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14화
651화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설명을 모두 들은 이드가 저택을 나섰다.
케마란을 통해서 연락받은 대로 오색 기사단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일리나와 라미아에게 동행할지를 물었지만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일리나는 은색 기사들과 이드가 자리를 비운 수업을 대신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라미아는 새롭게 손에 넣은 코어를 살펴야 하기 때문에 바쁘다고 했다.
“그나저나 나도 수련생을 받아 놓고 너무 자주 자리를 비우는 것 같단 말이야. 이러면 안 되는데.”
비록 소드 팰러스에서의 발언권 강화와 삼검왕에 대한 압박용 카드로 쓰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보고 배우기 위해 찾아온 수련생들을 소홀히 대하기는 싫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는 달리 수업에 자주 빠지고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학교 공부처럼 매일매일 정해진 분량만큼 빼야 할 진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확실히 반성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이드의 마음과 달리 곧 황궁으로 가게 되면 그는 또 수업을 빼야 했다.
“그 전에 내가 없는 동안 수업을 어떻게 처리할지 미리미리 계획을 세워 둬야겠지?”
이번에는 하루 이틀 맡겨 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수개월은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드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진행할 수업 내용을 고심하며 화원에 도착했다.
은색 기사단이 복귀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개구멍을 이용할 필요 없이 정문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휘유~ 화려하네.”
문을 넘은 이드가 감탄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전에 개구멍을 통해 들어올 때도 아름답다고 느꼈지만, 봄의 끝자락에 선 화원은 그때보다 활짝 핀 꽃으로 보다 더 화려해지고 향긋해져 있었다.
“일리나에게 꼭 같이 가자고 할 걸 그랬네.”
“봄의 화원은 특히 아름답지요. 같이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이드가 왔다는 소식에 마중 나온 쉴라가 말했다.
“그러게요. 이후에라도 같이 와야겠어요.”
“언제든 찾아오세요. 문을 열어 환영할 테니까.”
아무에게나 화원의 문을 열어 주는 은색 기사단이 아니었지만, 같이 검후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수차례 동료 기사들을 구해 준 이드에게는 얼마든지 화원의 문을 열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상당히 일찍 오셨군요. 모이기로 한 시간은 아직 한참 멀었는데.”
“아무래도 모임 전에 쉴라 경에게 제 비밀을 이야기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기사단장들이 모이는 만큼 복잡한 자리가 될 테니까.”
“언제 이야기해 주시나 기다렸는데, 드디어 듣겠네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쉴라가 눈을 반짝이며 화원 안으로 이드를 안내했다.
오색 기사단장들의 모임 장소가 된 화원은 오랜만의 손님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활기에 차 있었다. 오색 기사단의 모임을 소문내지 않기 위해서 시종을 대신해 기사들이 직접 모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시종들이나 할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네들의 얼굴에는 한 점의 불만도 없이 가벼운 행복감만이 깃들어 있었다.
진정한 주인을 잃고, 관리인도 사라진 후 먼지가 쌓이던 화원이 자신의 손에 깨끗하고, 화려한 본래 모습을 찾아간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다.
이전 숲에서 함께 싸운 기사들이 이드를 보고 반가운 듯 인사를 해 왔다. 그녀들의 인사를 받으며 이드가 쉴라를 따라 그녀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처음 와 보는데, 느낌이 좋은 방이군요.”
이드는 쉴라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우아하고 단정한 집무실 곳곳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길을 알아채고는 칭찬했다.
과연 쉴라도 칭찬이 싫지 않은지 밝게 웃으며 이드에게 자리를 권하고 마주 앉았다.
“검후님을 따라 꾸몄는데 느낌이 좋다니 기쁘군요.”
“쉴라 경은 검후님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네. 정말 좋아합니다.”
이드는 한 점의 꾸밈도 느껴지지 않는 쉴라의 대답에 그녀와 검후가 얼마나 강한 믿음으로 이어져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참으로 부러운 마음이었다.
“그럼 이제 이드 님의 비밀을 들어 볼까요? 클라인 백작님을 단번에 따르도록 한 비밀이 어떤 것인지 몹시 궁금했거든요. 물론 비밀은 목숨을 걸고 지켜드릴 테니 걱정은 마시고요.”
쉴라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자 이드도 가볍게 마주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 개인적인 비밀에 그런 가치는 없어요.”
“그건 제가 듣고 결정하면 되죠.”
“훗, 그렇게 하세요. 그럼 말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보죠. 쉴라 경은 마인드 마스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검후님의 스승이시죠.”
보통 마인드 마스터에 대해 물으면 따라붙는 존경, 전설 등의 요란한 수식어가 붙지 않은, 모든 일에 검후를 중심으로 두고 있는 쉴라다운 답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관심이 없어 보였다. 사실을 밝혀도 이웃 나라 전쟁 이야기처럼 덤덤히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고 생각한 이드가 망설임 없이 카드를 깠다.
“그럼 전 어떻습니까?”
이드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멈칫하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말했다.
“쉴라 경이 말한 검후의 스승이 아직 살아 있고, 그 스승이 쉴라 경 눈앞에 앉아 있는 저라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
쉴라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놀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틀린 모양이다.
이드가 많이 놀란 것 같은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본래 숨길 생각도, 이유도 없는 비밀이었습니다. 하지만 검후를 찾기 위해 나온 세상이 절 그렇게 알고 있어서 굳이 사실을 밝혀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검후를 찾는 데는 이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사실, 에단이 금방 절 알아본 탓에 이 비밀이 이렇게 오래 갈 줄도 몰랐습니다.”
“……”
말없이 눈을 감은 쉴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드는 눈꺼풀 아래로 숨은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많이 놀라시는군요.”
“……………그만큼 놀라운 비밀이니까요.”
“전 쉴라 경이 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상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그만큼 진실이 가진 무게가 무거우니까요.”
쉴라가 감았던 눈을 뜨고 대답했다.
이드와 협력 관계를 약속한 후 그녀는 남몰래 이드에 대해서 조사했다. 상대를 믿기 위한 조치였다. 신분이 불분명한 자와의 협력은 강력한 적 이상으로 위험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이드를 믿기로 결심한 것은 그가 보였던 검후의 무공과 일리나라는 엘프, 그리고 소드 팰러스에서 누구보다 검후를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자신하는 클라인의 믿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사실이지, 상대의 본질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사했다. 하지만 그녀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이는 이드에 대해서 조사한 모든 사람이 겪었던 곤란이었다.
세상 어느 누가 지구라는 다른 세상에 있다가 돌아왔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만큼 엉뚱한 가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보원이 되지 않고 연극이나 소설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런 빈약한 정보 때문에 쉴라는 이드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정을 세우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드에 대한 의심이 점점 줄어들고, 검후의 숲에서 있었던 전투로 그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면서 이드에 대한 경계는 가셨지만, 그 정체에 대한 의문은 완벽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많은 가정들 중 하나가 바로 마인드 마스터였다.
누구보다 검후 가까이 있으면서 그녀가 많은 나이에도 드높은 무공 수준으로 젊어 보이는 외모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녀가 소중히 간직하는 초상화를 자주 보았기 때문에 충분히 가질 수 있는 합리적 추론이었다.
검후의 숲에서 펼쳤던 작전도 그런 추론이 있기 때문에 이드를 믿고 진행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 확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드가 사실을 확인시켜 줌으로 인해서 마지막 남은 이성도 인정했다. 덕분에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빨랐다.
“다행히 기사단장님들과의 만남을 크게 조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역시 짐작하고 있으셨습니까.”
“그보다는 비밀을 지켜야 하니까 달라질 게 없는 것이죠. 이드 님에 대한 문제는 어떠한 것이라도 개인적인 차원으로 다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농담이 아니라 제 목숨으로도 모자라요.”
“이런 제 사생활이 위험하군요. 부디 제 사생활을 존중해 주길 바라요.”
“하지만 미리 말씀해 주신 덕분에 기사단장님들을 저희 쪽으로 협력하게 만들 비장의 카드를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어요.”
이드가 진심을 담아 농담처럼 말했지만 쉴라는 깔끔히 무시하고 딴소리를 했다. 이드는 내심 서운했지만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에게 제 이야기를 하실 생각입니까?”
“네. 믿을 수 있고, 협력을 약속해 주는 분들에게만요. 마인드 마스터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효과만 좋다면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남은 일이 있어서…………….”
이드는 자신이 마인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큰 변화가 없는 쉴라의 행동을 보며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오로지 눈치와 추리로 이드의 신분을 밝힌 에단도 이드의 확인을 받고는 흥분을 지우지 못했고, 클라인은 대놓고 흥분했었다.
침착한 쉴라의 모습과 비교하면 그들이 과하게 호들갑을 떨었다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저런 진중한 모습이 바로 기사지! 괜히 은색 기사단의 단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
확실히 케마란과 네리베르들이 선망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던 순간, 자리를 뜨던 쉴라가 무언가 떠오른 듯 갑자기 돌아서며 말했다. “이드 님이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시라면, 당연히 마인드 마스터의 두 보검도 가지고 있으시겠군요!”
은근히 압박감까지 느껴지는 그녀의 질문에 이드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 라미아와 일라이져를 말하는 거라면 그렇죠.”
푸화확!
순간, 쉴라의 눈에서 별이 폭발하며 광채가 뿜어지는 것처럼 안광이 뻗어 나왔다. 그 속에 깃든 기대감이라니!
“그렇습니다. 라미아, 일라이져,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지요. 꿀꺽. 그 두 보물을 제가 직접 볼 수 있을까요?”
이제는 탐욕까지 일렁이는 눈빛에 곤란해하는 이드의 눈에 그제야 방의 벽에 장식된 검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지 않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명검이 확실해 보이는 것들이었다.
“저는 검후님께 마인드 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라미아와 일라이져라는 두 보물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아쉬웠는데, 드디어 그 기회가 제 눈앞에 찾아왔군요.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과연, 알겠다. 항상 곧고 고고해 보이는 이 사람은 마인드 마스터보다 마인드 마스터의 검에 더 큰 관심과 흥미를 가진 무기 오타쿠다. 이드는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반사적으로 허리에 매달려 있는 일라이져를 잡았다. 잘못하면 빼앗길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작은 행동이 쉴라의 눈길을 끌었고, 예감대로 이드는 일라이져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일라이져를 돌려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야 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마인드 마스터의 명성 같은 건 이미 별나라 이야기 같아 보였다.
쉴라의 요청으로 오색 기사단장들을 불러 모은 카일란은 약속한 시간에 라발과 함께 화원 앞에 도착했다.
“오랜만이군.”
지나다니며 항상 눈에 담게 되는 화원을 본 라발의 말에 묘한 감회를 느낀 카일란이 씁쓸하게 답했다.
“…..그렇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