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91화
628화
짤랑거리는 스폴의 웃음소리에 빅터가 진저리를 쳤다.
“이, 이건 거짓말이야.”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살롱 마담의 짐작으로 사무엘 백작의 의중을 대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의 어깨를 잡은 스폴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빅터는 그로 인한 아픔을 느낄 정신도 없었다.
“배, 백작 각하를 불러 주십시오. 그분이라면 진실을 이야기해 주실 겁니다. 정말입니다. 전 절대로 저런 계약서 같은 건 모릅니다.”
빅터가 꼼짝도 하지 않는 팔을 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쳤다. 한쪽 어깨가 잡혀 달랑거리는 모습이 마치 인형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 모습을 안타깝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대결 전날까지 그와 제법 친하게 지냈던 수련생들도 그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놀기 좋아하는 친구였던 빅터는, 어느새 그들에게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어머나, 설마 당신이 부른다고 백작님 같은 고위 귀족이 당장 달려와 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빅터가 안타깝다는 듯 말한 스폴은 곧 빅터의 팔을 비틀어 그를 완전히 제압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데일리가 끈을 가져와 그의 팔을 묶었다. 이제 수련생에서 완전한 죄인의 모습이 되었다.
그런 자신의 처지에 빅터는 고래고래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건 아니야! 진짜 내가 아니라고! 내가 미쳤다고 그런 계약서를 쓰냔 말이야.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파냐고!” 하지만 그건 오로지 빅터 혼자만의 외침일 뿐이었다.
이미 그의 인성을 확인한 사람은 그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빅터의 말에는 틀린 부분도 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이미 한 번 케마란과 네리베르에게 눌려서 빅터가 도망갔을 때 이드는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를 되돌리지 않음으로써 그를 수업에서 제외시킨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수업에 참가한 모든 수련생과 기사들이 확인한 일이었다.
수련생들이 보기에 빅터의 행위는 자신만 확인하지 못한, 쓸모없어진 기회를 과대 포장하여 판 것에 불과했다.
다만 빅터만 인정하지 못하는 진실이었다. 빅터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바로 전날까지 다시 수업을 받기 위해 전력을 다해서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과오들을 입막음했으니까!
어느새 빅터의 일은 스폴과 데일리에 의해서 마무리되고 있었다.
스르륵.
그리고 그 순간 조용히 수련장 안으로 찾아드는 한 사람이 있었다. 0124…….
이드가 기억에 남아 있는 기척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수련장 안에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그의 존재는 이드를 제외한 그 누구도 기척은 물론, 존재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마치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자연스럽게 수련장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존 워스 한번 찾아오겠다더니, 어째 타이밍 좋게 딱 소란스러울 때 찾아왔네.’
두 사람의 눈이 살짝 마주친 순간 빅터의 고함이 크게 터졌다.
“이건 음해야 결단코 이건 절 음해하려는 음모라고요!”
“에고.”
그 목소리에 이드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저런 바보가 자신의 저택 수련장에 있다는 사실이 쪽팔렸다.
동시에 묵묵히 이드와 마주보고 있던 존 워스의 고개가 무겁게 돌아갔다.
“훗, 너 따위를 위해 음모를 꾸몄다면, 그 또한 슬픈 일이군. 도대체 얼마만큼 바닥을 기는 인간이기에 너 따위를 위해서 음모를 꾸밀까.”
무정하면서도 비웃음 가득한 냉소였다.
섬뜩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수련생들이 화들짝 놀라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그제야 워스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돌멩이를 바라보는 듯 무심한 시선 앞에 선 빅터였다.
그는 워스를 확인한 순간 소리를 지르는 것도 잊어버렸다.
다만 시퍼렇게 날이 선 검 한 자루가 서 있는 것 같은 워스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점점 고개를 숙였다. 고개가 바닥을 향하는 순간 뚝하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삼검왕 앞에서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인 이상 자신의 소드 팰러스의 생활이 여기서 끝났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세인들이 이드를 사검왕이라고 말한다고는 해도, 이드와 존 워스의 무게는 엄연히 달랐다.
기존의 세 검왕과 네 번째 검왕이 주는 무게감의 차이를 빅터의 반응이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척!
“은색 기사단 수석 기사 스폴 레드파뉴가 철벽의 검왕께 인사드립니다.”
워스의 존재감에 순간 압도되어 있던 사람들이 스폴의 인사를 시작으로 분분히 고개를 숙였다. 수련생들은 그러는 중에도 은근히 열기 있는 눈으로 워스를 훔쳐보았다.
평소에는 감히 마주치기도 힘들뿐더러 일 년에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존재가 바로 삼검왕이었다.
‘그 뵙기 힘든 검왕님을 이드 님의 수업에서만 벌써 두 분째! 역시 최고의 수업이닷!’
‘혹시! 혹시 이번에도 세상을 울릴 최고의 대결이!’
어느새 잔잔한 흥분이 수련생들을 감쌌다.
이드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대부분이 기대 어린, 노골적인 표정인데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아쉽지만, 당신들이 기대하는 쇼는 없네요.’
스스도로 괜히 쓸데없는 힘자랑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도 있지만, 과연 존 워스가 자신이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싸움을 걸어올까?
‘음………… 아주 불가능은 아닌 것 같네.’
힐끔 워스를 돌아본 이드는 무심한 눈길 깊숙이 은은한 붉은 열기를 느꼈다. 그것은 강자와 싸우고 싶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띠는 투쟁 본능이었다.
‘과연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어도 삼검왕이라는 이름은 건재하다는 건가. 그러고 보면 아직 삼검왕의 진짜 힘을 확인해 보지 못했지. 마르텔이라는 양반도 진짜는 꺼내 보이지 않았고.’
이드는 오히려 자신 안에 호기심이라는 가면을 쓴 투쟁심이 이는 것을 느끼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귀한 손님께서 오셨군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단순한 눈길로 한 사람을 눈물콧물 다 짜게 만드는 재주를 보인 워스가 대답했다.
이드를 대우하는 말투에 수련생들이 또 술렁였다.
워스의 존재감에 분위기만이 아니라 기운까지 제대로 흔들려 버렸다. 이대로라면 오늘 수업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마음과 기가 흩어진 상태에서 휘두르는 검은 쟁기질 한 번보다 의미 없다.
“그럼 먼저 들어가 계시죠. 전 수련생들을 다독인 후에 들어가겠습니다. 안내는 에단이…………….”
고개를 돌리던 이드는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에단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에단이 이 양반한테 당한게 많았지?’
결국 이드는 록에게 워스의 안내를 맡겼다.
그리고 돌아서서 빅터 앞에 서 있는 데일리를 보며 말했다.
“데일리 경은 빅터의 일을 마무리해 주세요. 서로 말이 너무 다른 만큼 확인은 필요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벼르고 있던 사무엘 백작의 개입에 이드는 살짝 경계심이 일었다. 어쩌면 아침에 찾아왔던 로터스도 그의 끈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장 쓸 수는 없지만 때가 되면 당길 수 있는 끈.
“확실히 할 수 있도록 검궁에 인계한 후 클라인 백작님께 본 건에 대해서 자세히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다행히 데일리는 이드의 뜻을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빅터는 질질 끌려 수련장을 떠났다.
그 뒤로 돌아서던 워스의 말이 더해졌다.
“데일리 경. 클라인 경에게 저런 어리석은 자는 소드 팰러스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내 말도 전해 주게.”
“옙!”
‘끝났구나!’
수련생들은 다시는 빅터를 소드 팰러스에서 같은 수련생으로 보게 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느끼며 마지막 인사로 마음속으로 손을 흔들었다.
“자, 주목!”
짜악-!
이드가 수련생들 앞에 나섰다. 그가 수련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인 이상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박수로 수련생들의 주의를 모은 이드는 수련장 일대를 자신의 간격 안에 두고 의지로써 지배했다.
뭉클-
동시에 이드에게서 뭉게뭉게 솟아오른 무혼(武魂)에서 뻗어나간 기운이 수련생 하나하나의 기운과 연결되었다. 그러자 마치 대련 중인 것처럼 수련생들의 신경이 바짝 조여졌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몸이 전투를 준비하자 수련생들이 흠칫 놀랐다.
모든 수련생으로부터 똑같이 투기가 솟아오르자 수련장이 마치 전장으로 바뀐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엄연히 여긴 수련장이지. 전장이 되어서는 곤란해.’
이드는 무혼에 자극받은 투기를 올올이 모아 하나로 승화(昇華)시켰다. 그러자 수련생들의 집중력이 순간 최대치를 찍었다. 그것은 깊이 집중한 순간 닿는 무아지경과 잘 닮아 있는 현상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하루의 수련은 평소의 수배에서 많게는 수십 배의 효과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평소라면 해 주지 않을 서비스! 감히 지구의 집중력 향상 기계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너무 자주 해 주면 스스로는 고도의 집중 상태에 들지 못하는 불행한 부작용이 생길 수가 있었다.
본능을 흔드는 무혼에 록을 따라 저택으로 향하던 워스가 수련장을 돌아보았다. 그의 두 눈을 승화된 투기가 아찔하게 찔러 들어왔다. 그 순간 워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다른 색으로 바뀌었다가 돌아왔다. 하지만 누구도 그 찰나의 순간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워스 님?”
갑자기 멈춰선 워스를 보며 록이 돌아섰다.
“…………..아무것도 아니네. 가지.”
록은 워스가 바라보던 수련장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계속 워스를 안내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지만 삼검왕을 상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흔들린 수련생의 마음을 다잡은 이드는 스폴에게 오늘 하루 단단히 조이라는 말을 전했다. 스폴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어 보였다.
그녀도 이드가 어떻게 한지는 모르지만, 수련장의 분위기가 화살촉처럼 날카로워졌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이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조련하기 딱 좋은 순간이라는 것도.
부르르-
수련생 몇몇이 몸을 떨었다. 예리해진 집중력이 전해 준 자신들의 미래를 몸이 먼저 알아 버린 탓이었다.
“일리나는 라미아에게 들러서 워스의 방문을 이야기해 주고, 차를 준비해 줄래요?”
“두 사람만 이야기하는 거 아니었어요?”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지, 사람 수를 정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만약 제가 워스라면 일리나도 만나 보고 싶을 것 같거든요.”
“어째서요?”
“전설 속 한 페이지를 장식한 아름다운 엘프니까요.”
“호홋.”
이드의 너스레에 일리나가 싫지 않은 표정으로 웃었다. 두 사람은 각각 지하실과 저택으로 향했다.
워스가 기다리는 방의 문 앞에 록이 나와서 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안에 있지 않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있는데도 숨이 턱턱 막혀서요. 에단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록이 진저리를 쳤다.
“하기야 저 양반, 자신의 기세를 전혀 갈무리하지 않고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힘들 만하네.”
사실 워스의 그러한 행동은 명사로서의 몸가짐은 아니었다. 록 정도로 단련한 사람이 이렇게 느끼는 정도라면 심약한 사람은 심장이 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의형살인(意形殺人)이 가능한 지경에 이른 자가 워스였다.
“이제부턴 내가 상대하지.”
“클라인 백작님께 연락을 할까요?”
“음, 그럴 필요는 없어.”
이드는 가볍게 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구구구구―
그러자 수백 미터 지하의 동굴같이 중압감에 물든 방과 워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