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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10화


647화

제발 한 번만 더 안에 물어봐 달라고 애원하는 기사의 등을 떠밀어 돌려보낸 록이 혀를 찼다.

모시는 주군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기사가 그 소식을 보고할 때 얼마나 고역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소드 팰러스의 사람들 중 그 심정을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삼검왕으로 이름 높은 페시딘이라면 그 부담감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감히 그의 초대를 거부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단언컨대 저 기사는 페시딘을 주군으로 삼고 처음으로 안 된다는 말을 전하는 걸 거다.

록이 기사를 배웅하고 돌아오자 눈을 감고 일리나에게 빗질을 당하고 있던 이드가 물었다.

“기사는 돌아갔어?”

“예, 마스터. 다시 물어 달라는 걸 거절하고 돌려보내느라고 애를 좀 먹었습니다.”

“두 번이나 묻고도 다시 물어?”

“돌아가서 초대를 거절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할 테니까요. 페시딘 님의 초대를 거절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거절의 말을 전한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록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이드가 눈을 떴다.

“거절한 게 걸리나 보지?”

“걸린다기보다 굳이 거절하실 이유가 있을까 싶어서요. 그래도 삼검왕이지 않습니까.”

“그래, 삼검왕이지. 하지만 삼검왕이 뭐? 우리가 아쉬울 거 있어?”

“아쉬울 건 없지만, 그래도………….”

록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드의 말처럼 아쉬울 건 없지만 마음이 묘하게 불편했다.

입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검후를 납치한 범인이다 말했지만, 소드 팰러스에서 자라서인지 삼검왕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치지 못한 것이다.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묘한 표정을 짓는 록을 보며 이드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래, 아쉬울 거 없지. 그리고 굳이 만나야 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만나고 싶으면 본인이 찾아와야지, 내가 가야겠어?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삼검왕이 찾아뵈어야겠지요.”

무공의 주인인 마인드 마스터와 무공을 익혀 경지에 오른 삼검왕.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록에게는 선후가 분명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대답을 마치고 보니 묘하게 거슬리던 마음이 편해졌다.

동시에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한 것인지 눈치채고는 얼굴을 붉혔다.

감히 이드를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말해 놓고 삼검왕을 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주군으로 모신 이드를 두고 타인을 우선한다는 것은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보 같은! 아무리 이드 님이 격의 없이 편하게 대해 주셨기로서니 기사의 본분을 잊고, 에단도 하지 않을 이런 실수를 하다니!’

쿵!

록이 무릎을 꿇었다.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마스터. 제가 감히 마스터께…………”

“아아! 거기까지 하자.”

“그러나………….”

“그러나고 저러나고. 알았으면 된 거야. 앞으로 또 그럴 건 아니잖아?”

이드에게 말이 막힌 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된 거지. 나가서 스폴 경에게 오색 기사단장들과 약속이 잡혔는지나 물어봐.”

“충!”

이드의 말을 들은 록이 가슴을 작게 두드리며 예를 취했다.

“안 하던 거 하지 말고!”

이드는 록의 행동이 어색한 오버 액션처럼 보여서 괜히 허리춤을 긁으며 질색했다.

그 모습에 어쩔 수 없이 긴장을 유지하던 록의 표정도 풀어졌다. 자신의 잘못은 스스로 단속할 일이고, 그것을 위해 주군이 싫어하는 일을 할 수는 없으니까.

“예, 마스터. 그런데 곧 수업이 끝나는데, 나가 보지 않으십니까?”

“그래. 오늘은 알아서 해산시켜. 아직 일리나가 머리 빗겨 주는 게 끝나지 않았거든.”

빗질 중인 일리나의 가슴으로 이드가 등을 기대자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이드의 머리를 쓰다듬던 일리나가 말했다.

“그거라면 곧 끝나니까, 나가봐도 좋아요.”

“아니요. 그 후에는 내가 일리나의 머리를 빗겨 줘야죠.”

수련생들이 수영장에 이어 빗질에도 밀리는 순간이었다.

일리나와 눈을 맞춘 이드는 뒤에 있는 록을 향해 휙휙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묘한 분위기에 눈을 빛내던 록은 아쉬운 표정으로 방을 나가야 했다. 그리고 곧 저택을 관리하는 하인을 불러 저녁 식사 때까지 이드를 방해하지 않도록 했다.

방금 전 체감한 달콤한 감도로 봐서는 두 시간 정도는 두 사람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기사를 통해 되돌아온 초대장을 본 페시딘은 침묵했다.

탁자 위에 놓인 초대장을 노려보던 페시딘이 초대장을 길게 찢어 던져 버렸다.

“초대를 거절하다니. 설마 내 생각이 틀렸던가?”

페시딘은 혹시 벤의 말을 통해 자신이 읽어 낸 이드의 뜻이 틀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자에게도 황궁보다는 소드 팰러스가 움직이기 편하지. 황제와 새로운 힘겨루기를 하는 것보다야 이미 이름을 떨친 소드 팰러스가 낫다.”

그렇다면 자신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면서 왜 자신의 초대를 거절한 것인가.

페시딘은 잠시 고민한 후 그럴듯한 답을 냈다.

“고작 초대장 정도로는 움직이지는 않겠다는 것인가? 스스로 우위에 있음을 확실히 하겠다는 뜻이겠군.”

본래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입장을 토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이고, 페시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분명 틀린 답이지만 페시딘은 확신했다. 왜냐면 자신이라면 그랬을 테니까.

“결국 내게 직접 찾아오란 말이지 않나. 건방진!”

페시딘은 스스로 찾아낸 답에 으드득 이를 갈았다.

지금의 상황을 기다림의 때라고 생각하고 참고는 있지만, 참는다고 마음속에 감춰 둔 수치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찾아낸 답은 절대 굽힐 수 없는 그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볼 생각이긴 하지만, 이드가 자신을 찾아오는 것과 자신이 이드를 찾아가는 것은 천지 차이라고 생각하는 페시딘이었다.

그 모든 걸 제외하고라도 자신은 곧 소드 팰러스의 왕이 될 자다. 절대로 왕이 직접 움직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드를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드가 황궁에 힘을 실어 주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럼 누가 봐도 만족할 만한 무거운 초대장을 보내면 달려오게 되겠지.”

곰곰이 생각을 마친 페시딘은 자신을 대신해 워스를 보내기로 했다. 오랜 시간 함께한 그라면 자신의 속내를 잘 알고 적당히 일을 처리해 줄 거라고 믿었다. 이드와의 만남도 나빠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늦은 밤.

혼자 정원에 나선 이드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시원했다. 이제 밤공기도 차갑지 않은지 길게 뱉은 숨에 입김이 나지 않았다. 항상 그의 옆에 서 있던 일리나는 오랜만의 즐거운 수영과 이어진 달콤한 사랑에 피곤하다며 일찍 잠든 뒤였다.

반짝이는 별이 총총히 떠 있는 정원은 이드가 옮겨 놓은 나무 때문에 휑한 느낌이 들 정도로 넓어져 있었다. 대신 한곳에 몰아 둔 나무들이 달빛을 차단하면서 음산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낮에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인상에 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저택의 정원에 저건 좀 안 어울리겠지?”

당연하다. 궁궐 같은 저택과 으스스한 유령의 숲이 어울릴 리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내일 중으로 다시 손을 봐야 할 것 같았다.

마침 그런 나무들 뒤로 멀리 검궁이 보였다. 어두운 밤,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나무들 위로 솟아 있는 검궁은 마치 마왕(魔王) 성 같았다. 검후가 머물고 있을 때는 곧게 뻗은 한 자루의 섬세한 검과 같이 아름다웠는데, 건물도 주인을 닮아 가는지 삼검왕이 머물기 시작하면서부터 분위기가 칙칙해지고, 무거워졌다고 한다. 물론, 이는 삼검왕을 지독하게도 싫어하는 검후 빠돌이 클라인의 소견이라 어느 정도 감안하고 받아들여야 하지만, 지금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삼검왕이 초인들을 잡아 와서 인체 실험을 하던 생명의 관과 손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올라를 통해 확인했으니까. 그뿐 아니라 검후의 납치와도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배신자인 것도 모자라 인체 실험까지 하는 흉악한 무리들의 배후라니! 그들이 있는 곳을 마왕성이라고 불러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소드 팰러스의 사람들은 물론, 대부분의 제국민들이 그런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증거가 없기 때문에 ‘삼검왕이 사실은 이렇게 추악한 자들이다!’ 하고 밝힐 수도 없었다. 특히 검후의 납치에 대해서는 철저한 심증만 있을 뿐, 정황증거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것은 클라인이 가장 답답해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런 문제를 제외하면 삼검왕에게 크게 문제 삼을 거리는 없었다. 소드 팰러스가 그들의 본진이라는 생각이 있어서인지, 겉으로는 검후가 있으니 없으나 소드 팰러스를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철저히 감췄으니까.

그나마 트집을 잡을 만한 것은 소드 팰러스의 독립 의사를 드러내고, 소드 팰러스 밖 제국의 정치적인 부분에서 권력자 사이를 오가며 은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도 큰 이슈는 될지언정 삼검왕의 권위를 흔들 만큼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소드 팰러스에서 무공을 배우고 발전시키고 있는 타국의 수련생들과 기사들이 삼검왕의 뜻을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수는 소드 팰러스 인원의 절반에 이른다. 남은 절반은 제국 사람들로, 그들이 삼검왕의 뜻에 반대한다면 소드 팰러스가 둘로 나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완전한 소드 팰러스를 원하는 삼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심조심 비밀을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이드는 그런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공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 모인 자들이 무공보다 정치질에 더 열심히인 꼴이라니!

“시르피가 숲에 만들어 둔 집에 자주 가 있었던 것도 이런 꼴을 보기 싫어서인지도 모르지.”

이는 삼검왕이 비밀을 유지하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몇 달째 소드 팰러스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이드가 이곳에 정을 주지 못하는 이유기도 했다. 소드 팰러스 안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소드 팰러스 그 자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시르피에게는 소드 팰러스가 거대한 새장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멀리 보이는 검궁을 향해 혀를 찬 이드가 몸을 돌렸다.

뜻하지 않게 검궁 마왕성설(說)이 떠올라 머리가 복잡했지만, 이드가 밖으로 나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아가씨가 지하실에 꿀이라도 발라 뒀나? 오늘은 왜 이렇게 안 나오는 거야?”

이드는 오늘 하루 종일 조용한 라미아를 찾아 지하실로 내려갔다.

평소라면 항상 하던 것처럼 마음으로 그녀를 찾아보겠지만, 하루 종일 소식이 없는 만큼 혹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참다가 직접 라미아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또 바뀌었네.”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던 이드는 이전과 다른 형태에 혀를 내둘렀다. 이드가 저택의 지하실을 찾은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어차피 바이트 타블렛의 연구는 자신이 도울 수 없기 때문에 편하게 연구할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다고 발길을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은 찾아오곤 했는데, 올 때마다 지하실의 모습은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비올라가 주축이 되어 마법사의 연구실처럼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의 상황을 준비하는 것이 마법사의 자세라면서 지하실 곳곳에 마법적인 장치와 마법들을 심었다.

이를 본 라미아도 마법사로서의 본능이 자극된 것인지 한 손, 아니 한 날개를 거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지하실이 지금에 와서는 어느덧 평범한 저택 지하실이 아니라 마법사의 지하 던전을 방불케 했다.

무엇보다 어느새 확장 공사를 했는지 규모조차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닌지 또 이전에 보지 못한 것들이 생겨나 있었다. 에단을 따라간 비올라가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보고 간 것이다.

혹시 그중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작동하는 것이 있을까 이드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바이트 타블렛이 있는 방에 도착해서 라미아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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