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15화
652화
카일란은 검후가 실종되고, 은색 기사단까지 자리를 비운 이후에 단 한 번도 화원을 찾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 검후의 부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유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당당히 검후를 찾기 위해 달려 나가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기 싫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언제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화원 앞에 서던 자신이 지금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라발을 바라보자 이전의 일이 떠올랐다.
“미안하네.”
“뭐가 말인가?”
뜬금없는 사과에 라발이 이해하지 못했는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자네가 이드를 데려왔을 때 일.”
카일라의 말에 라발은 이드를 면전에 두고 소드 팰러스의 지도자라는 자들이 부렸던 추태를 떠올리고는 혀를 찼다.
“그때 일에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면 이드지, 내가 아니야.”
“물론이야. 하지만 그때 어쭙잖은 말로 내가 자네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는가.”
“훗, 그만하게. 그때의 침묵은 오로지 내 판단이었네. 내 생명처럼 지킬 신념이었다면 자네의 몇 마디 말에 굽히지 않았겠지. 그때의 나도 결국 자네와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네.”
라발이 자조적인 음성으로 말하며 화원과 그 앞에 서 있는 은색 기사단을 눈에 담았다.
“그때가 아니라 은색 기사단과 함께 달려 나가지 못했던 순간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변명일 뿐이지만 쉴라 단장과 우리는 입장이 달랐으니까.”
“입장이라.”
라발은 카일란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색 기사단은 검후와 소드 팰러스에 충성하기를 맹세했다. 제국이 아닌 타국의 기사가 적잖이 포함된 오색 기사단은 온전히 제국에 충성할 수 없는 집단이기 때문이었다.
검후의 실종 당시 적, 흑, 청, 황의 네 기사단은 검후가 사라진 소드 팰러스의 안전을 위해서 소드 팰러스를 지키는 것을 택했고, 은색 기사단은 검후를 위해 소드 팰러스를 떠났었다.
물론 이것은 온전히 검후를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 은색 기사단이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카일란이 말한 입장의 차이 말이다. 그러나 라발은 이드를 데려온 날부터 은색 기사단의 선택이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소드 팰러스를 위해 자리를 지킨 자신의 선택이 정말 최선이었는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특히 노골적으로 이드를 견제하고, 황궁과 각을 세우는 삼검왕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은 점점 더 강해지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받은 쉴라의 요청은 그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맞아. 입장이 달랐을 수도 있겠지. 마찬가지로 지금 내 입장도 그때와 달라. 이번엔 신중히 쉴라 단장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볼 생각이네.”
결심한 듯 이야기하는 라발의 눈이 번뜩였다.
카일란은 그가 말하는 그때의 입장이 은색 기사단을 따라 나가지 못했던 때인지, 자신의 말을 따라 이드를 조롱하던 것을 참고 있었던 때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그의 행동은 지금까지와는 달라질 테니까. 특히 저 라발이 그렇게 결심했다면 분명 그렇게 되리라.
‘그리고 나 역시……………?’
카일란은 내심 라발의 말에 동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삼검왕이 내세운 명분에 동의했지만, 이후 명분에 맞지 않는 처사를 보임으로써 그의 믿음은 희미해진 상태였다.
이드의 사람이 분명한 마법사를 데려온 쉴라의 요청을 쉽게 허락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일단 들어가세. 쉴라 단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건 그 이후일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게. 저쪽도 온 듯하니 같이 들어가지.”
막 걸음을 옮기려던 라일이 무엇을 보았는지 멈춰 서며 말했다.
카일란이 돌아보니 자신들이 온 맞은편 길에서 걸오어는 두 남자가 있었다. 둘 모두 건장한 덩치에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자들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카일란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모이엔, 빌런.”
두 사람은 각각 청색과 황색 기사단의 단장들이었다. 라발과 함께 적잖은 시간을 함께한 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들도 라발과 카일란을 발견한 듯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는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라발의 표정이 나빠졌는데, 카일란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런, 우리도 일찍 온다고 왔는데 자네들이 더 빨랐던 모양이야. 카일란, 라발,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네. 모이엔, 빌런. 그런데 자네들, 무기를 가져왔군?”
송곳 같은 형태의 날을 가진 창을 든 모이엔이 태연히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 분신이 아닌가. 한시도 손에서 놓을 수 없지.”
하지만 그것은 카일란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모른 척 말게. 내 말은 왜 화원에 무기를 들고 온 것이냐는 말이잖나.”
아는 사람들은 검후를 존경하고, 그녀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에서 화원에 출입할 때 무기를 가져오지 않는다.
당연히 라발과 카일란은 오늘도 무기를 지참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주 선 두 사람은 보란 듯이 자랑하듯 자신들의 커다란 무기를 가져왔다. 천박하게까지 느껴지는 노골적인 뜻을 헤아린 카일란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마주 선 두 사람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등에 두 자루의 도끼를 멘 빌런이 딱하다는 듯 말했다.
“자네야말로 몰라서 하는 소린가? 아니면 라발과 어울리며 같이 답답해진 건가.”
은근슬쩍 자신을 비꼬는 말에 라발이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우리가 무기를 들지 않은 것은 검후님에 대한 충성과 존경의 표현이었네만, 지금 화원에는 그분이 계시지 않지. 그분도 없는 화원에 존경을 표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카일란은 답답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정말 그리 생각하는가?”
“이미 검후님이 사라지신 후 그렇게 된 일이 아니었나?”
“……”
검후가 사라진 후라니. 그 짧은 말 속에는 검후가 돌아올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도 담겨 있지 않았다. 과연 그런 마음이기 때문에 화원에 무기를 들고 올 수 있었던 것일까.
“흥, 죽은 주군을 위해서 주군의 가족과 성을 지키는 기사들은 모두 등신이라서 그런 줄 아나.”
라발이 도발하듯 빌런의 말을 비웃자, 빌런이 익숙한 듯 혀를 차며 라발의 말을 세상모르는 자의 말로 깎아 내렸다.
“쯧쯧쯧. 자네는 그 답답한 소리 좀 말게. 그런 일반 기사들과 우리 오색 기사단이 같은 입장인 줄 아는가.”
그러나 카일란은 내심 라발의 말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죽은 주군을 위해 충성하는 그들이 어디 머리가 모자란 자들이라서 그럴까. 그렇다면 그들의 행동을 추앙하는 자도, 존경하는 자도 없었을 것이다. 카일란이 침묵하자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화원 앞에 모인 네 사람은 말없이 화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이미 한참 전부터 화원 앞에 그들이 도착했음을 보고받고 기다리던 쉴라가 네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제 초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말에 단장들이 짧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참으로 오랜만이오, 쉴라 경. 무사히 복귀한 것을 축하드리오.”
모이엔을 빼고 말이다. 화원 앞에서 보이던 계산적인 모습과 달리 쉴라를 향한 말에는 은근한 열기와 노골적인 호감이 깃들어 있었다.
쉴라는 그것이 거북했다.
“감사합니다, 모이엔 단장님. 그리고 경이 아니라 단장입니다. 조심해 주십시오.”
“미안하오. 내 쉴라 단장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도 오랜만이라 즐거워 실수를 하고 말았소. 하하하.”
“……들어가시죠.”
쉴라가 앞장서며 다섯 사람이 화원 안으로 사라졌다.
마침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가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다섯이 다 모였군. 약속된 날이 오늘이었던가?”
주인 모를 건물 지붕에 올라선 철벽의 검왕 워스는 화원을 다시 눈에 담고 달려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그는 전날 페시딘에게 부탁받은 대로 이드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오색 기사단의 단장들을 보고 그들이 화원에 들어가는 모습까지 지켜보게 된 것이다.
오색 기사단장들의 모임에 대해서는 이미 페시딘을 통해 언질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워스는 이 사실을 페시딘도 아직 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왔던 길을 돌아가 페시딘에게 이 사실을 알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었다.
굳이 자신이 아니라도 화원을 감시하고 있는 페시딘의 눈이 곳곳에 숨어 있었으니까.
“굳이 내가 알릴 필요는 없겠지.”
아마도 이드를 만나고 돌아갈 때쯤이면 저들이 모였던 이유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워스는 쉴라가 오색 기사단장을 모은 이유에 대해서 호기심을 느끼며 이드의 저택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화원에 가 있는 이드를 만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저택으로 거침없는 걸음으로 저택으로 향하는 그를 일리나가 막아섰다.
“이드는 지금 외출 중이며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설마 부재중일 줄이야!
페시딘의 말대로라면 이드는 페시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 생각이 틀렸다.
“그럼 만날 수 없다는 말이오?”
“오늘은 그렇습니다.”
워스는 마주 선 일리나의 대답에 살짝 불쾌함과 신선함을 함께 느꼈다.
보통 그가 찾아가면 부재중일지라도 모든 수단을 통해 연락을 전해 받고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려와 그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일리나는 만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드를 찾아오겠다는 말도 없었다.
무엇보다 삼검왕을 앞에 둔 이 여성의 눈에는 한 조각의 두려움이나, 위축도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강단 있는 여성이라니, 마음에 드는군.’
그 앞에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여성은 매우 드물었다. 이전에는 이드에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이드만큼이나 눈여겨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여성인 듯했다.
“부인은 소드 팰러스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드가 현재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후훗.”
충동적으로 던진 질문의 답에 워스는 껄껄 웃으며 돌아섰다.
“아무래도 약속 없이 찾은 내 잘못인 듯하니, 내일 다시 찾아오겠소. 이드에게 전해 주시오.”
“멀리 나가지 않습니다.”
일리나의 짤막한 인사말을 들으며 워스가 휑하니 몸을 돌려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일리나의 말처럼 정말 그를 배웅할 필요가 없었다.
워스가 사라지자 일리나는 별일 아닌 듯이 다시 수련장으로 돌아왔다.
수련생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우와, 대단하다. 철벽의 검왕님과 마주 서서 전혀 꿀리지 않으셨어.”
“저거 진짜 대단한 거다. 나 저번에 검왕님하고 눈이 마주쳤다고 찔끔해서 주저앉았다니까.”
“그건 네 하체가 부실해서겠지.”
“…..이 자식이 어디서 유언비어를! 바지 까!”
“볼 것도 없는 것들이 뭘 까! 그나저나 이드 님 수업받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평생 한 번도 보기 힘든 검왕님들을 벌써 몇 번째 보는 거냐?”
“그러게. 그러니 수업권을 팔겠다는 말이 나오는 거겠지.”
“참, 마침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빅터 놈은 어떻게 된 거야? 전혀 눈에 안 띄던데.”
“글쎄.”
슬슬 잡담으로 흐르는 수련생들의 분위기는 록이 나서고 나서야 제자리를 찾았다.
자신으로 인해 수업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것도 모른 채 저택을 나선 워스는 느긋한 걸음으로 검궁으로 돌아가 페시딘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