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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76화


613화

네리베르는 그날 밤을 새워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이튿날 케마란과 다시 대련했고, 다시 패배했다.

6연패!

“당신이 이겼어요.”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네리베르는 의외로 산뜻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미쳤다! 또 실력이 늘었어!”

“아…….”

네리베르가 패배를 인정하자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련생들로부터 환호와 탄식이 흘러나왔다.

파죽의 5연승까지와는 조금 달라진 분위기였다. 오늘의 패배는 지난번의 대련보다 조금 더 시간이 짧아져 있었으며, 대련의 내용면에서도 네리베르의 약세가 두드러졌다.

그러자 수련생들 중에서 케마란의 연승 이유가 단순히 그녀의 천재성 때문이 아니라 링스피어라는 무기의 우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같이 검(劍)이라는 무기를 사용하는 그들로서는, 링스피어가 검보다 뛰어난 무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무인에게 무기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며, 또 다른 자신이다.

그런 무기를 의심하는 순간 무기는 주인을 배신하고, 무공은 퇴보하기 시작한다.

오늘 대련에서 특히 네리베르를 응원한 수련생이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검을 의심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네리베르가 자신들을 대신해 링스피어를 이겨 주길 바란 것이다.

결국 다시 졌지만.

“하루하루 실력이 늘어나는군요. 축하해요.”

“어, 고마워.”

어제까지와 달리 분해하지도 않는 그녀의 반응에 케마란이 살짝 당황해서 대답했다.

“하지만 저도 당신에게 언제까지나 지고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

“응?”

네리베르는 당황해하는 케마란을 두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오늘 특별히 대련을 관전해 달라고 요청한 이드가 서 있었다.

“어머나, 이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뜨거운걸요.”

마침 이드와 함께 나와 있던 일리나가 새초롬한 눈으로 이드의 옆구리를 찔렀다. “에이, 난 무서워 보이는데요.”

마침 네리베르가 화난 듯 정색한 얼굴로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이드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드는 일찍 찾아온 네리베르로부터 케마란과의 대련을 관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패배 후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이미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도 말이다.

이드는 과연 그녀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불렀는지가 궁금했다.

“이드 님.”

“아쉽게 패했지만 이전보다 실력이 훌쩍 늘어서 놀랐어. 정말 많이 늘었는걸.”

사실이었다. 비록 케마란에게 연패 중이지만 네리베르의 실력은 수련생들 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이드의 칭찬에도 네리베르는 전혀 기뻐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6연패 중에 도대체 어떻게 실력이 늘었다는 말을 인정하고 기뻐하라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케마란 양이 저보다 더 강해요. 그래서 연패 중이죠.”

“대련을 봐 달라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니?”

“네, 전 케마란 양을 이기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 그녀는 도저히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해요.”

온전히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는 발언에 수련생들의 시선이 케마란에게 모였다.

“큼…….”

케마란은 어쩐지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링스피어를 고집하면서 깔보거나 적대적인 시선에는 익숙했지만, 지금과 같은 수련생들의 반짝이는 눈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고개를 숙일 정도로 그녀의 신경이 말랑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 보이는 네리베르의 뒤통수에 집중했다.

네리베르가 똑바로 이드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전 그녀를 이기고 싶어요.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마치 맡겨 둔 것을 찾으러 온 것 같은 당돌한 발언이었지만, 이드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일절 가식이 없는, 오로지 하나를 향한 열망이 보기 좋았다.

케마란은 어깨를 움츠렸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이기는 방법을 알려 달라니.

‘어쩐지 암살자에게 내 살인 의뢰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인걸.’

“스폴 경과 데일리 경에게 물으면 가르쳐 줬을 텐데?”

이드는 마침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알려주셨습니다. 저와 케마란 양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올바른 수련을 하고 있으니 꾸준히 수련하면 그녀를 이기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정론이네. 그런데도 날 불렀다는 건 기다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네. 전 지금 이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드 님이라면 이길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들으면 스폴과 데일리를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두 사람은 모르고 이드는 알고 있다는 말이니까. 자존심 강한 기사였다면 네리베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밉상으로 찍어 놓을 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정작 두 기사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흥미롭게 이드의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도………… 알고 싶습니다.”

수련생 중 하나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 선택한 무기에 대한 의심에 허덕이던 중 들린 네리베르의 말이 황금 동아줄처럼 느껴진 때문이었다.

그를 시작으로 수련생들이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도 케마란에게 패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 어쩐지 악당이 된 것 같아.”

케마란이 입을 삐죽였다. 주변에 온통 자신을 노리는 적으로 가득했다.

“그게 바로 강자가 걸어야 할 고독한 길이란다. 키킥!”

어느새 다가온 스폴이 빙글거리며 뒤에서 목을 감싸 안자 케마란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 건가요?”

“응! 그런 거야.”

그때 그 모습을 수련생들이 돌아보고 부러운 듯 도끼눈으로 노려보자, 스폴이 보란 듯이 케마란의 얼굴에 볼을 비볐다. 순간 질투심이 폭발한 수련생들이 외쳤다.

“꼭! 케마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없었던 목표 의식에 불타올랐다.

케마란은 어쩐지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죽이는 방법을 알고 싶어하는 듯한 수련생들의 모습에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이건 강자의 길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응! 그런 거야.”

“그러니까 어느 쪽이요!”

이드는 재미있게 흘러가는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쉴라가 걱정했던 부분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런 문제라면 오히려 환영이다.

이드는 분위기에 같이 어울려 주기로 했다.

“여러분이 이처럼 열화와 같이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 좋다! 그럼 내 첫 수업은 케마란을 사냥하는 방법으로 하자.”

“아앗, 마스터까지!”

오오오!

질색하는 한 사람이 있었지만 즉석에서 정한 수업 주제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인지 환호성이 올랐다. 스폴과 데일리의 인기에 밀려서 정작 지도 당사자인데도 뒤로 밀렸던 이드의 입지가 순식간에 제 위치를 찾은 듯하다. 거기다 수련생들과의 거리가 급 가까워져 버렸다.

그러고 보면 이게 제대로 된 첫 수업이었다.

지금까지도 가벼운 대련과 조언으로 수련생들이 가진 허점과 수련 방향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무언가를 주제로 수업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기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흐름을 타지 못한 네리베르는 얼굴을 감싸고 조용히 절망했다.

“아…………… 왜 일이 이렇게 됐지?”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마음을 가다듬은 일이었는데, 어쩐지 한껏 진지했던 자신이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등을 미는 일리나의 손에 수련생 사이에 섞일 수밖에 없었다. 일리나가 누군지 아는 그녀로서는 감히 그녀의 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사이 수련생들은 이드의 수업을 듣기 위해 모여 앉았다.

떨어진 곳에서 케마란이 스폴과 데일리 사이에 끼어 귀여움을 받으며 훌륭히 수련생들의 성취욕을 돋우고 있었다.

수련생들 앞에선 이드는 케마란을 불러 세우고 말했다.

“자, 수련생들의 공공의 적이 여기 있다. 훌륭하게 최종 보스로 성장 중이지.”

“하하하.”

“네리베르, 케마란을 이기고 싶다고 했지? 그럼 자신이 왜 지고 있는지는 알고 있니?”

“아니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기는 방법을 알게 되면 자연히 지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다. 반대로 지는 이유를 알게 되면 이길 수 있는 방법도 찾을 수 있다. 결국 같은 말을 평소 생각과 성향에 따라 앞뒤만 바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기는 방법을 요구하는 네리베르의 성향은 공격적이고 직선적이다.

이드는 케마란에게서 링스피어를 받아 들며 말했다.

“좋아. 그럼 네리베르가 원하는 대로 이기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 우선 이기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 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최우선이다. 이것은 전쟁뿐 아니라 개인 간의 싸움에서도 가장 먼저 실행되어 하는 일이다. 그 부분이 미흡할 경우 자신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달려들어 개죽음하게 된다.”

전술의 핵심이자 기본과 같은 발언에 수련생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는 수련생들과 케마란, 그리고 검과 링스피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링스피어가 가진 무게와 길이, 강도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수련생들이 링스피어를 매일 보며 눈에 익혔을 뿐 링스피어라는 무기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성능이 불분명한 무기는 그 존재 자체로 상대에게는 이점을 주고, 자신에게는 약점을 가져다주는데도 말이다.

이드는 다시 링스피어를 케마란에게 넘겨주고 말했다.

“자, 그럼 케마란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케마란 조교 위치로.”

“네?”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드의 말에 케마란이 눈만 끔뻑거리자 이드가 수련생들 앞을 가리켜 보였다. 어리둥절해하던 케마란은 곧 눈치 빠르게 이드가 가리키는 곳으로 뽈뽈거리며 가서 섰다.

“네리베르 조교도 위치로!”

“네? 저도 말인가요?”

그리고 이어진 이드의 호출에 네리베르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이드의 까딱이는 손가락뿐.

네리베르는 힘없이 케마란과 마주서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두 사람은 살아 있는 교보재로서 이드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네리베르로서는 오늘 하루 만에 두 번째로 절망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왜 이야기를 꺼냈을까!’

차라리 조용히 물어볼 것을, 하고 후회가 되었다.

마주 선 케마란의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녀를 이기겠다는 호승심은 이미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그저 자신과 함께 인형과 같은 처지가 된 그녀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그러나 참담한 심정의 네리베르와 달리 재미있는 인형극이 추가된 이드의 수업은 수련생들의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이드는 네리베르의 연패의 핵심 원인으로 그녀의 검과 네리베르의 링스피어가 가진 힘과 무게의 차이를 꼽았다. 가벼운 네리베르의 검이 링스피어의 무거운 힘을 이기 못하고 끌려가 버린 것이 이유였다.

쾌검이자 환검에 속하는 검후의 난화십이식을 근원에 두고 발전한 그레센의 무공은 기본적으로 가벼울 수밖에 없고, 네리베르의 검도 기본적으로 빠른 속도를 자랑했다.

그에 반해서 중병기에 속하는 링스피어를 다루기 위해서 이드는 케마란에게 중검(重劍)에 대한 검의(劍意)를 은연중에 주입했다.

그렇지 않아도 검보다 무거운 링스피어에 중검의 묘리가 더해지자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사과처럼 검이 그리는 선이 링스피어에 의해서 일그러져 버린 것이다.

네리베르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더라도, 댐에 난 작은 구멍처럼 작은 일그러짐은 결국 큰 허점이 되어 그녀를 연패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드의 설명에 수련생들이 반박하고 나섰다.

“하지만 제 검이 가진 힘과 파괴력도 링스피어에 뒤지지 않습니다!”

당연했다.

그들은 그들의 손에 들린 검으로 나무를 쪼개고, 검기를 뿜어 바위를 부순다.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힘으로 밀린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들이었다.

이드는 그들을 이해했다. 그도 몇 마디 설명으로 수련생들이 중검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와라. 직접 겪어 볼 수 있도록 해 주겠다!”

그래서 실기가 중요하다.

하지만 지적당한 질문자는 질색했다.

“에엑! 보복성 체험 반대!”

“이 녀석!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인간으로 보이냐!”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씩 저희들을 무자비하게 굴리시는 손에 감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

아무래도 스폴과 데일리에게 밀리면서 욱했던 업보가 돌아온 모양이다.


보복성 체험이 아니냐는 의심 속에서 질문자를 포함, 원하는 수련생들에게 체험 학습이 이루어졌다.

“그래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실 이드도 기대하지 않았다.

“괜찮다. 아무리 천재라도 한 번 보고 듣는 것으로 모두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중검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한 가지 수련 방법을 준비해 왔다.”

“그게 뭔가요?”

“바로 만검수련이라는 것이다.”

만검은 하나의 초식을 최대한 천천히 전개하는 수련 방법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다는 아니었다. 꼭 지켜야 할 두 가지 핵심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절대 끊기거나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의 초식을 펼치는 중간에 천 명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천 명은 수련자가 임의로 상상하는 상대이며, 그들은 모두 다른 방법으로 수련자를 공격해야 하고 수련자는 공격을 막거나 피하기 위해 검을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짧은 움직임 안에 수십, 수백의 변화와 생각이 쌓이게 된다. 그렇게 쌓인 생각은 무거운 추가 되어 수련생들의 검에 힘과 무게가 실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검이다.”

“케마란도 만검수련을 했습니까?”

“아니,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링스피어를 수련하다 자연스럽게 익힌 경우다. 물론 만검수련은 함께한다.”

수련생들은 직관적이지 못하고 두리뭉실한 중원식 표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장 적보다 먼저 상대를 찌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검을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오히려 천천히 움직이라니?

그러나 수련생들이 제대로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에 한쪽에서 만검수련을 하고 있는 스폴과 데일리의 모습에 수련생들도 별수 없이 검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독특한 수련 방법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소드 팰러스로 퍼져 나갔다.

다만 이드의 당부에 의해서 핵심이 되는 두 가지 유의 사항은 같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식이 삼검왕에게 알려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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