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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64화


601화

“지금 소드 팰러스에 있다고?”

“예. 적당한 숙소를 잡아 이드 님의 수련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머무는 동안 사무엘 백작은 알고 있는 귀족들과 어울리고 있고, 이그렌 경은 소드 팰러스를 돌아보면서 수련 기사들과 검술 대련에 빠져 있습니다. 일반 기사들이 소드 팰러스를 찾았을 때 보이는 일상적인 반응이죠.” 다행히 이드만 목매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이의 후손 이름이 이그렌인 모양이지?”

“예.”

이드는 다시 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뒤를 밟았다는 말은 무슨 소립니까? 그거 어떻게 들어도 좋은 의미로는 들리지 않는데.”

“실제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알아본 바로는 시온 숲에서 소드 팰러스까지 이드 님이 지나온 길을 그대로 쫓아왔는데, 아무래도 사무엘 백작이 이그렌 경을 내세워서 이드 님께 접근하려는 목적인 것 같습니다.”

“이그렌 경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건데, 그렇게 볼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래이 님의 가문은 이미 몰락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조사된 바로는 무리를 하다가 영지까지 잃고, 그 후에는 일리나스 정계에서 비웃음을 사서 버려졌다고 합니다. 이제는 존재조차 잊힌 가문이지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사무엘 백작이 이그렌 경을 직접 데리고 나타났다면 그 이유는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용이라………….”

이드는 문득 그래이와 하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은 이유도 있지만 그들은 순수했고, 용감했다. 이드 때문에 전쟁과 혼돈의 파편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렸지만, 도망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손은 누군가의 손에 이용당하는 상황이라고? 거기다 집안이 망했어?

톡.톡.

불편한 속내를 대신하듯 이드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이용당하는 이그렌이라는 놈이나, 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사무엘 백작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이와 하엘의 후손이라면 빠릿빠릿하지는 못해도 남에게 이용당하고 살지는 않아야 했다.

“그래이와 하엘은 어떻습니까?”

“두 분 모두 사망하셨습니다.”

하긴, 살아 있어서 이드의 소식을 들었다면 직접 움직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짧은 소식이라도 전했을 것이다.

이드가 창밖을 보았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저녁인 시간.

“지금 부르면 올까요?”

“당연합니다, 마스터. 아마 한밤중이라도 부르면 당장 달려올 겁니다. 그런데 만나 보실 생각이십니까?”

에단이 이드의 눈치를 보다가 재빨리 대답했다.

“만나야지. 그래이의 증손이라는데, 당연히 만나 봐야지.”

“그럼 제가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단은 휙 하니 달려 나갔다.

그러자 일리나 뒤에서 얌전히 서 있던 네리베르가 분위기를 살피고는 말했다.

“그럼 저희들은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먼저 돌아가라.”

록이 고개를 끄덕여 손짓을 했다.

“어? 난 더 보고· ・・옥!”

자신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결정에 케마란이 반항을 했지만, 네리베르의 팔꿈치에 옆구리를 찔리고는 질질 끌려 나갔다.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해요.”

이드는 투닥대는 두 사람의 모습에 침울하던 기분이 풀어지는 것 같아 말했다.

“굳이 돌려보내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비밀로 할 일도 아니고.”

“아직 어린 후배들이라, 사무엘 백작에게 빈틈을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다.

당장 감정에 솔직한 케마란의 경우, 사무엘 백작에게 표정을 읽힐 수가 있었다.

혹시 모를 사고는 미리미리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미안해요. 그래이와 하엘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어요.”

일리나가 이야기 중에 한쪽에서 준비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라미아가 아니라는 듯 일리나의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에이, 그건 아니죠. 두 사람도 수명이 다해서 죽은 건데요. 그렇죠?]

“맞습니다. 그런 정보는 없었습니다.”

라미아가 확인하듯 돌아보자 록이 단언했다.

[것 봐요. 오히려 일리나가 두 사람을 살피다가 혼돈의 파편이나 일리나스의 귀족들이 들러붙었으면 그게 오히려 더 큰일이었을걸요.]

이드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일리나의 차는 맛있어요. 라미아의 말이 맞아요. 그리고 제가 기분이 나빴던 건 그래이와 하엘이 죽은 것 때문이 아니에요. 어차피 흘러간 시간을 들었을 때 다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단념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두 사람의 증손자라는 놈이 타인의 생각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거예요. 도대체 평소 어떤 정신머리를 하고 있는 놈인지, 제대로 얼굴을 좀 봐야겠어요.”

이드는 속에서 불이 난다는 듯 차를 원샷했다.

하지만 뜨거운 차는 불을 끄기보다는 기름처럼 이드의 가슴만 뜨겁게 만들었다.


‘에이씨, 이그렌이라는 놈만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왜 하필 둘 다 숙소에 있는 거야.’ 

에단은 문 앞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드의 기분을 살펴 이그렌만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은 탓이었다.

“마스터,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모시고 들어오세요.”

에단은 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었다.


이드는 에단을 따라 두 남자가 들어오자 그중 젊은 남자를 주시했다.

그래이와 하엘의 증손자라고 하니 그의 얼굴에서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들여다봐도 두 사람의 흔적은 일절 찾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그래이와 하엘의 모습이 선명한데도 말이다.

“이 녀석이 진짜 그래이의 증손 맞아?’

사 대 만에 두 사람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의 유전자가 그렇게 약했던가? 아니면 록의 조사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드였다.

하지만 사람을 불러 놓고 노골적으로 얼굴만 살피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사무엘 백작이 얼굴을 붉히며 불쾌감을 표하려는 순간, 이그렌이 한 발 나서며 손을 뻗었다.

“바, 반갑다. 난 이그렌이야. 내 증조할아버님이 너희 증조할아버님과 친구였다고 했어. 그럼 너와 나도 친구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드도 쑥 내밀어진 이그렌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덕분에 조용히 탄식하는 라미아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하엘이 어쩌다 이런 바보를 만들었지?]

“엇! 네가 증조할머님 이름을 어떻게 알지?”

황당해하던 시선이 라미아에게 모였다. 그 속에서 이그렌이 반사적으로 라미아에게 손을 뻗었지만, 이드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아 흔들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그렇게 듣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는데, 전 증손자는 아닙니다.”

“어? 그럼… 그럼 어떡하죠?”

순간 이그렌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떠올랐다. 대뜸 말투도 반존대로 바뀌었다.

그는 정말 단순하게, 친구였던 두 사람의 증손자기 때문에 이드와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리고 친구는 그런 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앉아서 할까요? 인사가 늦은 것 같은데,

사무엘 백작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좀 전엔 무례했습니다. 이드라고 합니다.”

“사무엘 잭 댑슨 백작이네. 자네가 이어받은 이름은 아주 유명하지. 한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을 좋은 이름이군.”

“지금은 부담스러운 이름이죠.”

이드는 사무엘 백작의 덕담에 쓰게 웃으며 답했다.

구십 년. 그 시간이 아니라면 이렇게 세상을 떨어 울리는 이름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련을 마치고 나왔을 때 손님이 있다는 말에 사실 좀 놀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소드 팰러스에 있는 절 찾아올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이해하네. 내가 좀 서둘렀지. 하지만 꼭 내가 아니라도 곧 자네를 찾는 사람은 넘쳐날 거라고 생각하네. 자네 개인은 몰라도 자네가 사용하는 이드라는 이름을 숭배하는 자들은 수없이 많으니까.”

“몰랐던 일입니다만, 제가 그들을 만나야 할 이유는 없지요. 지금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요.”

이드는 은근히 선을 그었다.

백작 정도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듣기에는 충분히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말인데도 사무엘 백작의 표정에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했다. 

“암, 그래야지. 어디 근본도 알 수 없는 자들과 함부로 대면해서야 이드라는 이름이 아깝지.”

‘전혀 아까울 것 없는데.’

이드는 내심 혀를 빼물었다.

이드라는 이름에 무슨 가치가 있어서 아까울까.

이름이란 거지에서부터 황제까지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공평한 것이다.

“그런데 이그렌 경과는 어떻게 함께 오셨습니까?”

이드는 말과 함께 이그렌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는 증손이 아니라는 이드의 말에 뭔가 생각과 크게 어긋난 듯 혼자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그렌 경은 본 작이 다스리는 영지에 살고 있어 평소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불현듯 이드라는 이름이 들려오는 게 아니겠소. 마인드 마스터의 높은 이름을 존경하고 있던 차에 그 전설의 후손과 전설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이의 후손을 내가 직접 만나게 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오. 그것이 참 의미 있는 일인 듯하고 이야기 속의 한 장면 같다는 아이 같은 흥분된 마음에 이렇게 찾아 왔는데, 아무래도 이그렌 경이 뭔가 착각한 모양이오.” 

난감한 얼굴로 이그렌을 바라보는 사무엘의 눈동자가 순간 짜증으로 번뜩였다.

하지만 그 눈을 보지 못한 이그렌이 급히 고개를 들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 저와 나이차가 없으시기에 당연히 마인드 마스터님의 증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전에 제 증조할아버님께서는 항상 마인드 마스터님과 절친한 친구이자, 전쟁터에서 등을 맡기던 친구 사이였다고 자랑을 하셨거든요. 그러시면서 나중에라도 마인드 마스터님의 후손을 만나거든 그와 너는 무조건 친구라고, 꼭 그래야 한다고 항상 버릇처럼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 그래서…..”

이그렌은 이제 와 자신이 했던 일이 무안한 듯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바보짓은 모두가 본 후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마인드 마스터님과는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지금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전쟁터에서 등을 맡겼다는 이야기는 그래이 님께 직접 들으신 건가요?”

이드의 질문에 이그렌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일곱 살 때까지 증조할아버님이 잠자기 전에 늘 해 주시던 이야기니까요. 제게 해 주신 이야기로는 증조할아버님이 마인드 마스터님이 위험할 때 몸을 던져서 구한 적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인드 마스터님께 듣지 못하셨습니까?”

못 들었다. 아예 금시초문이다.

무엇보다 마인드 마스터의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으라고!

‘그레이 이 자식, 증손자 앞이라고 얼마나 거하게 뻥을 친 거야?”

생명은커녕 전쟁터에 같이 서 본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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