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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88화


625화

“으드득.”

이를 악물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빅터는 문이 닫히자 온 힘을 다해 허리에 걸려 있던 검을 패대기치고는 참고 참았던 가슴속 분노를 토해 냈다.

“끄아아아아악! 씨이이이바아아아알! 씨발! 씨발! 씨이발!”

단순히 소리치는 것만으로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빅터는 방 안에 있던 탁자를 뒤집고 집기들을 집어 던졌다. 방은 순식간에 엉망으로 변했다. 한참 발광하던 빅터는 숨이 차는지 씩씩거리며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하지만 곧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문을 노려보았다.

“개새끼들.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놈이 없어!”

수련생들 위해 만들어진 기숙사의 방 중에는 보안과 방음 마법이 걸린 곳도 있었지만, 그의 방에는 그런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다. 작지 않은 소리는 당연히 문을 넘어서 들렸을 것이다.

밖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걱정하며 문을 열어 보는 놈이 없었다.

“위선자 새끼들. 지들이라고 뭐 달라? 지들도 마르텔 님이 물었으면 당연히 나처럼 말했을 거면서!”

빅터는 가슴을 채우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바닥을 내리찍었다.

수련생들이 그를 무시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마르텔이 이드에게 패배한 날 빅터가 했던 짓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날의 일은 그 자리에 있던 수련생들을 통해 이미 자세하게 알려져 있었다.

수련생들은 빅터의 행동을 비난했다. 어떻게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을 앞에 두고 그의 가르침을 부정할 수 있느냐고.

거기에 대결 끝에 마르텔이 패배하자 바로 이드를 향해 박수를 친 행동까지!

“역겨운 배신자 새끼.”

“저런 박쥐 같은 놈인 줄 몰랐네.”

수련생들은 그런 빅터를 비난했다. 그들에게 빅터가 한 짓은 배신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수련생들의 비난과 조롱이 쏟아졌다. 그날부터 빅터는 수련생들로부터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방 안에서 아무리 지랄 발광을 해도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였다. 어쩌면 지금도 밖에서 그의 방문을 보고 낄낄거리며 비웃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오늘 아침까지는 그런 비웃음도 무시할 수 있었다. 패배자들의 발악이라고 비웃어 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블러디 혼 마르텔의 제자가 되었으니까!

무려 소드 팰러스 검왕의 제자가 된 것이라고, 빅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수련생들이 이드의 수업을 받고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그것은 학생과 선생의 관계일 뿐이지 부모와 자식 같은 정식 제자와 스승의 관계가 아니었다.

다른 놈들은 그런 수업조차 받지 못한 부러움에 몸부림치는 병신들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달랐다. 자신은 무려 검왕의 정식 제자였다.

그렇게 믿었다. 오늘 외출하기 전까지는!

“씨이발.”

빅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만졌다.

아직도 서늘한 검날의 감촉이 생생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오늘 빅터는 마르텔이 불러 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마르텔을 찾아갔었다. 그러나 그는 마르텔을 만나기는커녕 문전박대만 당했다. 처음에는 문을 지키는 자가 자신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마르텔의 새로운 제자라고 당당히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살기 어린 싸늘한 경고와 시퍼런 검날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할 것이니 절대 잊지 마라. 우선 마르텔 님께서는 너같이 천박한 자를 제자로 들이신 적이 없다. 그분은 그저 네 수련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약속도 마르텔 님이 쓰러지신 상황에 박수를 치는 순간 깨어졌다. 그런 신의와 예의를 모르는 자에게 마르텔 님의 귀한 가르침이 어디 가당키나 한 소리냐. 귀한 가르침을 욕되게 할 뿐이지. 경고하는데, 그런 식으로 분에 넘치는 행운을 탐하다가는 죽게 될 것이다.”

빅터는 기사의 경고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그의 발치의 땅을 검으로 잘라 낸 기사가 돌아서며 한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박쥐 같은 놈!”

빅터는 몰랐지만 기사의 덕목 중 하나인 충성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연이어 보인 그는 기사들에게 단단히 찍혀 있었다.

얼마나 놀라서 정신이 없던지. 기숙사 앞에 와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새삼 깨닫게 된 자신의 현실에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빅터는 갑갑한 현실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동기들과 수련생들은 자신을 벌레 보듯 하고, 자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한 수업은 최고의 이슈가 되었고,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마르텔에게조차 거부당했다.

“결국 원래 수업을 다시 들어야 하나?”

그러나 빅터는 곧 제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았다. 다른 선생의 수업을 위해서 나갔던 놈이 오만 문젯거리를 달고 돌아오면 자신이라도 받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다른 수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라면 소드 팰러스에서 날 가르쳐 줄 기사나 선생은 찾을 수 없게 될 거야.”

추측이 아닌 사실이었다.

“흥, 배우긴 잘 배워 놓고 뒤에 가서 딴소리하는 놈의 뭘 믿고 가르쳐?”

“그래도 한 번쯤은 실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어리숙하게 굴다가 배신당해! 신중하라고. 배신도 버릇이야. 특히 그놈, 한 자리에서 두 번이나 얼굴을 바꾼 무서운 놈이잖아!”

현재 빅터의 이야기를 들은, 수련생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하나같은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순간 그의 인생은 파멸이었다. 소드 팰러스의 소문이 소드 팰러스에만 남으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소드 팰러스가 존재하고, 소드 팰러스 출신의 기사가 존재하는 한 그를 기사로 받아 줄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지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란 건데.”

빅터는 이드의 수업을 떠올렸다. 하나하나 자세를 교정하며 돌봐 주던 은색 기사단의 아름다운 기사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마르텔을 쓰러트리던 이드의 모습까지.

“확실히 내가 갈 수 있는 건 거기뿐이야. 미친년들이 지랄을 해서 그렇지, 이드 님이 날 쫓아낸 건 아니니까. 거기다 그때 이드 님은 아무런 말도 없으셨단 말이지.”

그러고 보면 이드가 수련생을 가르치면서 한 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장난처럼 수련생들과 어울려 줬다. 그런 이드라면 자신이 잘못을 빌면 용서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을 협박하던 네리베르를 어떻게 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지저분한 사생활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알고 있었다. 유부녀까지 얽힌 추문을 만들어 결투 신청을 받고 싶은 것이냐는 네리베르의 경고는 무서웠다.

특히 그때는 곧 마르텔의 제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이 밝혀지면 마르텔의 제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차피 마르텔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대로 소드 팰러스를 떠나도 그의 인생은 끝장이었다.

“흐흐,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것, 끝장을 보자. 어차피 내게 남은 마지막 기회야. 생각해 보면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나와 논 여자들도 끝장이란 말이지. 과연 네리베르가 그녀들의 인생을 망치면서까지 날 몰아붙일 수 있을까?”

‘어쩌면’을 연발한 빅터의 뇌는 어느새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그러나 빅터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가치와 수 명의 여성들의 인생을 저울에 걸었을 때 네리베르가 누구를 택할지는 나름대로 냉정히 계산했다.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는 생각을 굳힌 빅터는 바로 방을 나섰다.

지금 당장 달려갈 수도 있었지만, 그전에 할 수 있는 일은 미리 해 둘 생각이었다.

빅터는 그때부터 자신과 은밀하게 만났던 여성들과 좋지 않게 헤어진 여성들을 찾아다녔다. 그는 은밀하게 만난 여성들에게는 협박과 함께 결별을 고했고, 좋지 않게 헤어진 여성들에게는 두둑한 선물을 들고 찾아가 간절히 용서를 빌었다.

상대가 그의 말을 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빅터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그가 그런 일을 했다는 증인과 증거였다.

네리베르에게 제시할 수 있는 적당한 카드를 마련할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덕분에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탕진했다. 적당한 카드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중간한 물건들로는 힘들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힘들게 사방으로 뛰어다니던 빅터에게 한 사람이 반갑게 다가왔다.

“이런 반가울 데가. 자네를 여기서 만나는군.”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반갑게 자신을 반기는 그의 행동이 고마운 빅터였다.

최근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모두 그를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귀인께서 어떤 분이신지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니네. 당연하지. 우리가 정식으로 인사한 적은 없으니까.”

“그럼 절 어떻게 아시고?”

의아해 하는 빅터의 모습에 그, 사무엘 백작이 환하게 웃었다.

“그때 그 자리, 마르텔 님이 패배하시던 때 말이네. 나도 거기 있었거든.”

“음…….”

사무엘 백작의 말에 빅터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조롱하는 그때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이자가 자신을 반긴 것도 조롱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빅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사무엘 백작은 그 속을 다 안다는 듯 친한 척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네. 하지만 걱정 말게. 난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박수를 쳤을 때 난 옆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네. 기억하나?”

“아! 그때!”

빅터는 순간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얼굴이 환해졌다. 그때 만세를 부른 이 남자 역시 자신과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 떠오른 것이다.

빅터의 마음에 순식간에 그에 대한 동질감이 솟아났다. 최근 모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한 역작용이었다.

사무엘은 그런 기색을 기가 막히게 눈치챘다.

“역시 알아보는구먼. 내, 자네가 요즘 힘들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었지. 그래서 한번 찾아가 볼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만났으니 참으로 인연이 아니겠나.”

“가, 감사합니다.”

“난 일리나스에서 온 사무엘 잭 댑슨 백작이네.”

“배, 백작 각하!”

“허허허허.”

기습적으로 신분을 밝힌 사무엘 백작의 말에 빅터는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위급한 처지인 자신에게 백작이 먼저 다가오다니.

“자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디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좀 하세.”

빅터는 사무엘 백작의 강권에 그를 따라 고급 살롱으로 향했다. 수련생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비싼 술집이었다.

거기서 방을 빌린 사무엘 백작은 빅터의 술잔에 술을 채워 주며 말했다.

“난 자네를 응원하네. 그리고 자네가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네. 왜냐면 그때 자네의 행동이야말로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줄 아는 자의 행동이었기 때문이네. 마시게!”

“백작 각하!”

“지금이 어디 검만 잘 휘두른다고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세상인가! 지금 철모르는 아이들과 어리석은 자들은 자네를 욕할지 몰라도………… 두고 보게. 자네는 분명히 크게 성공할 거야. 자, 또 한 잔 마시게!”

“감사합니다, 각하.”

“하하하, 사실을 이야기한 게 무에 감사하겠나. 그런데 지금 자네는 어떤가?”

“정말 억울해 죽겠습니다.”

슬쩍 판을 깔아 주는 사무엘의 말에 빅터는 신이 나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수련생들의 무시. 네리베르의 경고. 마르텔 저택 기사들의 행패. 그리고 자신의 생각까지.

두 사람은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에는 여자까지 불러서 마셨다.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마셨다.

“끄응…….” 

그리고 다음 날.

빅터는 깨질 듯한 머리와 무거운 몸으로 겨우 살롱의 방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는 술병이 가득했고, 여기저기 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잠시 멍하니 그 꼴을 바라보던 빅터는 곧 정신이 들어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사무엘 백작은 먼저 돌아간 듯 보이지 않았다.

덮고 있던 얇은 이불을 치운 빅터가 방에 달려 있는 줄을 당겼다.

그러자 곧 아름다운 살롱의 마담이 하인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제 일어나셨나요?”

“그렇소. 그런데 같이 계시던 백작 각하께서는 어찌되셨소?”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우선 속이 편치 않으실 테니 이것부터 먼저 드세요.”

“이건 뭐요?”

“포션이 들어간 따뜻한 차랍니다. 숙취에 효과가 좋죠.”

그 비싼 포션으로 숙취 해소라니!

빅터는 내심 놀란 표시를 내지 않고 마담이 내미는 따뜻한 포션차를 마셨다. 그러자 무겁던 몸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확실히 좋군.”

“저희 살롱이 자랑하는 서비스랍니다. 이제 돌아가실 건가요?”

“그래야 할 듯하오.”

사무엘 백작이 없는 살롱은 빅터에게는 부담이었다.

마담은 빅터의 대답에 신호를 했고, 등 뒤에서 건네주는 봉투를 받아 내밀었다.

“받으세요.”

“이건 뭐요?”

“백작님께서 빅터 님이 일어나시면 전해 달라고 하셨답니다.”

“백작 각하께서?”

빅터는 사무엘 백작이 남겼다는 말에 반갑게 봉투를 열어 펼쳤다. 그리고 그 내용을 확인한 빅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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