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95화
632화
으드득!
쉴라는 허공에 던져진 기사를 보며 이를 갈았다. 기감을 통해 기사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파악한 그녀는, 아무리 적이라지만 시신을 돌멩이 던지듯 던진 사실에 분노했다. 이는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받아 낸 기사의 시신에는 아직 희미한 온기가 남아 있었는데, 강력한 힘에 몸 안이 부서지며 숨을 거둔 듯 토한 피로 앞섶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단장님.”
보이지 않는 적을 노려보던 쉴라는 곁으로 다가온 훤에게 안고 있던 시신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투두둑.
그러자 죽은 후에라도 동료의 품으로 돌아와 안심했다는 듯 그때까지 꼭 쥐어져 있던 시신의 손이 풀어졌다. 그러자 공간 이동을 위한 텔레포트 키가 부서진 상태로 떨어져 내렸다.
그걸 본 쉴라의 눈이 번뜩였다.
최후의 상황이 닥치면 키를 부수라는 것이 기사에게 내려진 명령이었다. 죽은 기사는 죽는 순간까지 명령을 충실히 실행한 것이다.
“잘했다, 이스트 경.”
최후의 순간까지 임무를 수행한 기사의 노고를 치하한 쉴라가 기사들을 살폈다. 저들의 마지막 순간 또한 그녀의 판단에 달렸다는 사실에 새삼 어깨가 무겁다.
죽은 기사에게 예를 표하는 짧은 시간 동안 양측은 공격과 방어를 위해 진형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도 양 진형 간 규모의 차이는 컸다.
개인의 실력에서는 은색 기사단이 조금 앞설지 몰라도 수에서 열 배가량 차이가 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상급 기사 이상의 실력자가 없어서 괜찮았지만, 이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위기임을 그녀는 냉정히 인정했다. 정체불명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안전장치와 대책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이 이상 피해가 커지기 전에 수습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벌써 열두 명이 죽었다.’
휀과 합류하고 이동하던 중에 두 명의 사상자가 더 나왔다. 과격한 적의 검 놀림으로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희생자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 확실하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 이상의 희생자가 나올 것이 확실했다.
쉴라는 기사단 측면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기척에 서늘한 시선으로 경고하고는 나무 그림자에 숨은 자를 향해 말했다.
“나서라. 죽은 자에 대한 예의도 모르는 자의 얼굴이 궁금하구나.”
“감상적이군. 시신은 시신일 뿐이다.”
목소리의 주인은 거한이었다. 그 큰 몸으로 어떻게 그림자 아래 숨어 있었을까 싶은 남자는 마치 곰처럼 걸어 나왔다. 주변에 있는 자들보다 두 배는 큰 키와 체격에, 독하게 각오하고 있던 기사들도 놀란 얼굴을 했다.
쉴라는 예리한 눈으로 남자를 살폈다.
지금처럼 불리한 때에는 적에 대한 작은 정보 하나에 아군의 생명 하나가 왔다 갔다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핀 상대는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가리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무공이 보급되고 파츠 아머가 대세가 된 후에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갑옷이었다. 거기다 무게를 줄이는 마법 처리도 하지 않은 듯, 본래 그의 몸무게에 갑옷의 무게가 더해져 걸을 때마다 해머로 땅을 두드리는 것처럼,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당장 다른 무기를 들 필요도 없이 갑옷에 싸인 크고 무거운 팔다리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일 것 같았다. 몸이 크다는 말은 그 안의 근육이 크다는 것이고, 큰 근육은 큰 힘을 뜻한다!
자연히 거한에게서는 덩치만큼이나 우악스러운 위압감이 흘렀다. 아니, 그 덩치에 압도되어 그렇게 느껴지는 지도 몰랐다.
기사단을 포위한 사람들을 지나 쉴라와 마주 선 거한이 쉴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를 잡아 가기 위해 왔다.”
대담한 발언에 기사들에게서 살기가 솟았다.
예비 납치범의 범행 예고에 쉴라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당신이 나를?”
“그렇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하는 남자는 마치 바위 같았다. 무려 은색 기사단장을 잡아 가겠다는 자의 말치고는 너무 담담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이 잔꾀로 술수를 부리는 자들보다 더욱 무서운 법!
쉴라는 내심 최대한 기사들의 희생을 줄일 방법을 궁리하며 말했다.
“그대들이 검후님을 납치한 것인가?”
비록 위급 상황이긴 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었다.
“내 목표는 너뿐이다.”
무려 검후의 이름이 나왔지만 거한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도저히 답을 들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판단한 쉴라는 검을 들어 숲 속을 가리켜 보였다.
“당신은 어떤가?”
“키킥 기회가 있으면 나도 해 보고 싶군. 검후 사냥, 짜릿하겠어.”
여전히 숲 속에 숨은 자가 말했다. 말투가 마치 뒷골목 건달처럼 건들거렸다. 대체로 저런 자에게는 어지간해서 진실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조롱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날 납치한다면 내 기사들은 어찌하려는가?”
“죽인다.”
참, 간단하다. 본인은 납치하고, 수하들은 죽인다는 소리를 너무 당당히 한다. 악당이라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당신이 나를 감상적이라고 했지? 과연 부하들이 죽어 가는데, 내가 순순히 잡혀 줄 것 같은가, 아니면 목숨 걸고 싸울 것 같은가.”
쉴라는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기 위해서 일부러 쓸데없는 말을 꺼냈지만, 그 뜻은 바로 상대방에게 읽히고 말았다.
“키키키킥, 애써서 헛소리하는 꼴이 불쌍해서 더 못 들어 주겠다. 죽은 기사가 비상 신호를 알리는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포기하시오, 단장나리. 이 숲은 공간 이동을 비롯해서 어떤 마법적인 신호도 모조리 막아 버리니까.”
“아깝군.”
진짜 아까웠다. 쉴라의 미간이 구깃구깃 구겨졌다.
저자의 말대로 죽은 기사가 부러트린 텔레포트 키는 공간 이동을 위한 마법진의 열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사태를 알리는 신호기이기도 했다. 즉, 키를 부수면 자동으로 위험신호가 정해진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형태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마련한 안전장치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신호가 막혀 버린 것이다.
‘말에 깃든 오만과 이들의 준비를 보면 거짓은 아닌가. 곤란하군.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준비한 것도 있긴 하지만,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린다. 시간을 끌 수 있을까?’
쉴라는 마주 선 거한을 바라보았다. 일체의 흔들림도 없는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지금부터 전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죽여라.”
과연, 쉴라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는 이름 대신 피비린내 나는 명령이 떨어졌다. 동시에 거한의 발과 땅에 검은 혈관이 나타나며 땅에서 금속 성분을 빨아 올렸다. 정체불명의 검은 금속은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타고 돌다 손에서 덩어리지며 긴 삼각뿔 형태의 마상창(馬上槍)이 되었다.
하지만 쉴라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상대의 공격을 예상한 시점에서 얌전히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몫이 확실해 보이는 거한을 상대하기 전에 기사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새롭게 나타난 알 수 없는 실력자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어 기사들의 부담을 덜어 줄 생각을 한 것이다. 오러텅으로 휀에게 문을 걸어 잠그고 방어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날린 쉴라는 거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을 막아선 적들을 쳐 날리고 건달 목소리가 숨은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꽈르르릉!
그 직후 폭음과 함께 몇 그루의 나무들이 터져 나가며 숲을 가리던 나뭇잎이 모조리 떨어져 내렸다.
“제법 머리가 도는 여자잖아. 하지만 이 스피드 스타를 잡기에는 백년은 빨라, 꺄하하하.”
스스스스—
경박한 웃음소리를 따라 고장 난 버스의 매연처럼 검은 바람의 칼날이 숲에서 튀어나왔다. 바람의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는 돌과 나무가 가릴 것 없이 거칠게 뜯겨져 나갔다.
그때 마상창을 손에 든 거한이 쿵쿵거리며 전투가 한창인 숲 쪽으로 걸어가 멈춰 있는 자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죽이라고 명령했다.”
나직한 목소리에 밖으로 튀어나오는 바람의 칼날에 움찍거리던 적들이 화들짝 놀라서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같은 편인 그들에게도 거한, 렉터는 무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옙! 지금 죽이겠습니다!”
“새끼들아, 달려들어!”
“오른쪽 세 번째 검은 머리는 남겨 둬라. 내가 좀 가지고 놀아야겠다!”
“그러려면 렉터 님께 허락부터 받고 와라, 병신아!”
음담패설로 살기를 돋운 자들이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사들의 중앙에 선 휀은 그 모습을 보며 검을 단단히 잡고 외쳤다.
“화원의 문을 단단히 잠근다. 무조건 견뎌!”
“견디긴 뭘 견뎌! 문 열어, 이년들아!”
휀이 말이 끝나는 순간 적들의 무기가 기사들이 세운 방패를 두드렸다.
쩌러렁
부하들의 꽁지에 불을 당긴 렉터는 숲 속에서 사방으로 날뛰고 있는 쉴라를 향해 창을 들었다. 그가 공격의 의지를 가지자 그의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창이 철판을 긁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더니 시계태엽처럼 꼬여 나사못처럼 변했다.
“그것은 내 목표물이다.”
꼬이던 창이 멈춤과 동시에 렉터는 땅을 내리찍으며 창을 찔렀고, 동시에 꼬여 있던 태엽이 풀리며 창에서 검은색 쇳가루가 회오리치듯 뿜어졌다. 쇳가루의 회오리는 순식간에 크기를 키우며 숲의 일부를 깔아 내고, 쉴라와 스피드 스타를 덮쳤다.
그렇지 않아도 공격 전에 렉터의 목소리를 들었던 스피드 스타는 끈덕지게 따라붙는 쉴라를 떨쳐 내며 급하게 몸을 피하려 했다. 그가 아무리 빨라도 렉터의 공격을 받고 난 후에는 더 이상 달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른 그는 틈을 보였고, 쉴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잡았다.”
쉴라는 그가 달리는 길의 앞을 검기의 그물로 막고, 방패로 그를 압박했다.
“미…………친! 저 공격을 받으면 넌 무사할 줄 알아!”
스피드 스타는 다급한 마음에 고함을 질렀지만, 큰 목소리가 쉴라와 렉터의 공격을 막아 주지는 않았다.
쉴라는 코앞까지 다가온 검은 쇳가루의 폭풍으로 몸을 던지며 방패와 검으로 그의 다리를 노렸다. 그가 자신한 스피드 스타라는 말처럼 그의 속도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떨어져라!”
쉴라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바람의 칼날을 쳐내고 방패를 휘둘러 그의 허리를 노렸다. 모든 움직임의 중심점이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방패의 테두리를 따라 강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제대로 맞았다가는 허리가 두 동강 날 판이었다.
하지만 스피드 스타는 다리에 바람의 칼날을 감아 방패를 막아냈다. 동시에 방패를 도약대 삼아 몸을 빼내려 했다.
“흥!”
그의 의도를 파악한 쉴라는 즉시 방패의 힘을 빼서 그의 도약력을 상쇄한 후 살짝 늘어진 그의 다리를 바람의 칼날과 함께 잘라 버릴 생각으로 강기를 뿌렸다. 몇 번의 충돌로 바람의 칼날이 날카롭고 거칠지만, 자신의 강기는 그보다 더 단단하고, 강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강기는 바람의 칼날을 자르고 스피드 스타의 피부를 베는 일에는 성공했지만 곧 들이닥친 렉터의 공격에 휩쓸리며 스러지고 말았다. 찰나의 시간만 더 있었어도 스피드 스타를 전장에서 제외시킬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아쉬워할 시간도 없었다. 스피드 스타를 잡기 위해서 회피를 포기한 렉터의 공격이 그녀를 덮쳤기 때문이다.
내력으로 방패의 강기를 두텁게 만든 쉴라가 안개처럼 일렁이는 검은 폭풍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힘이 약한 스피드 스타라면 몰라도 이 정도의 공격으로 그녀의 방패를 깰 수는 없다. 무엇보다 바보처럼 공격을 막아 내고만 있을 생각이 없었다.
“고작 이런 바람으로 날 잡을 수 있겠는가.” 부우우-
쉴라가 바닥을 찍고 한 바퀴 회전한 순간 강기가 퍼지며 방패의 크기가 두 배까지 늘어났고, 달덩이처럼 빛나는 방패가 검은 폭풍의 핵과, 거기서 뻗어 나오는 바람의 길목을 정확히 찔러 터트렸다.
이드가 봤다면 방패의 운영에서 이전의 멸혼향처럼 화령인의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다.
고속으로 회전하던 폭풍이 한순간 힘을 잃고 남은 회전력에 실려 사방으로 흩어지며, 그 뒤로 어느새 다가온 렉터의 모습이 드러났다.
“널 잡는 건 나다.”
“나야말로 널 생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