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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92화


629화

워스와 눈이 마주친 이드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워스는 그 미소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다.

두근!

무공에 대한 열정과 희열, 그리고 전투에 대한 흥분은 느끼지만 한 번도 뜨겁게 뛰지 않던 심장에서 크나큰 고동 소리가 울려 전신을 두드린 것이다.

‘흐…… 좋군.’

생전 처음으로 자신이 더없이 살아 있음을 확인시키는 감각에 워스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기세가 춤추듯 뿜어지며 방 안을 숨 막히게 내리눌렀다. 실존하지 않는 무형의 것이었지만, 생물이 가진 삶에 대한 본능을 위협하는 종류의 압박감이었다.

고오오오-

“이런.”

이드는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워스의 모습에 작게 혀를 찼다. 기세를 전혀 갈무리하지 않는 모습에서 짐작은 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아 주변에 피해를 주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때, 이드의 눈에 창턱 위의 꽃이 곧 죽을 듯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기세를 작은 꽃이 견뎌 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꽃은 일리나가 따로 보살피는 아이였다. 이대로 그냥 죽게 둬서는 그녀에게 미안했다.

생각과 동시에 이드가 가벼운 손짓으로 난잡하게 날뛰며 뻗어나가기만 하는 기세를 밀고 당겨 기존에 없던 흐름을 만들었다.

투두두둥.

큰 흐름을 탔지만 더 난폭해진 기세를 이드는 연공연결(連控聯結)의 비결로 크게 휘돌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무의식중에 기세를 발산하던 워스에게는 난데없는 짜릿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깊이 생각만 잘 한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경험이었다. 자신의 기세에 자신이 물렸으니 말이다.

“오래 기다리게 만들어 기분이 상하지 않으셨나 모르겠군요.”

이드는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말하고 워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크흐흐, 이거 아주 좋군요.”

이건 또 생각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자신의 힘에 당한 만큼 화를 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좋아하다니.

“하하, 워스 님도 생각보다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아무리 그래도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이드 님만 하겠습니까.”

“이드 님・・・・・・ 입니까?”

“주변에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하신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그동안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거려나?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다.

“그렇기는 하죠. 그래도 천하의, 철벽의 검왕에게 존대를 들으려니 어렵군요. 외적으로 나이 차가 많이 나지 않습니까.”

“사검왕이라는 명성을 두고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연치 어리신 황자 전하들도 누구에게나 존대를 들으시듯이요.”

“하하하, 황자 전하들과 비교하기는 어렵지요.”

황궁의 귀에 들어가면 결코 좋아하지 않을 이야기였다.

“이드 님에 대한 보고서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워스가 문득 핵심을 치고 들어왔다. 이드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워스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놀라긴 마찬가집니다. 바로 달려오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왜 오지 않으시나 했습니다. 덕분에 에단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재미있는 자더군요.”

이드가 피식 웃었다. 에단이 들으면 기겁할 말이다.

“좀 더 빨리 뵙고 싶었지만, 개인적인 일로 바쁘신 듯해서 말입니다.”

“바쁜 일이 있었지요.”

이드는 눈을 반짝였다. 워스가 말하는 개인적인 일은 아마 자신이 수련을 핑계로 생명의 관에서 일을 해결하던 때일 것이다. 이드는 가볍게 미끼를 던져봤다.

“혹시 그때 찾아오셔서 헛걸음을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어차피 만나지 못할 것을 알았으니까요.”

이거, 지금 내가 그때 생명의 관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는 말과 같은 거지? 이드는 확인차 다시 물었다.

“바쁘셨던 모양이군요.”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드는 어물쩍 넘기는 말에 내심 혀를 찼다.

‘그나저나 에단의 보고서를 빼돌리고, 다른 두 검왕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을 때부터 생각은 했지만………… 도대체 이 인간 무슨 생각이야? 숨길 게 없는 것처럼 기세를 뿌리고 다니는 것과 달리 검왕의 이름은 그냥 단 게 아니란 건가.’

그때 마침 일리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서로 꿍꿍이를 감추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문양이 가득한 찻잔에 꿀 차를 타 가져왔다.

“드시면서 이야기 나누세요.”

워스가 찻잔을 밀어 주는 일리나를 살피다 말했다.

“과연, 기록이나 그림으로 남은 모습과 똑같으시군요. 귀는 마법입니까?”

“그렇죠.”

“사실 기록으로 남은 분들을 실제로 뵙는 것은 영광입니다. 언젠가는 이드 님을 만날 날이 올 거라는 확신 같은 예감은 있었지만, 그때가 지금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검후가 쌩쌩하게 생존해 있는 만큼 가능성 있는 말이었다. 중원이라면 모르지만, 천년의 수명을 가진 엘프와 수천 년을 살아가는 드래곤이 실존하는 그레센인 만큼 인간이라고 고작 백 년의 시간으로 방심할 수는 없는 일이기는 했다.

“저 역시 그 시간 동안 검후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오랜만에 직접 모습을 보이신 것은 오로지 그 일 때문입니까?”

“소드 팰러스까지 온 것은 오로지 그 때문입니다. 검후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겁니다.”

검후에 대한 말이 나오자 이야기가 급하게 오고 갔다. 서로를 향해 질문과 답을 이어 갔지만 핵심을 찌르지는 못했다. 이드는 ‘검후의 실종에 당신들이 관련되었지!’ 하고 물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에 참았다.

확답을 들을 거라 확신할 수도 없는 질문으로 문제가 생기면 이후 혼돈의 파편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영혼과 정신의 관 토벌에도 영향이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이드 님의 생각은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런가요. 저는 아직 세 검왕분들의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만?”

“저희 세 사람이 하나가 아닌데, 어떻게 저 하나를 보고 세 명의 생각을 모두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모두 다릅니다, 이드 님.” 

이드는 눈을 반짝였다. 워스의 말이 마치 세 검왕의 관계가 한 몸처럼 단단하지만은 않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럼 워스 님의 바람을 알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기사로의 궁극, 제 한계에 대한 시험입니다. 더불어…………… 초인의 관리 정도겠지요.”

한 박자 쉬고 나온 초인이란 말에 음험한 살기가 묻어나왔다.

‘초인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이건 한계에 대한 도전 같은 건 둘째고 초인에 대한 관리가 본심 같은데. 느낌이 고약하네. 절대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네.’

관리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군인에 대한 관리에서부터 선생이 학급 아이들을 케어하는 것까지 모두 관리다. 순간 이드의 머릿속에 근대 지구의 세계적인 미치광이 독재자가 했던 유대인 관리가 떠오른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가 말하는 ‘관리’라는 단어에서는 진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초인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시나 보군요.”

“하하하, 그보다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초인이라는 놈들과는.”

이 정도면 초인에 관해서는 한발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발언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아직 초인 전체라고 할 만큼 초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이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드 님이 약해진 기사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새로운 구심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복잡한 입장은 제가 원하는 바는 아니군요.”

워스가 은근히 이드의 손을 들어 주겠다는 말을 건넸지만, 이드는 즉시 끊었다.

그런데도 워스는 오히려 기분 좋은 듯 웃어 보였다.

“역시 기록에 있던 대로의 성격이시군요. 하지만 잘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고 곧 수도에 가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모쪼록 초인들을 경계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워스는 일리나가 가져온 찻잔에 한 번도 손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궁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하니, 그 전에 한 번 더 뵙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일로 이드 님을 찾는 것은 페시딘일 겁니다.”

길지 않은 이야기를 마친 워스는 따로 배웅도 없이 바로 돌아갔다.

저택을 나선 그가 수련장에 다시 나타났지만 이드가 끌어올려 둔 집중력에 수련생들이 다시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그 모습에 워스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지금까지 그가 나타난 곳에서는 대체로 소란이 일었다. 그의 기세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등장을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외면받기는 드물었다.

“과연, 이런 일도 가능한가? 좋은 걸 배웠군. 이렇게………… 하는 건가?”

워스는 이드가 수련장에서 수련생을 사로잡은 방법과 방에서 자신의 기세를 뜻대로 휘두른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꿰뚫어 보고 무언가 깨달았다.

활짝 펼쳐졌던 워스의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투투퉁.

그러자 사방으로 뿜어지던 그의 기세가 단번에 성난 망아지처럼 날뛰며 땅을 기었다.

“단번에 되지는 않는군.”

이드가 했던 것처럼 기세를 내공처럼 다루는 일에 실패했음에도 그의 입가에는 상쾌한 미소가 감돌았다. 실패했음에 화내기보다 도전할 목표가 있다는 사실이 즐거운 것이다.

“좋은 걸 배웠군. 다음엔 또 어떤 걸 보여 줄지, 기대하지요.”

저 뒤에 있는 저택을 돌아보는 워스의 한쪽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수련장을 돌아볼 때처럼 한순간이었지만, 푸른 그의 본래 눈동자와는 분명 다른 색이었다.

“이드…… 님.”


“대단하네요. 이드가 한 걸 보고 처음 따라해 보는 것 같은데.”

“삼검왕이라고 불릴 만큼 모두 천재라는 거겠죠.”

저택을 떠나는 워스를 지켜보던 이드와 일리나는 워스의 기세가 비정상적으로 날뛰는 모습을 보며 그가 무엇을 시도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시도는 일반적인 무인들은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당장 내공도 그러하지만 기세라는 것은 내공 이상으로 그 실체가 모호한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의지라고도 할 수 있으며, 위엄, 존재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정신의 힘이었다. 당장 내공의 운용조차 경지에 이르지 못한 그들에게 정신의 힘을 다루라는 것은 뜬구름 잡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명상과 내공을 가다듬어 기세를 갈무리하는 것이 바로 정신의 힘을 다루는 것의 기초였다. 그런데 저 철벽의 검왕은 단 한 번 느끼고 겪은 것만으로 그 단초를 손에 잡은 것이다. 경지에 올라 있기는 했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던 수법을 두 번 보고 느낀 것만으로 따라하다니 무림에서도 충분히 천재라고 불릴 재능이었다.

“그나저나 이런저런 변죽만 울리고 갔네요. 도대체 목적이 뭐야?”

“변죽이요?”

“제가 생명의 관에 갔던 사실을 안다든가, 검후의 실종에 관련이 있다든가, 뭔가 있을 법한 말은 해 놓고 확답한 건 하나도 없었잖아요.” 

일리나가 ‘과연.’ 하고 턱에 손을 괴었다.

아쉽지만 진실을 보는 엘프의 눈도 그레이트 소드 이상의 경지에 오른 강자에게는 크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정신과 마음은 그 경지처럼 단단한 정신 장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거 아무래도 클라인 백작을 불러 봐야겠는걸요. 저 남자가 했던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알았어요. 그럼 밖에 있는 록에게 제가 전할게요.”

일리나가 탁자에 올려 둔 찻잔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리고 방을 나가기 전, 이드의 입술에 살짝 키스해 주었다.

“그리고 이건 작은 꽃을 지켜 준 고마움의 표시예요.”

“아!”

창틀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작은 꽃은 언제 고개를 숙였냐는 듯 고개를 들고 활짝 펴 있었다.

이드는 일리나가 나간 후 꽃을 보고 말했다.

“으흐흐,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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