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28화
665화
케마란은 전 내공을 동원한 전력에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나무로 만들어진 성문에 기가 막혔다.
“에이 씨, 뭐 이딴 게 다 있어? 무늬만 나무잖아!”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철문보다 더 단단하면 어쩌란 말인가? 솔직히 나가서 라미아의 설명을 듣고 다시 도전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이 공간 밖으로 나가기에는 너무 일렀다. 링스피어를 만들 때나 링스피어를 위한 창법을 만들어 나갈 때처럼 쓰러질 때까지 노력은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특유의 고집으로 마음을 다스린 케마란이 다시 성문을 공격했다. 주먹으로 두드리고, 발로 차고, 심지어 박치기도 해 봤다. 하지만 자신만 어지럽고 아팠다.
여전히 태연한 성문에 오기가 치솟았다.
“쌍! 너 안에 있는 거 아니까 빨리 문 열어! 링스피어는 내 거야! 내가 만들었다고, 여긴 내 성이야! 어서 문 열지 못해!”
그렇게 정신 줄 놓고 미친년처럼 발악을 하고 있을 때 문득 손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케마란은 너무나 익숙한 감촉과 균형감에 돌아보지 않고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링스피어가 왜?”
도대체 소울 다이브의 공간 밖에 있어야 할 링스피어가 어떻게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애병의 귀환이 기뻤다. 동시에 갑자기 나타난 애병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도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소울 다이브 안에 들어가면 저절로 알게 될 거라는 라이마의 말대로였다.
“링스피어 이 녀석, 역시 너도 날 알아보는구나!”
막막한 상황을 해결해 줄 애병(愛兵)의 출현에 감동한 케마란이 격렬하게 링스피어를 끌어안았다. 조금만 실수하면 시퍼런 칼날에 얼굴이 베일 수도 있을 텐데 익숙한 듯 행동에 거침이 없다.
밖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네리베르가 친구의 익숙한 이상 행동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 봤을 때는 저도 놀랐지만, 링스피어를 손질하다 보면 가끔 저럴 때가 있어요.”
그녀도 저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기겁했었다. 아무리 자신의 무기가 좋아도 그렇지 무슨 여자가 칼날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흔들어 대는지! 놀라지 말라는 것이 무리다.
거기다 기겁해서 말렸더니 하는 말이 애정 표현이란다.
“아무리 자기 무기가 좋아도 저런 짓은 안 하는데…………”
실로 링스피어를 자신의 반쪽이라고 주장하는 케마란의 말이 이해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저렇게 링스피어를 사랑하니까 역사가 짧은 무기에 의념이 깃들 수 있는 거겠죠.”
일리나가 말했다. 동시에 그 말을 긍정하듯 영상 안과 밖의 링스피어가 동시에 붕붕거리며 진동했다.
항상 일방통행으로 애정을 쏟을 뿐 한 번도 그에 대한 반응을 보인 적이 없던 링스피어의 진동에 화들짝 놀라던 케마란이 곧 ‘드디어 네가 에고 링스피어로 진화하는구나!’ 하고 환호하며 링스피어를 안고 바닥을 굴렀다. 눈 오는 날 닭살 생산이 특기인 연인들만 한다는 그것 말이다.
기가 막힌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가 물었다.
“어쭈! 신기한데? 라미아, 저거 정말 에고 링스피어가 되는 거 아냐?”
에고를 가진 귀한 무기의 탄생에 네리베르의 귀가 쫑긋 섰다.
[어림없어요. 에고가 깃든 무기가 어디 그렇게 쉽게 나오는 줄 알아요? 처음보다 가능성이 눈곱만큼은 늘었지만 아직 어림도 없네요! 지금 반응도 링스피어가 독립된 개체로서의 반응을 보인 게 아니라, 깃들어 있던 케마란의 의념이 본래 주인을 알아보고 반응한 거예요. 냉정히 이야기해서 궁극적인 자기애(自己愛)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겠죠?]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 라미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대분류에 따르면 그녀의 시작도 에고 소드였기 때문에 너무 쉽게 에고 링스피어를 거론하는 이드에게 발끈한 것이다.
코어와 같은 정신 에너지의 침입으로 의념이 자극당해서 깨어나는 현상이 분명 매우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현상을 겪는다고 무조건 자아가 발현하는 것은 아니다. 에고를 가진 무기의 제작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었다면 세상은 이미 에고 무기라는 최상의 마법 무기로 가득 찼을 것이다.
인간과 대화하고 감성을 나눌 수 있는 인공지능의 개발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과학자들에게는 모든 노력을 부정당하는 악몽 중의 악몽과 같은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단순히 에고를 각성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주어진 역할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제되지 않은 에고는 그저 쓸모없는 수다쟁이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에고 무기에 기대하는 특별한 능력과 마법을 전혀 사용할 수 없을 테니까.
혹시 모르겠다. 식량이 가득 쌓인 지하 터널에 수십 년간 갇히는 경우라면 대화가 가능한 수다쟁이 에고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 외의 상황에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한 네리베르는 부러움 가득한 눈빛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밖에서 자신을 두고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모르는 케마란은 한참 바닥을 뒹굴었다. 얼마나 격렬하게 뒹굴었는지, 그녀가 뒹군 바닥이 반질반질해졌다.
사랑스런 눈으로 링스피어를 바라보던 케마란이 희한하게 웃으며 말했다.
“으흐흐흐흐. 이거 이러다 당장 주인님 하고 부르는 거 아냐? 이왕이면 늠름한 왕자님 목소리면 좋겠는데.”
라미아가 극히 미미한 가능성이라고 판단한 것을 알 리 없는 케마란은 개인적인 욕망을 훨훨 불태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링스피어만 뚫어져라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그녀는 자신이 맡은 일을 위해 성문을 향해 다가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부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던 성문이 손에 든 링스피어 때문인지 너무 만만해 보였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을 확인시키듯 끝도 없이 높게 뻗어 있던 성문이 순식간에 줄어들어 익숙한 화원의 성문으로 변했다. 케마란의 마음 상태에 따라 성문이 변한 것이다.
“그래. 너도 내가 든 열쇠 앞에 졸았구나. 아하하하. 그러게 쓸데없이 반항하지 말고 진작 나오지 그랬어.”
문 앞에 당당히 선 케마란이 뿌득뿌득 어깨를 풀더니 링스피어로 성문을 두드렸다. 과연 열쇠라서 다른 것인지, 링스피어를 손에 쥐어 이제야 제 실력이 나온 것인지 두드릴 때마다 성문이 우르릉우르릉 울렸다.
“야, 코어. 내가 아는 것처럼 너도 내가 온 걸 알고 있지? 여기 봐. 링스피어도 날 알아보고 열쇠를 넘겼어. 그러니 순순히 문 열어. 그러면 내가 적당히 사정을 봐 줄 수도 있어. 나도 중요한 게 달렸다고. 우리 대화로 문제를 풀자. 서로 힘을 써 봤자 좋을 것 없다고.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링스피어가 상하는 것은 원하지 않잖아. 안 그래?”
자신감이 가득한 권유였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에 대한 반응도 없이 묵묵부답이다.
“오호, 무시하시겠다? 그렇다면 남은 건 실력 행사뿐이지!”
케마란은 자신이 언제 말로 하자고 했냐 싶게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링스피어로 성문을 찔렀다.
꾸르르륵.
창날이 닿은 성문이 일그러지며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딱 보기에도 내가 이 성문의 열쇠 구멍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생겼다.
케마란은 그 구멍으로 바로 링스피어를 찔러 넣으려 했다.
쿠콰과과과-
“오지 마! 나가!”
그러자 성문이 여름날 아지랑이처럼 이지러지더니 강력한 바람으로 케마란을 밀어냈다.
하지만 케마란은 뒤로 날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내공으로 보호한 양발을 바닥에 박아 넣고 바람에 대항했다.
“하하하! 이 정도는 이미 예상했지. 나한텐 안 통해, 자, 집주인의 등장이다!”
의기양양한 얼굴의 케마란은 링스피어를 열쇠 구멍에 푹 찔러 넣었다.
다른 열쇠처럼 돌릴 필요도 없었다. 바로 바람이 멈추고 원래 없었던 것처럼 성문이 사라졌다.
“자자, 과연 어떤 모양으로 행차하시려나?”
꿀꺽.
영상을 지켜보던 이드들이 호기심에 침을 삼켰다.
[에고를 각성하고, 링스피어의 의념과 교감한 후 소울 다이브에서 케마란과 공존하며 그녀의 영향을 받은 코어는 더 이상 단순한 빛 덩이 형태로 있지 않을 거예요. 아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라고 라미아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에 이드는 전쟁터를 구르고 구른 끔찍한 흉터를 가진 거한을 상상했다.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 코어가 흉악한 실험을 하는 생명의 관 출신이고, 몇 시간 전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죽이려 했던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런 위험한 일에 관계된 사람이면 이런 모습일 거라는 일종의 고정관념이랄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추측은 보기 좋게 배신당했다. 성안으로 들어선 케마란을 따라 영상에 나타난 것은 오우거처럼 큰 덩치에 오크처럼 흉악한 인상의 인간이 아니라 귀여운 얼굴을 한 다섯 살의 남자아이였던 것이다.
“아, 아이? 아니, 왜?”
이드의 음성에는 진한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놀라기는 영상 속 케마란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또…………… 의외네요.]
오로지 라미아만이 흥미롭게 영상 안 사내아이를 향해 눈을 빛냈다.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한 후 케마란은 다양한 상대와 싸우고, 수많은 상황을 가정하며 수련했다. 하지만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자신의 창칼 앞에 어린아이를 세우게 될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뜻하지 않게 창날 앞에 소년을 세우고 말았다. 그것도 다섯 살짜리 꼬맹이를!
“어…… 어…… 그러니까…………… 너지! 네가 날 죽이려고 했던 코어지!”
순간 멍해진 뇌세포를 억지로 작동시킨 케마란이 마음을 다잡고 소리쳤다.
“먼저 날 괴롭힌 건 너겠지.”
“그건 미안해!”
장난처럼 쇠사슬을 흔들어 고통을 준 상대가 아이였다니! 케마란이 광속으로 사과했다.
그 순간 영상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네 명이 한마음으로 외쳤다.
“바보!”
케마란은 부르르 몸을 떨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런 사악한 놈. 어디 순진한 아이의 모습을 하고 날 속이려고!”
생각해 보니 빛 덩이 같던 코어가 진짜 아이일 턱이 없지 않은가. 뒤늦게 라미아의 경고가 떠오르며, 이 일을 알면 바보라고 놀려댈 네리베르가 떠올랐다. 곧 그녀는 속았다는 분노까지 더해 이글거리는 눈으로 코어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건 네 본래 모습이 아니지! 나도 이미 알고 있다고. 넌 주인 있는 링스피어를 무단 점거하고 있는 질 나쁜 도둑놈일 뿐이라고. 어서 썩 꺼져 버려!”
“이미 늦었어. 난 이미 여기에 뿌리를 내렸다. 여기가 내 집이야!”
코어의 외침이 신호가 된 듯 케마란이 서 있던 바닥이 출렁이며 성 밖으로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어엇!”
당황한 케마란은 단숨에 뛰어올라 출렁이던 바닥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성의 기둥이 뱀처럼 늘어지며 케마란을 잡으려고 했다. 꽈릉!
케마란은 링스피어에 내공을 주입해서 기둥을 베고 부숴 버렸다. 하지만 흩어진 돌조각은 곧 사라지고 다시 멀쩡해진 기둥이 케마란을 잡으려 했다. 뿐만 아니라 바닥에서 손바닥이 솟기도 하고, 성문에서 뿜어지던 바람이 케마란을 날려 버리기도 했다.
정신없이 이어지는 공격에 잠시 허둥대던 케마란이었지만, 모두가 어중간하기만 한 공격에 곧 정신을 차리고는 코어를 노려보았다.
“결국 얌전히는 안 나가겠다는 거지. 그런 못된 아이는 벌을 받아야지? 하압!”
속내야 어떻든 외형은 어린아이였기에 살짝 양심에 걸렸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은 케마란이 링스피어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