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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65화


602화

실력도 경험도 미미한 시골 청년을 전쟁터에 데리고 간다는 건 죽으라는 소리다.

이드가 당시 나이가 어리긴 했어도 강호에서 구른 경험이 있는데, 설마 그래이를 전쟁터 한가운데로 데려갔을까!


그러나 자랑스러운 얼굴로 그래이의 이야기를 하는 증손자를 앞에 두고 차마 그런 일은 없었노라고, 그건 모두 그래이의 거짓말이라고 해서 그의 자랑을 부숴 버릴 수는 없었다.

“글쎄요. 생각날 듯 말 듯하네요.”

“아, 아쉽네요.”

이그렌이 대놓고 실망했다. 그래이의 자랑이 상대에게는 큰일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래이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저도 그래이 님이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하하하. 그렇죠. 증조할아버님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마인드 마스터님과 헤어진 후에 하신 모험도 많거든요.”

이그렌은 당장이라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야겠다는 듯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드는 일단 그를 말리고 사무엘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드와 이야기를 이어가는 이그렌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무엘 백작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사적인 이야기가 이어지면 지루하실 텐데요. 무엇보다 짧은 시간에 끝날 이야기도 아닌 것 같습니다.”

“본 작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소. 이처럼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또 어디 있겠소이까. 난 그저 기쁜 마음으로 경청할 수 있소.”

아니, 당신을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닌데. 이드는 속에 든 말을 바로 하진 못하고 순화시켰다.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당시의 이야기 중에는 제국에서 외부로 나돌지 않기를 원하는 이야기도 있어서 말입니다.”

제국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사무엘 백작도 어쩔 수 없는지 한발 물러서는 모습이다.

일리나스 왕국의 백작으로서 제국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잘 아는 탓이다.

“제국과 연결되어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허나, 내 따로 이드 군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소이다만.”

이드는 과연 이제 본론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드 군? 누구 허락받고 그렇게 부르는데?”

이드는 아무리 나이 차이가 나도 생전 처음 본 인간에게 ‘이드 군’으로 불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길지 않은 이야기라면, 우선 사무엘 백작님의 이야기를 먼저 듣도록 하지요. 그리고 말씀 중 제 호칭에 관한 부분입니다만, 제가 물려받은 이름의 무게가 있으니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헹. 아까는 전혀 아깝지 않다면서요!]

‘아까워, 이런 인간한테는.’

이드와 라미아가 내심 투닥거렸지만, 그 속을 모르는 사무엘 백작은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오히려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당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미처 그 생각을 못 했구려. 허면 어찌 부르면 좋겠소?”

“요란하지 않도록, 경 정도면 적당하겠습니다.”

“그럼 이드 경, 내 편히 이야기하지요. 혹 알고 있는지 모르겠소만, 이그렌 경 가문의 사정이 매우 좋지 못하다오. 비록 내가 다스리는 영지 내에 있지만 나도 쉽게 손을 내밀 수 없는 지경인데, 혹 이드 경이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찾아왔다오.”

“음. 이그렌 경의 방문 소식을 듣고 그의 가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렇게 심각할 정도로 많이 위태롭습니까?”

이드는 짐짓 모르는 척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사무엘 백작이 덩달아 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는 그 불행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이그렌의 가문에 대해서 떠들어 댔다.

얼마나 노골적이고 망신스러운 이야기인지, 이그렌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피가 떨어질 듯 달아올랐다. 몇 번은 그게 아니라는 듯 나서려 했지만, 사무엘에 막혀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사무엘 백작의 말에 따르면, 이그렌의 가문은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왕국을 속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그 오명을 벗기 위해 발악하다가 영지까지 팔아먹은 데 더해서 산더미 같은 빚까지 만들고 끝에 가서는 부모마저 부정하는 멍청이들이 되었다.

‘이건 완전히 콩가루 집안인데?’

사무엘 백작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 속에 들어 있는 큼직한 일들만 봐도 이게 한 가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인가 싶을 만큼 어이가 없는 내용들이라 순간 할 말을 잊을 정도였다.

[헐………… 사고가 그렇게 많은데 가문이 이어지고 있는 게 더 대단하네요.]

그건 이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람들의 경악 속에서 이그렌은 고개를 숙이고 바르르 주먹을 떨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는 일리나를 돌아보았다.

최근 들어 그녀를 신분증 내지는 거짓말 탐지기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있는 능력은 고맙게 잘 사용해야지! 썩히는 것보다는 낫다!

그런데 이번엔 그 믿음직한 능력이 답을 주지 못했다.

일리나가 미적지근한 표정으로 이드의 눈을 피한 것이다.

‘엥?’

이드는 도대체 저게 무슨 뜻인가 싶었다. 난데없는 파업 선언은 아닐 테고.

-무슨 일이에요?

ᅳ판단이 어려워요. 진실인데 거짓 같고, 거짓인데 진실 같아요.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여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엘프의 능력은 순리에 맞지 않는 흐름을 거짓으로 판명하고 가려내는 것이지, 상대의 마음을 읽어 내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묘한 거짓이나 작은 진실을 크게 부풀린 것들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사무엘 백작의 이야기 중에 보였던 이그렌의 반응을 생각하면 그 둘 모두일 수도 있다.

‘그러면 진실을 이야기할 만한 사람에게 직접 듣는 수밖에.”


“한 가문이 겪기에는 너무 큰일이 한꺼번에 덮쳤소.”

사무엘 백작이 말했다.

하지만 저 말이 온전한 진실이 아니란 사실은 이미 일리나를 통해서 확인받았기 때문에 이드는 차가운 눈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요. 하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도 아닌 듯합니다. 제 능력으로는 그중 어느 것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사실 그랬다. 타국의 정계나 개인적인 가정사에 타인이 간섭할 수 있는 한계선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나마 가장 쉽게 도울 수 있는 것이 금전적인 빚인데, 그것도 이드에게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쉽게 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

“아니네. 이드 경이 나서 준다면 대부분의 문제를 풀 수 있어. 그렇게 되도록 본 작이 중간에서 충분히 조율해 줄 수 있네.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모든 문제의 근본은 의외로 간단하네. 그것만 푼다면 다른 문제들은 쉽게 풀릴 것이란 것이 내 생각이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이그렌 경의 가문을 일으킨 그래이 시온 자작이 왕국에 진상했던 무공이네. 모든 문제는 자작이 그 무공을 온전하게 모두 내어놓지 않았다는 의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지. 그 일그러진 부분만 해결한다면 나머지 문제야 자연스럽게 풀리지 않을까 생각하네.”

“그래이………… 님의 무공이란 말이군요?”

결국 그거냐!

‘허기사, 지금 내게 얻어낼 수 있는 거라면 무공과 일라이져 정도겠지.’

산더미 같은 보물이야 아공간에 들어 있어서 모르겠지만, 마인드 마스터라는 이름으로 공인된 무공과 마인드 마스터가 사용하던 검은 현 대륙의 권력자들에게 숨 막히도록 가지고 싶은 보물일 것이다.

이드는 라일론 제국에서 그의 무공을 노리고 뒤를 쫓았던 일과 소드 팰러스에 도착하자마자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을 보자고 탐욕 어린 눈으로 겁박하던 삼검왕의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무엘 백작이 무공을 언급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래이의 가문의 문제가 모두 무공에서 시작되었다는 말과 그가 왕국에 온전한 무공을 내어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그래이가 무공을 일리나스 왕국에 내어놓은 일은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현명한 일이다. 그가 제국의 그늘로 도망이라도 치지 않는 이상 일국을 상대로 무공을 지킬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어줄 것은 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는 것이 낫다.

당장 검후만 보더라도 제국뿐 아니라 전 대륙에 무공을 뿌려 두었지 않은가.

‘쯧. 생각하면 괘씸하긴 하지. 무림이었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그런데 그래이가 무공을 숨기고 일부분만 내줬다는 건 좀 이상한데. 그래이에게 그럴 만한 주변머리가 있을 리가…………?’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 중에 하얗게 주먹을 쥐고 있던 이그렌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섰다.

“아닙니다! 증조할아버님은 마인드 마스터님께 배운 모든 무공을 전했습니다. 절대 하나도 숨기신 것이 없습니다.”

“자자, 진정하게. 자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왕국에 전해진 그의 무공이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지 않나.”

“그건…….”

이그렌은 순간 말이 막혔다. 사무엘 백작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왕국에 전한 그래이의 무공은 그에게서 사용될 때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렇소. 자작이 무공을 전했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흘러 그 무공을 익힌 기사들이 나오고 그 위력이 생각과 달랐을 때 문제가 되었소. 자작이 신전과 마법의 힘을 빌려 그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해도 눈에 보이는 성과는 달랐기 때문에 논란은 쉬이 가실 수가 없었소.”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충분히 왕국을 속였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거기에 신전과 마법으로 증언을 했으니 속였다는 얘길 들으면서도 무사한 이유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런 오명을 쓴 그래이와 친하게 지낼 귀족들이 있었을까?

사무엘 백작이 말했던 사건사고들은 그런 따돌림 속에서 나온 일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드는 십여 년 전에 그래이에게 무공을 가르쳤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럼 이그렌 경은 어떻습니까? 그래이 님의 무공을 배우셨을 것 같은데요.”

“그건 제가 모자란 때문에………….”

결국 이그렌의 무공도 별 볼 일 없다는 뜻이다.

‘이거 확실히 문제가 있기는 있나 본데.’

이드는 내심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당장 기억을 들추기보다는 지금 바로 이그렌의 무공을 볼까 하는 중에, 사무엘 백작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본 작도 자작이 거짓을 말했다고 생각지는 않소. 왕국뿐 아니라 후손까지 기만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쉽게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오. 그보다는 무공에 근본적인 어떤 오류가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 본 작의 생각이요.”

“그럼 사무엘 백작님의 생각은?”

“이드 경이 마인드 마스터의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자작에게 전했던 무공을 여기 이그렌 경에게 다시 전해서 그를 통해 자작이 왕국에 받은 오명을 씻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네. 그렇게만 된다면 나머지 문제는 무공을 받은 왕국의 은혜로 모두 풀 수 있지. 그리고 이번엔 혹시 있을지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내가 옆에서 전해지는 무공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하겠네.”

아항~!

“같이 배우시겠다는 의미시군요?”

“그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준다면 기쁘겠지만, 옆에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네.”

이드는 마치 다 결정된 일인 듯한 사무엘 백작의 얼굴에 내심 어이가 없었다.


“어디서 이런 사기꾼 같은 XX가!’

결국 그래이를 마인드 마스터와 엮어 무공 전수를 하게 만들어 그걸 옆에서 같이 배우고, 그걸 인연으로 자신과도 무공을 가르치고 배운 관계를 만들어 보겠다는 뜻이 아닌가!

‘내가 그런 병신 같은 말장난이 통할 정도로 만만하게 보이나?’

이드는 새삼 유리창에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본다.

잘생긴 얼굴이 어려워 보이진 않는다. 만만하게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얼굴이 안 되면 말로 만만하지 않다고 못 박아 줄 수밖에. 어디서 호구를 찾아!

“참, 어이없는 말을 하십니다. 설마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가능할 거라고 말을 꺼내신 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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