 일에서 혼돈의 파편을 찾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착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복을 받는 거 아닐까요?”

“크큭. 일리나, 이번 농담 괜찮았어요.”

이드가 풀썩 웃으며 말하자, 일리나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메르시오가 거기서 뭘 하고 있었을까요?]

“글쎄.”

이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있던 곳은 폐기장으로 쓰던 곳이었다. 과연 거물이라고 하면 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메르시오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생명의 관에서 뭔가 원하는 것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후각이 예민한 라이칸스로프가 그렇게 악취가 심한 곳에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흠. 혼돈의 파편인 메르시오가 진짜 라이칸스로프처럼 후각이 예민할지는 모르겠지만, 목적이 있었던 건 틀림이 없겠죠. 이유도 없이 그런 곳에 있지는 않을 테니까.”

쓰레기장 투어와 같은 특이한 취미를 가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상한 건 또 있어요. 카린 경의 팔과 다리는 왜 뜯어먹은 걸까요? 그것도 영혼까지.]

“입이 짧은가 보지.”

찌릿!

툭 던지듯 대답한 이드는 이어지는 눈총에 어깨를 움츠렸다.

[말이 돼요? 거기다 카린 경을 죽이지 않은 것도 이상하잖아요.]

“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그런데, 솔직히 그놈 식성을 어떻게 알아? 실제 라이칸스로프도 인간을 잡아먹잖아. 그리고 카린 경의 경우는 살려 줬다기보다는 죽도록 방치한 거 같은데? 마침 쉴라 경과 네가 찾지 않았으면 카린 경은 죽었을 거야.”

순간 라미아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이드의 말이 조금 허풍처럼 들리긴 했지만 메르시오가 인간이 아니란 점을 생각하면 아니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카린이 살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사람들을 두고 왜 그녀가 살아 있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일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카린 경이 깨어나면 좀 더 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좋겠어요. 아, 그러면 쉴라 경이 이드가 이야기해 주기도 전에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그놈이 카린 경에게 예의 있게 자신의 이름과 사는 곳을 밝히지 않은 이상 어디에 사는 줄 알고 찾아가겠어?”

[히히. 그러네요.]

세 사람이 메르시오를 한눈에 알아본 탓에 생긴 착각이었다.

“그럼 다시 놈이 무슨 목적으로 거기 있었냐는 건데. 뭘까?

이드는 생명의 관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되새겨 보았다. 과연 메르시오가 직접 움직여서 탐낼 만한 무언가가 있었는지를 말이다.

“있다면 바이트 타블렛 정도인데, 그걸 원했다면 벌써 가져갔겠지? 그럼 그 외에 메르시오가 탐낼 만한 무언가가 생명의 관에 있었다는 걸까?”

“비올라 씨를 통해서 알아보면 빠르지 않을까요? 저희가 오기 전에 무언가 사라진 것이 없는지.”

확실히.

“내가 데려올게요.”

이드는 바로 비올라의 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 마법서를 보다 끌려온 비올라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저에 대한 취급이 점점 나빠지는 것같이 느끼는 건 제 착각일까요?”

[응, 착각이야.]

…..그렇지?”

[당연하지. 그보다 물어볼 일이 있어.]

무성의한 라미아의 대답에 이어 일리나가 의자까지 빼 주자 비올라는 미묘한 압박감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 앞으로 탁자가 드르륵하고 끌려오고 물 한 잔이 놓였다.

“자, 그럼 묻는 말에 대답해라.”

“…………야, 취급 나빠지는 거 아니라며!”

비올라의 작은 반항이 지나가고 취조가…………… 아니라 질문이 시작되었다.

“내가 말하는 거 듣고 찬찬히 생각해서 말해 봐. 혹시 말이야, 우리가 오기 전에 생명의 관에서 뭔가 없어졌다거나, 누가 실종되었다거나 하는 이상한 일 없었어?”

“무슨 질문이……….”

비올라는 반짝이는 대머리에 주름을 만들고 대답을 기다리는 세 사람을 돌아보다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했다.

“혹시………… 생명의 관에 침입자가 있었던 겁니까?”

찬찬히 생각해 보라고 했더니 이상한 쪽으로 추리를 한 모양이다. 똑똑한 마법사답게 정확했지만.

“일단 대답부터!”

“아이씨, 무슨 제국 수사댑니까? 내가 죄인도 아니고 무작정 생각하라고 하면 어쩌라고요. 보아하니 생명의 관에 내가 모르는 제3의 침입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말해 봐요. 제가 천재 아닙니까. 내가 앞뒤 다 맞춰 드릴게요.”

“그놈의 천재 소리.”

“하지만 설명해 주고 의견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것 보십시오.”

일리나가 편을 들자 비올라의 자세가 순식간에 거만해졌다.

생각 같아서는 한 대 패서 내쫓아 버리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드는 메르시오의 존재를 알렸다. 하지만 그가 혼돈의 파편이라거나 구십 년 전의 존재라는 사실은 빼고 엄청난 실력자라고 덧붙였다.

“흐흐흐, 부관주도, 나도 찾지 못하는 실력을 가진 침입자가 있었다니. 확실히 생명의 관이 껍데기만 남긴 남은 모양이군.” 

비올라는 거만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길 얼마, 비올라가 탁자에 한 팔을 올리고 얼굴을 내밀었다.

“일단 정체는 알고도 숨기는 것 같으니까 넘어가고요.”

뜨끔.

‘싸가지 없지만 똑똑한 시키.’

“간단합니다. 바이트 타블렛을 노린 겁니다. 생명의 관에서 가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유일합니다.”

“우리도 그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은 하지만 말이야, 그럼 왜 탈취해 가지 않은 거지?”

“고작 실력 좋은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만 던져 주고 어디까지 바라는 겁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다만 짐작은 가능하죠. 바이트 타블렛이 목적이지만 탈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닌 경우 말입니다.”

“그런 경우도 있나?”

“부관주 있지 않습니까. 놈도 바이트 타블렛을 이용해서 뭔가 장치를 만들었으니 그 침입자도 그런 게 있을 수 있지요. 그거 말고는 생명의 관에서 가져갈 건 없습니다. 있다면 고작 실험 결과들 정도인데, 말씀하신 정도의 실력자가 직접 노릴 물건은 아니라고 봅니다.”

나름대로 객관적인 비올라의 분석에 이드가 일리나와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두 사람도 가능성이 높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라미아가 좀 더 꼼꼼하게 바이트 타블렛을 살펴야겠는데.”

[알았어요.]

“크흠. 필요하다면 저도 도울 수 있습니다만?”

“됐다.”

바이트 타블렛 이야기가 나오자 비올라가 슬그머니 손을 뻗었지만 이드에 의해서 깨끗이 무시당했다.


이드는 이번 일에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실종된 시르피를 찾고 손을 떼려는 생각을 하며 움직였다. 그랬기 때문에 모든 일에 조금 수동적이기도 했고,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과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 혼돈의 파편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르피의 실종은 몰라도 최소한 생명의 관에 대한 일은 자신이 앞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원래는 황궁과 소드 팰러스에 최대한 떠넘겨 둘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기사들이 포로와 죄인들을 인솔해서 도착했다. 포로는 몇을 제외하고 바로 감옥에 갇혔다. 미리 언질을 받은 탈탈 영주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그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섰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탈랄 마을의 죄인들은 기사가 감옥을 지키는 상황과 무서운 분위기에 겁에 질려 덜덜 떨었다.

각각 취향에 맞는 세 명씩의 포로를 챙긴 양대 기사단은 단장과 부단장의 명령에 따라 떠날 준비를 했다. 연락을 받은 탈탈 영주가 헐레벌떡 서둘러 그 뒤에 섰다. 다른 자들이라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겠지만 두 기사단에 그런 명령을 내릴 배짱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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