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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44화


681화

마음을 정한 레오날도 후작이 벤 자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고생스럽겠지만, 카일란 단장의 집까지 안내를 부탁하오.”

“고생이라니요. 후작 각하께서 명하신다면 당연히 따라야지요. 그러나 후작 각하께서 이 밤에 직접 방문하는 일이 행여 각하의 품위를 해칠까

걱정입니다. 내일 만나는 것은 어떠실지요. 그래도 만나길 원하신다면 제가 가서 이드를 데려오겠습니다.”

“하하, 황궁의 방도 마다한 자인데 이 밤에 내가 찾는다고 달려오겠소? 그런 자였다면 삼검왕과 각을 세우지도 않았을 거요.”

가볍게 웃으며 하는 말에 한 치도 틀린 것이 없어 벤 자작이 입을 닫았다. 그리고 미처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레오날도 후작을 보니 그 이상 말릴 수 없다고 판단한 벤 자작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즉시 준비된 후작의 마차에 올라 황궁을 나갔다.

음울한 눈길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게일이 굳어 있던 턱을 움직여 말했다.

“어딜 가는 거지?”

의문에 대한 대답은 없었지만, 대략 짐작 가는 것은 있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던 게일은 빠른 걸음으로 마차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마음은 매우 복잡했다.

이드가 오늘 황궁에 입궁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부터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드와 관련한 정보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살피는 사람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목구멍이 턱 막혀 결국 점심과 저녁을 걸렀다.

‘빌어먹을. 대체 그자가 뭐라고 이렇게 신경을 쓰느냔 말이다!’

게일은 등장만으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뒤흔드는 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출연했다는 소식에, 그가 소드 팰러스에 입성했다는 소식에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 변했다. 그리고 오늘 이드가 황궁에 도착한다는 말에 사람들은 다시 미묘한 변화를 보였다. 그것은 게일에게 결코 반갑지 않은 것들이었다. 마치 검후의 후계자로 주목받으며 처음 황궁에 왔을 때 다가오던 자들의 반응을 역으로 되감은 것 같았다.

이런 변화와 거부감의 원인은 검후의 후계자로서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지만 게일은 애써 그 부분을 외면했다.

그는 검후와 소드 팰러스의 후계는 오로지 자신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주변에서 그렇게 노골적으로 반응하니 게일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오후부터 레오날도 후작의 집무실을 살필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만 게일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레오날도 후작이 남은 것이 이드 때문일 것 같아서였다.

게일에겐 그것조차 불만으로 다가왔다.

황제의 최측근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는 레오날도 후작이, 작위는커녕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제대로 인정조차 받지 못한 야인을 만나기 위해 퇴근을 미루다니.

“설마 후작이 그자를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말인가?”

게일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저절로 자신과 이드가 비교되었다. 과연 후작이 자신에게도 그와 같은 중요 인물로 여겨 대한 적이 있었던가? 

“젠장! 왜 이 밤에 움직여 사람을 치졸하게 만드는 거냐고!”

바닥을 차는 발에 힘을 더한 게일의 턱이 불끈 일어났다. 마차를 쫓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이미 짐작을 하면서 냉정하지 못하게 직접 확인하겠다고 후작의 뒤를 추적하는 자신의 모습이 말이다.

그것은 이드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과 주변의 변화에서 받은 스트레스, 자괴감과 분노, 그리고 그사이에 꼭꼭 숨은 보기 흉한 질투 때문이지만 게일은 거기까지 냉정히 살피지는 못하고 있었다.

슈슉! 슈슉!

게일이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지붕과 지붕 사이를 날았다. 과연 검후가 직접 가르친 그의 실력은 범상치 않았다. 따로 훈련한 것이 아닌데도 실력 좋은 암살자처럼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따르던 게일은 마차가 어느 저택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택의 위치와 대문의 문장을 보고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저건 카일란 단장님의 저택이잖아…… 허허.”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이드가 카일란 단장의 저택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내어 주지 않은 저택을 내어 줄 정도로 그를 인정하고 있단 말인가.”

자신도 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생각이란 사실을. 그러나 눈앞의 상황은 그 유치한 생각을 결코 가볍게 넘기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비록 농담처럼 묻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빌려 주지 않았던 저택을 이드에게 내어 주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게일의 머릿속에는 안티로스의 귀족들이 사소한 것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측면에서 카일란이 이드에게 저택을 내어 주었다는 것은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쉴라가 이드 위에 카일란이 있음을 보여 주어 귀족들의 허튼짓을 경계한 일이, 귀족들보다 먼저 게일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순간이었다.

“흑색 기사단이라니. 이건 아버님의 말씀보다 더하잖아!”

그렇지 않아도 들끓어 오르던 마음에 조급함이 찰칵 맞아 들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하던 자가 강하게 적으로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주장했다.

“검후의 후계로서 소드 팰러스의 다음 주인이 될 자는 오로지 나뿐이야.”

게일은 저택에서 하인이 뛰어나오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곳에서 할 일은 없었다.

“멍청하게 서 있기보다는 아버님과 이야기를 해야겠어. 더 이상 아버님이 하시는 일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겠어. 저자가 황궁으로 온 이상 나도 움직여야 한다.”

발길을 돌리던 게일은 저택을 향해 눈을 번뜩였다.

“날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소드 팰러스의 주인이 될 수 없어.”

마치 선언하듯 중얼거린 그는 올 때보다 바쁜 걸음으로 자신의 집을 향해 달렸다.

이드는 하인의 안내를 받아 방에 도착해 라미아와 함께 짐을 풀었다.

원래 그를 안내하고 시중을 들려던 집사에게는 많은 짐을 가져온 사무엘과 이그렌의 상대를 맡겼다.

이드에게 주어진 방은 원래 저택의 주인이 사용하는 방이라고 한다. 저택에 머무는 동안 주인처럼 편하게 사용하라는 카일란의 배려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드는 그 부분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욕심이 없기 때문에 작은 것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고마워할 뿐이다. 이후에 그 고마움에 보답하면 그뿐.


이드는 하인이 준비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기지개를 켰다.

“으아, 시원하다. 어떻게 된 것이 달리는 것보다 마차를 타는 게 더 피곤한 것 같아.”

[그거야 이드가 마차에서 수련을 해서 그런 거죠. 본인이 사서 고생을 하고는 왜 마차 탓을 해요?]

“하하, 그래도 할 일 없이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이드는 같이 따라 들어온 라미아의 몸을 물로 씻어 주며 말했다.

즐거운 경치 구경도 한두 시간이지. 하루 종일 풍경만 보는 것도 힘든 일이라, 이드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 무극신기를 다듬거나 자신에게 흡수된 초인의 씨앗을 살폈다.

씨앗에서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지만, 어떻게 하면 한 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한 조각의 정보라도 더 얻을 수 있을까 눈치를 보는 벤 자작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일 황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라미아의 깃털 한 장 한 장을 씻어 내던 이드가 말했다.

[별거 있겠어요. 이리저리 말을 돌리다 결국 이드를 자신 아래 두고 싶다고 할 텐데. 이드를 가지면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잖아요. 아, 기분 좋다. 우리 다음부터는 꼭 같이 씻어요.]

“맡겨 주십시오. 언제나 친절히 봉사하겠습니다.”

[히히히!]

이드는 히죽거리는 라미아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과연 강철의 몸에도 자신의 손길이 느껴지는 걸까?

궁금했지만 괜히 물어 라미아의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아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 제의를 거절하면 싫어하겠지?”

[키킥, 그럼 그 얼굴 볼 만하겠네요. 그런데 전 제국과 소드 팰러스의 거리가 왜 저렇게 멀어졌는지 이해가 안 돼요.]

검후가 사라진 후 본격적으로 드러나긴 했지만, 이전부터 그런 기색이 없었다면 이처럼 빠르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제와 검후의 혈연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아무리 검후가 소드 팰러스의 운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절대 권력과 절대 무력을 가진 권력자들의 속이야 모르는 거지. 그런 것보다 여긴 어때?”

[아웅~ 거기 시원해요!]

결국 이드가 씻는 시간보다 손바닥만 한 라미아를 씻기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새로 변한 라미아의 몸은 상상 이상으로 섬세하고 복잡했다. “아이고, 목이야. 설마 깃털 하나하나까지 재현했을 줄이야.’

이드는 한참 숙이고 있던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라미아를 수건으로 닦아 준 후 말했다.

“샤워도 했으니까 일리나에게 잘 도착했다고 전해야지?”

[그래야죠. 일리나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이드의 말에 답한 라미아는 검은 아공간을 열어 커다란 거울 하나를 꺼내 놓았다. 그것은 이드 키만큼 길쭉한 전신 거울이었다.

이드는 거울을 침대 옆에 기대 세우고는 매끈한 거울의 표면에 손을 올려 무극신기를 주입하면서 마법을 깨우는 시동어를 외웠다.

“여기는 이드. 일리나 나오세요. 오버~”

슈루루루-

거울에 비치던 이드와 라미아의 모습이 일그러지며 흐려졌다. 이드는 거울에서 손을 떼고 한발 물러섰다. 마나를 불어넣은 것은 발동을 위해서일 뿐, 이후 유지는 거울에 박힌 마나석이 한다.

곧 일리나의 모습이 거울에 떠올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간단히 음성만 전달할 뿐이지만 이드와 일리나가 사용하는 것은 화상 통신이 가능한 특별품이다.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가 귀하고 비싸 가성비가 극악이지만 아공간에 보물을 쌓아 둔 이드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쯤 연락이 올 것 같아서 기다렸어요. 두 사람 모두 무사히 도착한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이드와 내가 있는데 별일 있을 리가 없죠.]

라미아가 자신감에 찬 얼굴로 가슴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꼭 구애하는 새 같아 일리나가 화사하게 웃는다. 무엇보다 라미아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에게 별일이 있으려면 도대체 어떤 사고가 터져야 할까.

모르긴 몰라도 제국이 한바탕 뒤집어질 규모의 사고는 벌어져야 할 것이다.

이드가 우쭐한 라미아의 미간을 살살 긁어 주며 말했다. 지구의 초고화질 티브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선명한 화면이 꼭 일리나가 바로 곁에 있는 것 같았다. 투자한 값을 하는 것 같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 방이 일리나가 화원에서 쓰는 방이에요? 불편하진 않아요?”

“네. 하루 종일 햇살이 들어서 좋아요. 문을 열면 바로 화원의 풀과 물과 나무의 향기도 날아들어요.”

이드의 정체와 함께 일리나가 엘프라는 사실을 안 쉴라의 배려였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그래도 뭔가 불편한 게 생기면 바로 쉴라 경에게 말해요. 괜히 참지 말고.”

자기는 어지간한 문제가 아니면 나서지 않으면서 일리나에게는 다른 소리를 하는 이드다.

“이드는 절 너무 아기처럼 대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전할 소식이 한 가지 있어요.”

새침한 투정과 달리 싫지 않은 표정으로 일리나가 말했다.

“음? 무슨 일이요?”

“오늘 오색 기사단에서 기사들이 파견 왔어요. 낮에 그들과 싸움이 있었어요.”

“응?”

이드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기껏 도움을 위해 파견을 나와서 싸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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